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티에 생제르맹데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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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티에 생제르맹데프레는 프랑스 파리의 역사적인 지역으로, 생 제르맹 데 프레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중세 시대부터 종교, 문화,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17세기에는 극장과 카페가 들어서면서 문화적 명성을 얻었다. 19세기에는 국립 고등 미술 학교가 설립되고, 오스만 남작의 도시 계획으로 지역이 변화했다. 20세기에는 실존주의와 재즈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현재는 고급 주택 지역으로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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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에 생제르맹데프레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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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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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파리 6구 |
면적 | 알 수 없음 |
인구 (1999년) | 5,154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우편 번호 | 75006 |
지리 | |
설명 | 파리 6구의 네 개 구역 중 하나이다. |
명칭 | |
프랑스어 명칭 | Quartier Saint-Germain-des-Prés |
로마자 표기 | Kwartie Saeng-jeleumaeng-de-peule |
역사 및 문화 | |
유래 |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에서 유래 |
관련 인물 | 알베르 카뮈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
주요 거리 | |
거리 | Rue des Saints-Pères Rue de Seine Rue Mazarine Rue du Four |
특징 | |
별칭 | 제르마노프라탱 (Germanopratins) |
명소 | 레 되 마고 에콜 데 보자르 |
2. 역사
이 지역은 메로빙거 왕조 시대 파리 주교였던 제르맹 드 파리에 의해 558년경 봉헌된 생 제르맹 데 프레 교회(구 수도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2]
17세기 이후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생제르맹데프레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르 프로코프"와 같은 카페는 백과전서파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나 프랑스 혁명 시기의 주요 인물이었던 장 폴 마라, 조르주 당통, 조제프 기요탱 등이 자주 드나들며 교류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생제르맹데프레는 파리의 지적·문화적 활동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같은 철학자들을 비롯하여 줄리에트 그레코,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자크 프레베르 등 수많은 작가, 배우, 영화 감독, 음악가들이 이 지역의 나이트클럽과 브라스리에 모여들었다. 특히 "두 마고"나 "카페 드 플로르"와 같은 카페는 당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으며, 브라스리 "립"은 언론인과 유명 배우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1921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운영된 르 디방 출판사와 동명의 문학 잡지 『르 디방』 역시 이 지역의 문학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현재 생제르맹데프레는 과거와 같은 지적 중심지로서의 명성은 다소 약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매력적인 지역으로 남아있다. 17세기 건물이 남아있는 거리에는 유서 깊은 카페와 레스토랑, 아트 갤러리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과거의 소매점이나 서점 자리에는 고급 패션 부티크들이 들어서면서 상업적인 면모도 강해졌다.
이 지역의 변화하는 모습과 분위기는 여러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싱어송라이터 기 베아르는 1961년 발표한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Il n'y a plus d'après)에서 생제르맹데프레를 노래했으며[4], 알랭 소숑은 그의 노래 '파리 좌안'(Rive gauche à Paris)에서 변화된 모습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레오 페레 역시 1967년 노래 '라탱 구역'(Quartier Latin)에서 생제르맹데프레의 변화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또한 파리의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로서, 많은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
2. 1. 중세
17세기까지 이 지역은 센 강의 홍수에 취약하여 건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부분이 열린 들판, 즉 prés|프레프랑스어였으며, 이것이 이 지역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구역 중심부에 위치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은 6세기에 클로비스 1세의 아들인 킬데베르 1세(재위 511–558)에 의해 설립되었다. 542년, 스페인에서 전쟁을 벌이던 중, 킬데베르는 주민들이 순교자 성 빈센트의 보호 아래 있다는 말을 듣고 사라고사 포위를 풀었다. 감사의 표시로 사라고사의 주교는 성인의 스톨을 그에게 선물했다. 킬데베르는 파리로 돌아와, 시테 섬의 왕궁에서 들판 건너편으로 보이는 곳에 성십자가와 성 빈센트의 유물을 안치하여 기리기 위한 교회를 세웠다. 558년, 성 빈센트 교회는 완공되었고, 12월 23일 파리 주교 제르맹에 의해 봉헌되었다.[2] 같은 날 킬데베르가 사망했다. 교회 근처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수도원 교회는 메로빙거 왕조 왕들의 매장지가 되었다. 수도원장은 생제르맹 주민들에 대한 영적 및 세속적 관할권을 모두 가졌으며, 이는 17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수도원은 풍부한 보물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도시 성벽 밖에 위치했기 때문에, 9세기에 노르만족에게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1014년에 재건되었고, 1163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시성된 주교 제르맹에게 다시 봉헌되었다.
