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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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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회영은 1867년 한성부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로,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가 출신이다. 그는 개화 사상을 수용하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며 계몽 운동을 펼쳤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전 재산을 처분하여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나, 내부 갈등으로 탈퇴 후 아나키즘 운동에 헌신했다. 만주사변 이후 흑색공포단을 지휘하며 항일 투쟁을 벌이다 1932년 다롄에서 체포되어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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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회영
출생일1867년 3월 17일
출생지한성, 조선 (현재 서울, 대한민국)
사망일1932년 11월 17일
사망지랴오닝 성(중화민국) 뤼순 시
국적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업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정당무소속
종교유교(양명학) → 개신교(감리회)
배우자사별 초배 달성 서씨 부인, 재혼 계배 이은숙
자녀이규룡 (아들)(출계)
이규학(아들)
이규온 (딸)
이규숙 (딸)
이규창 (아들)
이경숙 (딸)
이현숙 (딸)
이규동(아들)
부모이유승(부), 동래 정씨 부인(모)
형제이석영(형)
이건영(형)
이시영(아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직책군무총장 예하 보좌관 직무대리
임기1919년 12월 8일 ~ 1920년 2월 29일
군무총장노백린
대통령이승만
국무총리이동휘
군무차장이춘숙
임정 의정원임정 의정원 의원
기타 정보
친인척이종찬(손)
이종걸(손)
웹사이트우당 이회영 기념관

2. 삶

이회영은 1867년 한성부 저동(苧洞)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과 동래 정씨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로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6대조 이태좌(李台佐)는 영조 때 좌의정을, 5대조 이종성(李宗城)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사도세자의 후견인이었다. 어머니 동래 정씨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후손으로, 외가 역시 명문가였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1885년 달성 서씨와 결혼했으나 1907년 사별하고, 1908년 이은숙과 재혼했다. 양반가의 자제로 유년기에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사상을 접하면서 유교사상에서 기독교(감리교)로 개종했다. 1896년 항일 의병의 자금 조달을 위하여 경기도 개성부 인근 풍덕(豊德) 지방에 삼포농장(蔘圃農場)을 경영하기 시작, 이후 농장의 수익금으로 의병들의 자금을 후원하였다.

먼 족친인 이상설과 절친했던 그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계몽, 강연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6년 이상설 등과 만주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기지 설치계획을 수립한 후 만주 간도의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이시영 등과 조약 철회, 무효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나인영, 기산도 등과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안창호, 양기탁, 윤치호, 신채호 등과 비밀 결사 조직 신민회를 결성하고 신민회 중앙위원에 취임하여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형제들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1910년 경술국치 전후, 6형제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이상룡, 허위 가문과 함께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과 고종의 망명을 계획했으나, 1919년 고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돌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으나, 임시정부 내 분쟁을 우려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갔다.

1921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분 때 신채호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의 저술에 감명을 받은 그는 임정이 창조파, 개조파, 임정 고수파로 나뉘자 임시정부를 떠났다. 1923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한수이 현(漢水縣)에 한중합작 이상농촌인 양도촌(洋濤村)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했다.

1930년 유자명 등은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만주사변 이후 이회영, 정현섭, 백정기 등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1931년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일본만주를 공격하여 만주침략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동지들이 상하이로 집결하여 협의기구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였고, 의장에 피선되었다.

1931년 상하이에서 정화암, 백정기 등과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산하에 일본측 기관 및 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했다. 왕정위 암살 미수, 일본 영사관 폭파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1] 1932년 톈진에서 일본 군수물자 수송선 폭파, 일본 영사관 폭탄 투척 등의 활동을 벌였다.[1]

이후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여 만주에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고 관동군 사령관 암살을 계획했으나, 1932년 다롄(大連)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했다.(향년 65세) 일본 경찰은 이회영의 죽음을 자살로 발표했지만, 유족과 언론은 고문치사 의혹을 제기했다.[6]

2. 1. 초기

이회영은 1867년 한성부 저동(苧洞)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과 동래 정씨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로 신라 개국공신 이알평의 후손이자, 조선 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6대조 이태좌(李台佐)는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고, 5대조 이종성(李宗城)은 의정부영의정을 지냈으며, 사도세자의 몇 안 되는 후견인이었다. 어머니 동래 정씨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후손이자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로, 외가 역시 명문가였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2. 1. 1. 출생과 가계 배경

1867년 한성부 저동(苧洞)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1835~1906)[6]동래 정씨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로 신라 개국공신 이알평의 후손이자, 조선 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6대조 이태좌(李台佐)를 비롯하여 소론 주요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5대조 이종성(李宗城)은 의정부영의정을 지냈으며, 사도세자의 몇 안 되는 후견인이기도 했다.

