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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임전보국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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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임전보국단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10월 22일, 친일 단체였던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이 통합되어 결성된 단체이다. 황도정신 선양, 국민생활 쇄신, 노동 보국 등을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김성수, 오긍선, 정구충, 최동 등 친일 성향의 인물들이 참여했다. 1년여 동안 활동하다가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흡수 통합되었으며, 학병제와 징병제를 찬양하는 등 일제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쳐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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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임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결성일1941년 7월 21일
해산일1945년 8월 17일
설립 목적태평양 전쟁 시기 조선인들의 전시 동원 및 지원
활동국방 헌금 모금
일본군 위문 활동
징병제 실시 홍보
황민화 정책 선전
관련 단체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
조선유도연합회
조선기독교단
주요 인물
주요 인물박흥식
윤치호
김활란
이광수
최린
장덕수
현영섭
김성수
조병상
고원훈
이승우
박영철
백낙승
김갑순
송금선
모윤숙
임숙재
김동환
주요한
정인익
김문집
최재서
기타
특징전시 체제 하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협력하기 위해 조직
조선 각계각층의 친일 인사들이 대거 참여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대표적인 단체로 지목됨
영향해방 이후 친일 잔재 청산 과정에서 비판의 대상
참여 인물들의 친일 행위는 사회적 논란과 비판을 받음

2. 결성 배경

3. 주요 조직 및 활동

최린, 김동환이 주도한 임전대책협의회윤치호 계열의 흥아보국단이 통합하여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황도정신의 선양과 전세체제하에서의 국민생활 쇄신을 추진한다는 목표를 가졌다. 설립 취지문에서는 2천 4백만 조선 민중에게 애국심을 호소하며,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강령을 제시했다.

# 황도정신 선양과 사상의 통일

# 전시체제의 국민생활 쇄신

# 국민 모두의 노동보국

# 국가우선의 원칙하에 저축, 생산, 공출 등에 협력

# 국방사상의 보급

출범식에서는 2천4백만 반도민이 일치결속하여 성전완수를 통해 황국의 흥융을 기할 것을 맹세하는 선서문이 낭독되었다. 산하에 여성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두는 등 약 1년 동안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윤치호는 회장직을 사양하고 임전보국단 행사에 여러번 불참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부통령까지 역임했던 김성수는 1942년 전후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가 여러 번 게재되었고,[4] 김성수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라디오 시국강좌 및 강연을 통해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며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했다.[5][6]

오긍선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귀국하여 세브란스의전에서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34년에는 제2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1921년 유민회 평의원을 시작으로, 동민회, 조선교육회, 경성군사후원연맹,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조선기독교연합회, 경성보호관찰소,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에서 활동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이 되었으며, <반도의 빛>에 기고한 글과 <매일신보> 기고문을 통해 '직무의 군인'으로서의 각오와 '대동아 건설'을 위한 학도병 지원을 독려했다.

정구충은 오사카의대를 졸업하고 경성여자의전에서 외과 교수로 일했으며, 조선군사후원연맹,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배영동지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에서 활동하며 친일 행적을 남겼다. <매일신보>와 <춘추>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학병 지원을 독려하기도 했다.

최동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3·1운동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의이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임용되었다. 1939년 세브란스의전 교장에 취임한 그는 <재만조선인통신>에 기고한 글을 통해 조선 민족과 야마토 민족의 동종동근을 주장하며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결합을 옹호했다. 1938년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맡았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미영타도좌담회'에서 앵글로색슨인의 유색인 차별을 비판하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7]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에는 모윤숙,[8] 임영신, 박순천, 박인덕, 김활란, 노천명, 이숙종, 배상명, 임숙재 등이 참여하였다.

3. 1. 주요 강령

3. 2. 활동 내용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김성수친일파로 변절했다.[4]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등을 지냈다.[6]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감사로 활동하면서[6] 1943년~1945년 매일신보경성일보,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6]

오긍선(1878~1963)은 1921년, 3·1운동 이후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친일 세력이 조직한 유민회(維民會)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924년 "내선융화의 철저한 실행"을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同民會)에도 참여했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이 되었다. <반도의 빛> 1942년 1월호에 "임전하(臨戰下)에 신년을 마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여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며, 후방에 있는 우리는 각각 자기가 하는 '직무의 군인'임을 한층 더 각오하라"고 했다.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 학도지원병 지원 촉구를 위한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특집에 "환하게 열린 정로(征路) ― 주저 말고 곧 돌진하라"를 기고하여 '대동아 건설'을 위해 적국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결전장으로 주저 없이 나설 것을 촉구했다.

