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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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해창은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제36대, 제37대 법무부 장관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인물이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에 모두 합격했다.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시작하여 법무부 차관, 법무연수원 원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변호사로 활동하며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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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용은 경북 고령군·성주군·칠곡군을 지역구로 둔 대한민국 제21대 및 제22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의원 보좌진과 경상북도지사 경제특별보좌관을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국민의힘 당직을 역임하고 상임위원회 및 특별위원회 활동을 수행하며 재선에 성공, 현재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간사 및 해양수산법안심사소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나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관련 논란도 있다.
정해창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정해창 |
원어명 | 丁海昌 |
로마자 표기 | Jeong Hae-chang |
출생일 | 1937년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법조인 |
경력 | 제36대 법무부 장관 제37대 법무부 장관 |
기타 |
2. 생애
1937년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1] 대학 재학 중이던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에 모두 합격하였다.[1]
1962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어 법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이후 법무부 등에서 검사로 재직했다. 중앙일보는 그가 김기춘과 함께 유신체제 하 법령 입법 및 개정 공로로 발탁되었다고 보도했다.[2] 1987년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법무부 장관 재임 중이던 1987년 6월, 고건 내무부장관과 함께 6월 항쟁 관련 6·10 규탄대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행 시 엄정 처단하겠다는 합동 담화를 발표했다.[3] 또한 지강헌 탈주 사건 당시 교도관의 탈주 조력 의혹이 제기되자 이에 대한 책임으로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4]
1995년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경북 김천시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6]
공직 퇴임 후에는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1994년 개인 사재 1억원을 출연하여 한국범죄방지재단을 설립하고 20년간 이사장으로 활동했으며,[13] 이 공로로 2015년 법조언론인클럽 공로상을 수상했다.[14] 삼중 스님과 함께 재일 한국인 권희로의 일본 내 가석방을 위해 노력하여 석방에 기여했고,[9]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정본(定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출간을 이끌었다.[12] 2017년에는 무료법률상담센터 '모두의 변호사'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15]
2012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정기승 전 대법관 등 법조인 244명과 함께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참여정부 시절 도입된 로스쿨 제도가 서민의 법조계 진입을 막는 실패작이라며 당시 제도 입안에 관여한 문재인 후보를 비판했다.[16][17]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 이후에는 "자신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더라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법치주의와 판결 수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8] 2009년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11]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37년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대구사범학교를 1회로 졸업한 교사 죽포(竹圃) 정윤진이었고, 어머니는 하숙과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도우며 자녀들을 키웠다.[1]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김천초등학교와 김천중학교(20회)를 졸업했다.[1] 이후 김천고등학교에 다니다 경북고등학교로 옮겨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1]서울대학교 법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 양과에 모두 합격하였다.[1] 당시 국어 교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합격 소식을 듣고 교실 칠판에 자기 아들을 낮춰 부르는 단어인 '돈아(豚兒)’를 크게 쓰고 학생들이 뜻을 묻자 "돈아가 고시에 합격했다"고 말했다고 한다.[1]
정해창은 아버지로부터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으며, 사무실에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뜻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글귀가 담긴 액자를 걸어두었다.[5] 그는 아버지에 대해 "평생 꿀벌처럼 사셨죠. 그 삶을 이해하는 데 30년 넘게 걸렸습니다."라고 회고했다.[5] 동생인 정해왕(전 금융경제연구원장)은 집안 분위기에 대해 "위에서 잘하니까 나도 잘 안 하면 안 되는 거죠. 그게 돌아보면 집안의 전통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으며, 또 다른 동생 정해방(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어머니가 하숙, 삯바느질, 미군 빨래 등으로 자녀 학비를 마련했던 것을 기억하며 "자식들 학비 부담이 매우 컸어요. 어머니가 아랫방에서 하숙을 치고 삯바느질, 미군 빨래까지 안 한 일이 없었죠"라고 말했다.[5]
2. 2. 검사 임용과 주요 경력
1962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대전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법무부 등에서 검사로 활동했다. 중앙일보는 정해창이 고시 2년 후배인 김기춘과 함께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보도했다.[2]1987년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8일, 고건 당시 내무부장관과 함께 6월 항쟁의 주요 사건 중 하나인 6·10 규탄대회에 대해 "국정 분란과 공권력의 무력화까지 초래하여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생활을 희생시키려는 저의가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며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강행 시 엄정히 처단하겠다는 합동담화를 발표했다.[3] 이는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 입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지강헌 탈주 사건 당시 교도관이 탈주범을 도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사회적 파장에 책임을 지고 이춘구 내무부장관과 함께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4]
비서실장 퇴임 후에는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1994년 12월, 개인 사재 1억원을 출연하고 지인들의 찬조를 받아 한국범죄방지재단을 설립하여 20년간 이사장직을 맡았다.[13]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사단법인 법조언론인클럽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다.[14] 또한, 1999년에는 삼중 스님과 함께 권희로의 일본 내 가석방을 위해 노력하여 석방에 기여했으며,[9] 2017년에는 무료법률상담센터 '모두의 변호사'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15]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정본(定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출간에도 힘썼다.[12]