어머니 동래 정씨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후손이자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로, 외가 역시 명문가였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다섯째 동생 성재 이시영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로 변절한 이하영과 국문학자 이준영 형제[4]는 이회영의 14촌 종형이었다.

2. 1. 2. 결혼과 개화 사상

李會榮중국어1885년에 달성 서씨와 결혼하였으나 1907년 1월 중순에 사별하였고, 1908년 10월 20일 이은숙과 상동 교회에서 재혼했다.[6] 첫 부인 달성 서씨는 판서를 지낸 서신보(徐臣輔)의 딸로, 할아버지 서유상(徐有象)은 참판, 증조부 서영수(徐英修)는 사어를 역임했으며, 외할아버지는 보국숭록대부와 이조판서를 지낸 연안 이씨 이풍익(李豊翼)이었다. 후처 한산 이씨 이은숙은 진사 이덕규(李悳珪)의 딸로 할아버지는 판사 이인식(李寅植)이고, 증조부는 군수를 지낸 이승서(李承緖)였고, 외조부는 도정을 지낸 홍종림(洪種林)이었다.

양반가의 자제로 유년기에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사상을 접하면서 유교사상에서 기독교(감리교)으로 개종한다. 결혼식을 교회에서 신식으로 올렸고, 여성의 재가를 꺼리는 당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잃은 자신의 누이 동생은 거짓으로 부고를 낸 뒤 다시 결혼시켰다. 1906년 아버지 이유승이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 해방시켰다.

1896년 항일 의병의 자금 조달을 위하여 경기도 개성부 인근 풍덕(豊德) 지방에 삼포농장(蔘圃農場)을 경영하기 시작, 이후 농장의 수익금으로 의병들의 자금을 후원하였다.

먼 족친인 이상설과 절친했던 그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계몽, 강연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여준, 이강연(李康演), 윤치호, 남궁억, 이상재 등의 인사들을 만나 교류하였다. 1906년 이상설, 여준, 장유순, 이동녕, 유완무 등과 만주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기지 설치계획을 수립한 후 만주 간도의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2. 1. 3. 개화, 계몽 운동

독립협회에 참가하고 장훈학교를 설립하는 등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장훈학교 교사 외에 공옥학교 학감으로도 초빙되었다. 공옥학교 학감으로 있을 때 신민회를 조직하였다.[5]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정 고관이었던 이상설과 당시 대한제국 외무부 교섭국장인 친동생 이시영 등과 함께 조약 철회, 무효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바로 나인영, 기산도 등과 함께 조약 체결에 가담한 박제순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였다.[5]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그는 1907년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윤치호, 안태국, 이상재, 김규식, 이동녕, 김홍량, 이동휘, 신채호, 최광옥, 이시영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신민회를 결성, 조직하여 신민회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신민회의 정치·경제·교육·문화 분야 등에 관여하였다.[5] 그러나 일제는 신민회를 탄압했고, 신민회 회원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개화 이전에 노비 해방, 적서(嫡庶) 타파, 여성의 부당한 인습에 의한 권리 박탈에 반대, 개가와 재혼을 장려하였고,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5]

2. 2. 독립 운동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회영은 형제들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1906년 만주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무력항쟁 기지를 건설하려 하였다.[6]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에 발각되어 고종 퇴위의 빌미를 제공했다.[7]

1910년 경술국치 전후, 이회영은 6형제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이상룡, 허위 가문과 함께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6] 이는 1909년 신민회 간부 회의에서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한 것이 배경이 되었다.[6]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회영은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과 만나 고종의 망명을 계획했다.[7] 시종원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의 승낙을 얻고, 김가진 등과도 비밀리에 연락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했으나,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이후에도 이회영은 블라디보스토크,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돌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다.[6] 그러나, 이회영은 임시정부 내에서 분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예상대로 독립운동 단체 사이에 내분과 조직 간의 알력이 심화되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었으나, 결국 의견 차이로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1년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때 신채호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이회영은 일본의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의 저술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6] 임정이 창조파, 개조파, 임정 고수파로 나뉘자 임시정부를 떠났다.[8] 1923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한수이 현(漢水縣)에 토지를 매입하고 한중합작 이상농촌인 양도촌(洋濤村)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했다.