정구충(1895~1986)은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 등 친일 어용단체에서 활동했다. "학병이여 잘 싸워라"(<매일신보> 1943년 11월 26일자), "출진하는 청년학도에게 고함―역사적 조류를 타라"(<춘추> 1943년 12월호) 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최동(1896~1973)은 1938년 기독교계의 친일 협력을 위해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동양지광사에서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앵글로색슨인이 유색인을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발표했다.[7]

이외에도 모윤숙,[8] 임영신, 박순천, 박인덕, 김활란, 노천명, 이숙종, 배상명, 임숙재 등이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동하였다.

4. 주요 참여 인물

김성수1937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친일파로 변절했다.[4] 중일전쟁 발발 후, 김성수는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및 연설을 하였고,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5] 1938년 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등을 지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매일신보경성일보,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6]

오긍선1921년 유민회 평의원, 1924년 동민회에 참여했고,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교육회의 평의원을 지냈다. 1937년 경성군사후원연맹 부회장,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의 발기인,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이 되었다.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특집을 기고했다.

정구충은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 평의원,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 등 친일 어용단체에서 활동했다. "학병이여 잘 싸워라" 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최동은 1938년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앵글로색슨인이 유색인을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발표했다.[7]

모윤숙,[8] 임영신, 박순천, 박인덕, 김활란, 노천명, 이숙종, 배상명, 임숙재 등이 여성 단원으로 참여했다.

4. 1. 남성

1937년부터 1945년까지 김성수조선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친일파로 변절했다.[4] 중일전쟁 발발 후, 김성수는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및 연설을 하였고,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5] 1938년 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등을 지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매일신보경성일보,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6]

오긍선1921년 유민회 평의원, 1924년 동민회에 참여했고,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교육회의 평의원을 지냈다. 1937년 경성군사후원연맹 부회장,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의 발기인,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이 되었다.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특집을 기고했다.

정구충은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 평의원,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 등 친일 어용단체에서 활동했다. "학병이여 잘 싸워라" 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최동은 1938년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앵글로색슨인이 유색인을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발표했다.[7]

4. 2. 여성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모윤숙,[8] 임영신, 박순천, 박인덕, 김활란, 노천명, 이숙종, 배상명, 임숙재 등이 여성 단원으로 참여했다.

5. 해산 및 영향

최린, 김동환이 주도한 임전대책협의회윤치호 계열의 흥아보국단이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설립 목표는 황도정신의 선양과 전세체제하에서의 국민생활 쇄신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설립 취지문에 따르면, 반도민중은 특별지원병 외에 병역에 복무할 명예를 가지지 못하므로 무한한 황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국민운동의 강력한 하나의 기관으로서의 단체를 설립한다면서 2천 4백만 조선민중에게 애국의 지정을 호소하고 있다. 단체의 강령으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내걸었다.

# 황도정신 선양과 사상의 통일

# 전시체제의 국민생활 쇄신

# 국민 모두의 노동보국

# 국가우선의 원칙하에 저축, 생산, 공출 등에 협력

# 국방사상의 보급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출범식이 열렸고, 2천4백만 반도민 모두 일치결속하여 성전완수를 통해 황국의 흥융을 기할 것을 맹세하는 선서문도 낭독되었다. 산하에 여성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두는 등 약 1년 동안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회장직을 사양한데 이어 임전보국단 행사에 여러번 불참하여 논란이 되었다.

6. 역사적 평가

6. 1. 비판적 시각

김성수1937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비판을 받는다.[4]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가 여러 번 실렸다.[4]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등을 지냈으며,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감사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매일신보 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했다.[6]

오긍선1921년 유민회 평의원으로 선임된 것을 시작으로,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이 있다. 1943년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특집에 글을 기고하여 '대동아 건설'을 위해 적국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결전장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7]

정구충은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 등 친일 어용단체에서 활동했으며, 1943년 매일신보춘추에 학병을 독려하는 글을 기고하여 비판을 받는다.[7]

최동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앵글로색슨인이 유색인을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발표하여 비판을 받는다.[7]

6. 2. 대한민국 사회에 미친 영향

참조

[1] 백과사전 조선임전보국단 http://100.daum.net/[...] 브리태니커(ブリタニカ百科事典 한국판)
[2] 백과사전 조선임전보국단 http://terms.naver.c[...] 두산백과(斗山世界大百科事典)
[3] 백과사전 조선임전보국단 http://terms.naver.c[...] 한국민족문화대백과(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4] 뉴스 지원병 보도내용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2013-09-07
[5] 웹사이트 ‘고려대학’은 2010년판 신명심보감? http://www.sisainliv[...]
[6] 서적 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원회
[7] 뉴스 친일파 의사들의 생존법,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10-03-08
[8] 뉴스 주요인사 60명 친일 파헤쳐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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