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태극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태극전은 자금성 내에 위치한 건물로, 명나라 영락제 때 미앙궁으로 처음 지어졌으며, 이후 계상궁, 태극전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황후와 후궁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황후와 후궁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서태후가 경극 관람을 위해 장춘궁과 연결된 체원전을 개조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주요 건축물로는 계상문, 영벽, 태극전, 체원전, 동·서배전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6궁 - 함복궁
    함복궁은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때 수안궁으로 건립되어 가정제 때 함복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등이 머물렀던 주요 건축물이다.
  • 서6궁 - 장춘궁
    장춘궁은 자금성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때 지어져 명·청 시대 후궁들의 거처였으며, 특히 서태후가 거주하며 수렴청정을 하고, 건륭제의 현판과 《홍루몽》 벽화로 유명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 자금성 - 함복궁
    함복궁은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때 수안궁으로 건립되어 가정제 때 함복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등이 머물렀던 주요 건축물이다.
  • 자금성 - 경양궁
    자금성 동6궁 중 하나인 경양궁은 명나라 시대에 후궁의 거처로 지어졌으나 청나라 시대에는 서고로 사용되었고, 화재로 소실 후 복원되어 현재는 고궁박물원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태극전

2. 역사

영락 18년(1420년)에 건립되어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렸다. 가정제의 생부 흥헌왕 주우원이 여기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정 14년(1535년)에 '계상궁(啓祥宫)'으로 이름을 바꿨다. 청나라 말기에 '태극전(太極殿)'으로 이름을 바꿨다. 청나라 시기에 여러 번 궁을 수리하였다.[2]

계상궁 정전 앞처마에는 '계상궁(啓祥宮)'이라는 가파른 현판이 걸려있다. 건륭 6년(1741년), 건륭제영수궁의 가파른 현판을 보고 11면 현판을 만들어 직접 쓴 것으로, 동6궁, 서6궁은 영수궁을 제외한 11궁의 정전(正殿)에 각각 걸려있다. 건륭제는 "스스로 건 후에는, 천만년 동안 옮길 수 없다. 후궁이 다른 궁으로 옮겨가도 안된다.(“自挂之后,至千万年,不可擅动,即或妃嫔移住别宫,亦不可带往更换.)"라고 명하였다.

명 만력 연간, 건청궁과 곤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명 신종 주익균이 계상궁에서 잠시 머물렀다. 푸이가 출궁하기 전, 동치제유태비가 태극전에 있었다.

태극전에는 5개의 방, 두 개의 측면 홀 및 뒷전이 있다. 정전은 자금성의 대부분의 궁궐처럼 황색 유약을 바른 기와로 덮인 팔작지붕을 가지고 있다.[2] 들보는 쑤저우 스타일의 그림, 금룡, 봉황으로 장식되어 있다. 벽은 다른 궁궐에서는 보기 드물게 산에 앉아있는 봉황의 메달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2. 1. 명나라

영락 18년(1420년)에 건립되어 '미앙궁(未央宫)'으로 불렸다. 가정제의 생부인 흥헌왕 주우원이 여기서 태어났기 때문에, 명 가정 14년(1535년)에 '계상궁(啟祥宫)'으로 이름을 바꿨다.[3]

만력 연간, 건청궁과 곤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명 신종 주익균이 계상궁에서 잠시 머물렀다.[4]

연도황제비고
1590만력제내정의 세 주요 궁궐이 불탄 후, 이곳이 그의 임시 거처가 되었다.


2. 2. 청나라

청나라 시기에 태극전은 여러 번 수리되었다.[5]

원래 이진원이었던 태극전은, 청나라 후기 장춘궁을 개수하면서 태극전의 후전과 장춘문 터에 천당전인 체원전을 짓고, 뒷 처마가 건물을 감싸게 되었다. 또한, 장춘궁과 그 동서배전 및 회랑으로 연결되어 회랑을 만들었는데, 태극전 후전 동서귀방들이 각각 한 칸씩 통로로 만들어지면서, 태극전과 장춘궁이 관통하는 남북사진원을 이루게 되었다. 청나라 때 체원전은 후비의 거처였으며, 서태후가 머물렀던 곳이다.

