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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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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세창은 1864년 역관 오경석의 아들로 태어나, 개화 사상과 서화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관료로 활동하며 언론인으로도 활동했고,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 대한제국기에는 천도교에 입교하여 계몽 운동을 펼치고 언론 활동을 했으며,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예가, 전각가, 미술사 연구가로 활동하며, 《근역서화징》 등 저서를 남겼다. 광복 후에는 서울신문 사장, 민주의원 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하여 건국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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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청년 시절의 오세창
청년 시절의 오세창
한글 이름오세창
한자 이름吳世昌
별칭위창 (葦滄; 韙傖)
직업서화가
출생일1864년 8월 6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953년 4월 16일
사망지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대봉동
국적대한민국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교유교(성리학) → 천도교
부모오경석(부)
자녀오일륙(아들)
경력
직책우정총국 통신원실 실장
임기1895년 1월 ~ 1895년 8월
기타 경력매일신보 명예사장 겸 서울신문 명예사장
훈장
서훈[[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추서)
저서
저서근역서휘
근역인수
근역서화징
웹사이트
웹사이트오세창(독립유공자 공훈록)

2. 생애 초기

1864년 한성부에서 태어난 오세창은 중국어 역관(譯官)이자 개화 운동가였던 오경석의 아들이다. 오세창의 집안은 대대로 외국어를 배우는 역관 가문이었으며, 부유한 환경 덕분에 희귀 서적, 그림, 금석 문자본 등을 접할 수 있었다.[1][2]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사회에 근대화와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오세창은 이러한 진보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2] 아버지 오경석의 영향으로 오세창은 개화 사상에 일찍 눈을 뜨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개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2. 1. 가계와 출생

1864년(고종 1년) 8월 6일 한성부에서 중국어 역관(譯官)이자 구한말의 선각자로 잘 알려진 오경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다. 아버지 오경석은 역관으로 숭록대부(종일품)까지 올랐으며, 구한 말 개화당의 이론적 지주였다.[1] 그의 집안은 역관 가문으로, 대대로 외국어를 익혀 개화 사상에 일찍 눈을 뜬 중인 집안이었다.[2]

2. 2. 개화 사상과의 만남

오경석의 차남으로 태어난 오세창은, 대대로 외국어를 익혀 개화 사상에 일찍 눈을 뜬 중인 집안 환경과 개화파의 거두였던 스승 유홍기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개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1][2] 아버지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던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등과 교류하며 가깝게 지냈다.

3. 관료 생활과 개혁 운동

오세창은 16세에 한학 번역 및 통역 관직 시험에 합격하여 박문국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 정부의 여러 부처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갑신정변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1884년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06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정부 밖에서 활동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었고,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3년간 투옥되기도 하였다.[5][6]

중인 출신 중국어 통역관이자 대한제국 말기 개화 운동가였던 오경석의 장남으로 한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외국어를 배우는 집안에서 개화 사상에 일찍 눈을 떴으며, 개화파 거두인 스승 유홍기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개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02년 일본 망명 도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천도교 기관지이자 일간지인 《만세보》 사장으로서 계몽 운동을 전개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펼쳤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가 창간한 반일 논조의 일간지 《대한민보》 사장도 맡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권동진과 함께 개화에는 찬성하지만 일본과의 합병에는 반대하는 문명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합병 청원으로 개화를 주장하는 일진회 계열과 대립하여 이용구를 추방했다.

3. 1. 초기 관직 생활

1879년 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885년 박문국 주사시보로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기관 《한성주보》의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 입문하였다. 1886년 박문국 주사가 되어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다.[22]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쳤고, 1894년 군국기무처 낭청총재 비서관이 되었다가 관제 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역임했다.

3. 2. 개혁 운동 참여와 망명

1894년 군국기무처 낭청총재 비서관이 되었다가 관제 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역임했다. 1895년 을미사변 직후 권동진, 정난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혐의점이 없어 귀국했다.[22] 1896년 일본 문부성의 초빙으로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1897년 정식으로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과 교사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1년가량 교사 생활을 했다.[3] 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4]

4. 대한제국기 활동

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 권동진은 삼천리 지에서 당시 망명 중이던 자신의 옛 동지 중 한 명으로 그를 소개하였다.[23] 고종은 일본 조정에 계속 사람을 보내 망명객들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4. 1. 천도교 입교와 계몽 운동

1902년부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손병희, 양한묵 등의 거듭된 권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23] 1906년 천도교 기관지를 겸한 일간지 《만세보》 사장으로 계몽 운동을 펼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7][8] 1907년 3월에는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갔다가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해 7월 10일에 귀환하였다. 11월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4. 2. 대한협회와 대한민보

1907년 대한협회의 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09년 대한협회가 창간한 일간지 《대한민보》 사장을 맡았다.[7][8] 천도교 내부에서는 권동진과 함께 개화에는 찬성하되 일본과의 합병에 반대하는 문명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합병 청원으로 개화를 주장하는 일진회 계열과 대립하여 이용구를 몰아냈다.[9]

5. 일제 강점기 활동

1906년 천도교 기관지이자 일간지인 만세보 사장으로서 국채보상운동을 펼쳤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가 창간한 반일 논조의 일간지 대한민보 사장을 맡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권동진과 함께 개화에는 찬성하지만 일본과의 합병에는 반대하는 문명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합병 청원으로 개화를 주장하는 일진회 계열과 대립하여 이용구를 추방했다.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약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에는 서예가, 전각가, 금석학 연구자로 활동하며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서도 부문에서 입상했다.

