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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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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춘궁은 자금성 내정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영락제 18년(1420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후궁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건륭제의 정궁황후인 효현순황후, 서태후, 융유태후 등이 거주하였다. 장춘궁은 정전, 이수전, 승희전, 이정서사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이수전과 승희전의 복도에는 소설 《홍루몽》의 장면을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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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궁
장춘궁
장춘궁
장춘궁
개요
위치자금성 서6궁
주요 기능황제의 후궁 거주지
건축 시기명나라 영락 18년 (1420년)
주요 특징내부 장식에 《홍루몽》 장면이 그려짐
함풍제의 효정현황후가 거주
역사
명나라건립
청나라여러 차례 재건 및 개조, 황후 및 비빈의 거주지로 사용됨
함풍제효정현황후 거주
서태후1884년부터 1887년까지 거주
건축 구조
주요 건물정전 (장춘궁)
후전
동·서 배전
문화적 중요성
내부 장식홍루몽》 장면 묘사
관련 인물효정현황후
서태후

2. 역사

명나라 영락 18년(1420년)에 건립되었고, 처음 이름은 '''장춘궁(長春宮)'''이었다. 가정 14년(1535년)에 '''영녕궁(永寧宮)'''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만력 43년(1614년)에 다시 '''장춘궁(長春宮)'''으로 복칭되었다. 청나라 강희 22년(1683년)에 중수하였고, 이후로도 여러 번 고쳤다. 함풍 9년(1859년)에는 장춘궁의 궁문인 장춘문을 헐고, 계상궁 후전을 천당전으로 고쳤다. 함풍제가 편액을 하사했고, "체원전(體元殿)"이라 하였다. 장춘궁과 계상궁, 두 궁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남북의 사진원이 형성되었다.[2]

명나라 · 청나라 때 후궁의 거처였고, 명 천계 연간 이성비가 장춘궁에서 머물렀다. 청 건륭제의 정궁황후인 효현순황후가 머물렀고, 사후 장춘궁에 영관을 안치했다. 서태후동치 년인 광서 10년(1884년)까지 장춘궁에서 살았다. 《왕씨동화속록》에는 "함풍 11년, 모후황태후가 장춘궁에 거처하며 이수하였다. 성모황태후는 장춘궁 평안실에 머물며 매일 몸소 문안드렸다"고 적었다. 《청목종실록》 " 함풍 11년 9월 갑인일, 모후황태후 · 성모황태후가 환궁하다. 상례는 수이전을 찾아 모후황태후께 문안드리며 평안실의 성모황태후께 문안드린다." 라고 써있다.

융유태후는 태후가 되자 장춘궁으로 이주했다. 《선통정기》에는 "선통 원년 11월, 황태후의 휘호를 숭상하고, 장춘궁을 찾아 모후황태후에게 공손이 들어가 책을 연주했다"고 적혀 있다. 《청대내기주》에는 "선통 2년 1월 10일, 융유황태후 만수절, 관직 파견 태묘 후전, 장춘궁 황태후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다."고 적혀 있다.

장춘궁 정전 앞 처마에는 "장춘궁(長春宮)"이라는 가파른 현판이 걸려있다. 건륭 6년(1741년), 건륭제는 영수궁의 가파른 현판 모양으로 11면 현판을 만들어 직접 써서 동6궁, 서6궁의 영수궁을 제외한 11궁의 정전에 각각 걸게 하였다. 건륭제가 "자계한 후, 천 만년이 지난다해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것, 비빈이 다른 궁으로 옮겨가거나 바꾸지도 말것"이라고 명을 내렸다.

1859년에는 인접한 태극전과 연결하기 위해 내문을 해체했고, 서태후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경극 무대가 건설되었다.[3]

이 궁궐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조설근의 ''홍루몽'' 장면을 묘사한 18개의 쑤저우 스타일 벽화가 그려진 복도이다.

3. 장춘궁 내 건물

장춘궁의 주요 건물은 다음과 같다.