서기 1000년경 수도원의 교회와 건물은 돌로 재건되었고, 수도원은 주요 학문 및 학습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2세기에는 약 600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 수도원 주변에 생겨났다. 현재의 rue du Four|뤼 뒤 푸르프랑스어는 수도원의 옛 가마(프랑스어로 four)가 있던 자리이며, 식당은 현대의 아베이 거리(Rue de l'Abbaye)를 따라 위치했다. 생피에르 교회라는 본당 교회 또한 센 강 좌안, 현재의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가 있는 자리에 세워졌으며, 그 본당은 현대의 6구와 7구 대부분을 포함했다. 1180년경에는 생 쉴피스 교회가 관할 소교구 교회가 되었다. 필리프 2세(1180–1223) 왕이 건설한 요새, 즉 도시 전체를 둘러싼 최초의 기록된 성벽으로 인해 생제르맹데프레는 성벽 바로 바깥에 위치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부터 생제르맹데프레는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상인과 판매자를 끌어모으는 연례 박람회 덕분에 중요한 시장이기도 했다. 푸아르 생제르맹(Foire Saint-Germain)은 1176년에 이미 유명해져 수익의 절반을 국왕에게 할당할 정도였다. 박람회는 부활절 15일 후에 개장하여 3주 동안 열렸으나, 날짜와 장소는 해마다 바뀌었다. 1482년부터는 10월 1일에 개장하여 8일간 열렸고, 다른 해에는 11월 1일 또는 2월 2일에 개장하기도 했다. 1486년부터는 현대의 뤼 마비용(rue Mabillon) 근처, 오텔 드 나바르(Hôtel de Navarre) 정원 일부에서 열렸다. 1483년 박람회에는 340개의 가판대가 있었고, 1512년에는 516개의 가판대를 수용하는 특별 건물이 박람회를 위해 세워졌다. 박람회는 도박, 방탕, 그리고 인근 대학의 난폭한 학생들이 난입하여 일으킨 폭동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3월 17~18일 밤 건물에 불이 났지만, 빠르게 재건되었다. 박람회는 1789년 혁명까지 매년 열렸고, 혁명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폐쇄되었다.
2. 2. 르네상스 시대

16세기 말, 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여전히 공식적으로 프랑스 여왕이었던 발루아의 마르그리트(1553–1615)는 생제르맹데프레 지역에 거처를 짓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현재의 프랑스 학사원 근처, 센 강 근처의 수도원 부지에, 현대의 rue de Seine|뤼 드 센fra 서쪽에 있는 부지에 궁전을 지었다. 그녀는 광대한 정원을 갖춘 궁전을 짓고 1615년 사망할 때까지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서 자리를 잡았다.
