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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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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태영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시대의 변호사이자 여성운동가이다. 1914년 북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가정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195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중 한 명이 되었다.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를 설립하여 여성 인권 보호에 힘썼으며,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여 197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가족법 개정을 통해 여성의 권익 신장에 기여했으며, 호주제 폐지 운동을 주도했다. 국제적으로도 활동하며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고, 1998년 사망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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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태영
로마자 표기I Taeyeong
한자 표기李兌榮
출생일1914년 8월 10일
출생지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사망일1998년 12월 17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사인알츠하이머병
배우자정일형
자녀1남 3녀
부모이흥국(부), 김흥원(모)
형제오빠 2명
학력
학력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
경력
주요 경력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前 신민당 법률행정특임고문
前 YWCA 전국연맹 이사장
여성법률상담소 소장
前 국제법률가위원회 위원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명예 이사장
직업변호사
사회운동가
저술가
前 정치인
수상
주요 수상막사이사이상 (1975년)
국제법률봉사상 (1984년)
브레넌 인권상 (1989년)
종교
종교무종교 → 개신교
기타
웹사이트정일형 이태영 기념사업회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李兌榮
한국가정법률상담소 李兌榮 소장

2. 생애

이태영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갔다.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여성의 권익 향상과 가족법 개정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정일형과 결혼 후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 한국 전쟁 이후인 195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남편 정일형은 1940년대 미국 스파이 혐의로 투옥되기도 하였다.[3][10]



195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된 후,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현재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하여 법률 지식이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을 지원했다.[12] 가족법 개정,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

1976년 남편 정일형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명동선언)에 참여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시민 자유를 돌려줄 것을 촉구했다가, 1977년 3년의 집행유예, 시민권 박탈, 10년간의 변호사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12][13]

1963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취임했으며, 1977년까지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을 역임했다. 1973년 국제여성변호사연맹 부의장, 1981년 국제법률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는 등 국제적으로 활동했으며, 1975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74년 남편 정일형과 함께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였고, 19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명동선언)에 서명하며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2][13]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서는 증인으로 김대중의 변호를 맡기도 하였다.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당시 증인으로 김대중을 변호했다.[1] 1981년 국제법률가위원회 위원이 되었고,[1] 같은 해 미국 뉴저지 드류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1] 1986년 가사심판법 기초위원이 되고 그해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에 재선되어 1996년까지 재직했다.[1]

1988년 2월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여성의 계몽, 강연 활동을 다니며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여성 스스로 목소리를 낼 것과 부당한 인습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1]

1995년 가정법률상담소장 직을 사위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였으며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19] 1998년 12월 17일 치매와 노환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2. 1. 젊은 시절

이태영은 1914년 8월 10일 일제강점기 조선 북진, 운산군(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어났다. 3대째 감리교 신자였으며, 아버지는 금광부였고 어머니는 김흥원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부모들은 여자아이들에게 집안일을 가르쳤지만, 그녀의 부모는 여자아이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자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외할아버지는 이태영의 고향에 감리교회를 설립했다.[8] 북진에서 학교를 마친 후 평양의 숭의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다.[8]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가정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1936년 미국에서 유학한 감리교 목사인 정일형과 결혼했다.[3][9] 남편 정일형1940년대 미국 스파이 혐의("반일" 혐의)로 투옥되기도 하였다.[3][10]

1945년 광복 후, 194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49년 졸업하고, 한국전쟁 이후인 195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중 한 명이 되었다.

