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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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승화는 1929년 김천 출생으로, 대한민국 육군 대장까지 오른 군인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에 참전했으며, 제2군단장,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79년 10.26 사건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12.12 군사반란으로 체포되어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2002년 사망했으며, 저서로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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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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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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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정승화 |
출생일 | 1929년 2월 27일 |
사망일 | 2002년 6월 12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김천시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13호 |
별명 | 벽송 |
본관 | 연일 |
종교 | 천주교(세례명: 베드로) |
거주지 | 서울특별시 |
가족 | 아버지 정시영, 어머니 인천 이씨, 배우자 신유경, 자녀 3남 1녀 |
군사 경력 | |
충성 | 대한민국 |
군종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7년–1979년 |
최종 계급 | 대장 |
지휘 | 육군참모총장 제2군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3보병사단 제10기계화보병여단 제26보병연대 |
참전 |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12·12 군사반란 저항 작전 |
정치 경력 | |
직책 | 최고위원 |
대통령 | 윤보선 |
임기 | 1961년 6월 18일 ~ 1961년 9월 29일 |
수상 | 장도영(내각수반) 송요찬(내각수반) |
의장 |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
대통령3 | 박정희 |
총리3 | 정일권 |
국가3 | 국방부 |
장관3 | 김성은 |
차관3 | 강서룡 |
전임3 | 정병주 |
후임3 | 정재석 |
직책3 | 운영차관보 |
임기3 | 1966년 1월 14일 ~ 1966년 2월 11일 |
국가 | 국가재건최고회의 |
국가2 | 국방부 인사국 |
대통령2 | 박정희 |
총리2 | 최두선 정일권 |
장관2 | 김성은 |
차관2 | 강서룡 |
직책2 | 부국장 |
임기2 | 1964년 1월 8일 ~ 1964년 5월 31일 |
정당 | 무소속 |
상임고문 | 통일민주당 (1987년) |
학력 | |
학력 |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
기타 | |
경력 | 제22대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대한체육회 이사장 |
2. 생애
1929년 2월 27일 김천시에서 태어난 정승화는[3] 대한민국 육군 17연대 병으로 입대하여 부산주변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26보병연대 소위로 임관하여 1960년대 초에는 연대장을 역임했다. 그 후 기계화여단장과 사단장을 거쳐 1976년 제2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78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청와대에서 만찬을 즐기는 동안, 인근 시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암살범 김재규는 즉시 정승화를 찾아가 대통령직 인수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긴급 내각 회의가 소집되었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으며, 정승화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하나회를 배제하려 했으나,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에게 박정희 암살 연루 혐의로 체포되었다.[2]
이후 이등병으로 강등,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무죄 판결을 받고 장성 계급을 회복했다. 2002년 6월 12일 사망했다.[3]
2. 1. 생애 초반
정승화는 1929년 2월 27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북도 상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19대조 정종소는 성균관 사성을 역임했으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낙향하였다. 그 뒤 18대조 정이교는 사헌부 장령과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지만 무오사화로 화를 당하자 정이교의 처와 자식들은 외가인 김천으로 가서 은거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정착생활을 했다.[3]1947년에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 5기생으로 입학하여 1948년 4월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26보병연대 소위로 임관하여 1960년대 초에는 연대장을 역임했다. 그전에는 17연대 병으로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부산주변 전투에 참전했다.[3]
2. 2. 군인으로서의 생애
1929년 2월 27일 김천시[3]에서 태어난 정승화는 17연대 병으로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부산주변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26보병연대 소위로 임관하여 1960년대 초에는 연대장을 역임했다. 그 후 기계화여단장과 사단장을 거쳐 1976년 제2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78년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군 생활의 정점을 찍었다.주요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3]
기간 | 내용 |
---|---|
1947년 | 한국육군사관학교 5기로 졸업, 육군 장교로 임관 |
1950년 | 제18연대 대대장 |
1953년 | 제3보병사단 작전참모 |
1961년 | 제2군단 작전참모 |
1962년 | 국군기무사령부 (육군방첩부대) 대장 |
1964년 | 제7보병사단 사단장 |
1967년 | 국방부 인사국장 |
1968년 | 육군본부 인사참모차장 |
1968년 10월 |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장 |
1969년 | 제1군 참모장 |
1970년 |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
1973년 | 제3군단장 |
1975년 | 제24대 육군사관학교장 |
1977년 | 제1군 사령관 |
1978년 | 육군 대장 임관 |
1979년 | 제22대 육군참모총장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 사건 발생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암살 실행범)의 부름을 받고 현장에 있었다. 그 직후 김재규와 함께 육군본부로 향했으나, 처음에는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실제로는 박정희와 함께 사살됨)이 박정희 암살을 실행했다고 오인하고, 차지철의 움직임을 억제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에 명령하여 청와대를 포위하는 동시에 경호실 차장 이재전 육군 중장에게 경호실을 움직이지 않도록 명령했다. 결국 김재규가 암살 실행범임이 밝혀지자 헌병을 동원하여 김재규를 체포했다.