  • '''장춘궁(長春宮)''': 1420년에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영춘궁(永春宮)으로 불렸다. 1535년 가정제는 영녕궁(永寧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나라 시대에 현재의 이름인 장춘궁으로 다시 바뀌었으며, 1689년에 개조되었다.[2] 정전은 면적 5칸에 황유리와 헐산정으로 되어 있으며, 복도가 있고 명간에는 문이 있다. 앞쪽 복도 아래에는 '장춘궁(長春宮)' 현판이 걸려 있고, 양쪽에는 서태후가 제작한 대련이 있다. 현랑 안 처마 밑에는 함풍제가 제작한 '징심정성(澂心正性)' 현판과 대련이 있다. 앞쪽과 오른쪽에 구리거북, 구리학이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조설근의 ''홍루몽'' 장면을 묘사한 18개의 쑤저우 스타일 벽화가 복도에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이수전(응천경)(膺天慶)''': 장춘궁 앞의 동배전이다. 면적은 3칸이고, 앞은 복도로 되어 있다. 이수전 앞 처마 밑에는 '응천경' 현판이 걸려 있고, 양옆으로 강희제가 제작한 대련이 있다.
  • '''승희전(수만방)(綏萬邦)''': 장춘궁 앞의 서배전이다. 면적은 3칸이고, 앞은 복도로 되어 있다. 승희전 앞 처마 밑에 '수만방' 현판을 걸고, 양쪽으로 강희제가 제작한 대련이 있다.[1]
  • '''연극무대''': 장춘궁 안에 설치된 무대이다. 체원전 뒤에 있으며, 장춘궁 남면에 위치한다. 1859년에는 인접한 태극전과 연결하기 위해 내문이 해체되었고, 서태후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3]
  • '''병문(屏門)''': 장춘궁 앞마당의 동북쪽 귀퉁이와 서북쪽 귀퉁이에 있는 문으로, 후전과 통한다. 병문에는 '길경장구'라고 쓰여 있다.
  • '''이정서사(怡情書史)''': 장춘궁의 후전으로, 정전과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다. 면적은 5칸이며, 동서에는 각각 사랑방 3칸이 있다. 앞 처마 밑에는 '이정서사(怡情書史)'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 '''익수재(益壽齋)''': 이정서사의 동배전이다. 면적은 3칸이다. 앞처마 밑에 '익수재(益壽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 '''악지헌(樂志軒)''': 이정서사의 서배전이다. 면적은 3칸이다. 앞처마 밑에 '악지헌(樂志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정정(井亭)''': 장춘궁 뒷마당 동남쪽에 있는 정자.

3. 1. 장춘궁(長春宮)

장춘궁은 1420년에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영춘궁(永春宮)으로 불렸다. 1535년 가정제는 영녕궁(永寧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나라 시대에 현재의 이름인 장춘궁으로 다시 바뀌었으며, 1689년에 개조되었다.[2] 1859년에는 인접한 태극전과 연결하기 위해 내문이 해체되었고, 서태후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경극 무대가 건설되었다.[3]

장춘궁의 정전은 면적 5칸에 황유리와 헐산정으로 되어 있으며, 복도가 있고 명간에는 문이 있다. 풍문과 죽문 치맛자락, 차간, 초간은 모두 난간으로 되어 있고 금지창이 있다. 앞쪽 복도 아래에는 '장춘궁(長春宮)' 현판이 걸려 있고, 양쪽에는 서태후가 제작한 '월방구천소성제북아치(月傍九霄眾星齊北拱)', '산호만세선무서래(山呼萬歲爽靄自西來)' 대련이 있다. 현랑 안 처마 밑에는 함풍제가 제작한 '징심정성(澂心正性)' 현판과 '풍우화감조육막(風雨和甘調六幕)', '성운경영삼계(星雲景榮三界)' 대련이 있다. 장춘궁 앞쪽과 오른쪽에 구리거북, 구리학이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장춘궁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조설근의 ''홍루몽'' 장면을 묘사한 18개의 쑤저우 스타일 벽화가 복도에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3. 1. 1. 장춘궁 서초간(西梢間)

서쪽 끝 북쪽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난로가 있다. 이곳은 침실로 사용되었다.

3. 1. 2. 장춘궁 서차간(西次間)

북쪽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온돌 앞 꽃덮개 남쪽에는 자단도장대등이 설치되어 있는데, 등불은 자단 테두리에 보물 뚜껑이 달린 유리 등잔으로 되어 있다. 보개 네 귀퉁이에는 등불 이삭이 드리워져 있으며, 조명을 켤 수 있고 실내 장식으로도 활용 가능하다. 온돌 위에는 온돌 탁자가 설치되어 있고, 실내에는 발 디딤돌과 반원 테이블 등의 가구도 마련되어 있다.

