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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가쓰라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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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가쓰라 내각은 1901년 6월 2일부터 1906년 1월 7일까지 1681일 동안 가쓰라 다로가 이끌었던 일본의 내각이다. 이 시기 주요 정책으로는 1902년 영국과의 영일 동맹 체결, 러일 전쟁 발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및 통감부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1905년의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등이 있다. 특히 러일 전쟁 승리 이후, 포츠머스 조약 체결에 대한 불만으로 히비야 방화 사건이 발생했고, 제2차 한일 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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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가쓰라 내각
개요
내각명제1차 가쓰라 내각
일본어 명칭第1次桂内閣 (다이이치지 가쓰라 나이카쿠)
대수11대
총리가쓰라 다로
전직육군대장
성립1901년 6월 2일
해산1906년 1월 7일
정당관료 내각, 제국당
선거제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제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제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해산 정보1902년 (메이지 35년) 8월 10일 (임기 만료)
1902년 (메이지 35년) 12월 28일
1903년 (메이지 36년) 12월 11일
관련 정보내각 명부 (일본 총리대신 관저)
가쓰라 다로
가쓰라 다로
정부 정보
국가 원수메이지
정부 수반가쓰라 다로
정부 수반 직함내각총리대신
전임 내각제4차 이토 내각
후임 내각제1차 사이온지 내각
존속 기간1901년 – 1906년
깃발 테두리true
깃발Flag of Japan.svg
관할 구역일본
내각 번호11대
의회 정보
선거1902년 총선거
1903년 총선거
1904년 총선거
의회 임기1898년 8월 – 1902년
1902년 – 1903년
1903년 – 1904년
1904년 – 1908년
기타 정보
총 의석수알 수 없음
이전 구성원 수알 수 없음
정치 정당알 수 없음
의회 상황알 수 없음
야당 내각알 수 없음
야당알 수 없음
야당 대표알 수 없음
마지막 선거알 수 없음
예산알 수 없음
조언 및 동의 1알 수 없음
진입 형성알 수 없음
나가는 형성알 수 없음
내각 유형알 수 없음
구성원 수알 수 없음

2. 재직 기간

1901년 6월 2일부터 1906년 1월 7일까지 총 1681일간 재직하였다.[1]

3. 내각 구성

1901년 6월 2일, 육군 대장 출신인 가쓰라 다로를 총리대신으로 하는 제1차 가쓰라 내각이 발족했다. 내각은 군부귀족원 세력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다.

발족 당시 국무대신 9명 중 귀족원 출신이 5명(소네 아라스케, 기요우라 게이고, 기쿠치 다이로쿠, 히라타 도스케, 요시카와 아키마사), 군부 출신이 3명(가쓰라 다로, 고다마 겐타로, 야마모토 곤베), 관료 출신이 1명(우쓰미 타다카쓰)이었다.[1] 내각서기관장에는 귀족원 출신 시바타 이에카도가, 법제국 장관에는 관료 출신 오쿠다 요시토가 임명되었다.[14]

3. 1. 국무대신

1901년 (메이지 34년) 6월 2일 임명. 재직 일수 1681일.

직책성명출신 등특명 사항 등비고
내각총리대신11가쓰라 다로--육군대장
자작
내무, 문부대신 겸임
외무대신17소네 아라스케
귀족원
무소속
임시 겸임
(대장 대신 겸임)
1901년 9월 21일 면
18고무라 주타로
외무성
남작
첫 입각
1901년 9월 21일 임명
내무대신16우쓰미 타다카쓰
내무성
남작
첫 입각
1903년 7월 15일 면
17고다마 겐타로
육군중장
남작
대만 총독1903년 7월 15일 임명
1903년 10월 12일 면
18가쓰라 다로--육군 대장
자작
내각총리대신 겸임1903년 10월 12일 겸임
1904년 2월 20일 면직
19요시카와 아키마사
귀족원
무소속
자작
1904년 2월 20일 임명
1905년 9월 16일 면
20기요우라 게이고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농상무대신 겸임1905년 9월 16일 임명
대장대신10소네 아라스케--귀족원
무소속
외무대신 임시 겸임
체신대신 겸임
육군대신6고다마 겐타로--육군 중장
남작
대만 총독유임
1902년 3월 27일 면
7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 중장첫 입각
1902년 3월 27일 임명
해군대신5야마모토 곤베
해군중장
(해병 2기)
유임
사법대신11기요우라 게이고--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농상무대신 겸임1903년 9월 22일 면
12하타노 요시나오
사법성첫 입각
1903년 9월 22일 임명
문부대신16기쿠치 다이로쿠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남작
첫 입각
1903년 7월 17일 면
17고다마 겐타로--육군 중장
남작
내무대신 겸임
대만 총독
1903년 7월 17일 임명
1903년 9월 22일 면
18구보타 유즈루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첫 입각
1903년 9월 22일 임명
1905년 12월 14일 면
19가쓰라 다로--육군 대장
자작
내각총리대신 겸임1905년 12월 14일 임명
농상무대신18히라타 토스케
귀족원
무소속
(차화회)
남작
첫 입각
1903년 7월 17일 면
19기요우라 게이고--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사법대신 겸임1903년 7월 17일 임명
체신대신12요시카와 아키마사
귀족원
무소속
자작
1903년 7월 17일 면
13소네 아라스케--귀족원
무소속
대장대신 겸임1903년 7월 17일 임명
1903년 9월 22일 면
14오우라 가네타케
귀족원
무소속
첫 입각
1903년 9월 22일 임명