2. 3. 17-18세기: 극장과 카페의 등장

1673년, 파리의 주요 극단인 코미디 프랑세즈는 생토노레 거리(rue Saint‑Honoré프랑스어)의 기존 건물을 떠나 센 강 좌안, 생제르맹 구역 바로 외곽에 위치한 '파사주 드 퐁뇌프'(passage de Pont-Neuf프랑스어, 현재의 rue Jacques‑Callot프랑스어)로 이전했다. 그러나 극단의 존재는 인근 콰트르 나시옹 대학(현재의 프랑스 학술원) 관계자들에게 불편함을 주었고, 결국 1689년 코미디 프랑세즈는 다시 '포세-생제르맹-데프레 거리'(rue des Fossés-Saint‑Germain‑des‑Prés프랑스어, 현재의 rue de l'Ancienne‑Comédie프랑스어)로 이전하여 1770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극장 지붕의 상태가 나빠지자, 극단은 그해 생 루이 궁의 기계관으로 임시 이전했으나 공간이 너무 컸다. 마침내 1797년, 코미디 프랑세즈는 다시 센 강 좌안으로 돌아와 현재의 오데옹 극장 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파리 최초의 카페는 1672년 생제르맹 박람회에서 아르메니아인 파스칼(Pascal)에 의해 문을 열었다. 박람회가 끝난 후 그는 케 데 제콜(Quai des Écoles)에 좀 더 영구적인 가게를 열고 커피를 한 잔에 2수 6데니에에 팔았다. 당시 커피는 즐기는 음료라기보다는 약처럼 여겨져 고객이 많지 않았다. 파스칼은 런던으로 떠났고, 또 다른 아르메니아인 말리반(Maliban)이 rue de Buci프랑스어에 새로운 카페를 열어 담배와 파이프도 함께 판매했다. 그의 카페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그는 네덜란드로 떠났다. 말리반의 웨이터였던 페르시아계 아르메니아인 그리고아르(Gregoire)가 사업을 이어받아, 코미디 프랑세즈의 새 극장 근처인 rue Mazarine프랑스어에 카페를 열었다. 1689년 극장이 이전하자, 그리고아르도 카페를 rue des Fossés-Saint‑Germain프랑스어의 같은 위치로 옮겼다. 이후 이 카페는 1672년 파스칼의 웨이터로 일했던 시칠리아 출신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오 데이 콜텔리(Francesco Procopio dei Coltelli)가 인수했다. 그는 카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딴 '르 프로코프'(Le Procope)로 바꾸고, 차, 초콜릿, 리큐어, 아이스크림, 설탕 절임 과일 등을 메뉴에 추가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카페는 현재까지도 영업 중이다. 1723년경 파리에는 380개가 넘는 카페가 생겨날 정도로 카페 문화가 확산되었다. 특히 '르 프로코프'는 많은 출판업자, 편집자, 인쇄업자들이 이 구역에 거주했던 덕분에 파리 문학계의 주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작가 드니 디드로와 장 르 롱 달랑베르는 그들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앙시클로페디의 구상을 '르 프로코프'와 또 다른 인기 있는 문학 카페였던 rue de Buci프랑스어의 카페 랑델(Café Landelle)에서 했다고 전해진다.
2. 4. 프랑스 혁명 시기

17세기 이후 많은 지식인이 이 지역에 모여들면서 생제르맹데프레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르 프로코프"와 같은 카페는 백과전서파의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이후 프랑스 혁명을 이끌게 되는 장 폴 마라, 조르주 당통, 조제프 기요탱 등이 자주 드나드는 교류의 장이 되었다.
1789년 혁명이 발발하자, 많은 인쇄소와 출판사가 밀집해 있던 생제르맹데프레, 특히 현재의 파리 6구에 속하는 코르들리에 구역은 혁명 활동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천 종의 팜플렛, 신문, 선언문이 제작되어 파리 시민들과 프랑스 전역에 혁명의 열기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면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교회 근처의 2층 건물이었던 감옥은 반혁명 혐의자로 가득 찼다. 이곳에는 주로 귀족 출신 인사, 혁명 정부의 성직자기본법을 거부한 사제, 외국인 등이 수감되었다. 1792년 9월에 이르러 파리의 감옥들은 포화 상태였고, 폐위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탕플 탑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전쟁 중이었고, 프로이센군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혁명 세력이 왕정을 복고시키지 않으면 파리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하며 파리 근교까지 진격해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감옥에 갇힌 정치범들은 프랑스의 적과 내통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파리의 혁명 세력은 계획적이지만 비인도적인 결정을 내렸다. 주로 창과 도끼로 무장한 이들을 각 감옥으로 보내 정치범들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국민공회 의원들이 동행하기도 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9월 첫 주 동안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감옥을 포함한 여러 감옥에서 수백 명의 수감자들이 학살당했다. 당시 파리를 방문했던 영국인 아서 영은 감옥 밖 거리가 말 그대로 피로 물들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한편, 혁명가들에 의해 폐쇄된 옛 코르들리에 수도원은 조르주 당통과 카미유 데물랭 등이 이끄는 가장 급진적인 파벌 중 하나인 코르들리에 클럽의 본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후 더 극단적인 파벌에 의해 숙청당하게 된다. 급진적인 혁명 선동가로 유명했던 스위스 출신 의사 장 폴 마라 역시 코르들리에 구역에 거주하며 활동했다.