3. 1. 3. 장춘궁 명간(明間)

명간에는 지상왕좌가 설치되어 있다. 명간 안 북쪽 처마 남쪽을 향하여 "경수내측(敬修內則)"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건륭제 제작). 청나라 말기, 서태후가 살았을 때, 장춘궁 후전(이정서사) 서실의 현판인 "덕흡육궁(德洽六宮)" (건륭제 제작)을 이곳으로 옮겨와 내걸었다. 명간 동쪽, 서쪽 양쪽에 커튼이 쳐져 있으며, 동 · 서 차간으로 나뉜다.

3. 1. 4. 장춘궁 동차간(東次間)

동차간 동문 양쪽에는 대련인 '조경인시협사시(趙慶因時協四始)', '개소교태응삼양(開少交泰應三陽)' (조병충서(趙秉忠書, 상항 '어제구', 하항 '신조병충공집경서')이 걸려있다. 동차간 북쪽에 있는 꽃덮개 북쪽 창 아래에는 자단 조각조안이 있고, 그 양옆 동 · 서쪽 벽에는 한 쌍의 자단정이 세로로 놓여있다. 꽃덮개 바로 남쪽에는 향나무 한 쌍, 자단점취화조 한 쌍이 꽂혀 있다.

3. 1. 5. 장춘궁 동초간(東梢間)

동초간 북쪽에는 천장에서 바닥까지 내려오는 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침실로 사용된 공간이다. 동쪽 벽면에는 그림이 있으며, 양쪽에는 '□□나경환원(□□납경환원간□,□□□□□□□)'이라고 적혀 있다.

3. 1. 6. 이수전(응천경)(膺天慶)

장춘궁 앞의 동배전이다. 면적은 3칸이다. 앞은 복도로 되어 있고, 모퉁이와 연결되어 각 전으로 통할 수 있다. 동·서랑 내벽에는 《홍루몽》 18점이 그려져 있다. 홍루몽을 소재로 한 거대한 벽화는 청나라 말기 작품이다. 이수전 앞 처마 밑에는 '응천경' 현판이 걸려 있고, 양옆으로 "만상이 모두 춘조봉관(万象皆春调凤琯), 팔방향이 홍균으로 바뀌었다(八方向化转鸿钧)" (강희제 제작)라는 대련이 있다.

3. 1. 7. 승희전(수만방)(綏萬邦)

장춘궁 앞의 서배전이다. 면적은 3칸이고, 앞은 복도로 되어 있으며, 모퉁이와 연결되어 각 전으로 통할 수 있다. 동·서랑 내벽에는 홍루몽 18점이 그려져 있다. 홍루몽을 소재로 한 거대한 벽화는 청나라 말기 작품이다. 승희전 앞 처마 밑에 '수만방' 현판을 걸고, 양쪽으로 '인유봉무중천서(麟游凤舞中天瑞), 해맑은 바람과 대지의 봄(日朗风和大地春)'(강희제 제작)인 대련이 있다.[1]

3. 1. 8. 연극무대

장춘궁 안에 설치된 무대이다. 체원전 뒤에 있으며, 장춘궁 남면에 위치한다.

3. 1. 9. 병문(屏門)

장춘궁 앞마당의 동북쪽 귀퉁이와 서북쪽 귀퉁이에 병문(屏門)이 있어, 후전과 통한다. 병문에는 '길경장구'라고 쓰여 있다.

3. 2. 이정서사(怡情書史)

장춘궁의 후전으로, 정전과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다. 면적은 5칸이며, 동서에는 각각 사랑방 3칸이 있다. 앞 처마 밑에는 '이정서사(怡情書史)'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원래 이 전각 명간(明間) 한가운데에는 건륭제가 제작한 '덕협곤원(德協昆元)'이라는 현판이, 서실에는 '덕흡육궁(德洽六宫)'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청나라 말기에 '덕흡육궁(德洽六宫)' 현판은 장춘궁 정전(正殿)으로 옮겨졌다.

