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호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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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창호는 일제강점기 평양 출생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북한에서 13년간 강제 노역 생활을 한 군인이다. 1994년 탈북하여 대한민국으로 귀환했으며, 국군 중위로 진급하고 보국훈장을 받았다. 그는 북한에 남은 국군 포로와 납북자들의 귀환을 위해 노력했으며, 2006년 사망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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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호 (군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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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조창호 |
현지어 표기 | 趙昌浩 |
로마자 표기 | Cho Chang-ho |
출생일 | 1930년 10월 2일 |
사망일 | 2006년 11월 19일 (만 76세)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본관 | 배천(白川) |
종교 | 개신교(예장통합) |
국적 |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대한민국 |
가족 | |
배우자 | 북한 부인(1979년 강제 이혼), 남한 부인 윤신자(1940년생) |
자녀 | 북한 자녀 2남 1녀, 남한 자녀 2남 2녀 |
친척 | 조부 조익순, 누나 조창숙, 조형수, 남동생 3명, 누이동생 3명 |
부모 | 부친 조형국, 모친 이곤옥 |
군 복무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50년 8월 10일 ~ 1994년 11월 26일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중위 |
근무 | 육군본부 포병여단 육군 수도연대 포병 제101대대 |
지휘 | 관측장교, 전포대장 |
참전 기간 | 1950년 ~ 1951년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강원도 인제 한석산 전투 |
서훈 | |
훈장 | 보국훈장 통일장 |
학위 | 1995년 2월 연세대학교 명예 학사 학위장 |
기타 정보 | |
정당 | 무소속 |
2. 생애
조창호는 일본 제국 시대의 조선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6년 가족과 함께 경성(서울)으로 이주했고,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1951년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되었다. 같은 해 인제군 한석산 전투에 참전했다가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포로로 잡혀 북한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북한에서 43년간 억류되었다. 1964년 강제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평안북도 화풍 탄광에 배치되어 결혼했다. 5년 만에 세 자녀를 두었지만, 끊임없는 감시와 서로 첩보 활동을 하라는 북한의 요구로 결혼 생활이 어려워 이혼했다.[2]
1994년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으며, 재중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녀들에게 함께 중국으로 갈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들은 북한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2]
대한민국에서 그는 나머지 생애를 다른 포로들의 송환 노력에 헌신했다. 2006년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 참석하여 포로 문제에 대해 증언했다.[3] 1995년 자서전 "돌아온 사자"를 출판했다.
2006년 11월 19일 사망했으며, 북한에 남겨둔 자녀들은 체포되어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 것으로 알려졌다.
2. 1. 어린 시절
1930년 10월 2일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6], 1932년 일가족과 함께 경기도 인천 제물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1934년 일제 강점기 경기도 시흥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1936년 가족이 일제 강점기 경성부(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로 이주하였다. 경성 경기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연희대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2. 2. 한국 전쟁 참전과 포로 생활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연희대학교 교육학과를 중퇴하고 대한민국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1951년 4월 육군종합학교를 수료하고 포병장교로 임관하여 육군본부 포병여단 관측장교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 101포병대대 관측담당 및 소대장으로 참전하였다.[2]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 한석산 전투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붙잡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끌려갔다.[2]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으나, 1952년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부에 발각되어 '월남기도'와 '반동분자' 혐의로 13년간 황해북도 서흥군, 평안남도 덕천군, 함경남도 함흥시,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읍, 자강도 강계시 광산 등지의 강제 노역소에서 복역하였다.[2]
이후 자강도 자성군에 광부로 배치되어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오랜 광산 노역으로 규폐증을 얻게 되었다.[2] 그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 약 10시간의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나 일일 식량 배급량은 300그램 정도였다.[2]
43년간 북한에 억류되었다가[2] 1964년 8월 강제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평안북도 화풍 탄광에 배치되어 결혼했다.[2] 5년 만에 세 자녀를 두었지만, 끊임없는 감시와 서로 첩보 활동을 하라는 북한의 요구로 결혼 생활이 어려워 이혼했다.[2]
2. 3. 탈북 및 귀환