3. 2. 내각 서기관장·법제국 장관

1901년 (메이지 34년) 6월 2일 임명.

직책성명출신 등특명 사항 등비고
내각서기관장12시바타 이에카도
시바타 이에카도
귀족원
무소속
법제국 장관9오쿠다 요시토
오쿠다 요시토
농상무성내각 은급국장유임
1902년 9월 26일 면직
10이치키 기토쿠로
이치키 기토쿠로
귀족원
무소속
내각 은급국장1902년 9월 26일 임명


4. 주요 정책 및 사건

제4차 이토 내각번벌입헌정우회 내부의 갈등으로 붕괴한 후,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각 시도도 실패하면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계열로 평가받는 가쓰라 다로 전 육군대신에게 총리직이 넘어갔다. 당시 가쓰라는 원훈 세대의 다음 주자로 여겨졌으며, 야마가타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예상 속에서 '소(小) 야마가타 내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01년 6월 출범하였다. 출범 당시 입헌정우회와 헌정본당 등 주요 정당이 모두 야당으로 돌아서면서 의회 운영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가쓰라 내각의 최우선 과제는 의화단 운동 이후 첨예해진 러시아 제국과의 대립이었으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주요 정책 목표를 설정하였다.


  • 상공업 발달
  • 해군 확장
  • 영국과의 협정 체결
  • 한국의 보호국화


이러한 정책 목표 아래, 가쓰라 내각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여 1902년 1월 영일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는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나, 동시에 한반도 침략 정책을 본격화하는 발판이 되었다.

국내 정치에서는 재정 문제와 의회와의 관계가 주요 현안이었다. 1901년 말 재정 위기를 예산 재편성으로 극복하였고, 1902년 8월 제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에는 지세 증징 연장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가쓰라 내각은 증세분을 해군 확장 비용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제1당인 입헌정우회와 제2당인 헌정본당의 연대에 의한 반대로 갈등이 격화되었다. 결국 1902년 12월 28일, 가쓰라 내각은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대립 끝에 중의원 해산을 단행하였다.

해산 후 총선거에서도 정우회와 헌정본당의 우위가 예상되자, 가쓰라 수상은 정우회 총재인 이토 히로부미와의 직접 담판을 시도하였다. 1903년 1월, 가쓰라는 이토와 비밀리에 만나 지세 증징을 철회하는 대신 해군 확장 예산을 다른 방식으로 확보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제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선거 과정에서의 갈등과 정우회 내부의 반발 등으로 잠시 관계가 경색되기도 했으나, 결국 4월 말 이토 총재가 당 간부들에게 밀약 내용을 공개하고 해군 확장 예산안은 5월 30일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후 야마가타와 가쓰라는 이토를 추밀원 의장으로 추천하여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후임 정우회 총재로는 사이온지 긴모치가 취임했다. 이는 정우회를 통제하려는 의도였으나, 오히려 하라 다카시가 실권을 잡은 정우회는 더욱 안정적인 운영 기반을 갖추었다.

한편, 1903년 들어 러시아가 러청 만주 철병 협약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한반도에 군대를 증파하자 러일 간의 긴장은 크게 고조되었다. 일본은 만한 교환론에 입각한 외교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러시아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1903년 12월에는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봉답문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중의원이 해산되는 등 국내 정치적 혼란도 겪었다.

결국 1904년 2월, 러시아와의 외교적 해결 시도가 실패하면서 러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가쓰라 내각은 전쟁 수행을 위해 대한제국과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고, 전쟁 중 증세를 단행하는 등 국가 총력 체제를 구축하였다. 일본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전쟁 장기화로 인한 국력 소모와 국민 부담 증가로 강화 교섭을 서둘렀다. 이 과정에서 가쓰라는 정우회의 하라 다카시와 비밀 교섭을 통해 전후 정권 이양을 약속하며 국내 정치 안정을 도모하였다.

