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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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하영은 1858년 태어나 1929년 사망한 조선의 귀족으로, 일본의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찹쌀떡 행상에서 시작하여 미국 공사관 요리사, 육영공원 교사, 외무대신 등을 역임하며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하고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대륙고무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는 등 사업가로 활동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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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 (조선귀족)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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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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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58년 8월 15일 |
출생지 |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
사망일 | 1929년 2월 27일 (향년 70세)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
국적 | 한국 |
별칭 | 자는 치행(致行), 호는 금산(琹山) |
학력 | 없음 |
직업 | 통역관, 외교관, 정치인, 기업인 |
작위 | 자작 |
후임자 | 이규원 |
2. 생애
이하영은 1858년 경상남도 기장군(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이항복의 10대손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이유수가 농사를 지어 가난하게 살았다.[6] 통도사에 동자승으로 들어간 적도 있을 정도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이 개항되자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며 일본어와 상술을 익혔다. 1884년 무역업을 시작했으나 동업자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귀국길 여객선에서 알렌을 만나 그의 요리사로 일하게 되었다.[8]
1885년, 일본어와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육영공원의 외국어 교사가 되었고, 이듬해 외무아문 주사(外務衙門主事)로 임명되어 고종의 통역을 맡았다. 윤치호는 그가 한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8]
1886년 9월, 주미공사관 개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이등서기관으로 일했다.[10] 1888년 박정양이 귀국한 후에는 주차미국서리전권대신 임시서리로서 공사관 업무를 맡았다. 귀국 후에는 경인선 개통에 기여했으며, 웅천현감, 흥덕현감,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 외무아문 참의 등을 역임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궁내부 회계원장(宮內府會計院長)에 올랐고, 같은 해 윤치호와 함께 개국 기원절 503주년 행사를 주관했다. 이후 주일공사관 전권공사,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하며 일본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899년 의정부 찬정을 거쳐 1902년 외무대신으로 승진했으나 곧 사퇴했다. 1904년 다시 외부대신이 되어 일본에 각종 이권을 넘겨주는 조약들을 체결했다.[1] 같은 해 6월 9일에는 프랑스와 선교약조를 체결하였다.
1905년,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인의 외국 이민 금지령이 내려졌으나, 이하영은 하와이 이민을 지지하며 이민법 개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 같은 해 을사 조약 체결 당시 법부대신으로서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결국 찬성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 5적으로 비판받았다. 1907년에는 나철, 오기호 등이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07년 자신의 별저를 기부하여 소의학교(동성중학교, 동성상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맡았다. 1910년 교장직을 사임한 후에는 인천부에서 과수원을 운영했다. 1908년에는 교남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회장을 맡았으나, 1910년 한국통감부의 명령으로 해산되었다.
만년에는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을 지냈으며, 1929년 사망했다. 그의 작위는 아들 이규원이 물려받았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장상리(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에 있다.
2. 1. 성장 배경과 초기 경력
1858년 8월 15일 경상남도 기장군 읍내면 동부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이유수(李裕脩)[5]와 서수성의 딸 서산 서씨(瑞山徐氏)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집안 자체는 명문 집안이나,[6] 직계에서는 벼슬한 사람이 없어 가난했으며 그의 부친은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그는 동생과 함께 찹쌀떡 행상까지 해야 했다. 심지어는 보릿고개에 너무 먹을 게 없어 통도사에 동자승으로 들어간 적도 있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이 개항되자 혼자 부산항까지 찾아가 일본인 상점에서 일했다. 총명했던 그는 8년 여간 일본인 사장과 손님들을 상대하며 일본어, 상술을 어깨너머로 익혔다.1884년 27세의 이하영은 그간 모은 돈으로 자기 사업을 모색했다. 일본과 무역업을 생각한 그는 거래처 장사치였던 평양 출신 모 씨와 동업했다. 그러나 나가사키에 여장을 풀자마자 동업자가 밑천을 몽땅 챙겨 도주해 버렸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귀국길에 올랐다. 상하이를 출발, 나가사키를 경유해 부산으로 가는 여객선 난징호에서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과 마주친다. 전년도에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한 알렌은 장로교 중국 선교사로 발령돼 난징과 상하이를 거점으로 의료선교 사업을 시작했었다. 신통치 않았던 그는 동료 의료선교사인 핸더슨 박사의 조언에 따라 조선으로 옮겨가던 길이었다.