정치적으로는 1995년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김천시 지역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 임인배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6] 2007년 4·25 대전 서구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국민중심당 심대평 후보 선거사무소를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10] 2012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정기승 전 대법관, 정구영·김기수 전 검찰총장 등 법조인 244명과 함께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은 참여정부 시절 도입된 로스쿨 제도가 서민의 법조계 진입을 막는 실패작이라 비판하며, 당시 제도 입안에 참여했던 문재인 후보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16][17]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서로 의견이 다를 수는 있지만 서로가 약속한 헌법과 법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법치`의 의미"라며 판결 수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8]
1999년에는 대검찰청 발행 `검찰가족`과의 대담에서 검찰의 과중한 업무 부담과 정치적 중립성 문제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7] 2009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창회로부터 윤영철 전 헌법재판소장 등과 함께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선정되었다.[11]
2. 3. 법무부 장관 및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노태우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기 이전인 1987년,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중앙일보는 정해창이 고시 2년 후배인 김기춘과 함께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2]법무부 장관 재임 중이던 1987년 6월 8일, 고건 당시 내무부장관과 함께 합동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그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려던 6·10 규탄대회에 대해, 이것이 단순히 박종철 사건 규탄이나 헌법 문제 제기를 넘어 "국정 분란과 공권력의 무력화까지 초래하여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생활을 희생시키려는 저의가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며 우려를 표했다. 또한, 이 대회를 명백한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중지를 촉구하며, 만약 강행될 경우 관련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3] 이는 6월 항쟁 당시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려는 정부의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교도소에서 탈주했다가 검거된 손동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강헌 등 탈주범들이 호송 버스 탑승 전 교도관으로부터 수갑 열쇠를 건네받거나 쇠꼬챙이 등을 소지했음에도 제대로 된 검색 없이 버스에 올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교도관이 탈주범을 도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정해창은 이춘구 내무부장관과 함께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4]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 4. 정치 입문과 낙선
김천중학교 동창회장을 맡고 있던 1995년,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경북 김천시 지역구에 출마하였다. 당시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 후보로 나선 검찰직 7급 공무원 출신의 임인배에게 패배하여 낙선하였다.[6]2. 5. 사회 활동
법무부 장관 재직 중이던 1987년 6월 8일, 고건 당시 내무부장관과 함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규탄 및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본부'의 6·10 규탄대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행 시 엄정 대처하겠다는 합동 담화를 발표했다.[3] 이는 당시 전두환 정부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려 했던 강경한 입장을 보여준다.같은 해 교도소에서 탈주한 지강헌 일당 검거 후 조사 과정에서 교도관이 탈주범에게 수갑 열쇠를 건네는 등 탈주를 도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이춘구 내무부장관과 함께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4]
1994년 12월, 개인 사재 1억원을 출연하고 지인들의 찬조를 받아 한국범죄방지재단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이는 노태우 대통령 비서실장 퇴임 후 참석한 유엔 관련 국제회의에서 한국 지부 설립 요청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20년간 재단을 이끌며 민간 차원의 범죄 예방 활동에 힘썼고, 2014년 11월 후배인 김경한 전 법무부 장관에게 이사장직을 물려주었다.[13]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1월, 사단법인 법조언론인클럽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다.[14]
1999년 1월, 대검찰청 발행 '검찰가족'과의 대담에서 검찰의 과중한 업무 부담과 정치적 사건 개입 경향을 지적하며, 사회 각 분야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7] 같은 해 9월에는 재일 한국인 권희로의 일본 내 가석방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의 석방이 확정되자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 이를 계기로 한일 관계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9]
2007년 4·25 대전 서구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국민중심당 심대평 후보를 찾아 격려하며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10] 2009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창회로부터 김증한 전 학장, 윤영철 전 헌법재판소장과 함께 '제15회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선정되었다.[11]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다산 정약용의 저작을 집대성한 《정본(定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출간을 이끌었다. 2013년 인터뷰에서는 다산의 애민정신을 강조하며, 해당 전서가 다산 연구 활성화에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12]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12년 12월 16일에는 정기승 전 대법관 등 다른 법조인 244명과 함께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은 참여정부 시절 도입된 로스쿨 제도가 서민의 법조계 진입을 막는다며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후보를 비판했다.[16][17] 이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자, "자신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더라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 법치의 의미"라며 판결 수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8]
2017년에는 시민단체 바른사회운동연합이 출범시킨 무료법률상담센터 '모두의 변호사'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재능기부를 통한 법률 서비스 지원 활동에도 참여했다.[15]
2. 6. 박근혜 지지 선언과 탄핵 이후