2. 1. 1. 출생과 초기 활동

1914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서 아버지 이흥국과 어머니 김흥원의 딸로 태어났다. 위로 이태윤, 이태흡 등의 형제가 있었다. 탄광을 운영하던 아버지 이흥국은 그녀가 첫돌을 겨우 넘겼을 때 사고로 사망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김흥원은 어려운 살림을 혼자 꾸려가야 했지만, "아들 딸 가리지 않고 공부 잘 하는 아이만 끝까지 뒷바라지하겠다"면서 딸 이태영을 두 아들과 평등하게 가르쳤다.[8]

1931년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모교인 평양 정의여보고의 교사가 되어 교사생활을 하였다. 그 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부임하였다. 평양여고보 교사 재직 중 평안북도 출신 독립운동가 겸 기독교 운동가 정일형과 만나 결혼했다. 정일형은 후일 미군정의 관료로 있다가 해방 후 정치에 투신했으며, 정치인 이윤영의 친척이었다. 남편 정일형1940년대 미국 스파이 혐의("반일" 혐의)로 투옥되기도 하였다.[3][10]

그녀는 3대째 감리교 신자 집안 출신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부모는 여자아이들에게 집안일을 가르쳤지만, 그녀의 부모는 여자아이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녀는 남자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외할아버지는 이태영의 고향에 감리교회를 설립했다.[8] 북진에서 학교를 마친 후 그녀는 평양의 숭의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다.[8] 이화여자대학교에 다니며 가정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1936년 정일형과 결혼했다.[3][9]

2. 1. 2. 결혼과 대학 재학

이윤영의 주례로 정일형과 결혼한 후 경성에서 생활하였다. 남편 정일형은 아내의 학업을 지지했고, 덕분에 이태영은 1932년 이화여전 가사과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6년 이태영은 미국에서 유학한 감리교 목사인 정일형과 결혼했다.[3][9] 졸업 후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법률 공부를 하라."는 정일형의 격려를 받으며 1946년 33세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면서 서울대 역사상 최초의 여대생이 되었다.

이태영은 손수 가방을 두 개 들고 다닐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194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였다. 이어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에 진학했다.

2. 2. 법조 활동과 여성운동

이태영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5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중 한 명이 되었다.[9] 1957년 한국 전쟁 이후, 가난한 여성들에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여성 법률 상담 센터인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12]

1976년 남편 정일형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명동선언)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시민 자유를 돌려줄 것을 촉구했다.[12] 이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적대자로 여겨져 1977년 3년의 집행유예, 시민권 박탈, 10년간의 변호사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12][13]

1963년에는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취임했으며, 1977년까지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을 역임했다. 1973년 국제여성변호사연맹 부의장, 1981년 국제법률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는 등 국제적으로 활동했으며, 1975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법률 사무소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로 발전하여 매년 1만 명 이상의 의뢰인을 지원했다.[13] 이태영은 가족법 개정 운동을 통해 이혼한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 부모 친권의 평등성, 동성동본금혼제와 호주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은 1988년 민법 개정으로 이어져 이혼한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과 이혼 부부 자녀 양육 관련 부모의 평등한 면접교섭권 등이 규정되었다. 호주제에 대해서는 개인의 평등에 반하고 가부장제 재생산으로 이어진다고 비판하며 헌법 소원을 청구했다. 그녀의 사후 2005년 민법이 개정되어 호주제는 폐지되었고, 동성동본금혼제는 근친혼 금지 제도로 변경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이혼 제도 연구』(1957년), 『북한 여성』(1988년), 『가족법 개정 운동 37년사』(1992년) 등이 있다.

2. 2. 1. 사법시험 합격과 변호사 활동

1952년에 치러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사법시험 역사상 첫 여성 합격자가 되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태영의 판사 임명을 제청했지만, 야당 인사 정일형의 아내라는 점과 봉건적 여성관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였다.[17] 김병로는 여러 번 건의했으나 아직 여성 판사는 시기상조라는 이승만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이태영은 판사 대신 변호사 개업을 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17] 그해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소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1952년부터 가족법개정운동을 시작하였다. 최초의 여자 변호사라는 점 때문에 '법과 인습에 눌려 우는' 여성들이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를 계기로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현재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열었다.[18] 이후 30여 년간 "법조계 초년생이 뭘 안다고 법을 고치려 하느냐",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킨다"라는 법조계의 비난과 싸워가며 가족법 개정 및 호주제 폐지와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를 위해 힘썼다.