그 후 계엄사령관에 취임했지만, 합동수사본부장을 지낸 전두환 보안사령관(당시)과 대립하여, 결국 같은 해 12월 12일 12·12 사태로 김재규의 공범 혐의를 받고 체포·투옥되었다. 이 조사 과정에서 보안사령부로부터 고문을 당했다.
1980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10년형(이후 징역 7년으로 감형)을 선고받고,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예편되었다. 1981년 집행유예로 석방 및 사면되었다. 1997년에는 공범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는 등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고, 전두환과 노태우의 재판 때는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2. 2. 1. 6.25 전쟁과 5.16 군사 정변
대한민국 국군이 출범하면서 육군 소위가 되었고, 고속승진 후 대위가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3사단 대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와 기계-안강 전투, 형산강 도하 작전에 지휘관으로 출전했다. 현리 전투에서는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기도 하였다. 이어 육군 제3보병사단 작전참모로 재직 중 1953년 휴전을 맞이하였다.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 때는 육군 본부 예하 방첩부대장(현재의 명칭은 기무사령관)을 역임하고, 현역 대령 계급으로써 육군 2군단 작전참모를 거쳐 육군 2군단 작전과 과장으로 재직 중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등으로 전격 임명, 겸임되었다. 그해 8월 11일 최고위원의 한 일원 시절,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7] 1962년 2군단 작전과장에서 다시 방첩부대장으로 전임되었다. 1962년 7월 30일에는 북한에서 월남한 월남귀순자 원호심사위원회 심사위원을 겸임하였다.
1963년 11월에는 야당으로부터 군 부재자 투표 당시 선거과정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11월 21일 민주당 이춘기 선거사무장은 정승화 방첩대장이 차규헌(車圭憲) 육본 정보처장과 함께 제2군단방첩대와 대전지구방첩대에서 병사들의 선거 무관심을 유도했다는 의혹이었다.[8] 이어 이춘기 사무장은 그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하도록 지령을 내렸다며 그가 내린 지령 일부를 입수하여 폭로하였다.[9]
그러나 민주당 등 야당 측의 공격에서 그는 별다른 제한이나 제약을 받지 않았다.
2. 2. 2. 대한체육회 관련 활동
1967년 2월 24일 대한체육회 이사에 선출되었다.[10] 1968년 3월 4일 재선임되었고,[10] 3월 16일에는 육본 인사국장으로서 대한체육회 해외파견, 초청심의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10]2. 2. 3.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장과 육군사관학교 교장
1968년 8월 19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과 육군종합행정학교 창설위원회 위원장을 겸하였고, 1968년 10월 16일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장이 되었다.[3] 1975년 9월부터 1977년 12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3]2. 2. 4. 10.26 사태와 12.12 군사반란
10.26 사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궁정동 안가 '가'동에 있었고(피살 장소는 '나'동), 이 사실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11]1979년 10월 27일 새벽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직무대행이 되었다.[11] 정승화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김재규 체포 작전을 지시했지만, 심증만 있고 확실한 증거가 없어 체포를 망설였다.