푸이가 출궁하기 전, 동치제유태비가 태극전에 있었다. 《청궁술문(淸宮術聞)》에 따르면, 《사연재일기(使斋齋日記)》에 '청 황실이 출궁 하지 않았을 때, 유귀비(동치제 후궁)는 장춘궁, 진황귀비(동치제 후궁)은 중화궁, 순황귀비(동치제 후궁)는 저수궁, 근황귀비(광서제 후궁)는 영화궁에 기거한다. 4궁의 주위는 때때로 태극전에서 신하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쓰여있다.

《국조궁사속편(国朝宫史续编)》에는 청나라 황후가 자녕궁 황태후를 축하하러 갈 때, 귀비, 비, 빈을 거느리고 예복을 타고 계상문으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태극전과 체원전은 궁중생활의 원형으로 진열되어 있다.

연도황제황후 및 후궁비고
1872–1924동치제현절황귀비
1908–1913광서제융유황후[5]자경궁에서 이 곳으로 이사왔으며, 장춘궁에서도 거주했다.


3. 주요 건축물

태극전의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 '''계상문(啓祥門)''' : 태극전 앞 동남쪽 모퉁이에 있는 문으로, 원래 계상궁의 궁문이었다. 동6궁, 서6궁의 다른 궁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 문 안에는 나무로 만든 상봉만수문영벽이 있다.[1]
  • '''영벽(影壁)''' : 태극전 앞 정남쪽 마당 벽은 높은 영벽으로, 사각에는 유리가, 정중앙에는 운룡문(雲龍文)에 유리영벽상자가 있다. 함풍 9년(1859년) 장춘궁을 중수할 때 증축되었다.

태극전 앞 정남쪽 영벽


태극전 앞 정남방 영벽 중앙의 운룡문유리영벽함

  • '''태극전(太極殿)''' : 자금성 내정 서6궁 중 하나로, 영락 18년(1420년)에 건립되어 '''미앙궁(未央宫)'''으로 불렸다. 가정제의 생부 흥헌왕 주우원이 여기서 태어나, 명 가정 14년(1535년) '''계상궁(啟祥宫)'''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말기 '''태극전(太極殿)'''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청나라 시기에 여러 번 수리되었다. 정전 앞처마에는 '계상궁(啓祥宮)' 현판이 걸려있고, 건륭제영수궁 현판을 보고 11면 현판을 직접 써서 동6궁, 서6궁은 영수궁을 제외한 11궁 정전에 걸게 하였다.


태극전은 원래 이진원이었으나, 청나라 후기 장춘궁을 개수하면서 후전과 장춘문 터에 체원전을 짓고, 뒷 처마가 건물을 감싸게 되었다. 장춘궁과 동서배전, 회랑으로 연결되어 태극전과 장춘궁이 관통하는 남북사진원을 이루었다.

만력 연간, 건청궁, 곤녕궁 화재로 명 신종 주익균이 잠시 머물렀고, 푸이 출궁 전 동치제유태비가 있었다.

태극전 정전은 면적 5칸, 황유리와헐 산정이며, 앞뒤로 복도가 있다. 겉처마에는 소련식 채화, 문과 창에는 만자금단수문, 금수풀은 창을 따고 있다. 실내에는 석고 더미 오복수문천두(청말민초때 수리)가 있다. 정전 앞 유리영벽과 동·서배전 둘레가 넓은 정원을 이룬다. 앞 처마 기둥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以仁義為巢, 鳳儀阿閣, 與天人合撰, 象拱宸居"(인의를 보금자리로 삼아 봉황이 아각에 의례하고, 하늘, 사람과 함께 어울려 상서로움이 대궐에 모이다)가, 뒷처마 기둥에는 '소명삼광(昭明三光), 청화육합(淸和六合), 경영조(營兆), 작성사시(作成四時)' (밝은 해, 달, 별빛, 맑고 온화한 천지사방, 터전을 경영하여 만물을 조성하고 사계절을 이루다)가 있다.