5. 1. 독립운동 참여와 투옥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남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1] 1917년만세보》와 《대한민보사》를 창설하여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다.[2]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3] 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3]

5. 2. 3.1 운동 전후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 최린, 권동진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동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부 천도교 연락원들이 기독교 지도자 일부와 합의하자, 범국민적인 만세 시위 개최에 동의하였다.

1919년 2월 10일 최린, 최남선 등이 협의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제출하자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했다. 또한 최남선의 초안을 감수해 몇몇 표현을 수정하기도 했는데, 최남선에게 "요즘 애들은 한문을 몰라서 큰 일"이라고 나무랐다는 일화가 있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 홍기조, 홍병기, 김완규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었다. 이때 오세창은 천도교 월보과장 옥파 이종일을 설득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1919년 2월 27일 오세창은 천도교 지도자들을 설득, 그들과 함께 경성부 재동 김상규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최종 확인하고 찬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이어 그는 최남선의 독립선언서 용지 보급과 인쇄 등을 지원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오세창은 경성부 인사동의 태화관 요리집에 손병희, 최남선 등 민족대표자들과 함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데 함께 서고, 대한독립 만세삼창을 외쳤다. 바로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1]

그는 독립선언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였다는 취지로 검사의 심문에 답했다. "...전 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고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

1920년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최종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투옥됐다.[1]

5. 3. 서화, 전각, 미술사 연구

1922년 초대 조선미술전람회 서예 부문에서 수상했고,[13] 서화사 연구에도 뛰어들어 아버지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한국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1928)을 펴냈다.[17] 고려조선의 서화를 직접 찾아 사진 촬영하고 소장한 고미술품을 합쳐 화보집 《근역서화휘》를 출간했다.[15]

《근역서화징》은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한반도에서 활동한 서화가를 총망라한 인명 사전이다. 삼국시대 이후 화가 392인, 서예가 576인, 시·화를 겸한 149인 등 총 1117명의 기록을 시대순으로 정리했다.[18][19] 각 서화가의 성명, 자·호·본관·가계·출생 및 사망 연도, 문헌 기록, 논평, 제시(題詩) 등을 싣고 서목을 밝혔다. 인용 문집은 총 270종이며, 읍지·족보·비명·서화 작품 제발(題跋)까지 수록하고 작품명과 소재도 기록했다.

최남선은 《근역서화징》 출간 당시 '암흑한 운중의 전광(전깃불)'이라 평했다. 유홍준은 "한국 미술사의 아버지가 고유섭이라면 오세창은 할아버지다"라고 평했다.

오세창은 조선 초기부터 근대 서화가, 서예가, 문인학자들의 낙관, 인장 정보를 모아 《근역인수》를 편찬했고,[16] 이는 낙관과 아호 연구 자료가 되었다. 1918년 근대적 미술가 단체 효시인 서화협회 창립 때 13인 발기인으로 서화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10]

6.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변절하지 않은 독립운동가 원로였기에, 광복 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에 임명되었고, 한국민주당 창당 당시 공동 당수로 영입하려 했다. 한국전쟁 때는 대구로 피난했으나, 피난 중 병사했다. 장례는 국장에 준하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24]

6. 1.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여

1945년 8월 광복 직후 9월에 창당된 우익 계열의 보수 정당 한국민주당은 오세창을 공동 당수로 영입하려 했으나, 그는 한민당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도 추대되었으나 이 역시 거절하였다.

과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직원들 명의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1945년 10월 오세창을 사장으로 추대하자 이를 수락하였다. 당시 81세 고령이었던 그는 미군정의 감독 하에 매일신보의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고 주요 인사를 마무리한 후 두 달 만에 사장직을 내려놓았다.

10월 16일 이승만의 환국 때 오세창은 김포비행장에서의 환영식에 참석했다.[24] 이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조직되자 회장에 추대되었고, 전국애국단체총연협회 회장으로도 위촉되었다.

1946년 해방 1주년을 맞아 미군정이 일본 궁내청으로부터 압수한 구 대한제국의 국새(도장) 6과와 관인 2과를 조선에 반환하는 행사를 가졌다. 오세창은 민족 대표의 자격으로 이 행사에 참석해 미군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으로부터 국새들을 인계받았다.

19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을 지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이후 남북협상과 단정 수립론이 갈렸을 때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참석하였다.