하선한 이하영은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알렌을 따라나선 그는 서울 주조선 미국 공사관에 당도했다. 알렌은 공사관 소속 무급 의사로, 이하영은 그의 요리사로 새출발을 시작했다.[8]
2. 2. 관료 생활
1885년(고종 22년) 일본어와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관료 재교육 기관인 육영공원의 외국어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 외무아문 주사(外務衙門主事)로 영전한 그는 고종의 통역을 맡았다. 유력 양반 가문 출신도 아니고 과거도 본 적이 없었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아 육영공원의 시험 감독관은 계속 겸임하면서 사헌부 감찰, 전환국위원(典圜局委員)까지 역임했다.[9] 윤치호는 자신의 회고에서 이하영이 한학(漢學)에 대한 배움이 없어 한문 편지 한 통 작성조차 힘들 정도였다고 평가했다. ('윤치호 일기',1929년 2월28일자)[8]2. 2. 1. 주미공사관 및 주일공사관 근무
1886년 9월 미국 워싱턴 D.C에 주미공사관을 개설하고자 초대 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등과 함께 부임해 이등서기관으로 일했다.[10] 1887년 이들은 요코하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그는 수십리길을 단 십 수 분에 주파하는 것에 놀라 미국 정부와 외무성의 관료들에게 직접 철도에 관해 묻기도 했다. 그는 철도에 계속 비상한 관심을 보여 재임 기간 동안 토목과 열차 설계까지 일정 부분 기록해 뒀다. 당시 이들은 조선의 복식 그대로였으며 특히 그는 '상투 댄디'라는 별명까지 붙었다.1888년 박정양이 청나라에 약속했던 영약 삼단[10]을 지키지 않아 문책성 귀국을 당하게 되자 그는 대신 미국에 남아 주차미국서리전권대신 임시서리(署理)로서 주미조선공사관 업무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대신 철도 부설 등 이권에 관심을 가진 미국 정부로부터 정교한 열차모형을 구해와 궁중에서 회람시켰고 철도에 관한 조선 조정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에 조선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기공을 시작해 1889년 개통되었다. 노량진에서 출발해 제물포까지 운행된 경인선은 미국 브룩스 사의 모걸(Mogull)형 탱크기관차로 운용됐다. 귀국 후 그는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 웅천현감, 흥덕현감,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 외무아문 참의 등을 지냈다.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으로 정부 기구가 일신되면서 창설된 궁내부의 회계원장(宮內府會計院長)에 올랐다. 그해 7월 15일 윤치호와 함께 조선 건국기념일인 개국 기원절(開國紀元節) 503주년 공동 사무위원장(事務委員長)으로서 행사를 주관했다. 그 공로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1895년 11월 28일 친러파 및 친미 개화파가 고종의 신병 확보를 기도했던 춘생문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듬해 바로 사면된 그는 2월 24일 경기 관찰사를 거쳐 3월 주일공사관 전권공사로 파견됐다가 공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되면서 그 역시 특명전권대사로 승진했다. 이때 일본 제국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2. 2. 2. 외무대신 재직
1899년(광무 2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으며 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 겸 의정부찬정으로 다시 일본에 부임하였으며 특명(特命) 주일전권공사 겸 대사(駐日全權公使兼大使)가 되었다. 주일공사 재직 시 외교공적을 쌓아 귀국 후 그 공로로 1등 훈장(一等勳章)을 서훈(敍勳)하고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을 제수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 조정으로부터 훈2등태극장(勳二等太極章)을 받았다.이후 의정부 찬정 등을 역임한 뒤 1902년 외무대신으로 승진했으나 곧 사퇴했다. 1904년 4월 19일에 다시 외부대신이 되었는데, 이후 여러번 사직하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외무대신 재임기간 동안 일본에 충청·황해·평안도의 어로권의 일본 부여, 일본의 황무지개척권요구, 제1차한일협약, 메가다(目賀田種太郞)의 재정고문 취임, 일본헌병대의 경성치안권 장악, 마루야마(丸山重俊)의 경무고문 취임, 일본에 통신원 이양, 연해하천의 항해무역권 부여 등 그때마다 각종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1]
조선 정조 때부터 프랑스 등에서 천주교 선교사와 신부들이 파견되고 이들과 조선 조정 사이에는 마찰이 발생했다. 1874년 11월 이후로 천주교 박해는 공식적으로는 풀렸으나 국내에서 포교하는 선교사와 사대부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으므로 1904년 6월 9일 주조선 프랑스 공사 콜린 플랑시(Collin dePlancy)의 요청에 따라 선교약조(宣敎約條) 8개 조항을 체결, 서명하였다.