2. 2. 2. 여성법률상담소 설립과 가족법 개정 운동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17] 1956년에는 여성법률상담소(현재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하여, 법률 지식이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에게 법률 상담과 지원을 제공하였다.[12] 이후 30여 년간 법조계의 비난과 싸워가며 가족법 개정,[18]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를 위해 힘썼다.

이태영은 가족법 개정 운동을 통해 이혼한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 인정, 부모 친권의 평등성 확보, 동성동본금혼제(성과 본관이 같은 남녀의 혼인을 금지하는 제도)와 호주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1952년부터 각종 청원서와 진정서를 법원에 제출하여 가족법 개정 운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호주제 폐지와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에서 시작하여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그 결과, 1988년 민법이 대폭 개정되어 이혼한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과 이혼한 부부의 자녀 양육에 관한 부모의 평등한 면접교섭권 등이 규정되었다. 호주제에 대해서는 개인의 평등에 반할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재생산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비판하며, 의견 심판과 헌법 소원을 청구했다. 그녀가 사망한 후인 2005년에 다시 민법이 대폭 개정되어 호주제는 폐지되었고, 동성동본금혼제는 근친혼 금지 제도로 개정되었다.

2. 2. 3. 호주제 폐지 운동

1952년부터 이태영은 호주제도가 국민 개개인의 평등권에 위배되며,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를 조장한다고 지적하며 위헌 심판과 헌법 소원을 청구하였다. 호주제도가 호주 사망 시 장남에게 상속되어 어머니나 누나 등 가족이 장남보다 낮은 위계서열에 놓이는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초기에는 법원에 채택되지 않았으나, 지속적인 청구로 위헌 심판 청구와 헌법소원이 받아들여졌지만 번번이 기각되었다. 그는 호주 승계 순위가 장남→기타 아들→미혼의 딸→처→어머니→며느리 순으로 아들 선호를 조장하고 가족 서열을 문란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특히 아들을 1순위로 하는 것은 아들이 딸보다 중요하며, 어머니나 누나보다 상위 개념에 놓이는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이태영은 생전에 호주제 폐지를 보지 못했지만, 이후 여성운동가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1999년 5월 여성단체연합 주도로 호주제폐지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대한민국 여성단체들은 유엔 인권이사회에 호주제도의 인권침해성을 제기했고, 그해 11월 5일 호주제도 폐지 권고 결의가 나왔다. 2000년 9월 22일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가 발족하여 국회 청원이 시작되었다.

2003년 1월 9일 여성부는 호주제 폐지 및 '가족별 호적편제' 도입 방안을 추진했고, 2월 16일 참여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호주제 폐지를 ‘12대 국정과제’로 선정하였다. 2003년 9월 4일 법무부는 호주제 폐지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였고, 11월 20일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첫 공개변론이 시작되었다. 헌법재판소는 5차례 공개변론 후, 2월 3일 호주제 관련 민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2005년 3월 2일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태영이 호주제 폐지를 주장한 지 51년 만에 수정이 시작되었고, 53년 만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가족법 개정 운동은 이혼한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 인정, 부모 친권의 평등성 확보, 동성동본금혼제와 호주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1988년 민법 개정으로 이혼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과 이혼 부부 자녀 양육 관련 부모의 평등한 면접교섭권 등이 규정되었다. 이태영은 호주제가 개인 평등에 반하고 가부장제 재생산으로 이어진다고 비판하며 헌법 소원을 청구했다. 서거 후 2005년 민법 개정으로 호주제는 폐지되었고, 동성동본금혼제는 근친혼 금지 제도로 바뀌었다.