1930년 4월 20일 유자명, 장도선, 정해리, 유기석 등은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24] 만주사변 이후 이회영, 정현섭, 백정기 등의 주요 아나키스트들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6][24] 이 단체는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1931년 이회영은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일본만주를 공격하여 만주침략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동지들이 상하이로 집결하여 협의기구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였고, 이회영은 의장에 피선되었다.

2. 2. 1. 독립 운동 준비 계획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차츰 가시화되자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6] 1906년 10월, 만주서전서숙을 세우고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였다.[6] 그는 서전서숙의 교장으로 이상설을 초빙하여 동지 획득과 교포 교육에 주력하게 했다.

1907년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 체결의 억지,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종에게 건의하였다.[7] 고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지만 일본의 조선통감부 경찰에 적발되면서 이는 고종 퇴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이회영은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만주로 파견했다.[7] 그러나 자금난과 일제의 간섭으로 서전서숙1907년 10월경 문을 닫고 말았다.[6]

2. 2. 2. 만주 시찰과 망명

1910년 경술국치 전후, 이회영은 6형제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이상룡, 허위 가문과 함께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1909년 신민회 간부 회의에서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한 것이 망명의 배경이 되었다.[6]

2. 2. 3. 신흥무관학교 활동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회영은 이에 자극받았다.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과 만나 고종의 망명을 계획했다.[7] 시종원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의 승낙을 얻고,[7] 김가진 등과도 비밀리에 연락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했다. 그러나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이후에도 이회영은 국내에서 가져온 자금이 바닥났지만, 블라디보스토크,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돌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2. 2. 4. 고종 망명계획 시도와 실패

이회영은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임시정부 내에서 지휘권을 둘러싼 다툼과 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다.[6] 그러나 이회영의 예상은 적중했고, 이때부터 이미 독립운동 단체 사이에 내분과 조직 간의 알력이 심화되고 있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었으나, 결국 의견 차이로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그해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때 신채호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이해 4월에 유자명은 이회영을 만났는데, 이미 이회영은 일본의 유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의 저술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였다.[6] 임정이 창조파, 개조파, 임정 고수파로 나뉘자 그는 임시정부를 떠났다.[8]

1923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한수이 현(漢水縣)에 토지를 매입하고 한중합작 이상농촌인 양도촌(洋濤村)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했다.

2. 2. 5. 임시의정원 의원

이회영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분과 조직 간 알력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14]

2. 2. 6. 임정 탈퇴와 아나키즘 활동

1921년 베이징에서 신채호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분을 수습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는 노선 차이로 갈등이 심해졌다.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 임시정부를 유지하되 개혁하자는 개조파, 임시정부 고수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이회영은 이러한 갈등에 실망하여 임시정부를 탈퇴했다.[4]

이 무렵 이회영은 일본의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일본어: 大杉栄)의 저술에 감명을 받았다. 1923년에는 중국 후난성(중국어: 湖南省, 병음: Húnán Shěng) 한수이현(중국어 간체자: 汉寿县, 정체자: 漢壽縣, 병음: Hànshòu Xiàn)에 이상농촌을 건설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

2. 2. 7. 만주사변 전후

1930년 4월 20일 유자명, 장도선, 정해리, 유기석 등은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24] 만주사변 이후 이회영, 정현섭, 백정기 등의 주요 아나키스트 거물들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6][24] 이 단체는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1931년 이회영은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일본만주를 공격하여 만주침략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동지들이 상하이로 집결하여 협의기구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였고, 이회영은 의장에 피선되었다.