2. 2. 3. 일본의 이민 금지 압력과 좌절
1905년 4월 일본의 압력을 받고 한국인의 외국 이민 금지령이 내려졌다. 데이비드 데슬러는 일본 고베 신문을 통해 한국 정부의 이민 금지령을 접하고 한국으로 건너가 이하영을 만났다. 이하영은 하와이에서 한국인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도 한국인 이민을 반대하지 않고 하와이 이민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카탄반도의 사이잘(Sisal) 농장에서 일할 한국인들을 모집하는 무책임한 이민회사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멕시코의 한인 노동자들이 임금 체불을 겪는다는 편지를 입수했다며, 멕시코는 한국인 이민에 적당하지 않고 한국인에 대한 착취가 중지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1]이하영은 일본 공사 하야시와 의논한 결과, 특정 국가나 이민회사를 차별하는 것은 불공평하므로 이민을 금지하려면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하야시의 말을 데슬러에게 전했다. 그는 이민자들에게 바람직한 보호를 제공할 수 있을 때까지 이민을 전면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하영은 이민법 개정을 시도했으나 조정에서 채택되지 않아 실패했다.[1]
외무대신 이하영은 한국인 하와이 이민을 지지했고 윤치호, 민영환 등이 동의했지만, 이용익 등은 반대했다. 하야시가 이민 금지에 멕시코뿐 아니라 하와이도 포함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자, 이하영은 결국 굴복했다. 일본 측의 반대로 외무부 유민원(이민 담당 부서)에 이민 금지령을 내렸지만, 각 항구의 감리들에게 노동 목적 이민은 막지 말라고 연락하여 인천과 부산에서는 이민이 허용되는 등 법 집행이 느슨하게 이루어졌다.[1]
그러나 이는 도쿄와 고베로 간 한국인들에 의해 일본 측에 포착되었고, 하야시는 규정 준수를 요구했다. 결국 이하영은 1905년 6월 10일 감리들에게 여권 발급 중지를 지시하고 다음 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고종이 사직을 모두 받지 않아 유임되었다. 당시 알렌은 이하영에 대해 "자신의 외교적 능력을 자만하고 있는 사람이다.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상상외로 고집 불통이며, 또 상상외로 양보한다. 충동적이고 쉽게 영향을 받는 편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1]
2. 2. 4. 을사늑약 전후
1905년(광무 8년) 9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 주재로 러-일 간 강화회의가 열렸다. 김제의 성리학자 이기(李沂)는 이 강화회의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모종의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 보고 동지 나인영(羅寅永, 후에 나철로 개명), 오기호(吳基鎬), 윤주찬(尹柱瓚) 등과 함께 공동으로 러일전쟁 승전 강화회의에 대한제국 역시 주요 관련국이니 한국측 대표를 파견할 것을 청하는 서한을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게는 결정권이 없다는 답변을 내렸다. 이에 이기(李沂)는 직접 미국에 건너가 그 회의에 참관하려고 했다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방해로 실패하였다.그는 수시로 외무대신 직에서 면직해줄 것을 청하였으며, 여러 번의 사임 요청 끝에 1905년 외무대신에서 면직되었다. 1905년 9월 훈1등 팔괘장(勳一等八卦章)을 수여받고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법부 형법교정원 총재를 겸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 조약 체결 때에는 법부대신으로서 을사 조약론이 나올 때 조약체결에 대해 무조건 불가하다고 주장했다가 찬성으로 의견을 바꾸었다. 당초 그는 을사조약 체결론이 나오자 공식회의에 부쳐 토의해 결정해야 한다, 중추원에도 가부 여부를 물어야 한다며 의견 개진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각부대신의 표결결과 조약체결 찬성으로 결론났고 그도 결국 결과를 승복하고 말았다. 그해 11월 16일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여기에 서명했다가 을사 5적으로 몰려 지탄받았다.