2. 2. 4. 여성, 가족문제 상담 활동

1962년 가정법원 설치 운동을 시작, 그 해 정부에 가정법원 설치를 제안하였으며 1년만인 1963년 가정법원을 기존의 법원에서 독립적으로 설치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6년 8월 여성법률상담소를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가정법률상담소로 이름을 바꾸고, 여자 외에도 가정폭력에 희생되는 남자 피해자들도 구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가족법 관련 상담과 이혼 관련 상담, 가정폭력 피해자 구제 등 남녀 모두의 권익을 위한 인권운동을 하였다. 1976년에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로 다시 이름을 바꿔 공익법인이 되었다.[13]

가족법 개정 운동은 이혼한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 인정, 부모 친권의 평등성 확보, 동성동본금혼제(성과 본관이 같은 남녀의 혼인을 금지하는 제도)와 호주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그 결과, 1988년 민법이 대폭 개정되어 이혼한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과 이혼한 부부의 자녀 양육에 관한 부모의 평등한 면접교섭권 등이 규정되었다. 호주제에 대해서는 개인의 평등에 반할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재생산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비판하며, 의견 심판과 헌법 소원을 청구했다. 서거 후인 2005년에 다시 민법이 대폭 개정되어 호주제는 폐지되었고, 동성동본금혼제는 근친혼 금지 제도로 개정되었다.

2. 3. 정치 활동

이태영은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남편 정일형과 함께 민주회복 국민선언, 3·1 민주선언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76년 명동3·1사건에 참여했다가 1977년 실형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가 1980년 복권되었다.

2. 3. 1. 민주화 운동 참여

1970년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국제법률구조연합회 이사가 되었고, 같은 해 국제법률구조연합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1974년 11월 남편 정일형 등과 함께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였고, 1976년 3·1 민주선언 서명에 적극 참여하여 수많은 민주화 유공자들을 법적으로 변호하였다.[12][13] 1976년 명동선언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시민 자유를 돌려줄 것을 촉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적대자로 여겨져 1977년 3년의 집행유예, 시민권 박탈, 10년간의 자동 변호사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12][13]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서는 증인으로 김대중의 변호를 맡았다.

2. 3. 2. 야당 정치 활동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74년 남편 정일형과 함께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였고, 19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명동선언)에 서명하며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2][13]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체포·구금된 사람들의 변호에도 헌신하였다.

1976년 명동3·1사건에 참여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적대자로 여겨져 1977년 3년의 집행유예, 시민권 박탈, 10년간의 자동 변호사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12][13]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서는 증인으로 김대중의 변호를 맡기도 하였다.

2. 4. 생애 후반

1973년 국제여성변호사연맹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1975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1]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1976년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했으며,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체포·구금된 사람들의 변호에 헌신했다. 1977년까지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서는 증인으로 김대중의 변호를 맡았다. 1998년 사망하여 남편 정일형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에 합장되었다.

2. 4. 1.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당시 증인으로 김대중을 변호했다.[1] 1981년 국제법률가위원회 위원이 되었고,[1] 같은 해 미국 뉴저지 드류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1] 1986년 가사심판법 기초위원이 되고 그해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에 재선되어 1996년까지 재직했다.[1] 1987년 대통령 선거때는 김영삼김대중이 분열하자 김대중을 지지했으나 낙선하였다.[1] 이후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에도 여성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여성주의 운동 후배 양성에 힘을 쏟았다.[1]

1988년 2월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여성의 계몽, 강연 활동을 다니며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여성 스스로 목소리를 낼 것과 부당한 인습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1]

1989년 1970년대부터 10년 넘는 요구 끝에 대법원에서 이혼녀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 판결과 모계·부계 친족의 범위를 8촌으로 인정하였으며, 1988년에는 동성동본 결혼 금지 조항을 폐지시켰다.[1]