혁명 기간 동안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은 폐쇄되었고, 종교적 상징물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수도원 건물들은 국가 재산으로 몰수되어 민간에 매각되거나 임대되었다. 그중 한 큰 건물은 화약 창고로 사용되다가 폭발 사고가 일어나 수도원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기도 했다.
이 지역의 또 다른 주요 수도원이었던 프티 오귀스탱 수도원 역시 폐쇄되고 내부의 종교 장식품들이 철거되었다. 비어 있던 건물은 고고학자 알렉상드르 르누아르가 인수하여, 국유화된 여러 교회와 수도원에서 나온 가구, 장식품, 예술품들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옛 수도원은 공식적으로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으로 지정되었으며, 수집된 회화 작품들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져 1793년 말 개관한 중앙 예술 박물관 소장품의 일부가 되었다.[1]
2. 5. 19세기
국립 고등 미술 학교는 건축, 회화, 조각을 가르치는 국립 학교로, 프랑스 혁명 이후 14 rue Bonaparte프랑스어의 쁘띠-오귀스탱 수도원 부지에 설립되었다. 19세기의 중요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교직원과 학생으로 활동했다. 교직원으로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와 귀스타브 모로 등이 있었고, 학생으로는 화가 피에르 보나르, 조르주 쇠라, 메리 커샛, 에드가 드가, 미국의 토마스 에이킨스 등이 있었다. 이 학교 출신 건축가로는 가브리엘 다비우, 샤를 가르니에, 미국의 줄리아 모건, 리처드 모리스 헌트, 버나드 메이벡 등이 있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6 rue de Furstenberg프랑스어에 거주하며 작업실을 마련하여 1857년부터 1863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나폴레옹 3세와 그의 센 강 지사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 1860년대에 진행한 대규모 도시 정비 사업은 이 지역의 지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좌안의 좁고 복잡한 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만은 처음에는 rue des Ecoles프랑스어를 주요 도로로 만들려 했으나, 경사가 너무 가파르다는 문제 때문에 대신 지역 중심부를 관통하는 생제르맹 대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 도로는 1889년에 완공되었다. 그는 또한 몽파르나스 기차역에서 센 강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인 rue de Rennes프랑스어 건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rue de Rennes프랑스어는 1871년 제2제국이 끝날 때까지 생제르맹데프레 교회 앞 광장까지만 완공되었고, 결과적으로 생제르맹 대로와 강 사이의 좁은 골목길들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생제르맹데프레는 또한 여러 외국 예술가들의 임시 거처이기도 했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몇 달 동안 rue Jacob프랑스어에 거주했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생제르맹데프레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에콜 데 보자르 근처 13 rue des Beaux‑Arts프랑스어에 위치한 작고 낡은 호텔 드 알자스(Hôtel d'Alsace)에서 지냈다. 그는 홀로 거리를 배회하며 가진 돈을 술을 마시는 데 사용했다. 그는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가난은 정말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너무 ''지저분''하고, 몹시 우울하고, 희망이 없습니다. 부디 할 수 있는 일을 해주세요."라고 토로했다.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 교정쇄를 보았지만,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은 거부하며 편집자에게 "나는 글을 쓸 수는 있지만, 글을 쓰는 즐거움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와 내 벽지는 죽음의 결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 중 하나는 가야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유머 감각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는 1900년 11월 30일에 사망했으며, 처음에는 도시 외곽의 작은 묘지에 묻혔다가 1909년에 페르 라셰즈 묘지로 이장되었다.
