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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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6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군 소속의 부대이다. 1945년 조선의용군을 모체로 창설되어, 중국 인민해방군 제166사단을 기반으로 재편성되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개성을 점령하고 서울 후방을 차단하려 했으며, 이후 낙동강 방어선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 이후에는 휴전선 일대에 배치되었으며, 현재는 제2군단 예하 부대로 개성특별시 개풍군에 주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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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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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소속 | [[파일:Flag of the Korean People's Army Ground Force (1993-2023).svg|20px]] 조선인민군 육군 |
종류 | 사단 |
역할 | 보병 |
창설 | 1949년 10월 |
해체 | (없음, 현재 유지) |
규모 | 불명 |
별칭 | 불명 |
표어 | 불명 |
위치 | 개성특별시 개풍군 해선리 답동 |
상위 부대 | 제2군단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방호산 |
현재 지휘관 | 불명 |
전투 및 훈련 | |
주요 전투 | 한국 전쟁 |
기타 | |
훈장 | 불명 |
기념일 | 불명 |
통칭 | 불명 |
영어 명칭 | NK 6th Division |
2. 역사
제6사단은 1948년 11월 중국 인민해방군 제4독립사단을 기반으로 창설되었으며, 대부분 한국인 장교와 병사로 구성되었다.[1] 1949년 7월, 이 부대는 해산되었고, 10,620명의 한국인 장병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동하여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제6사단의 모체는 1945년 11월 선양에서 창설된 조선 의용군 제1지대였다. 창설 당시 주요 간부는 지대장 김웅, 정치위원 방호산, 참모장 안빈, 정치부 주임 주연이었다. 1946년 2월, 동북 민주 연군 요녕 군구 이홍광 지대로 개칭되면서 '조선 의용군' 명칭은 사라졌다. 1948년 11월, 중국 인민 해방군의 정규 부대인 제166사가 되었다.[6] 1949년 7월 방호산의 인솔 하에 신의주로 들어가 제13, 14, 15연대, 포병연대로 편성되어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사단장에는 방호산 소장이, 참모장에는 노철룡이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제6사단은 개성 방면으로 침공하여 최초로 한강을 도하했다. 인천과 강화도를 점령하고 김포반도로 진출하여 서울 점령에 기여했다. 1950년 7월, 군산과 전주를 공략하고, 하동에서 진주까지 진격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8월 29일 북한으로부터 근위사단 칭호를 받았다.[7]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제6사단은 제25사단과 교전했다. 마산 점령을 시도했으나 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지리산을 거쳐 북한으로 철수했다. 이후 제2차 남진에 참여하여 원주 부근까지 진격했다. 1951년 동해안 방위 임무를 맡았고, 1954년 금성 남쪽 교암산 지구의 방어 진지를 중국군으로부터 인계받았다.
현재 제6사단은 제2군단 (북한) 예하 부대로 군사 분계선에 배치되어 있다. 한국 전쟁 발발 시 임진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2. 1. 초기
제6사단은 최초 조선의용군으로 이루어진 인민해방군 육군 소속 부대였다. 1945년 11월 조선의용군 제1지대로 창설되어, 1946년 2월 만주 지역 조선인 지도자 리홍광의 이름을 따 "동북 만주연군 리홍광 지대"로 개명되었다.[8] 1947년 동북 만주연군 요동 군구의 독립 제4사, 1948년 11월 제4군 예하 제166사가 되었다.[8]1949년 7월 25일에서 10월 사이, 방호산 소장은 제166사를 이끌고 신의주로 입국하였다.[8] 제166사를 기반으로 1949년 10월 조선인민군 800명을 보충받고 제13, 14, 15연대와 1개 포병연대로 재편성하여, 사리원에서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되었다.[8]
제166사단은 1948년 11월 중국 인민해방군 제4독립사단을 기반으로 창설되었으며, 대부분 한국인 장교와 병사로 구성된 한국인 부대였다.[1] 1949년 7월, 제166사단은 해산되었고, 10,620명의 모든 한국인 장교와 병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동하여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제6사단의 시작은 1945년 11월 중순 선양에서 창설된 조선 의용군 제1지대였다. 창설 당시 주요 간부는 지대장 김웅, 정치위원 방호산, 참모장 안빈, 정치부 주임 주연이었다. 제1지대는 기관총 중대와 경위 중대를 포함한 11개 중대 1,500명으로 구성되었다.