조창호는 북규폐 증세가 심해져 자강도 중강군 중강진면의 산간촌으로 보내졌는데, 이때 알게 된 중화인민공화국 상인을 통해 귀환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압록강 기슭에서 목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 북한을 탈출, 해상을 표류하다 1994년 10월 23일 새벽 대한민국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되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가족과 상봉하였다.[7] 1994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으며, 그곳에서 일부 재중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녀들에게 함께 중국으로 갈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들은 북한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2]이후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고,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입원한 병실을 찾아온 이병태 국방부 장관에게 귀환을 보고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을 보고하였다.[7] 11월 25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다. 전쟁 중에 실종 처리되었다가 1977년에 전사자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 중위로 진급하고, 군인 정신에 귀감이 된 점을 높이 평가받아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 다음날 11월 26일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4년 3개월이라는 최장기록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7]
그는 한국 전쟁 당시에 포로로 잡힌 많은 국군포로들이 여전히 북한에 생존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이는 북한에 생존해 있을 많은 국군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환경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 그는 나머지 생애를 다른 포로들의 송환 노력에 헌신했다.[2] 말년에 그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있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7] 2006년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 참석하여 포로 문제에 대해 증언했다.[3]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의 오랜 노역으로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사망하였으며, 11월 21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7]
2. 4. 귀환 이후 활동과 사망
조창호는 북규폐 증세가 심해져 자강도 중강군 중강진면의 산간촌으로 보내졌는데, 이때 알게 된 중화인민공화국 상인을 통해 귀환을 결심했다. 결국 압록강 기슭에서 목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 북한을 탈출, 해상을 표류하다 1994년 10월 23일 새벽 대한민국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되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가족과 상봉했다. 이후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고,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이병태 국방부 장관이 입원한 병실을 찾아와 귀환을 보고했으며, 10월 27일에는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을 보고하였다. 11월 25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다. 전쟁 중에 실종 처리되었다가 1977년에 전사자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 중위로 진급하고, 군인 정신에 귀감이 된 점을 높이 평가받아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 다음날 11월 26일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4년 3개월이라는 최장기록의 군생활[7]을 마감하였다.그는 한국 전쟁 당시에 포로로 잡힌 많은 국군포로들이 여전히 북한에 생존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이는 북한에 생존해 있을 많은 국군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환경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말년에 그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있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의 오랜 노역으로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사망하였으며, 11월 21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95년, 조창호는 자서전 "돌아온 사자"를 출판했다. 조창호가 북한에 남겨둔 자녀들은 체포되어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 것으로 알려졌다.
3. 유산 및 평가
조창호는 1994년 11월 26일 전역식에서 길고 참담했던 포로생활을 이겨낸 힘은 전쟁터에서 배운 군진수칙이었다고 회고하였다.[8] 그는 한국 전쟁 당시 국군 포로 가운데 약 320여 명이 북한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여 전향한 것과 달리, 43년 만에 귀환하여 '진정한 군인 정신의 귀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3. 1. 북한에 남겨진 가족
조창호가 북한에 남겨둔 자녀들은 체포되어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 것으로 알려졌다.4. 학력
- 경성 경기고등상업학교 졸업
- 연희대학교 교육학과 중퇴[9]
- 1995년 연세대학교 명예문학사 학위 수여[9]
- 대한민국 육군종합학교 1기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5. 대중 문화
1994년 KBS에서 "43년만의 귀대(歸隊)"라는 제목으로 국군포로 조창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드라마가 방송되었다.[10] 1996년에는 그의 귀환을 모티브로 한 영화 《알바트로스》가 제작,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이혁수가 감독하고, 차인표, 이정재, 이휘재, 강리나 등이 출연하였다.[10] 조창호는 이 영화에서 차인표가 연기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참조
[1]
뉴스
First prisoner of war to flee the North dies
http://koreajoongang[...]
[2]
웹사이트
A Hero's Welcome After 43 Years : Community: South Korean soldier Chang-Ho Cho, who finally made a dramatic escape from North Korea, is greeted in Los Angeles
https://www.latimes.[...]
1995-06-24
[3]
웹사이트
미의회 국군포로 청문회
http://koreanwarpow.[...]
[4]
간행물
보도 자료 1
http://www.saemoonan[...]
[5]
문서
도산 안창호와 친분이 있었으며 그래서 장손 조창호의 이름도 창호로 지었다고 한다. 이후 친분이 있던 안창호가 1938년 별세하신 뒤 20년 뒤인 1958년 작고했다.
[6]
뉴스
'영원한 국군' 조창호 중위, 하늘나라에 영원히 잠들다
https://www.konas.ne[...]
[7]
문서
전사자로 처리되었을 뿐 전역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귀환 순간에도 현역 군인의 신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대위 이하의 정년은 43세로 정한다는 대한민국의 군인사법 규정에 따라 중위 진급 후 바로 전역하였다.
[8]
뉴스
趙昌浩씨 귀환인사
https://news.naver.c[...]
[9]
뉴스
1994년도 전기 학위 수여식 - 조창호 동문 명예학사학위 수여 박사 119명, 석사 1,013명, 연구 85명, 학사 3,766명 배출
https://www.yonsei.a[...]
[10]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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