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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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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궁은 후한 말 동군 무양현 출신으로, 조조를 섬기다 배신하고 여포의 책사로 활약한 인물이다. 조조가 동탁 토벌에 참여할 때 합류하여 연주를 점령하는 데 기여했으나, 조조와 결별한 후 장막, 여포와 함께 연주를 점령했다. 여포가 패배한 후 조조에게 사로잡혔으며, 죽음을 택하여 의지를 지켰다. 진궁은 지략과 충의를 갖춘 인물로 평가받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를 돕다 배신하고 여포를 섬기는 인물로 묘사된다.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등장하며, 만화, 게임 등에서 책략가, 조력자 역할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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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청나라 삽화 속 진궁
청나라 시대의 진궁 그림
이름진궁
로마자 표기Chen Gong
자(字)공대(公臺)
출생생년 미상
출생지연주동군 동무양현
사망일199년 2월 7일
사망지쉬저우샤피군
소속후한
직업모사
주군조조
여포

2. 생애

진궁은 현재의 허난성산둥성의 경계에 위치한 동군 무양현(武陽縣)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지역의 유력 인사로서 천하의 영웅이나 유명한 학자들과 교류했다.[3][4]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190년조조에게 합류하여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했다. 192년 연주 사람들을 설득하여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하도록 하였고, 193년 외교적 노력을 통해 연주를 조조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4년,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러 간 사이, 진궁은 장막 등과 함께 여포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이들의 도움으로 연주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조조는 급히 돌아와 여포와 대치했다. 195년 여포와 진궁은 역공을 가했으나 복병에 패해 유비에게 의탁했다.

196년 여포가 서주를 차지한 후, 진궁은 여포의 주요 참모가 되었으나, 여포는 진궁의 계책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198년주1 조조의 하비 공격 당시, 진궁은 즉시 공격을 주장했으나 여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포는 항복하려 했지만 진궁은 만류했다.

진궁은 성 밖과 성 안에서 함께 방어하는 계책을 제시했으나, 여포의 부인이 반대하여 실행하지 못했다. 결국 여포군은 포위되었고, 진궁은 사로잡혀 조조에게 투항했다.

조조는 진궁을 회유하려 했으나, 진궁은 신념을 굽히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조조는 진궁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보냈고, 진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처형장으로 향했다. 그의 머리는 허도에 효수되었고, 조조는 진궁의 가족을 잘 보살폈다.[5][6]


  • --

주1: 원문에는 198년으로 되어 있으나, 하비 전투는 198년 겨울에 시작되어 199년 초에 끝났으므로 199년으로 수정함.

2. 1. 조조와의 만남과 결별

190년경, 진궁은 황제 헌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횡포를 부리던 동탁에 대항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한 조조에게 합류했다.[3][4] 192년, 연주자사 유대가 황건적에게 패하여 죽자, 진궁은 연주 사람들을 설득하여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하도록 하였다.[12] 193년, 진궁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연주를 조조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4년, 조조가 서주목 도겸을 공격하기 위해 서주로 나아간 사이, 진궁은 조조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장막의 동생 장초, 종사중랑(從事中郞) 허사·왕해(王楷) 등과 함께 모반을 계획하였다. 진궁은 진류태수 장막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주는 동쪽을 치느라 텅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여포는 장사로서 맞설 상대가 없을 정도로 싸움을 잘합니다. 여포와 함께 연주를 장악하고 천하 형세를 주시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면 한 시대를 종횡할 것입니다." 장막이 이를 좇아 여포를 연주목으로 세우니 견성, 동아(東阿), 범(范) 등 몇 개 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이 호응하였다.

진궁이 조조를 배신한 정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조의 통치 방식에 대한 의구심, 혹은 더 큰 대의를 위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급보를 받은 조조는 급히 군을 돌려 여포와 사투를 벌였다. 195년 산양군 거야현(鉅野縣)의 설란이봉 구원에 실패한 여포는 진궁과 함께 1만 명으로 동민현(東緡縣)에서부터 역공을 가했으나 복병에 패하였다. 결국 제음군 정도현(定陶縣)이 뚫리면서 여러 현들을 잃었고 진궁은 여포와 같이 유비에게 의탁했다.[13]

2. 2. 여포의 모사

196년 여포가 서주를 차지한 후, 진궁은 여포의 주요 참모가 되었다. 진궁은 뛰어난 책략으로 여포를 보좌했으나, 여포는 진궁의 계책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7]

198년 조조가 하비를 공격해 오자, 진궁은 여포에게 즉시 공격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나 여포는 조조군이 하비까지 쳐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포는 하비까지 조조군이 오자 성 밖으로 출격했으나 패배하여 성렴을 포로로 잡히고, 하비성 안으로 쫓겨 들어가 조조의 권고에 따라 항복하려 했다. 그러나 진궁은 과거 조조에게 반역했다는 깊은 죄를 자각하고 있었기에, 여포의 항복을 막았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진궁은 여포에게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은 돌에 계란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간언했다.[15]

진궁은 여포에게 성 밖에서, 자신은 성 안에서 서로 기각(掎角)의 형태로 방어하면 조조군의 군량이 떨어져 승리할 것이라고 진언했지만, 여포의 부인이 반대하여 실행하지 못했다.[16]