1907년 3월 나인영, 오기호(吳基鎬) 등이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무사했다.
2. 2. 5. 을사늑약 이후
1907년 9월 전경현,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경성부 서소문의 지역 유지들이 자금을 각출하여 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학교 부지를 마땅히 찾지 못하자, 이하영은 이 소식을 듣고 서소문 밖 합동(蛤洞) 조개골 부락에 있는 자신의 별저를 학교 부지로 쓰도록 기부하였다. 서소문 별저 자리에는 곧 소의학교(동성중학교, 동성상업고등학교의 전신)가 개교되었고, 그는 소의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1910년 10월 1일 그는 소의학교 교장직을 전경현에게 넘기고 사퇴하였다.그는 인천부 부내면 율목동의 땅을 매입하여 과수원을 삼고, 사과나무를 돌보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러나 인천 내 일본인 전용 장례시설을 만들려는 인천주재 일본거류민단 간부들의 요청으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인천부 답동 대지와 교환하였다. 율목동 과수원에는 일본인 전용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개설되었다. 이후 그는 인천부 부내면 답동의 대지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1908년 3월 15일 박정동, 상호(尙灝), 장길상 등과 함께 교육계몽, 장학 단체인 교남학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바로 교남학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그는 교남교육회잡지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1910년 5월 25일 한국통감부의 단체해산령에 따라 해산되었다.
1908년 10월 경성에서 이병현(李秉鉉) 등과 함께 양잠회사인 작잠회사(柞蠶會社)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2. 3. 생애 후반
이하영은 만년에 주소지와 본적지를 동래군 기장면에서 시흥군 수암면으로 옮겨 여생을 보냈다. 1924년 4월 18일 중추원 찬의에 재임명되었고, 1925년 3월 12일 중화민국의 지도자 쑨원이 사망하자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그는 3월 20일 쑨원의 사망을 추모하는 조전을 난징으로 보냈다. 1926년 5월 19일에는 동생 이준영의 양자인 이규종이 그가 재산을 가로챘다며 경성지방법원에 1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1927년 6월 3일 중추원 고문으로 전임되었다.1919년 대륙고무주식회사의 설립을 추진, 8월 1일 경성부 용산면 원효로1가에서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 사장, 중추원 고문 등으로 있다가 1929년 2월 27일 사망했으며 그의 작위는 아들 이규원이 습작했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장상리(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동막골 장상저수지 위쪽에 안장되었다.
한편, 행상 시절에 결혼해서 얻은 큰아들 이규삼은 모르핀을 수시로 흡입하여 헌병대에 끌려가 벌금을 납부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마약류를 열심히 일하는데 방해된다며 전면 금지하였다. 그러나 1921년 이하영의 큰아들 이규삼은 모르핀을 맞다 검거되었고[12], 이후에도 여러번 모르핀, 아편 등을 흡입하다가 체포, 검거되었다.
2. 3. 1. 대륙고무 창립과 최후
1919년 대륙고무주식회사의 설립을 추진한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수입한 검정고무신을 신는 것을 본 그는 자신이 직접 고무신을 만들어보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해 8월 1일 경성부 용산면 원효로1가에서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설립, 아들 이규원과 그밖에 이규완, 박영효, 박중양 등을 주주로 영입하여, 대륙고무주식회사 창립발기인, 대주주의 1인으로 참석하였다. 그는 최초로 고무로 된 공을 생산하여 그때까지 돼지나 소의 오줌보와 허파에 자전거 공기주입기, 또는 사람의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쓰던 것을 고무로 된 공으로 대체시켰다. 대륙고무는 1922년 8월경이면 회사자본 50만원, 사외 자본 125.1만원의 중견 주식회사로 성장한다.만년에는 주소지와 본적지를 동래군 기장면에서 시흥군 수암면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924년 4월 18일 중추원 찬의에 재임명되었고, 1925년 3월 12일 중화민국의 지도자 손문이 병사하자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그는 3월 20일 손문의 사망을 추모하는 조전을 난징으로 보냈다. 1926년 5월 19일에는 동생 이준영의 양자 이규종(李圭鍾)이 그가 재산을 사취했다며 경성지방법원에 1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기도 했다. 1927년 6월 3일 중추원 고문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대륙고무공원회사 사장, 중추원 고문 등으로 있다가 1929년 2월 27일 사망했으며 그의 작위는 아들 이규원이 습작했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장상리(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동막골 장상저수지 위쪽에 안장되었다.