3. 2. 1. 익수재(益壽齋)

이정서사의 동배전이다. 면적은 3칸이다. 앞처마 밑에 '익수재(益壽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3. 2. 2. 악지헌(樂志軒)

이정서사의 서배전이다. 면적은 3칸이다. 앞처마 밑에 '악지헌(樂志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3. 2. 3. 정정(井亭)

장춘궁 뒷마당 동남쪽에 있는 정자.

4. 장춘궁에 기거했던 후궁

명나라청나라 때 후궁들이 이곳에 거처했다. 명 천계제 연간에는 이성비가 장춘궁에서 머물렀다.[4]건륭제의 정궁황후인 효현순황후가 이곳에 머물렀고, 사후에는 장춘궁에 영관을 안치하였다. 서태후동치 연간부터 광서 10년(1884년)까지 장춘궁에서 살았다. 융유태후는 태후가 되면서 장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5]

4. 1. 명나라

천계제 시기인 1623년부터 1627년까지 장춘궁에 Consort Cheng이 거주했다.[4]

4. 2. 청나라

명나라 만력 43년 (1614년)에 '''장춘궁(長春宮)'''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청나라 강희 22년 (1683년)에 다시 지었고, 이후로도 여러 번 고쳤다. 함풍 9년 (1859년)에는 장춘궁의 정문인 장춘문을 없애고, 계상궁 뒷 건물을 천당전으로 고쳤다. 함풍제가 현판을 내려 "체원전(體元殿)"이라 하였다. 장춘궁과 계상궁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남북으로 사진원이 만들어졌다.

청나라 때 후궁들이 살던 곳이었다. 청 건륭제의 정궁황후인 효현순황후가 이곳에 머물렀고, 죽은 후에는 장춘궁에 영관을 안치하였다. 서태후동치 연간부터 광서 10년(1884년)까지 장춘궁에서 살았다. 《왕씨동화속록》에는 "함풍 11년, 모후황태후가 장춘궁에 거처하며 이수하였다. 성모황태후는 장춘궁 평안실에 머물며 매일 몸소 문안드렸다"고 적혀있다. 《청목종실록》에는 " 함풍 11년 9월 갑인일, 모후황태후 · 성모황태후가 환궁하다. 상례는 수이전을 찾아 모후황태후께 문안드리며 평안실의 성모황태후께 문안드린다." 라고 쓰여있다.

융유태후는 태후가 되면서 장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선통정기》에는 "선통 원년 11월, 황태후의 휘호를 숭상하고, 장춘궁을 찾아 모후황태후에게 공손이 들어가 책을 연주했다"고 적혀 있다. 《청대내기주》에는 "선통 2년 1월 10일, 융유황태후 만수절, 관직 파견 태묘 후전, 장춘궁 황태후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다."고 적혀 있다.

장춘궁 정전 앞 처마에는 "장춘궁(長春宮)"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건륭제 6년 (1741년), 건륭제는 영수궁의 현판 모양을 본따 11개의 현판을 직접 써서 동6궁, 서6궁 중 영수궁을 제외한 11궁의 정전에 각각 걸게 하였다. 건륭제는 "자계한 후, 천 만년이 지난다해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것, 비빈이 다른 궁으로 옮겨가거나 바꾸지도 말것"이라고 명을 내렸다.

연도황제황후비고
1735–1748건륭효현순황후
1861–1884함풍서태후
1908–1913광서융유황후[5]양심전에서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태극전에서도 거주했다.
1922–1924선통숙비 문수[6]


참조

[1] 서적 从北京故宫到避暑山庄/"A review of the Forbidden city in Peking". 山东画报出版社/Shandong Typography
[2] 웹사이트 长春宫 http://www.dpm.org.c[...] 2013-10-30
[3] 웹사이트 Palace of Eternal Spring (Changchungong), Forbidden City, Beijing https://www.travelch[...] 2020-10-01
[4] 서적 縱慾時代:大明朝的另類歷史/"Biographies of notables of great Ming dynasty" 達觀出版事業有限公司/Daguan Typographical Company
[5] 서적 清宫述闻:正续编合编本/ "Residences of Qing dynasty. Revised edition" Forbidden City Press
[6] 웹사이트 末代皇妃文绣的结局(图)_新华书画_新华网 http://news.xinhuane[...] 201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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