1905년 8월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배상금을 받지 못한 것 등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터져 나와 9월 히비야 방화 사건이 발생하는 등 큰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가쓰라 내각은 계엄령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한편, 러일 전쟁의 결과 확보된 한반도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바탕으로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체결을 강행하여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였다.

러일 전쟁 승리와 대한제국 보호국화라는 당초의 정책 목표는 달성하였지만,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불만과 사회 혼란, 그리고 입헌정우회와의 약속에 따라 가쓰라 내각은 1905년 12월 22일 총사퇴하고,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4. 1. 영일 동맹 체결 (1902)

가쓰라 내각의 주요 현안 중 하나는 의화단 운동 이후 더욱 명확해진 러시아 제국과의 대립이었다. 내각은 출범 당시 상공업 발달, 해군 확장, 한국의 보호국화와 더불어 영국과의 협정 체결을 주요 정책 목표로 설정했다.

마침 당시 영국은 전통적인 외교 정책이었던 영광스러운 고립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할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클로드 맥도널드 주일 영국 공사가 일본과의 연대를 제안했고, 가쓰라 내각은 이를 받아들여 1901년 8월 5일, 하야시 타다스 주영 공사에게 영국과의 동맹 교섭을 시작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동시에 가쓰라 내각은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관계 개선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이토 히로부미 원로가 9월 18일 외유를 떠나 러시아와의 협상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이는 영국과의 동맹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외교적 전략의 일환이었다. 10월 16일부터 하야시 공사와 영국 외무장관 랜스다운 후작 간의 공식적인 동맹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후 11월 28일, 이토 히로부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외무장관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와 만나 러일 협상의 여지를 내비치며 영국 측을 압박했다.

이러한 일본의 양면적인 외교 전략은 효과를 거두어 영국 측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결국 1901년 12월 7일, 일본의 원로 회의는 영국과의 동맹 체결을 최종 결정하였고,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영일 동맹 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이 동맹은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저지하려는 영국의 이해와, 한반도 및 만주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영일 동맹 체결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나, 동시에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침략 정책을 본격화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동맹 체결 이후, 일본은 러시아의 반응을 주시하며 외교적 상황을 관리했다. 1902년 4월 8일에는 러청 만주 철병 협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군의 만주 철수가 합의되었으나, 실제로는 일부만 이행되는 데 그쳤다. 같은 해 6월 14일에는 의화단 운동의 최종 처리와 관련된 북경의정서에도 조인하였다.

4. 2. 러일 전쟁 (1904-1905)

의화단 사건 이후 표면화된 러시아 제국과의 대립은 제1차 가쓰라 내각의 중요한 외교 과제였다. 1903년 러시아가 러청 만주 철병 협약을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자, 가쓰라 내각은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러시아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실패했다. 국내적으로도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제국의회가 해산되는 등( 봉답문 사건 ) 정치적 혼란이 있었다.

결국 1904년 2월, 러시아와의 협상이 최종 결렬되면서 일본은 전쟁을 결정했고, 2월 8일 일본군의 뤼순 공격으로 러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쓰라 내각은 전쟁 수행을 위해 2월 23일 대한제국과 한일 의정서 체결을 강행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군사 활동 기반을 확보했다.

전쟁은 일본군의 연이은 승리로 이어졌으나, 장기화되면서 일본 사회에 큰 부담을 안겼다. 미국의 중재로 1905년 8월 28일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배상금 문제 등 조약 내용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커져 히비야 방화 사건과 같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가쓰라 내각은 계엄령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나 정치적 부담은 가중되었다.

러일 전쟁 승리의 결과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여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전쟁의 목표는 달성했지만,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불만과 사회 혼란 등의 책임을 지고, 입헌정우회와의 사전 약속에 따라 가쓰라 내각은 1905년 12월 22일 총사퇴하였다.

4. 2. 1. 만한 교환론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 제국과의 대립은 제1차 가쓰라 내각의 주요 현안이었다. 가쓰라 내각은 출범 초기 내건 정강 중 하나로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영국과의 동맹(영일 동맹)을 추진하는 동시에,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가능성도 모색했다. 1901년 9월, 원로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를 방문하여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외무장관과 회담하며 러일 협상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러시아 정책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이권을 인정받는 이른바 '만한 교환론'으로 구체화되었다. 1903년 4월 21일, 교토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별장에서 가쓰라 수상, 고무라 외상, 그리고 필두 원로 자격의 이토 히로부미가 회동하여 이 대러시아 정책, 즉 만한 교환론을 공식적으로 논의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러청 만주 철병 협약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군대를 증파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1903년 8월, 가쓰라 내각이 러시아에 러일 협정안을 제시하며 외교 교섭을 시작했으나, 러시아는 시간을 끌며 군비 증강에 힘썼다. 결국 1904년 2월 3일, 양국 간의 협상은 최종 결렬되었다.