결국 여포군은 조조에게 포위되었고, 진궁은 위속[8], 후성, 송헌 등에게 사로잡혀 조조에게 투항했다.[9]

2. 3. 최후

조조는 진궁을 회유하려 했으나, 진궁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17] 진궁은 신하로서 불충했고, 자식으로서 불효했으니 자신은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조조가 진궁에게 노모와 처자식의 처우에 대해 묻자, 진궁은 “제가 듣건대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타인의 부모를 해치지 않으며, 인(仁)으로써 천하를 보살피는 자는 타인의 제사를 끊지 않는다 합니다. 그 생사는 제가 아니라 명공께 달렸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조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진궁은 자신을 죽여 군법을 밝히라며 죽음을 재촉했다. 조조는 진궁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조조는 눈물을 흘리며 진궁을 전송했고 진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처형장으로 향했다.[18] 그 머리는 허도에 효수되었다. 조조는 진궁의 가족을 두터이 대해 그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봉양하고 아들을 가르치며 딸도 시집보내주었다.[5][6]

3. 성품과 평가

진궁은 강직하고 기백이 넘치는 인물로, 젊은 시절부터 천하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쌓았다.[3][4] 순유하비 전투에서 진궁을 지혜는 있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19]

삼국지》 여포전 주석에 인용된 《전략》에 따르면, 진궁은 여포를 위해 계략을 세웠지만, 여포가 항상 진궁의 계략을 따르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하비 포위전 당시, 진궁은 여포가 성 밖에 진을 치고 자신이 성 안에 머물면서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고, 조조가 성을 공격하면 여포에게 성 밖에서 구원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여포의 처가 "조조가 진궁을 제 자식처럼 우대했는데, 그래도 진궁은 배반했습니다"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여포는 진궁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았다.[11]

또한, 진궁은 고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비 포위전에서 여포는 진궁과 고순에게 하비성을 지키게 하고, 기병을 이끌고 조조군의 양도를 끊으려 했지만, 여포의 처가 진궁과 고순의 불화를 지적했기 때문에 중단했다.[7]

진궁은 뛰어난 책략가였지만, 주군을 잘못 만난 비운의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지략은 여포보다는 조조와 같은 인물에게 더 적합했을지도 모른다. 진궁의 선택은 종종 배신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중도진보적 관점에서는 난세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뇌와 결단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진궁

조조동탁 암살에 실패하고 도망치던 중, 중모현의 현령이었던 진궁은 그를 체포했다. 하지만 진궁은 조조의 의기에 감복하여 관직을 버리고 함께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10]

이들은 도중에 조조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여백사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여백사 가족의 행동을 오해한 조조는 그들을 살해하고, 돌아온 여백사마저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 이에 진궁은 큰 실망을 느끼고 조조를 암살하려 했으나,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홀로 동군으로 떠났다.[10]

이후 진궁은 장막을 의지하다 여포를 맞이하여 그의 참모가 되었다. 복양 전투에서 진궁은 계략을 써서 조조를 함정에 빠뜨렸으나, 조조는 간신히 탈출했다. 여포가 조조에게 패하고 서주유비에게 의탁한 후, 진궁은 여포에게 유비를 몰아내고 서주를 차지하도록 진언했다.

진궁은 원술과 손을 잡고 조조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진규, 진등 부자의 방해로 실패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해 오자, 진궁은 여포에게 항복을 만류하고 '기각지세' 계책을 제안했지만, 여포 아내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여포와 함께 조조에게 사로잡힌 진궁은 조조의 항복 권유를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7]

5. 대중문화 속의 진궁



진궁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 진모가 그린 홍콩 만화 화봉요원의 캐릭터이다.
  •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진 삼국무쌍 8 엠파이어스》와 ''삼국지'' 시리즈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 Aniplex의 게임 Fate/Grand Order에 플레이 가능한 캐스터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한다.
  • 토탈 워: 삼국에서 여포 세력의 고유한 전설적인 책략가 영웅으로 등장한다.
  • 만화 《종말의 발키리》에서 토르와 싸우는 여포를 돕는 조력자로 등장하며, 애니메이션과 연극 각색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는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vol. 62 Zizhi Tongjian
[2] 웹사이트 後漢書 孝献帝紀 第九 https://zh.wikisourc[...] null #날짜 정보가 없음. 추가적인 정보 필요.
[3] 서적 真説三国志 最強は誰だ? 三国志研究会 2007
[4] 서적 三国志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5] 서적 三国志 呂布伝本伝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6] 서적 三国志 呂布伝注魚氏『典略』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7] 서적 三国志 呂布伝注『英雄記』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8] 서적 三国志集解 盧弼
[9] 서적 後漢書 列伝65呂布伝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10] 서적 魏書 王沈
[11] 서적 三国志 呂布伝注『魏氏春秋』、『後漢書』呂布伝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12] 서적 세어(世語) 배송지 주석
[13] 서적 삼국지 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14] 서적 영웅기 왕찬
[15] 서적 헌제춘추(獻帝春秋) 배송지 주석
[16] 서적 위씨춘추(魏氏春秋) 손성
[17] 서적 후한서 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건안 3년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18] 서적 후한서 75권 열전 제65 여포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19] 서적 삼국지 10권 위서 제10 순유 null #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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