2. 3. 흑색공포단 지휘와 최후

1931년 9월 이회영은 상하이에서 정화암, 백정기 등과 함께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일본측 기관 및 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했다.[1] 이회영은 흑색공포단을 지휘하며 왕정위 암살 미수, 일본 영사관 폭파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1]

1932년 1월에는 톈진에서 일본 군수물자 수송선 폭파, 일본 영사관 폭탄 투척 등의 활동을 벌였다.[1]

이후 이회영은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여 만주에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고 관동군 사령관 암살을 계획했으나, 1932년 11월 다롄(大連)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했다.[6] (향년 65세)

일본 경찰은 이회영의 죽음을 자살로 발표했지만, 유족과 언론은 고문치사 의혹을 제기했다.[6] 동아일보는 이회영이 삼노끈으로 목을 매 자결했다고 보도했으나,[25] 일본 영사관 측의 석연치 않은 정황과 유해 상태에 대한 목격담은 고문치사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2. 3. 1. 흑색공포단 조직

1931년 9월 이회영은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 중국인 왕아초(王亞樵), 화균실(華均實), 일본인 출신 아나키스트 전화민(田華民, 일본명 佐野), 오수민(吳秀民, 일본명 伊藤) 등 7인과 함께 상하이의 어느 건물 지하에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일본측 기관 및 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기획, 선전, 연락, 행동 등의 부서를 두었다.[1]

이회영은 흑색공포단을 지휘하였으며, 단원들인 천리방, 백정기,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유기문(柳基文) 등은 중국 국민당 내 친일파 우두머리인 왕정위(汪精衛)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그의 부관을 사살하였다. 또한, 아모이(厦門)에 있던 일본 영사관을 폭파했다.[1]

1932년 1월 흑색공포단은 톈진에 단원들을 파견, 톈진 부두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수물자 적재 일본 기선을 텐진 앞바다에서 폭파시켰다. 그리고 톈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져 영사관 건물과 시설 일부를 파괴시킨 뒤, 단원들은 한 명도 잡히지 않고 도주했다.[1]

2. 3. 2. 체포와 옥사

1932년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여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상해 사변이 일어나자 일본군 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 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 외교기관 폭파, 파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결정하고, 중국 국민당에게도 협조를 구하여 자금과 무기 지원을 확약받았다.

같은 해 9월, 중국 국민당 요인 이석증(李石曾), 오유휘(吳稚暉), 호한민(胡漢民)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거점 확보와 동시에 관동군 사령관 무토(武藤) 대장 암살 계획을 정하고 북행을 결정하였다.

1932년 11월, 만주의 연락 근거지 확보와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 일본군 사령관 암살 등 아나키스트의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이동을 결심하였다.[6] 당시 만주는 일본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어 대단히 위험했으므로 주위의 동지들이 말렸으나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6]

그러나 그해 11월, 조선인들의 제보와 일본 밀정의 첩보, 그리고 그와 사상이 달랐던 조카 이규서 등의 밀고로 다롄 항구에서 이동 중 일본 경찰과 중국 수상서원에게 체포되었고,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었다. 11월 17일, 이미 노인이었던 그는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연락을 받고 시신을 찾으러 간 유가족에게 다롄 수상경찰은 그가 자살하였다고 했으나 믿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65세였다.

2. 3. 3. 사망 원인

1932년 11월 17일 이회영은 만주 다롄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65세였다.[6]

일반적으로 그의 죽음은 고문치사로 알려져 있다. 일본 경찰은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회영이 쇠창살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렸으나, '대련수상서유치중 괴! 액사한 노인(大連水上署留置中 怪! 縊死한 老人)'이라는 기사가 중앙일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가 삼노끈(으로 만든 노끈)으로 목을 매 자결했다고 보도되었다.[25] 그러나 일본 영사관 당국은 이회영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고 발표했으나, 그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하는 등 수상한 정황 때문에 고문 치사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의 유해에는 '안면에 선혈이 낭자하고 타파오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는 목격담이 전해진다.[6]