와일드가 사망한 작은 호텔은 이후 유명해져 말론 브란도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유명 인사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 호텔은 자크 가르시아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단장되었으며, 현재는 L'Hotel이라는 이름의 5성급 럭셔리 호텔로 운영되고 있다.
2. 6. 20세기: 실존주의와 재즈의 중심지
1921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서점 "Le Divan|르 디방fra"은 보나파르트가와 아베유가 교차로에 위치했으며, 스탕달 연구가 앙리 마르티노가 운영하며 동명의 문예지를 출간했다. 당시 생제르맹데프레는 하나의 작은 마을과 같았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르티에 생제르맹데프레는 파리 문화계와 지식계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같은 작가와 철학자, 쥘리에트 그레코, 레오 페레 같은 "센 강 좌안" 음악가, 장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영화인, 자크 프레베르 같은 시인, 알베르토 자코메티, 베르나르 캉탱 같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활동 무대로 삼았다. 이들은 카페 레 되 마고나 카페 드 플로르에 모여들었고, 브라스리 리프에서는 언론인, 배우, 정치인들이 만남을 가졌다.[5] 주요 출판사인 갈리마르, 르 쇠유, 그라세 등도 이 구역에 본사를 두었다.

20세기 전반기 생제르맹데프레와 6구 대부분은 인구 밀도가 높은 노동자 계급 동네였으나, 인구는 점차 감소했다. 6구의 인구는 1921년 101,584명에서 1954년 83,963명으로 줄었고, 1990년에는 47,942명까지 감소했다. 전후 시대에는 주거 환경도 열악하여, 1954년 기준 주택의 42%만이 실내 화장실을, 23%만이 샤워 시설이나 욕조를 갖추고 있었다. 1954년 노동자 계급은 구 인구의 19.2%를 차지했다.
전쟁 후 생제르맹데프레는 카페와 바, 다양성, 그리고 비순응주의적인 분위기로 유명해졌다. 이곳의 바는 전쟁 후 주둔한 미군과 해군에게 인기 있는 장소였으며, 당시 파리의 게이 커뮤니티가 만나는 주요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카페 드 플로르와 밤새 운영되던 카페 카르푸(Café Carrefour)가 그 중심이었다. 낮은 임대료와 대학과의 근접성 덕분에 아프리카 프랑스 식민지 출신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는데, 약 3천에서 5천 명의 아프리카 학생들이 거주했으며, 그들의 협회는 생제르맹 대로 184번지와 Rue Serpente|세르팡트 거리fra 28번지에 본부를 두었다. 노동자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의 중요한 사무실도 이곳에 위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생제르맹데프레와 인근 생미셸 지구에는 많은 소규모 재즈 클럽이 생겨났다. 주로 지하실에 위치했는데, 이는 공간 부족 문제와 늦은 시간 연주 소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1945년 처음 문을 연 Caveau des Lorientais|카보 데 로리앙테fra는 클라리넷 연주자 클로드 루테르와 그의 밴드를 통해 뉴올리언스 재즈를 파리에 소개했다. 이후 Le Vieux-Colombier|르 비외-콜롬비에fra, Rose Rouge|로즈 루즈fra, Club Saint-Germain|클럽 생제르맹fra, 특히 르 타부 같은 클럽들이 뒤를 이었다. 이곳에서는 시드니 베셰와 트럼펫 연주자 보리스 비앙이 이끄는 전통적인 뉴올리언스 재즈와 비밥이 공존했으며, 메즈 메즈로우, 앙드레 레벨로티, 기타리스트 앙리 살바도르, 가수 줄리에트 그레코 등이 활동했다. 이 클럽들은 대학생, 지식인, 문화계 인사들을 끌어모았고, 곧 유명인만 출입시키는 문지기를 둘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시드니 베셰는 1949년 플레옐 홀에서 열린 첫 재즈 페스티벌의 스타가 되었고, 1955년 올림피아 음악 홀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음악가들은 곧 전통 재즈파와 현대 재즈파로 나뉘었고, 1960년대 초 로큰롤이 유행하면서 대부분의 클럽은 문을 닫았다.
