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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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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용만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의 언론인, 영문학자, 번역가, 소설가, 에세이 작가이다. 경성제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며 구인회에 참여했다. 1939년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참여하고 친일 작품을 발표하여 친일 논란에 휩싸였으며, 해방 후에는 매일신보에서의 행적을 반성하는 글을 발표했다. 6.25 전쟁 이후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영문학 연구와 번역에 힘썼고, 다양한 영미 문학 작품을 소개했다. 2002년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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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물 정보
이름조용만
출생일1909년 3월 10일
출생지{대한제국 한성부 종로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친척오세창(외종조부)
활동 기간1932년 ~ 1995년
직업소설가, 번역문학가, 영문학자
국적대한민국
장르소설
학력
학교경성제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경력
대학교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초빙교수
가족
부모조재혁(부)

2. 생애

조용만은 서울 출생으로, 그의 가계와 성장 배경, 매일신보 기자 시절, 그리고 해방 이후의 활동과 문학 활동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경험했다.

(하위 섹션에서 상세하게 다루어 지므로, 해당 내용들을 요약하여 간략하게 작성)


  • 가계 배경 및 성장 과정:
  • 외국어 교육기관인 사역원 판관이었던 아버지와 개화파였던 외증조부 오경석의 영향으로 외국 문화와 영어에 관심을 가졌다.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 매일신보 기자 시절:
  • 1933년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로 10여 년간 활동하며 구인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문화 활동을 펼쳤다.
  •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서 친일 행적을 보였으며, 해방 후에는 과거를 반성하는 글을 발표했다.
  • 해방 이후 활동:
  • 경향신문, 코리아타임스 등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서울대중앙대, 고려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 문학 활동:
  • 희곡 〈가보세〉로 등단했으나, 6.25 전쟁과 월북한 동료들의 영향으로 창작 활동은 소극적이었다.
  • 일제강점기 문화예술계의 모습을 담은 에세이집을 남겼다.


그는 한국의 초기 영문학자 중 한 명으로 다양한 영미문학을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셜록 홈즈》, 《피글위글 아주머니》, 《막다른집 1번지》, 《두시선역(杜詩選譯)》, 《인간의 굴레》, 《포 단편소설》, 《타고르시선》, 《근대영국희곡선》 등을 번역했고, 《문학개론》, 《육당 최남선》, 《일제하의 문화운동》 등을 저술했다.

2. 1. 가계 배경과 성장 과정

조용만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재혁은 대한제국의 외국어 교육기관인 사역원의 판관이었으나, 조용만이 태어날 무렵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 외증조부 오경석은 19세기 중반 역관으로 북경과 천진을 십수 차례 오가며 개화사상을 김옥균 등에게 전파한 초기 개화파였다.[1]

이러한 가족 배경으로 조용만은 외국 문화와 영어에 관심을 가졌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은 그의 외종조부이다.

2. 2. 매일신보 기자 시절

조용만은 1932년 경성제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년 간 무직으로 지내다 1933년 《매일신보》 학예부(오늘날의 문화부) 기자로 취직했다.[1] 이후 해방때까지 10여년 간 학예부 기자로 일하며 당대의 문단, 미술계, 영화계, 음악계 등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작품을 신문에 게재했다. 1933년에는 이상,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이효석, 이태준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구인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2] 1945년 무렵에는 학예부장을 지냈다.[2] 신문사에서 일하는 동시에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역 앞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의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조용만이 일했던 매일신보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4년 영국인 배설(Bathel)이 만들었으나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에 매입돼 기관지 역할을 했다. 1940년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총독부에 의해 강제폐간된 후 남은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다. 조용만은 학예부 기자생활 당시 문화예술, 가정면을 담당했다. 1942년 2월 중일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사상을 담은 수필가 김진섭의 글 〈아즉은 염려없다〉를 매일신보에 게재한 것이 일본 군부에 발각되어 총독부에 의해 해임당했다. 같은 해 6월에 촉탁(계약직)으로 재입사해 사진 화보집인 《매신사진순보》 편집을 맡았다.[2]

한편 총독부 기관지 직원으로 친일적인 행보도 보였다. 2차대전 발발 이후인 1939년엔 문학인 250여명이 이름을 올린 친일단체 조선문인협회에 참여했다. 또 일본어로 쓴 희곡 《광산의 밤(鑛山の夜일본어)》(1944)을 친일 문학잡지 《국민문학》에 발표했다.

조용만은 해방 후인 1945년 9월 23일 '《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로서의 과거를 반성한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직접 쓰고 종업원 일동 이름으로 신문에 실었다.[3]

그는 또 해방 후 출간한 언론 기고와 수필집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등에서 매일신보에서 일했던 데 대해 '몸을 팔았다'는 뜻의 '매신'이라는 말로 자신과 동료들을 비판하고 사과했다.

2. 3. 해방 이후 활동

조용만은 해방 후인 1945년 9월 23일 '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로서의 과거를 반성한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직접 쓰고 종업원 일동 이름으로 신문에 실었다.[3] 그는 또 해방 후 출간한 언론 기고와 수필집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등에서 매일신보에서 일했던 데 대해 '몸을 팔았다'는 뜻의 '매신'이라는 말로 자신과 동료들을 비판하고 사과했다.

6.25 전쟁 전후로 경향신문,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 국도신문의 주필과 《서울신문》의 논설 위원을 지냈고, 서울대중앙대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53년부터 1975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도서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퇴임 후 동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가 1995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2. 4. 문학 활동

조용만은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재학 중 잡지 《동광》에 동학 농민 운동을 다룬 희곡 〈가보세〉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작품 수는 많지 않으나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주로 썼다. 6.25 전쟁 직전에 첫 창작집을 내기 위해 원고를 인쇄소에 맡겼으나 전쟁 중 소실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사건과 절친했던 구인회 동료들인 정지용, 박태원, 이태준이 전쟁 중 월북한 이후, 창작에 소극적이 되었다.[2] 노년에는 젊은 시절 학예부 기자로 일하며 보고 듣고 겪었던 일제강점기 한국 문화예술계의 모습을 상세히 서술한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30년대의 문화 예술인들》, 《경성야화》, 《구인회 만들 무렵》 등 에세이집을 사료로 남겼다.

3. 친일 논란과 비판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2년까지 밝혀진 친일 작품 수는 소설 3편과 기타 기고문 5편, 총 8편이었다.[4]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 들어 있으며,[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4. 사후 평가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2년까지 밝혀진 친일 작품 수는 소설 3편과 기타 기고문 5편, 총 8편이었다.[4]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 들어 있으며[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5. 주요 저서 및 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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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뉴스 한반도 백년(15) 역관 오경석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2] 서적 극비 조선총독부의 언론검열과 탄압 https://books.google[...]
[3] 뉴스 경남도민일보 ‘반성문’ 계기로 본 언론사 반성문 http://blog.ohmynews[...]
[4] 저널 친일문학 작품목록 http://www.artnstudy[...] 2007-09-01
[5] 뉴스 고대 총학 ‘친일행적’ 10명 발표 http://www.hani.co.k[...] 한겨레 200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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