만한 교환론을 통한 외교적 해결 시도는 러시아의 거부로 무산되었고, 이는 결국 러일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4. 2. 2. 봉답문 사건

1903년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제국은 러청 만주 철병 협약을 지키지 않고 한반도를 세력권에 넣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군대를 증강하기 시작했다. 이에 가쓰라 내각은 8월 12일 러일 협정안을 제시하며 외교 교섭에 나섰지만, 러시아는 시간을 끌며 군비 확충에 주력했다.

이처럼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고 교섭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12월 5일 제19회 제국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12월 11일, 제국의회에서 정부의 대러시아 외교 정책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봉답문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가쓰라 내각은 중의원 해산이라는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중의원이 해산되어 의회가 공백 상태가 된 상황에서 러일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904년 2월 3일, 러시아와의 협정 교섭은 최종 결렬되었고,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하게 된다.

4. 2. 3. 전쟁 승리 및 포츠머스 조약 체결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은 뤼순 공격을 시작으로 러일 전쟁을 개전하였고, 10일에는 러시아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가쓰라 내각은 전쟁 수행을 위해 한반도에서의 보급선 확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2월 23일 대한제국과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황해 해전(8월 10일)에서 승리하고 랴오양을 점령(9월 4일)하는 등 우세를 보였으나, 러시아가 유럽의 발트 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면서 전쟁의 장기화가 우려되었다.

1905년 1월 1일, 일본군은 뤼순을 함락시켰고, 3월 10일에는 봉천 회전에서 승리하며 육상에서의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일본 국내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었고, 발트 함대와의 해전을 앞두고 있어 강화 교섭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05년 5월 28일 동해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러시아 발트 함대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전세는 완전히 일본 측으로 기울었고, 미국의 중재 하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8월 10일부터 미국 포츠머스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으며, 8월 28일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 중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못한 점 등이 일본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큰 불만을 야기했다. 결국 9월 5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강화 조약에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는 관공서 습격과 방화로 이어지는 히비야 방화 사건으로 격화되었다. 가쓰라 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러일 전쟁 승리의 결과로 일본은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전쟁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던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 확보를 추진하였다.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체결을 강행하여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츠머스 조약 내용에 대한 국민적 불만과 히비야 방화 사건 등의 사회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한 입헌정우회와의 사전 약속에 따라 가쓰라 내각은 1905년 12월 22일 총사퇴하였다. 후임 총리로는 사이온지 긴모치가 추천되었다.

4. 2. 4. 히비야 방화 사건

1905년 8월 28일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배상금 등 강화 조건이 일본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큰 불만을 샀다. 이에 9월 5일, 조약에 반대하는 민중 집회가 격화되면서 도쿄히비야 공원을 중심으로 히비야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다. 시위대는 내무대신 관저, 파출소 등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으며, 가쓰라 내각은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진압하였다. 한편, 입헌정우회사이온지 긴모치 총재와 하라 다카시 등의 주도로 당내를 통제하여 이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4. 3. 제2차 한일 협약 (1905)

가쓰라 내각은 출범 초기부터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것을 주요 정책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러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에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보급선을 확보하기 위해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받은 가쓰라 내각은 대한제국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에 나섰다. 결국 1905년 11월 17일, 가쓰라 내각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2차 한일 협약, 또는 을사늑약으로 불리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 및 내정에 직접 간섭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을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키는 것이었으며, 대한제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였다. 가쓰라 내각은 이를 통해 러일 전쟁의 목표 중 하나였던 한반도의 세력권화를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후 약 한 달 뒤인 1905년 12월 22일, 가쓰라 내각은 총사퇴하고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5. 평가

(내용 없음)

참조

[1] 웹사이트 First Katsura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1-06-02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1-09-21
[4] 문서 1902年(明治35年)2月27日叙任。 1902-02-27
[5] 간행물 『官報』第5593号「叙任及辞令」 1902-02-28
[6]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3-07-15
[7]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3-10-12
[8]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4-02-20
[9]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5-09-16
[10]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2-03-27
[11]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3-09-22
[1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3-07-17
[1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5-12-14
[14] 간행물 『官報』第5373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1-06-03
[15] 문서 1903年(明治36年)7月15日勅選。 1903-07-15
[16] 간행물 『官報』第6011号 1903-07-16
[17] 간행물 『官報』第5771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0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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