한편, 행상 시절에 결혼해서 얻은 큰아들 이규삼이 모르핀을 수시로 흡입하여 헌병대에 끌려가 벌금을 납부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마약류를 충량한 국민이 되는데 방해된다, 열심히 일하는데 방해된다며 전면 금지하였다. 그러나 1921년 이하영의 큰아들 이규삼은 모르핀을 맞다 검거되었다.[12] 이후에도 이규삼은 여러번 모르핀, 아편 등을 흡입하다가 체포, 검거되었다.
3. 평가
이하영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윤치호는 이하영이 낮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출세한 것을 비판했다.[1] 또한, 이하영은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3. 1. 부정적 평가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하영이 낮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출세한 것을 비판하였다.[1]이하영씨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부산 거리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며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알렌 박사의 요리사로 일했다. 그런 다음 외부대신에 올랐고, 자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에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본래 그는 편지 한 장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양반가문 출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점잔을 빼며 처신했다.|윤치호 일기, 1929년 2월28일자한국어[1]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이흥혁(李興赫) | |
할아버지 | 이응효(李膺孝) | 증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추증 |
아버지 | 이유수 | 증 내부대신(贈內部大臣)에 추증 |
어머니 | 서산 서씨(瑞山徐氏) | |
형 | 이근영(李根榮) | 군수(郡守) |
동생 | 이준영 | 관찰사, 국문학자 |
본처 | 양심온 | |
첫째 아들 | 이규삼 | 삼촌 이준영의 양자로 출계 |
처 | 강릉 최씨(江陵崔氏) | |
둘째 아들 | 이규원 | |
손자 | 이종찬 | 대한민국 창군 주역, 육군참모총장 역임 |
외할아버지 | 서수성(徐秀誠) | |
장인 | 최영홍(崔永弘) | |
19촌 숙부 | 이유승 | 1835년 ~ 1907년 |
20촌 | 이회영 | |
20촌 | 이시영 |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제1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먼 친척이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재산과 영달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한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시영(始榮)·소영(韶榮)·호영(頀榮) 7형제는 그의 20촌 동생으로, 이하영의 아버지 이유수와 이시영,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은 18촌 형제간이다.
5. 상훈
- 일본 훈1등 욱일대수장 (1897년 12월 18일)[13]
- 대한제국 훈2등 태극장 (1900년)
- 대한제국 훈1등 팔괘장 (1905년)
- 일본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1929년)
6. 기타
그는 학력이 없는 낮은 학식으로 외무대신과 법무대신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가 학식이 없음을 들어 그를 조롱하였다.
참조
[1]
서적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2]
문서
경성부 용산구 용산면 원효정 1정목(현재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3]
뉴스
'[책갈피 속의 오늘] 1922년 고무신 첫 등장'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5-08-05
[4]
서적
경상도 방언의 모음체계 변천사
박이정
2005
[5]
문서
차남 이하영의 공으로 내부대신(贈內部大臣)에 추증
[6]
문서
집안 대대로 정승, 판서를 했던 독립운동가 [[이회영]], 부통령 [[이시영]] 형제와 같은 항렬이나 이하영의 직계는 한미해 형편이 어려웠다.
[7]
간행물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1926-06
[8]
뉴스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http://shindonga.don[...]
신동아
2006-11
[9]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10]
문서
<<영약삼단(另約三端)>>
[11]
서적
친일정치 100년사
동풍
1995-07-01
[12]
뉴스
30년대 조선을 거닐다 <8> 모르핀(모루히네)권하는 사회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1-11-25
[13]
웹인용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
2022-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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