2. 4. 2. 여성운동과 저술 활동

이태영은 여성 관련 문제에 관한 책 15권을 저술했으며, 1957년에 첫 번째 책 『한국 이혼 제도』를 출판했다.[2] 1972년에는 『여성을 위한 법 상식』을 출판했다.[2] 그 외 저서로는 『북한 여성』(1988년),『여성으로 태어나서』, 『가족법 개정 운동 37년사』(1992년) 등이 있다.[2] 또한 엘리너 루즈벨트의 『나 홀로』(On My Own)를 한국어로 번역했으며,[2] 1984년에는 회고록 『조롱박으로 한강을 퍼내다』를 출판했다.[2]

이태영은 가족법 개정 운동을 통해 이혼한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 인정, 부모 친권의 평등성 확보, 동성동본금혼제(성과 본관이 같은 남녀의 혼인을 금지하는 제도)와 호주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그 결과, 1988년 민법이 대폭 개정되어 이혼한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과 이혼한 부부의 자녀 양육에 관한 부모의 평등한 면접교섭권 등이 규정되었다. 호주제에 대해서는 개인의 평등에 반할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재생산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비판하며 의견 심판과 헌법 소원을 청구했다. 서거 후인 2005년에 다시 민법이 대폭 개정되어 호주제는 폐지되었고, 동성동본금혼제는 근친혼 금지 제도로 개정되었다.

2. 4. 3. 은퇴와 사망

1991년 서울대학교 동문회로부터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되었다. 1995년 가정법률상담소장 직을 사위 김흥한(金興漢)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였으며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19]

만년에는 치매로 오래도록 고생하다가 1998년 12월 17일 오전 11시경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자택에서 치매와 노환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3. 학력

연도학교
1931년정의고등보통학교 졸업
1936년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졸업
1949년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1957년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1969년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4. 경력

5. 상훈

6. 저서


  • 《가정법률상담실기》(1958)
  • 《한국 이혼제도 연구》(1969)
  • 《북한의 여성생활》
  • 《여성으로 태어나서》
  • 《여성운동사》
  • 《현대여성의 모럴》
  •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1972)
  • 《쪽박으로 한강물을》(1985)[2]
  •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
  • 《나의 만남 나의 인생》(1991)
  • 《가족법개정운동 37년사》(1992)
  • 《북한 여성 연구》
  • 《정의의 변호사가 되라 하셨네》
  • 엘리너 루즈벨트의 《나 홀로》(On My Own|온 마이 오운영어) 한국어 번역[2]

7.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기타
아버지이흥국금광업
어머니김흥원
오빠이태윤
오빠이태흡
배우자정일형1904년 2월 23일1982년 4월 25일대한민국 외무부 장관 역임[11]
장녀정진숙1937년
사위김흥한1935년
차녀정선숙1939년
사위김의재1938년
3녀정미숙1942년
사위심철1940년심상준의 아들
장남정대철1944년 1월 4일
자부김덕신1946년
손자정호준1971년 2월 19일
손자정세준1980년


8. 기타

이태영은 1970년대에 홍보와 강연 활동 외에도 사재를 털어 1976년 여성백인회관 건립에 투자하였다.[12]

8. 1. 여성 구제 및 가정폭력 비판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를 창설하면서 이태영은 법률 지식이 부족한 여성과 어린이, 청소년들과 상담을 통해 가정에서 당하는 불이익을 최대한 줄이고 이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는 명백한 범죄임을 계속 호소하였다. 그는 어린이와 청소년도 인격과 인권을 가진 인간이며 함부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됨을 오래도록 역설했다. 1976년에는 홍보와 강연 활동 외에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서 여성백인회관을 건립하는데 투자하였다.[12] 1957년 한국 전쟁 이후 그녀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법률 상담을 제공하는 여성 법률 상담 센터를 열었다. 이 법률 상담 센터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로 발전하여 매년 1만 명 이상의 의뢰인을 지원했다.[13]

