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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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2010년 7월 11일에 실시되었으며, 2004년 선거로 당선된 의원들의 임기가 만료되어 치러졌다. 민주당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와 소비세 증세, 재정 재건,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등이 주요 쟁점이었다. 선거 결과, 민주당은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소수 여당으로 전락했고, 자유민주당은 의석을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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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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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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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정보 | |
국가 | 일본 |
선거 유형 | 의회 선거 |
이전 선거 | 2007년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이전 선거 년도 | 2007 |
다음 선거 | 2013년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다음 선거 년도 | 2013 |
선출 의석 | 참의원의 242석 중 121석 |
과반수 의석 | 122 |
선거 날짜 | 2010년 7월 11일 |
주요 정당 및 지도자 | |
제1당 지도자 | 간 나오토 |
제1당 | 민주당 (일본, 1998년) |
제1당 이전 선거 의석 | 109석, 39.5% |
제1당 선거 후 의석 | 106 |
제1당 의석 변동 | 3 |
제1당 득표수 | 18,450,139 |
제1당 득표율 | 31.6% |
제1당 변동율 | 7.9pp |
제2당 지도자 | 다니가키 사다카즈 |
제2당 | 자유민주당 (일본) |
제2당 이전 선거 의석 | 83석, 28.1% |
제2당 선거 후 의석 | 84 |
제2당 의석 변동 | 1 |
제2당 득표수 | 14,071,671 |
제2당 득표율 | 24.1% |
제2당 변동율 | 4.0pp |
제3당 지도자 | 야마구치 나쓰오 |
제3당 | 공명당 |
제3당 이전 선거 의석 | 20석, 13.2% |
제3당 선거 후 의석 | 19 |
제3당 의석 변동 | 1 |
제3당 득표수 | 7,639,433 |
제3당 득표율 | 13.1% |
제3당 변동율 | 0.1pp |
제4당 지도자 | 와타나베 요시미 |
제4당 | 모두의 당 |
제4당 이전 선거 의석 | – |
제4당 선거 후 의석 | 11 |
제4당 의석 변동 | 신설 |
제4당 득표수 | 7,943,649 |
제4당 득표율 | 13.6% |
제4당 변동율 | 신설 |
제5당 지도자 | 시이 가즈오 |
제5당 | 일본공산당 |
제5당 이전 선거 의석 | 7석, 7.5% |
제5당 선거 후 의석 | 6 |
제5당 의석 변동 | 1 |
제5당 득표수 | 3,563,556 |
제5당 득표율 | 6.1% |
제5당 변동율 | 1.4pp |
제6당 지도자 | 후쿠시마 미즈호 |
제6당 | 사회민주당 (일본) |
제6당 이전 선거 의석 | 5석, 4.5% |
제6당 선거 후 의석 | 4 |
제6당 의석 변동 | 1 |
제6당 득표수 | 2,242,735 |
제6당 득표율 | 3.8% |
제6당 변동율 | 0.7pp |
제7당 지도자 | 히라누마 다케오 |
제7당 | 일어서라 일본 |
제7당 이전 선거 의석 | – |
제7당 선거 후 의석 | 3 |
제7당 의석 변동 | 신설 |
제7당 득표수 | 1,232,207 |
제7당 득표율 | 2.1% |
제7당 변동율 | 신설 |
제8당 지도자 | 가메이 시즈카 |
제8당 | 국민신당 |
제8당 이전 선거 의석 | 4석, 2.2% |
제8당 선거 후 의석 | 3 |
제8당 의석 변동 | 3 |
제8당 득표수 | 1,000,036 |
제8당 득표율 | 1.7% |
제8당 변동율 | 0.5pp |
제9당 지도자 | 마스조에 요이치 |
제9당 | 신당개혁 |
제9당 이전 선거 의석 | – |
제9당 선거 후 의석 | 2 |
제9당 의석 변동 | 신설 |
제9당 득표수 | 1,172,395 |
제9당 득표율 | 2.0% |
제9당 변동율 | 신설 |
참의원 의장 | |
선거 전 의장 | 에다 사쓰키 |
선거 전 의장 소속 정당 | 민주당 (일본, 1998년) |
선거 후 의장 | 니시오카 다케오 |
선거 후 의장 소속 정당 | 민주당 (일본, 1998년)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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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거 배경
2008년 6월 11일, 야당이 장악한 참의원은 후쿠다 야스오 당시 총리에 대해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일본국 헌법 하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2]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G8 정상회의를 앞두고 있던 후쿠다 총리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결국 후쿠다 총리는 사임했고, 후임 총재 선거에서 아소 다로가 승리했다.[5]