1946년 2월, 동북 민주 연군 요녕 군구 이홍광 지대로 개칭되면서 공식적으로 조선 의용군이라는 명칭은 사라졌다. 1946년 12월, 이홍광 지대는 독립 제4사로 개편되었고, 사단 아래에는 단(연대)이라는 편제가 되었다. 1948년 11월에 중국 인민 해방군의 정규 부대로 제166사가 되었고, 선양의 수비와 치안을 담당했다.[6]
1949년 5월경 입북 준비 조치로, 인민군 편제 기준에 따라 초과하는 단급 간부 몇 명이 장춘의 제164사단으로 보내졌다. 제1지대 시절부터 부대의 정치위원을 맡고 있던 방호산의 인솔 하에 1949년 7월 신의주에 들어가, 10월에 800명의 보충을 받아 제13연대, 제14연대, 제15연대, 포병연대로 편성되어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사단장에는 방호산 소장이 취임했다. 참모장에 노철룡, 문화 부사단장에 홍림, 후방 부사단장에 박민, 포병 부사단장에 심청, 제13연대장에 한일해, 제14연대장에 황석, 제15연대장에 조관이 각각 임명되었다. 1950년 중에 조관은 제5사단 참모장으로 전출되었고, 제15연대장에는 이방남이 취임했다.
1949년 12월 중순, 신의주에서 제6사단에 의한 보병사단의 공격 훈련이 실시되었다. 소련 군사 고문은, 전투 경험이 많은 것은 인정하지만, 작전의 조직적 계획성이나 군사 이론 등은 아직도 낮다고 평가했다.
2. 2. 한국 전쟁
제6사단은 전차 1개 대대를 동반하여 한국 전쟁 개전 첫날 개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한강 하구를 건너 김포반도를 거쳐 서울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 서울 후방을 차단하려는 효과적인 기동전을 펼쳐 국군을 위협했다. 이러한 전과로 사단은 근위 칭호를 받았고, 사단장 방호산은 영웅 칭호를 받았다.[7]대전에 미군이 배치된 것을 확인한 제6사단은 위협을 느껴 당초 계획과 달리 부대를 역기동시켜 시간을 지체, 호남 지방으로의 진출이 늦어졌다. 이는 국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해안으로 진격할 때 보급로 확보를 위해 사단을 3개로 분산 운용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전투력을 약화시켜 공세 유지가 어려워졌다. 결과적으로 경상도 지방 진출이 늦어져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1950년 6월, 제1군단(김웅 중장) 예하 부대가 된 제6사단은 한국 전쟁에서 주력 부대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을 받아 개성 방면으로 침공, 최초로 한강을 도하한 부대가 되었다. 제13연대는 인천, 제15연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김포반도로 진출하여 서울 점령, 사단의 한강 도하 작전에 합류했다.
1950년 7월, 제1군단이 도하를 완료하자 천안까지 제4사단에 후속하여 천안에서 남서쪽으로 이동, 7월 13일에 예산을 통과하고 군산을 점령했으며, 20일에는 전주를 공략했다. 이러한 호남 지역 돌파 공적을 인정받아 8월 29일 북한으로부터 근위사단 칭호를 수여받았다.[7]
제6사단은 미군 제8군에 노출되지 않고 한반도 남서부 지역을 잇따라 점령하여 하동에서 제29연대 제3대대를 격파하고 진주까지 육박했다. 이로 인해 제8군은 상주의 제25보병사단을 투입하게 되었고, 제6사단은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제25사단과 교전하게 된다.