이 시기 생제르맹데프레의 문학적 삶은 비순응적인 분위기와 많은 서점 및 출판사가 밀집된 환경 속에서 꽃피웠다. 작가들은 주로 카페, 특히 장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자주 찾던 카페 드 플로르, 브라스리 리프, 레 되 마고에 모여 교류했다. 사르트르(1905–1980)는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이자 소설가, 극작가로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좌파 정치에도 깊이 관여하여 전후 프랑스 공산당 노선을 지지했으나, 헝가리 침공 이후 결별하고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8년에는 정부 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파업 중인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재즈 클럽에 자주 다녔다는 전설과 달리, 실제로는 너무 붐비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의 평생 동반자이자 철학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1902–1986) 역시 페미니즘의 선구자이자 작가로서 중요한 문학적 인물이었다.
이처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생제르맹데프레는 철학자, 작가, 배우, 음악가들이 모여드는 지적·문화적 용광로였다. 렌 가의 지하실 클럽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이 재즈, 샹송과 어우러졌다. 1950년대에는 파리의 주요 남성 동성애자 사교 장소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6]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광객 증가 등의 이유로 주거지로서의 인기는 뤽상부르 공원 남쪽 지역에 비해 다소 줄어들었다.
3. 문화와 예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르티에 생제르맹데프레는 파리 문화계와 지식계의 중요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곳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여드는 활기찬 공간이었다. 문학에서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이 활동했으며, 음악 분야에서는 쥘리에트 그레코와 레오 페레 등이 "센 강 좌안"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형성했다. 영화계의 장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 시인 자크 프레베르, 미술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베르나르 캉탱 등도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다.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카페 레 되 마고나 카페 드 플로르와 같은 유명 카페에 모여 교류했으며, 브라스리 리프는 저널리스트, 배우, 정치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었다.[5] 또한 갈리마르, 르 쇠유, 그라세와 같은 주요 출판사들이 이 구역에 자리 잡으면서 지적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 시기 생제르맹데프레는 실존주의 철학과 재즈 음악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지녔다.[6]
3. 1. 문학
1921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앙리 마르티노가 운영한 서점 르 디방은 동명의 문예지를 발간하였다. 이 서점은 보나파르트가와 아베유가 교차로에 위치하였으며, 당시 생제르맹데프레는 작은 마을과 같은 분위기였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르티에 생제르맹데프레는 파리 문화계와 지식계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곳은 많은 서점과 출판사가 밀집해 있었고, 비순응주의적인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같은 작가들, 쥘리에트 그레코, 레오 페레 같은 음악가들, 장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영화인들, 자크 프레베르 같은 시인, 알베르토 자코메티, 베르나르 캉탱 같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활동 무대로 삼았다. 주요 출판사인 갈리마르, 르 쇠유, 그라세 등이 이 구역에 본사를 두었다.
당시 작가들은 대부분 작은 방이나 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에 카페에 모여 교류했다. 특히 카페 드 플로르, Les Deux Magots|레 되 마고프랑스어, 브라스리 리프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주요 만남의 장소였다. 브라스리 리프에서는 저널리스트, 배우, 정치인들도 자주 모였다.[5]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철학자이자 실존주의의 창시자인 장폴 사르트르(1905–1980)였다. 그는 소설가, 극작가, 연극 연출가로도 활동했으며, 파리의 좌파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전쟁 후 프랑스 공산당을 지지했으나 헝가리 봉기에 대한 소련의 침공 이후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했고, 이후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과 마오쩌둥을 지지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반정부 시위에 참여해 빌랑쿠르의 르노 공장에서 파업 중인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생제르맹데프레의 재즈 클럽에 자주 다녔다는 통념과 달리, 실제로는 사람이 많고 시끄러워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사르트르의 평생 동반자이자 페미니즘의 선구적인 사상가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1902–1986) 역시 중요한 문학적 인물이었다. 그는 철학자이자 자서전 작가, 소설가로 활동했다.