2009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며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6] 일본사회당, 국민신당과 연립하여 두 번째 비자민당 정부를 구성하였다.[7] 아소 다로는 자민당 총재직에서 사퇴했고,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후임 총재가 되었다.[8]
2010년 참의원 선거는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자민당에서는 마스조에 요이치, 요사노 가오루 등 유력 정치인들이 탈당하여 신당을 창당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9] 한편, 민주당 역시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와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의 자금 스캔들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한 상황이었다.[9] 간 나오토가 하토야마 유키오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소비세 인상을 제안하면서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9]
2010년 6월 16일, 제174회 국회(임시국회)가 폐회됨에 따라 같은 날 열린 임시 각의에서 6월 24일 선거 공시, 7월 11일 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번 선거는 2004년 제20회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의 임기 만료에 따라 치러지는 선거였다. 민주당에게는 정권 교체 이후 첫 대형 국정 선거였으며, 자민당에게는 야당으로서 처음 치르는 대형 국정 선거였다. 또한, 헤이세이 시대에 태어난 유권자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선거이기도 했다.
2. 1. 정권 교체와 하토야마 내각 출범
2009년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자유민주당(LDP) 창당 이후 처음으로 하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기간 동안 두 번째 비자민당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상원 동맹인 일본사회당과 국민신당과 함께).[7] 선거 이후 아소 다로는 자유민주당 총재직에서 사퇴했다.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2009년 9월 28일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8]전년(2009년, 헤이세이 21년) 8월 30일에 시행된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면서 정권 교체가 실현되었다. 같은 해 9월 16일에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발족했다.
하토야마 내각은 초기에 70%를 넘는 높은 내각 지지율을 얻으며 출범하여, 발족 직후부터 국제연합(UN)에서의 일반 연설에서 온실가스 등 이산화탄소(CO₂) 감축 목표 상향(1990년, 헤이세이 2년 대비 25% 감축 목표), 자위대 인도양 파병 철수, 공공사업 재검토(소위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 등의 정책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1월에는 행정 낭비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 사업 선별이 실시되었고, 이 역시 여론으로부터 대체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민주당 매니페스토 실행을 위한 아동 수당법이나 고교 무상화법 등의 새로운 세출과 불황에 의한 세수 감소로 인해, 헤이세이 22년도 예산에서는 과거 최대인 44조 엔의 국채를 발행하게 되었다.
한편,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의 정치 자금 수지 보고서 허위 기재 문제가 다시 불거졌고,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자신에게도 하토야마 야스코 어머니로부터의 다액의 생전 증여에 대해 상속세를 납부하지 않았던 사실이 발각되었다. 자민당 정권 시대부터 이어지는 "정치와 돈"을 둘러싼 불신에 더해, 하토야마보다 오자와에게 실질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이중 권력 구조"와 선거 지원과 교환으로 예산 배분을 하는 오자와의 정치 수법 등이 당 안팎에서 문제시되면서 비판이 점차 강해지고 내각 지지율도 하락세로 돌아섰지만, 예산이 연도 내에 성립된 것도 있어 이 단계에서는 정권 운영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이와 동시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 미군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였다. 이전지를 "최소한 오키나와현 외가 기대된다"고 하며 총선거를 치른 하토야마는 현지 및 미국이 합의했던 오키나와현 나고시 베노코 연안부(캠프 슈와브)로 이전하는 현행 안을 일단 백지로 돌리고, 오키나와현 외, 일본 국외 이전의 길을 찾고 있었다. 후텐마 문제는 정권 교체 초기에는 반드시 중요시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문제가 하토야마 정권을 몰아넣게 된다.