  • '''체원전(體元殿)''' : 함풍 9년(1859년) 태극전 후전을 앞뒤로 문을 여는 천당전으로 바꾸면서, 함풍제의 어필 현판 '체원전(體元殿)'을 앞처마 한가운데 걸었다. 양쪽 영련은 '자강불식이희천, 양지호학 이희성'(스스로 힘써 쉬지 않고 하늘을 우러르며, 지혜를 기르고 학문을 좋아하여 성현을 우러르다)이다.[2] 체원전은 황유리기와경산정, 면적 5칸이다. 명간 앞뒤로 문이 열리고, 차간과 초간은 난간, 지창이다. 실내 각 칸에는 꽃갓이, 서초간에는 방 하나가 있고 문과 서차간이 통한다. 동 · 서쪽에 각각 세 칸씩 있는 이방 중 하나는 통로로 장춘궁 마당까지 연결된다.[2] 서태후경극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장춘궁과 연결되었다.
  • '''동 · 서배전(東 · 西配殿)''' : 태극전 동서 양쪽에 있다. 서배전 남쪽과 담장 사이에 작은 문이 연경전 앞마당과 통한다.[1]

3. 1. 계상문(啓祥門)

태극전 앞 동남쪽 모퉁이에 있으며, 원래 계상궁의 궁문이다. 이 문은 동6궁, 서6궁의 다른 11개 궁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 문 안에는 나무로 만든 상봉만수문영벽이 있다. 속칭 내계상문(內啓祥門)이라고도 하는데, 이 문 밖의 이음길 서쪽 끝에 있는 계상문(啓祥門, 속칭 외계상문)과 구별된다.[1]

3. 2. 영벽(影壁)

태극전 앞 정남쪽 마당 벽은 높은 영벽으로, 사각에는 유리가, 정중앙에는 운룡문(雲龍文)에 유리영벽상자가 있다. 계상문 서쪽에 있는 이 영벽은 함풍 9년(1859년) 장춘궁을 중수할 때 증축되었다.

3. 3. 태극전(太極殿)

자금성 내정 서6궁 중 하나이다. 영락 18년(1420년)에 건립되어 '''미앙궁(未央宫)'''으로 불렸다. 가정제의 생부인 흥헌왕 주우원이 여기서 태어났기 때문에, 명 가정 14년(1535년) '''계상궁(啟祥宫)'''으로 이름을 바꿨다. 말기 '''태극전(太極殿)'''으로 이름을 바꿨다. 청나라 시기에 여러 번 궁을 수리하였다.

계상궁 정전 앞처마에는 '계상궁(啓祥宮)'이라는 가파른 현판이 걸려있다. 건륭 6년(1741년), 건륭제영수궁의 가파른 현판을 보고 11면 현판을 만들어 직접 쓴 것으로, 동6궁, 서6궁은 영수궁을 제외한 11궁의 정전(正殿)에 각각 걸려있다. 건륭제는 "자계한 후 수만년 동안 옮길 수 없다. 후궁이 다른 궁으로 옮겨가도 안된다."라고 명하였다.

원래 이진원이었던 태극전은, 청나라 후기 장춘궁을 개수하면서 태극전의 후전과 장춘문 터에 천당전인 체원전을 짓고, 뒷 처마가 건물을 감싸고 있다. 또한, 장춘궁과 그 동서배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회랑을 만들었는데, 태극전 후전 동서귀방들이 각각 한 칸씩 통로로 만들어지면서, 태극전과 장춘궁이 관통하는 남북사진원을 이루게 되었다. 청나라 때 체원전은 후비의 거처로 서태후가 머물렀던 곳이다.