1979년 11월 19일, 계엄사령부는 계엄포고 8호를 공고하여 전국 대학에 내려졌던 휴교령을 해제했다. 대학생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12]
정승화는 야당 인사들과의 협력을 거부하며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1979년 11월 26일 언론사 사장단, 11월 27일 언론사 편집국장, 11월 30일 국방부 출입기자들과의 자리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길을 막겠다고 발표했다.[12] 훗날 정승화는 이 발언에 대해 김대중에게 사과하며,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파일’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고 밝혔다.[12] 그는 ‘정승화 파일’을 보고 날조된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문서’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밝혔다.[12]
1979년 11월 28일 이후, 정승화는 언론사 간부들을 육군본부로 초대하여 차기 대권 주자들을 비난했다.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고, 김영삼은 무능하며, 김종필은 부패했다는 것이다.[13][14] 이는 당시 군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정승화는 야당 인사들에게 협력을 거부했고, 최규하 대통령의 권유로 시국대책회의에 참석하는 등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15] 그는 3金씨의 자질에 대한 비판을 했다는 전두환의 증언과 달리, 실제로는 김대중의 자격에 대한 비판만 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16]
1979년 12월 9일, 정승화는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겠다는 건의를 했으나, 김재규 재판이 진행 중일 때는 유보하라는 국방장관의 말에 따랐다.[15]
1979년 10월 26일 저녁, 정승화는 청와대 만찬에 참석한 동안 인근 시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했다.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대통령직 인수를 설득하려 했으나, 긴급 내각 회의에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고 정승화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하나회를 배제하려 했으나, 하나회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하나회 핵심 인물들은 박정희 암살 연루 혐의로 정승화를 체포했다.[2]
정승화는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무죄 판결을 받고 장성 계급을 회복했다.
2. 3. 생애 후반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전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상임고문으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1988년 4월 25일을 기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93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내란 혐의로, 김계원 前 타이완 주재 대사와 김진기 예비역 육군 준장을 내란 방조 혐의로 김영삼 정부에 고발하고자 장태완, 이건영 등과 함께 작은 모임을 가졌다. 1997년 "김재규 내란기도 방조미수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후 대한민국 성우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17]2. 3. 1. 이등병 강제 예편과 명예 회복
1979년 12.12 사태 당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등에게 연행되어 육군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받았다.[23] 육군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됨과 동시에 국방부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되어 내란방조미수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23] 재판 직후 보충역 육군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되었고, 국방부 장관의 형량 확인 과정에서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었다.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80년 6월 1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며, 19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 기념 특별사면으로 사면 및 복권되었다.[23] 1988년 6월 30일에는 예비역 육군 대장 계급을 되찾았고, 1993년 5월 31일에는 예비역 육군 대장 군적을 완전히 회복하였다.[24]
12·12 군사반란 17년 후인 1997년, 서울지방법원은 박정희 암살 사건에 대한 정승화의 연루를 무죄로 판결했다. 그는 장성 계급과 몰수되었던 급여를 돌려받았다.
2. 3. 2. 사망
1999년부터 당뇨, 고혈압 등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였고, 만년에는 파킨슨병을 앓기도 했다.[17] 2002년에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해 6월 12일 사망했다.[3]3. 저서
-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4. 평가와 비판
- 10·26 사건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을 모시고 청와대에서 육군본부로 향했으나, 대통령 경호실에 경호를 붙이지 않았다.[19]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시해 사건의 범인이라고 판단하여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청와대 포위를 지시하고,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경호실 요원들의 출동 금지를 지시하였다.[20]
- 노재현 국방장관은 정승화와 전두환을 불러 전두환 사령관에게 “정 총장의 도움을 받아서 김재규를 연행하라”고 지시했고, 정 총장은 전두환 사령관에게 구두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21] 전두환은 안가에서 서빙고 분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21] 좀 더 정확히는 헌병감 김진기 준장과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이 체포를 하고 전두환 사령관은 호송과 수사를 맡았다고 한다.[16]
-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은 정승화 총장의 '잘 모셔라'는 지시에 따른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정동 안가로 잘 모셔라'는 말을 듣고, 김재규를 민간인을 주로 접견하는 곳으로 직접 에스코트해서 데려갔다고 증언한다.[21] 이후 허화평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화 연락을 하고, 김재규가 범인인 것 같다며 안가에서 서빙고 분실로 옮긴다.[21]
>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로 데려가 정중하게 잘 모시라고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지시한 것은 정승화 자신은 대통령 시해 현장에서 직접 시해범인 김재규를 봤으면서도 사건의 진실을 숨기고 김재규를 개인적으로 보호하려 한 정황이 남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은 애석하나 국가와 국민 전체의 불행은 아닙니다. 박 대통령 체제는 잘못됐으므로 시정돼야 합니다.