진주까지 큰 손실은 없었으나, 마산 점령을 위해 함안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진동면한국어 북쪽 고지가 마산을 가로막고 미군이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여 필사적으로 공격을 저지했기 때문에 7월 하순부터 8월까지 한 달 동안 제6사단은 수차례 공격을 실시했지만 작은 고지조차 점령하지 못하고 사상자만 속출했다. 더욱이 미 공군의 집요한 공격과 남해안에 정박한 미군 함정의 대구경 함포 사격을 포함한 화력이 치명적이었고, 낮에는 병사에서 연대장까지 참호에 숨어 있었다.
1950년 8월 하순, 제6사단의 각 연대는 병력과 화력으로 자력 공격 능력을 상실하고 처음으로 전쟁에서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8월 30일,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81호 명령이 하달되어 9월 1일에 마산 점령을 위한 마지막 공격을 하지만 사상자만 발생하고 공격은 실패했다.
1950년 9월 중순, 제6사단은 명령을 받고 진지에서 철수하여 진주에 집결했다. 이틀간 휴식을 취하고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려 인천 상륙 작전과 전략적 후퇴의 필요성이 설명되고 북상 시 행군 순서와 이동 경로가 결정된다. 진주에 집결했을 때 병력은 편제상의 60% 정도인 7,500명이었지만, 전투 부대인 대대와 중대의 손실이 심각하여 실제 손실은 50%였다. 병력을 60%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 남부에서 모집한 의용군 신병이 보충되었기 때문이다.
개전 3개월 동안 사단의 주요 지휘관은 모두 무사했지만, 연대 지휘부의 주요 구성원과 대대장 및 중대장의 손실은 컸다. 제13연대 참모장 장훈, 제15연대 문화부연대장 신학균, 포병연대장 장우철 등은 미 공군의 폭격으로 전사했고, 제15연대 참모장 박광흠, 제13연대 문화부연대장 최진작은 마산 지역 전투에서 전사했고, 제15연대 포병부연대장 이빈은 행방불명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에 호응하여 제8군의 반격 작전이 시작되자 제6사단은 문관 8천 명을 수용하고 지리산에 잠복, 10월 말부터 11월 초에 걸쳐 산길을 따라 이동하여 북한으로 철수했다. 제6사단은 다른 부대처럼 분산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부대의 낙오병을 흡수하여 출발 시보다 병력이 증가했다.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제6사단의 조직적 철수를 평가하여 전 장병을 1~2계급 특진시켰다. 이 공적으로 근위사단 칭호가 주어졌고, 제6사단을 기반으로 제5군단이 창설되었다.
중국으로부터 방한복과 군수 물자를 보급받고 15일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제6사단을 포함한 제5군단은 제2차 남진을 시작했다. 중국군 제38군과 제41군에 후속하여 덕천 - 맹산 - 순천의 경로로 황해도로 진출했다. 동부 전선으로 이동 후 금화, 양구 부근을 남하하여 원주 부근까지 진격했다. 원주의 미군 지휘부 기습 작전에서 제15연대 제2대대장 허창복에게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1951년 6월부터 9월에 걸친 공방전에서 병력 손실이 커서 전투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진지는 중국군이 이어받았고, 동해안 방위 임무 명목으로 1951년 10월 함흥, 고원 일대에 집결했다. 고원군 서쪽의 부뢰산한국어 부근에서 겨울을 보내고, 1952년 봄에 영흥 해안 지역에서 미군의 동해안 상륙 작전에 대비하여 갱도 작업을 했다.
1954년 초, 다시 전선으로 이동하여 금성 남쪽 교암산 지구의 중국군 방어 진지를 이어받았다.
2. 3. 전후
1959년 6월 18일, 사리원에서 개성시 북부로 이동하면서 제1사단의 1연대와 14연대를 맞교환하였다.[1]2020년 기준으로 제2군단 예하 부대로서 개성특별시 개풍군 해선리 답동에 본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
3. 주요 지휘관
→ 사단장
→ 사단장
→ 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