렌가의 지하실 클럽과 브라스리에서는 프랑스 비밥 재즈가 탄생했으며, 보리스 비앙, 자노 므리와 같은 재즈 애호가들이 드나들었다. 이곳에서는 실존주의 철학과 미국 재즈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50년대에는 파리의 주요 남성 동성애자 사교 장소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6]
많은 작가들이 생제르맹데프레를 배경으로 글을 썼다. 소설가로는 보리스 비앙, 마르셀 프루스트, 가브리엘 마츠네프, 장 폴 카라칼라가 있으며, 시인 니콜라 그르니에는 일본 시 형식으로 이곳을 노래했다. 이집트 작가 알베르 코세리는 생애 후반을 이 구역의 한 호텔에서 보냈다. 미국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이곳 카페를 자주 찾았으며, 그 경험을 에세이집 ''고향의 노트''에 기록했다. 찰스 디킨스는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가상의 텔슨 은행이 "파리 생제르맹 구역에 설립"되었다고 묘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제르맹데프레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고, 주거지로서의 명성은 뤽상부르 공원 남쪽 지역에 비해 다소 줄어들었다.
3. 2. 음악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르티에 생제르맹데프레는 쥘리에트 그레코 (및 레오 페레 역시) 등으로 상징되는 "센 강 좌안" 음악과 함께 파리 문화계와 지식계의 명소가 되었다.[5] 철학자, 작가, 배우, 음악가들은 나이트클럽에서 한데 어울렸는데, 이곳에서 프랑스 비밥이 나왔다. 또한 렌가의 지하실 브라스리에서는 보리스 비앙, 자노 므리와 재즈광들이 드나들며 실존주의 철학이 미국 재즈와 공존했다.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생제르맹데프레와 인근 생미셸 지구는 공간 부족 문제와 늦은 시간의 소음 문제를 피하기 위해 주로 지하실에 많은 소규모 재즈 클럽이 생겨났다. 1945년 생미셸 대로 근처에 처음 문을 연 Caveau des Lorientais|카보 데 로리앙테프랑스어는 클라리넷 연주자 클로드 루테르와 그의 밴드가 연주하는 뉴올리언스 재즈를 파리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이 클럽은 곧 문을 닫았지만, Le Vieux-Colombier|르 비외-콜롱비에프랑스어, Rose Rouge|로즈 루즈프랑스어, Club Saint-Germain|클럽 생제르맹프랑스어, 특히 Le Tabou|르 타부프랑스어 같은 지하실 클럽들이 생제르맹데프레 안이나 근처에 뒤이어 생겨났다.
이곳의 음악 스타일은 시드니 베셰와 트럼펫 연주자 보리스 비앙이 이끄는 전통적인 뉴올리언스 재즈와 비밥 모두였다. 메즈 메즈로우, 앙드레 레벨로티, 기타리스트 앙리 살바도르, 가수 쥘리에트 그레코 등도 활동했다. 이 클럽들은 인근 대학의 학생들, 파리의 지식인 사회, 그리고 파리 문화계의 유명인사들을 끌어들였다. 클럽들은 곧 붐비고 연기가 자욱한 지하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문지기를 두기도 했다. 시드니 베셰는 1949년 플레옐 홀에서 열린 첫 번째 재즈 페스티벌의 스타였으며, 1955년 올림피아 음악 홀에서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등 몇몇 음악가들은 유명한 경력을 쌓았다. 음악가들은 곧 전통적인 뉴올리언스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더 현대적인 변종을 원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대부분의 클럽은 음악적 취향이 로큰롤로 바뀌면서 1960년대 초까지 문을 닫았다.