이 발언에 모인 군 장성들은 웅성거렸고, 박정희 체제가 잘못됐다면 군 지휘관도 책임지고 물러나야 하지 않느냐며 따지는 일도 생겨 회의가 흐지부지 끝났다고 한다.[21]
- 전략전술에 뛰어난 지장이라는 평가가 있다.
- 백동림 수사제1국장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수사초기에 이미 10·26은 김재규의 우발적 단독범행이었다는 결론을 내려 상부를 이해시켰고, 정승화 총장은 수사에 협조적이었다”고 말한다.[16]
5. 대중문화 속의 정승화
작품명 | 연도 | 방송사/제작사 | 배역 | 배우 |
---|---|---|---|---|
제4공화국 | 1995년 | MBC | 정승화 | 정승현 |
다큐멘터리 극장 | 1993년 | KBS1TV | 정승화 | 최병학 |
코리아게이트 | 1995년 | SBS | 정승화 | 최병학 |
삼김시대 | 1998년 | SBS | 정승화 | 하대경 |
제5공화국 | 2005년 | MBC | 정승화 | 박인환 |
그때 그사람들 | 2005년 | 영화 | 정승화 | 정종준 |
남산의 부장들 | 2020년 | 영화 | 장승호(정승화 모델) | 김민상 |
서울의 봄 | 2023년 | 영화 | 정상호(정승화 모델) | 이성민[25] |
행복의 나라 | 2024년 | 영화 | 정승화 | 이원종[26] |
참조
[1]
뉴스
정승화 前육군총장 별세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2002-06-13
[2]
뉴스
Ex-general who tried to repress coup in 1979 dies
http://www.koreahera[...]
2010-07-31
[3]
웹사이트
Chung Sung-Hwa
https://www.britanni[...]
2019-03-11
[4]
뉴스
정승화 前육군총장 별세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2002-06-13
[5]
웹사이트
(37)연일 정씨(延日鄭氏)-216,510명
http://www.seoulecon[...]
2014-08-26
[6]
웹인용
[김천의 문중이야기] 영일 정씨-한국사 빛낸 정완영·정승화
https://news.imaeil.[...]
2023-04-26
[7]
뉴스
육군 장성급 대폭진급
동아일보
1961-08-11
[8]
뉴스
군의 부재자투표 미끼로 부정선거를 기도
동아일보
1963-11-21
[9]
뉴스
우수한 사병 선발
경향신문
1963-11-21
[10]
뉴스
전장병 제대 보류
동아일보
1968-02-07
[11]
서적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12]
웹인용
“수십년 ‘정치군인’ 세상에서 남편이 살아남은 건 기적”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5-12-06
[13]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4
[14]
서적
남산의 부장들(3)
동아일보사
1993
[15]
웹인용
"총구 뺨에 닿인채 끌려갔다" 정승화 전육참총장이 말하는 「12·12사태」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87-11-11
[16]
웹인용
“軍에 법을 무시하는 오점 남겨”
https://www.sisajour[...]
시사저널
1990-01-21
[17]
뉴스
명복을 빕니다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한국현대사 희생양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2-06-13
[18]
뉴스
정승화 前육군참모총장 별세
https://news.naver.c[...]
파이낸셜뉴스
2002-06-13
[19]
영상
KBS 다큐멘터리극장 유신시대 7부, 유고
KBS
1993-10-31
[20]
뉴스
12.12 사건은 쿠데타도,군사반란도 아니다
http://www.koreadigi[...]
한국디지털뉴스
2022-12-09
[21]
웹인용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허화평 前 대통령 정무수석 (上)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2-03
[22]
웹인용
故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자서전 출간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02-09-25
[23]
뉴스
'한국 현대사 悲運의 주인공'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2002-06-13
[24]
뉴스
계급강등 장성, 정부 31명 복권
http://www.joongang.[...]
중앙일보
1988-06-30
[25]
기타
극중 인물 정보
[26]
기타
극중 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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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 자리 ‘소장 전두환’, 20일 뒤 ‘파워맨’으로···쿠데타 뒤 ‘실권 장악’ 재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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