만력 연간, 건청궁(乾淸宮), 곤녕궁(昆寧宮)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명 신종 주익균이 계상궁에서 잠시 머물렀다. 푸이가 출궁하기 전, 동치제유태비가 태극전에 있었다. 《청궁술문(淸宮術聞)》에 따르면, 《사연재일기(使斋齋日記)》에 '청 황실이 출궁 하지 않았을 때, 유귀비(동치제 후궁)은 장춘궁, 진황귀비(동치제 후궁)은 중화궁, 순황귀비(동치제 후궁)는 저수궁, 근황귀비(광서제 후궁)는 영화궁에 기거한다. 4궁의 주위는 때때로 태극전에서 신하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써있다.

《국조궁사속편(国朝宫史续编)》에는 청나라 황후가 자녕궁 황태후를 축하하러 갈 때, 귀비·비·빈을 거느리고 예복을 타고 계상문으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태극전과 체원전이 궁중생활의 원형으로 진열되어있다.

태극전의 정전. 면적은 5칸, 황유리와헐의 산정이며, 앞뒤로 복도가 있다. 겉처마에는 소련식 채화가 그려져 있고, 문과 창에는 만자금단수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금수풀은 창을 따고 있다. 실내에는 석고 더미 오복수문천두가 있어 청말민초때 고쳤다. 정전 앞의 유리영벽과 동·서배전 둘레가 합쳐진 넓은 정원이다. 태극전 앞 처마 기둥에는 "以仁義為巢, 鳳儀阿閣, 與天人合撰, 象拱宸居"(자희태후 제작)이 있다. 태극전 뒷처마 기둥에는 '소명삼광(昭明三光), 청화육합(淸和六合), 경영조(營兆), 작성사시(作成四時)' (자희태후 제작)가 있다.

이 거처는 1420년에 지어졌으며 원래는 未央宫|Wèiyānggōng중국어이라고 불렸다. 가정제는 그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535년에 이름을 启祥宫|Qǐxiánggōng중국어으로 변경했다. 현재 이름은 건륭제 치세인 1741년에 붙여졌다.[2]

1860년, 뒷전인 체원전을 경극 무대로 개조하여 서태후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하여 장춘궁과 연결되었다.

태극전에는 5개의 방, 두 개의 측면 홀 및 뒷전이 있다. 정전은 자금성의 대부분의 궁궐처럼 황색 유약을 바른 기와로 덮인 팔작지붕을 가지고 있다.[2] 들보는 쑤저우 스타일의 그림, 금룡, 봉황으로 장식되어 있다. 벽은 다른 궁궐에서는 보기 드물게 산에 앉아있는 봉황의 메달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3. 4. 체원전(體元殿)

함풍 9년(1859년)에 태극전의 후전을 앞뒤로 문을 여는 천당전으로 바꾸면서, 함풍제의 어필 현판인 '체원전(體元殿)'을 앞처마 한가운데에 걸었다. 양쪽 영련은 '자강불식이희천, 양지호학 이희성'이다.[2] 체원전은 황유리기와경산정으로, 면적은 5칸이다. 명간 앞뒤로 문이 열리며, 차간과 초간은 난간, 지창으로 되어있다. 실내 각 칸에는 꽃갓이 떨어져 있고, 서초간에는 방 하나가 있고, 문과 서차간이 서로 통한다. 동 · 서쪽에 각각 세 칸씩 있는 이방이 있고, 그 중 하나는 통로로 만들어져 북쪽으로 장춘궁 마당까지 연결되어있다.[2]

청나라 후기 장춘궁을 개수하면서 태극전의 후전과 장춘문 터에 천당전인 체원전을 짓고, 뒷 처마가 건물을 감싸고 있다. 또한, 장춘궁과 그 동서배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회랑을 만들었는데, 태극전 후전 동서귀방들이 각각 한 칸씩 통로로 만들어지면서, 태극전과 장춘궁이 관통하는 남북사진원을 이루게 되었다. 청나라 때 체원전은 후비의 거처로 서태후가 머물렀던 곳이다.[2]