중국 항일 운동가 김소묵의 보고서에는 1932년 11월 17일 일제가 뤄순 감옥에서 재판 없이 이회영을 교수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회영의 체포 과정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은 일본 경찰이 4등 선실의 수많은 중국인 중 정확히 이회영을 지목한 점을 의심하였다. 이들은 이회영이 상하이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만난 이규서와 연충렬을 의심하고[6], 증거를 확보하여 추궁한 결과 일본 경찰에 밀정 행위를 한 사실을 확인하고 처단하였다.[6] 이규서는 1932년 10월 연충렬 등 3명과 함께 백정기에게 암살당했다.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시조알평
2세거명
3세금서
4세윤홍
5세승훈
6세주복
7세
8세치연
9세총섬
10세춘정
11세현복
12세선용
13세승고
14세득견
15세
16세세기
17세
18세원보
19세
20세연손
21세숭수
22세성무
23세예신
24세몽량
25세이항복
26세정남
27세시술
28세세필
29세이태좌
30세종성
31세경륜
32세정규
33세계선
34세유승
35세이회영본인


4. 기타

1966년 이회영의 부인 한산 이씨 이은숙이 탈고하고 1975년 출간된 《서간도 시종기(西間島始終記)》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일면을 주체적 입장에서 기록하여 사료로서 가치가 높으며, 전통적 양반집 부인의 교양과 의지를 묘사한 문학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이 책은 일조각에서 수여하는 '월봉저작상'을 받기도 했다.[27]

이회영 가문은 대대로 조선의 고위 관직을 역임한 명문가였다. 다음은 이회영의 가계도이다.

관계이름기타
이유승(李裕承)1835년 - 1907년, 시호는 효정(孝貞)
동래 정씨1832년 - 1899년, 이조판서 정순조(鄭順朝)의 딸
이건영(李健榮)1853년 - 1940년
이석영1855년 - 1934년, 13촌 백부 이유원에게 출계
이철영(李哲榮)1863년 - 1925년
동생이시영1869년 - 1953년
누나경주 이씨
매부홍승학(洪承學)1858년 - ?, 참판 홍우경(洪祐慶)의 아들
여동생경주 이씨
매제조병홍(趙秉弘)참판 조필영(趙弼永)의 아들
여동생경주 이씨
매제신재희1891년 - 1943년, 언론인 겸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신익희의 친형
서모(이름미상)
이복동생이소영(李韶榮)1875년 - 1905년
이복동생이호영1875년 - 1933년
달성 서씨1866년 ~ 1907년, 서신보의 딸
장남이규룡(李圭龍)1887년 - 1955년, 백형 이건영에게 출계
장녀이규원(李圭媛)1893년 - ?
사위박창서(朴彰緖)군수 박승철(朴勝轍)의 아들
차남이규학(李圭鶴)1896년 - 1973년
자부조계진1897년 - 1996년, 조정구의 딸, 흥선대원군의 외손녀
후처이은숙(李恩淑)1889년 - 1979년, 진사 이덕규(李悳珪)의 딸
차녀이규남(李圭男)1909년 - 1989년
사위고성봉(高成鳳)1897년 - 1951년, 독립운동가
3녀이규숙(李圭淑)1910년 - 2009년
사위장해평(莊海平)1905년 - 1965년, 독립운동가
3남이규창1913년 - 2005년
자부정문경(鄭文卿)1922년 - 2010년
4녀이현숙(李賢淑)1917년 - 1946년
사위김홍택(金弘澤)
3남이규오(李圭梧)1922년 - 1925년
4남이규동(李圭東)1926년 - 2014년
자부변봉섭(邊奉燮)1931년 - 2017년


4. 1. 이회영을 연기한 배우들

5. 참고 서적

참조

[1] 웹사이트 KBS website (Korean) http://www.kbs.co.kr[...]
[2] 웹사이트 KBS Website (English) http://english.kbs.c[...]
[3] 기타
[4] 서적 경상도 방언의 모음체계 변천사 박이정
[5]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6] 서적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역사공간
[7] 웹사이트 이회영 http://enc.daum.net/[...]
[8] 기타
[9] 서적 일제하 아나키즘운동의 전개 국학자료원
[10] 서적 항일 혁명가 구파 백정기 의사 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11]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2]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3]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4]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5]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6]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7]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8]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9]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20]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21]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22]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23]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24] 서적 식민지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 선인
[25] 뉴스 동아일보 1932-11-24
[26] 기타
[27] 뉴스 독립운동가 이회영 아내 회고록 '서간도시종기' 36년만에 재출간 https://mk.co.kr/new[...] 매일경제 (연합뉴스 보도) 2017-07-31
[28] 웹사이트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 우당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https://www.kha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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