1961년, 싱어송라이터 기 베아르는 Il n'y a plus d'après|일 니 아 플뤼 다프레프랑스어를 만들어[4] 생제르맹데프레를 노래했다. 이 노래는 쥘리에트 그레코에 의해 커버되었다. 싱어송라이터 알랭 소숑은 베아르의 노래에 그려진 지역의 분위기가 현재 없어졌다고, 자신이 만든 샹송 Rive gauche à Paris|리브 고슈 아 파리프랑스어에서 자신의 노스탤지어를 노래했다. 1967년에도 싱어송라이터 레오 페레는 Quartier Latin|카르티에 라탱프랑스어 안에서 생제르맹데프레의 변해가는 것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3. 3. 미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르티에 생제르맹데프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베르나르 캉탱과 같은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파리 문화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술가들은 이곳을 거닐며 카페 레 되 마고나 카페 드 플로르 같은 곳에서 교류했다.[5]이 지역에는 국립 고등 미술 학교(École des Beaux-Arts)가 있다. 이 학교는 건축, 회화, 조각을 가르치는 국립 학교로, 프랑스 혁명 이후 쁘띠-오귀스탱 수도원 부지인 rue Bonaparte|뤼 보나파르트프랑스어 14번지에 세워졌다. 19세기에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와 귀스타브 모로 같은 중요한 예술가들이 교수로 있었고, 화가 피에르 보나르, 조르주 쇠라, 메리 커샛, 에드가 드가, 미국의 토마스 에이킨스 등이 학생으로 거쳐 갔다.
또한,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rue de Furstenberg|뤼 드 퓌르스탕베르프랑스어 6번지에 거주하며 작업실을 마련했고, 1857년부터 1863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4. 교통
이 지역으로 접근 가능한 파리 메트로 역은 다음과 같다.
- 생제르맹데프레
- 마비용
5. 현재의 생제르맹데프레
센 강 강변에서 남쪽으로 뻗은 보나파르트 거리와 몽파르나스 타워까지 이어지는 렌느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의 생제르맹 데 프레 광장 주변을 동서로 생제르맹 대로가 통과한다. 이 일대가 생제르맹 데 프레 지구의 "심장부"로 여겨진다.
지구의 중심에는 이 지구와 이름이 같은 생제르맹 데 프레 교회가 있으며, 그 남쪽에는 생 쉴피스 교회가 위치한다.
포부르 생제르맹(7구) 지역으로 이어지는 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을 제르마노프라탱(Germanopratinfra)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파리에서도 지가와 임대료가 매우 높은 고급 주택가이자 상업 지구 중 하나이다.
주변 파리 지하철역으로는 생 쉴피스 역과 생제르맹 데 프레 역이 있다. 또한, 생제르맹 데 프레 주변의 6구 및 7구의 포부르 생제르맹에 걸쳐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이나 국립 고등 미술학교와 같은 그랑제콜을 비롯한 교육, 연구, 문화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참조
[1]
논문
Du musée du louvre au territoire Louvre ?
http://dx.doi.org/10[...]
2019-09-01
[2]
웹사이트
Histoire de l'église Saint-Germain-des-Prés
http://www.eglise-sg[...]
[3]
웹사이트
Diderot le Parisien
http://www.terresdec[...]
『…Egalement le Procope, haut lieu des Lumières mais où contrairement à Voltaire, « il semble que Diderot et Rousseau n’y sont pas tant venus que cela », nuance Jean-Christophe Sarrot. Il arrivera néanmoins aux encyclopédistes de s’y retrouver, ainsi qu’au café Landelle, rue de Buci.』
[4]
웹사이트
chanson "il n'y a plus d'après", paroles et musique de Guy Béart
http://www.musikiwi.[...]
[5]
웹인용
Le lieux : la Brasserie Lipp
http://www.brasserie[...]
2020-07-05
[6]
간행물
Des folles de Saint-Germain-des-Prés au fléau social
http://semgai.free.f[...]
éditions Complexe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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