2012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2월 16일, 정기승 전 대법관, 정구영·김기수 전 검찰총장 등 법조인 244명과 함께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16][17] 이들은 "박근혜 후보의 진정성과 가능성을 보다 높이 평가한다"고 밝히며, 문재인 후보에 대해서는 "참여정부 때 만들어진 로스쿨 제도는 서민들의 법조계 진입을 차단하는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패작인데 당시 로스쿨 제도 입안에 앞장섰던 이가 바로 문재인 후보"라며 "공정사회와 기회균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망각한 처사"라고 비판했다.[16][17]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이 있은 직후, 정해창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서로 의견이 다를 수는 있지만 서로가 약속한 헌법과 법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법치`의 의미"라며 "자신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더라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판결에 담긴 시대정신을 설명했다.[18]
3. 학력
4. 경력
- 1962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 1973년 법무부 검찰과 과장
- 1976년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 1979년 부산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 1981년까지 서울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 1981년 법무부 검찰국 국장
- 1981년 12월 17일 ~ 1982년 6월 17일: 제24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 1982년 6월 18일 ~ 1985년 2월 27일: 제26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
- 1985년 2월 ~ 1986년: 제10대 법무연수원 원장
- 1986년 4월 29일 ~ 1987년 5월 26일: 대검찰청 차장검사
- 1987년 5월 26일 ~ 1988년 2월 24일: 제36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
- 1987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원장
- 1988년 2월 25일 ~ 1988년 12월 4일: 제37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
- 1990년 ~ 1993년: 청와대 비서실 실장 (노태우 정부)
- 1994년: 대산법률사무소 변호사
- 1994년 ~ 2014년 11월 4일: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21]
- 1994년: 김천중학교 총동창회(송설동창회) 회장
- 1998년: 평화통일복지기금재단 감사
- 1998년 ~ :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장
- 2002년 ~ 2015년: 좋은합동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 대구·경북 출신 전직 장관급 인사 모임 ‘대경회(大慶會)’ 제2대 회장[22]
- 2005년 1월: 서울대학교 법대 동창회 회장[23]
- 2006년 5월 10일: 김천 중·고교 재단인 송설당(松雪堂) 교육재단 제5대 이사장[24]
- 대경육영재단 이사장[25]
- SBS 사외이사[26]
- 2007년 2월 9일: SBS 미디어홀딩스 이사회 사외이사, 이사회 의장[27]
- 2008년 8월 21일: 대경학숙추진위원회 공동 위원장[28]
- 2012년 7월 23일 ~ 7월 29일: 한국·중국 수교 20주년 기념 중국 외교부 및 중국인민외교학회 초청 방중단 참여[29]
- 2015년 ~ 2018년: 법률사무소 신&박 고문변호사
- 에스앤엘 파트너스 고문변호사
- 2017년 3월 24일: 무료법률상담센터 모두의 변호사 운영위원회 위원장[30][31]
-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고문
- 재단법인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 센터 이사장
5. 수상
연도 | 수상 내역 |
---|---|
1973년 | 홍조근정훈장 |
1987년 | 황조근정훈장 |
1990년 | 청조근정훈장 |
2007년 | 제15회 자랑스런 서울대 법대인[32] |
2014년 | 사단법인 법조언론인클럽 올해의 법조인 공로상[33] |
2015년 | 제1회 천고법치문화상[34] |
참조
[1]
뉴스
https://news.naver.c[...]
[2]
뉴스
http://www.hani.co.k[...]
중앙일보
1973-04-03
[3]
뉴스
http://www.mediatoda[...]
[4]
뉴스
http://ch.yes24.com/[...]
동아일보
1988-10-15
[5]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news.hankyung[...]
2018-12-24
[6]
뉴스
https://news.naver.c[...]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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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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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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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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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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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된 사본
http://news.hankyung[...]
20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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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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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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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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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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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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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verit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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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http://www.munhwa.co[...]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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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eongnam.[...]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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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된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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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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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뉴스
http://news.mk.co.kr[...]
[27]
뉴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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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
[29]
뉴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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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http://theleader.mt.[...]
[31]
뉴스
http://news1.kr/phot[...]
[32]
뉴스
http://news.khan.co.[...]
[33]
뉴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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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http://news1.kr/a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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