8. 2. 에피소드


  • 남편 정일형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1942년에 "일본태평양 전쟁에서 이길 확률은 희박하다"는 강의 내용 때문에 국가원수모독죄로 감옥에 갔다. 이태영은 생계를 위해 이불 장사를 했는데, 가위 날이 잘 들지 않아 고생했다. 해방 이후 정일형은 외무부 장관 업무 등으로 외국에 갈 때마다 가위를 사서 선물하며 "어려운 때를 잊지 말자"고 했다.
  •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김대중의 결백을 주장했다. 군 검찰관이 제지하자 "눈이 나빠 사람을 똑바로 보지 못하면 안경을 하나 더 끼우고 사람을 똑바로 보시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란 말이오! 자식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소?"라고 호통쳤고, 방청석에서 박수갈채가 나왔다.
  • 해방 이후 명성황후를 변호하는 글과 칼럼을 썼으며, 관련 자료를 모아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이라는 책을 냈다.
  • 1940년대 초반 남편이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투옥되자, 생계를 위해 교사, 라디오 가수로 일하며 재봉과 세탁 일을 했다.[10][9]
  •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시민 자유를 돌려줄 것을 촉구했다. 이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의 적대자로 여겨져 1977년 3년의 집행유예, 시민권 박탈, 10년간 변호사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12][13]

참조

[1] 서적 Stone mirror: reflections on contemporary Korea https://books.google[...] EastBridge 2013-04-27
[2] 서적 Encyclopedia of Women Social Reformers: A-L-v. 2. M-Z https://books.google[...] ABC-CLIO 2013-04-26
[3] 웹사이트 The 1975 Ramon Magsaysay Award for Community Leadership:Biography of Lee Tai-Young https://web.archive.[...] Official website of Magsaysay Award Organization 2013-04-28
[4] 서적 East Asia's Renewed Respect for the Rule of Law in the 21st Century: The Future of Legal and Judicial Landscapes in East Asia https://books.google[...] Hotei Publishing 2015-03-13
[5] 서적 4월의 모든 역사 - 한국사 https://books.google[...] 디오네 2013-10-08
[6] 일반
[7] 서적 East Asia's Renewed Respect for the Rule of Law in the 21st Century: The Future of Legal and Judicial Landscapes in East Asia https://books.google[...] Hotei Publishing 2015-03-13
[8] 서적 Women in the world's legal professions https://books.google[...] Hart Publishing 2013-04-26
[9] 서적 Feminist Writings from Ancient Times to the Modern World: A Global Sourcebook and History: A Global Sourcebook and History https://books.google[...] ABC-CLIO 2011-10-31
[10] 서적 North Korea in Pictures https://books.google[...] Twenty-First Century Books 2013-04-27
[11] 서적 United States Treaties and Other International Agreements https://books.google[...] Department of State 2013-04-27
[12] 서적 Sisterhood is Global: The International Women's Movement Anthology https://books.google[...] Feminist Press at CUNY 2013-04-27
[13] 학술지 ABA Journal https://books.google[...] American Bar Association 2013-04-27
[14] 웹사이트 The 1975 Ramon Magsaysay Award for Community Leadership https://web.archive.[...] 2013-04-27
[15] 웹사이트 이태영 (李兌榮)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26
[16] 뉴스 이태영박사 타계 '여성계의 어머니' 우리 곁을 떠나다 동아일보 1998-12-18
[17] 뉴스 여성 차별의 벽, 이태영 첫 여성 판사 임명, 이승만이 제동 http://sports.hankoo[...] 스포츠한국
[18] 간행물 이태영 변호사를 소개한 《좋은 생각》 2000년 3월호 기사 좋은 생각 2000-03
[19] 뉴스 이태영 여사'선각의 삶' 마감 '여성계 대모' 떠나다 경향신문 1998-12-18
[20] 웹인용 연혁 - 1950 ~ 1960년대 https://web.archive.[...] 한국가정법률상담소 200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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