1860년, 체원전을 경극 무대로 개조하여 서태후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장춘궁과 연결하였다.[2]

3. 5. 동 · 서배전(東 · 西配殿)

태극전의 동서 양쪽에 위치해있다. 서배전 남쪽과 담장 사이에 작은 문이 있는데, 이 문은 연경전 앞마당과 통한다.[1]

4. 태극전에 기거했던 후궁

푸이가 출궁하기 전, 동치제유태비가 태극전에 있었다.[5] 《청궁술문(淸宮術聞)》에 따르면, 《사연재일기(使斋齋日記)》에 '청 황실이 출궁 하지 않았을 때, 유귀비(동치제 후궁)는 장춘궁, 진황귀비(동치제 후궁)은 중화궁, 순황귀비(동치제 후궁)는 저수궁, 근황귀비(광서제 후궁)는 영화궁에 기거한다. 4궁의 주위는 때때로 태극전에서 신하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써있다.

4. 1. 명나라

연도황제황후/후궁비고
1476–1522성화제효혜황후[3]
1590만력제내정의 세 주요 궁궐이 불탄 후, 이곳이 만력제의 임시 거처가 되었다.
1640–1642숭정제공숙귀비[4]천우궁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고, 병이 들자 다시 원래의 거처로 돌아갔다.


4. 2. 청나라

청나라 시기에 여러 번 궁을 수리하였다.

원래 이진원이었던 태극전은, 청나라 후기 장춘궁을 개수하면서 태극전의 후전과 장춘문 터에 천당전인 체원전을 짓고, 뒷 처마가 건물을 감싸고 있다. 또한, 장춘궁과 그 동서배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회랑을 만들었는데, 태극전 후전 동서귀방들이 각각 한 칸씩 통로로 만들어지면서, 태극전과 장춘궁이 관통하는 남북사진원을 이루게 되었다. 청나라 때 체원전은 후비의 거처로 서태후가 머물렀던 곳이다.

푸이가 출궁하기 전, 동치제유태비가 태극전에 있었다. 《청궁술문(淸宮術聞)》에 따르면, 《사연재일기(使斋齋日記)》에 '청 황실이 출궁 하지 않았을 때, 유귀비(동치제 후궁)는 장춘궁, 진황귀비(동치제 후궁)은 중화궁, 순황귀비(동치제 후궁)는 저수궁, 근황귀비(광서제 후궁)는 영화궁에 기거한다. 4궁의 주위는 때때로 태극전에서 신하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써있다.

《국조궁사속편(国朝宫史续编)》에는 청나라 황후가 자녕궁 황태후를 축하하러 갈 때, 귀비 · 비 · 빈을 거느리고 예복을 타고 계상문으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연도황제황후 및 후궁비고
1872–1924동치제현절황귀비
1908–1913광서제융유황후[5]자경궁에서 이 곳으로 이사왔으며, 장춘궁에서도 거주했다.


참조

[1] 서적 从北京故宫到避暑山庄/"A review of the Forbidden city in Peking" 山东画报出版社/Shandong Typography
[2] 웹사이트 清朝宫廷陈设欣赏,明清古典家具,红木家具,家具历史,家具文化_历史传承_中华古典家具网 http://www.cfucn.com[...] 2020-08-19
[3] 서적 "香艷叢書"十六集卷四 /"The stories of Beauties", book 16, volume 4
[4] 웹사이트 田贵妃犯了大忌-生活日报数字报 http://paper.dzwww.c[...] 2020-08-19
[5] 웹사이트 Hall of the Supreme Principle (Taiji dian){{!}}The Palace Museum https://en.dpm.org.c[...] 2020-08-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