1949년 7월 5일 김구의 장례식에서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6. 2. 한국 전쟁과 최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오세창은 대전을 거쳐 대구로 피난을 갔다. 1951년 4월 16일 나인협의 장례식에서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53년 4월 16일, 대구 대봉동 31번지 자택에서 병석에 누운 지 1년 만에 향년 90세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러졌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 후 범어사 선방에 모셨다가 1954년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소는 2017년 10월 23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7. 사후 평가 및 기념

오세창은 민족사회의 원로이자 독립운동의 원로로서 존경받았으며,[10] 서화, 전각, 미술사 연구를 통해 한국 전통문화의 맥을 이은 공로가 크다. 1962년 3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0]

7. 1. 긍정적 평가

오세창은 민족사회의 원로이자 독립운동의 원로로서 존경받았다.[10] 서화, 전각, 미술사 연구를 통해 한국 전통문화의 맥을 이은 공로가 크다. 1962년 3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0]

문화부는 1996년 11월과 2001년 8월, 오세창을 각각 그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하며 "근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전각가(篆刻家)이자 탁월한 감식안(鑑識眼)을 지닌 서화사(書畵史) 연구자."라고 평가했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2004년 3월 오세창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10]

1918년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 등 당대 유명 화가들과 함께 최초의 근대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를 공동 설립하였다.[10] 서화협회20세기 초 한국 미술가 육성과 근대 전시 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1]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치 활동에서 물러나 저술 및 예술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생전에 한국화와 서예에 관한 여러 중요한 저술을 완성하였다.[14] 대표적인 저술로는 고려와 조선 시대 문인들의 서예 작품을 모은 『근역서휘』(槿域書彙, 1911)와 67점의 그림을 주제별로 정리한 그림 목록 『근역화휘』(槿域畵彙)가 있다.[15] 또한 조선 시대 학자와 서화가들이 사용한 3,912개의 인장을 목록으로 정리한 『근역인수』(槿域印藪)를 편찬하였다.[16]

1917년 3권으로 된 『근역서화사』(槿域書畵史)를 편찬하고, 최남선이 이끄는 계명구락부에서 1928년 이를 증보하여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으로 대량 인쇄하였다.[17] 이 책은 신라 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한국 미술사(Korean art)를 연대순으로 종합적으로 다루고, 1,117명의 화가와 서예가들의 활동과 작품을 기록하였다.[18][19] 한국 학자에 의해 쓰인 최초의 한국 미술 백과사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한국전쟁 이후 한국 미술사 분야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20]

8.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오경석
아들오일육 (장면 비서관, 경무대·이기붕 비서관 역임)


9. 저서


  • 《근역서휘》
  • 《근역화휘》
  • 《근묵》
  • 《근역인수》
  • 《근역서화징》

참조

[1] 서적 Wich'ang O Se-ch'ang https://www.worldcat[...] Ihoe 2000
[2] 논문 오세창 서예감식에 나타난 심미의식 연구 Sungkyunkwan University 2005
[3] 서적 북하우스
[4] 학술지 https://www.dbpia.co[...] 1993-05
[5] 학술지 http://digital.kyobo[...] 2004-06-01
[6] 서적 Han'guksa sillon https://www.worldcat[...] Ilchogak 1999
[7] 학술지 만세보와 대한민보에 관한 고찰 https://dspace.ewha.[...] 1971
[8] 학술지 한문맥(漢文脈)의 이미저리, 『대한민보(大韓民報)』(1909~1910)漫評의 알레고리 읽기 -1909년 연재분을 중심으로 http://kiss.kstudy.c[...] 2012
[9] 서적 Ilche kangjŏmgi Chosŏn ŏllon t'ongjesa = The control of the Korean medi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https://www.worldcat[...] 2013
[10] 웹사이트 Artists on the Turning Point of the Modern Era https://issuu.com/mu[...]
[11] 학술지 Constructing Images through Art Exhibitions - Chosǒn Art Exhibition and Inventing the Colonial Image of Chosǒn https://www.kci.go.k[...] 2017
[12] 논문 The Joseon Fine Art Exhibition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https://hdl.handle.n[...] The University of Hong Kong 2013
[13] 서적 Sungkunkwan University
[14] 서적 Wich'ang O Se-ch'ang https://www.worldcat[...] Ihoe 2000
[15] 서적 Kŭnyŏk sŏhwi kŭnyŏk hwahwi myŏngp'umsŏn https://www.worldcat[...] Tolbegae 2002
[16] 학술지 The Seal Engravings and Seal Print Collectionsof Wichang, Oh Se-chang 2008-12
[17] 학술지 『근역서화사』의 편찬과 『근역서화징』의 출판 https://www.dbpia.co[...] 2008-12
[18] 학술지 吳世昌과 『槿域書畵微』, 『국역 근역서화징』, 시공사(1998) https://www.dbpia.co[...] 1998-09
[19] 서적 Kugyŏk kŭnyŏk sŏhwa ching https://www.worldcat[...] Sigongsa 1998
[20] 학술지 O Sech'ang's Compilation of Kŭnyŏk sŏhwa sa 槿域書畵史 (History of Korean painting and calligraphy) and the Publication of Kŭnyŏk sŏhwa ching 槿域書畵徵 (Biographical records of Korean painters and calligraphers) https://doi.org/10.1[...] 2013-10-01
[21] 뉴스 吳世昌翁逝去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53-04-19
[22] 뉴스 生物進化論을 修正케한 世界的植物學者 동아일보 1950-01-22
[23] 서적 이동휘와 기독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24]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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