2. 2.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와 내각 지지율 하락
2009년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면서 정권 교체가 실현되었다. 같은 해 9월 16일,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발족했다.하토야마 내각은 초기에는 70%를 넘는 지지율을 얻으며 출범하여, 국제연합에서의 연설에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 자위대 인도양 파병 철수, 공공사업 재검토 등의 정책 전환을 추진했다. 그러나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의 정치 자금 문제, 하토야마 총리 자신의 상속세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정치와 돈"을 둘러싼 불신이 커졌다. 또한 오자와에게 실질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이중 권력 구조"와 그의 정치 수법에 대한 비판이 강해지면서 내각 지지율은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와 동시에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전지를 "최소한 오키나와현 외"로 하겠다고 공약했지만, 결국 오키나와현 나고시 辺野古 연안부(캠프 슈와브)로 이전하는 현행 안으로 되돌아갔다. 이는 중대한 약속 위반으로 비판받았고, 내각 지지율은 20%를 밑돌게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연립을 해소하고 야당으로 돌아갔다. 미야자키현에서 발생한 구제역 유행에 대한 정부의 초기 대응 지연도 비판을 받았다. 6월 2일, 하토야마는 민주당 대표 및 내각총리대신 직 사퇴를 표명했고,[15][16] 오자와도 함께 사퇴했다.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간 나오토가 승리하여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를 통해 제94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고, 6월 8일 간 내각을 조각했다. 국민신당 대표 카메이 시즈카는 우정개혁 법안 성립 연기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나,[17] 정권은 이탈하지 않았다.[18]
간 내각 출범 초기 지지율은 60%대로, 하토야마 내각의 지지율에서 V자 반등을 이루었다. 그러나 간 총리가 소비세 증세를 언급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했고,[19] 선거 직전에는 40%대로 떨어졌다.
2. 3. 간 나오토 내각 출범과 소비세 증세 논란
2009년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자유민주당(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하원에서 과반수를 잃었다.[6] 이후 일본사회당, 국민신당과 연립하여 두 번째 비자민당 정부를 구성하였다.[7] 선거 이후 아소 다로 총재는 사퇴하고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2009년 9월 28일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8]2010년 참의원 선거는 자민당의 몰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마스조에 요이치, 요사노 가오루 등 자민당 내 인기 의원들이 선거 전에 탈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와 오자와 이치로 사무총장을 둘러싼 자금 스캔들로 인해 민주당의 인기는 타격을 입었고, 두 사람은 2010년 6월 2일에 사퇴했다.[9] 간 나오토가 하토야마의 사임 후 총리가 되었고, 일본의 공공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소비세 인상을 제안했다.[9]
2010년에 접어들면서 후텐마 문제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전지에 대해 여러 차례 변경 끝에 하토야마 정권은 안보상의 제약으로 현(縣)외 이전을 단념했다.[13] 결국 현행안인 캠프 슈와브(キャンプ・シュワブ) 연안 부근으로 거의 되돌아가는 형태로 다시 미일 합의를 맺었고, 하토야마는 공동성명 발표 자리에서 사과했지만, 이 중대한 약속 위반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내각 지지율이 20%를 밑도는 등, 정권 출범 후 가장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민주당·국민신당·사회민주당 연립정권에서 이전지를 현행안으로 되돌리는 각의에서 서명을 거부한 후쿠시마 미즈호 사민당 당수가 소비자·저출산 담당 대신에서 파면당하자, 사민당은 8개월 만에 연립을 해소하고 야당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여당이 과반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의석수가 3당(민사국련립정권) 54석 이상에서 2당(민국련립정권) 56석 이상으로 늘어나 유지가 어려워졌다. 더욱 압박을 가한 것은 미야자키현에서 발생한 구제역 유행에 대한 정부의 초기 대응 지연과 미야자키현에 대한 책임 전가였다.
6월 2일 하토야마는 민주당 양원의원총회에서 민주당 대표 및 내각총리대신 직을 사퇴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했고,[15][16] 오자와도 함께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4일에 민주당 대표 선거가 실시되어 간 나오토가 승리했다. 같은 날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 의해 제94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어, 6월 8일 간 내각을 조각하고, 천황의 인증식을 거쳐 정식으로 취임했다. 국민신당 대표·카메이 시즈카우정개혁·금융 담당 장관은 이번 국회에서 우정개혁 법안의 성립이 폐기, 연기된 책임을 지고 조각 직후 사임했다.[17] 그러나 정권은 이탈하지 않았다.[18] 후임에는 동당의 지미 쇼자부로 간사장이 취임했다.
간 내각 출범 초기 지지율은 대체로 60%대로, 말기에는 20% 전후까지 떨어졌던 하토야마 내각의 지지율에서 V자 반등을 이루었고, 이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 채 선거에 돌입하기 위해, 민주당은 야당과의 당수 토론도 예산위원회도 하지 않고 국회를 폐회했다. 이대로 민주당이 완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간 총리가 소비세 증세에 언급하고, 또 그 발언이 여러 차례 바뀐 것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했고,[19] 선거 직전에는 40%대로 떨어졌다.
참의원 선거 임기 만료 직전에 총리가 교체되었기 때문에 선거관리내각의 성격을 보였지만, 내각 출범 34일 만에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투표일에 들어간 것은 역대 최단 기록이다.
2. 4. 자민당 분열과 신당 난립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여 야당으로 전락한 자민당에서는 현직 국회의원 14명과 전직 국회의원 11명 등 총 25명이 탈당했다.[9]이들 중 일부는 이번 참의원 선거를 겨냥하여 신당을 창당했다.
- '''일본을 일으켜 세우자'''는 "우정민영화"에 반대하여 자민당을 탈당한 헤이누마 타케오가 대표가 되었고, 여기에 전 재무대신 요사노 가오루 등이 자민당을 탈당하여 합류, 5명의 국회의원을 확보하여 법률상의 정당 요건을 충족했다.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별도 발기인·응원단장으로 참여했다. 10석 이상 확보를 목표로 했다.[20]
- '''신당 개혁'''은 자민당 집행부 비판을 되풀이해 온 마스조에 요이치와 일부 의원이 자민당을 탈당, 중의원 선거 후 자민당과 연립 교섭단체를 구성했던 개혁 클럽에 합류하여 명칭 변경 형태로 발족했다. 자민당과의 연립 교섭단체를 해소하고 마스조에가 대표가 되었다. 이에 반발한 나카무라 키시로와 오에 야스히로가 개혁 클럽을 탈당했다. 비례대표에서 10석 확보를 목표로 했다.
이들 정당 외에도 국민신당, 모두의 당도 존재했고, 2010년 4월에 지방자치단체장을 중심으로 일본 혁신당이 창당되는 등, 보수 세력에서 많은 정당이 난립했다.
일련의 탈당 움직임에 대해 자민당 집행부, 특히 당 간사장 오시마 리소가 강하게 비판했다. 탈당한 현직 및 전직 국회의원 중, 당기위원회 심사를 거쳐 6명(마쓰다 이와오, 시미즈 코이치로, 요사노 가오루, 마스조에 요이치, 나카야마 시게아키[21], 미즈노 켄이치)에 대해 제명 처분이 내려졌다. 특히 요사노와 마스조에의 제명이 주목받았지만, 당기위원회에서는 정당득표로 당선된 비례대표 의원이라는 점과 신당 창당 주모자로서 다른 자민당 국회의원에게 신당 창당을 위해 자민당 탈당을 종용한 것을 반당 행위로 간주했다.
3. 선거 데이터
이번 선거는 2004년 7월 11일에 실시된 제20회 참의원의원 통상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의 임기 만료로 인해 실시되었다. 민주당은 정권 교체 이후 처음으로 여당으로서, 자민당은 야당으로서 첫 대형 국정 선거를 치렀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지역구와 비례대표 모두 57.92%로 집계되었다.
선거일 | 2010년 7월 11일 | |
---|---|---|
공시일 | 2010년 6월 24일 | |
투표율 | 지역구, 비례대표 모두 57.92% | |
개선 의석 수 | 총 121석 (지역구 73석, 비례대표 48석) | |
선거 제도 | ||
기타 |
3. 1. 개선 의석 수
의석비대상
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