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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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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은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전자 음악, 음렬주의, 공간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시도를 했다. 1928년 쾰른 근교에서 태어나 쾰른 음악원에서 작곡을, 쾰른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다름슈타트 하계 강좌에서 올리비에 메시앙에게 사사했다. 1950년대부터 전자 음악을 실험하고, '콘트라-풍크테'와 같은 작품으로 점묘주의적 작곡법에서 탈피했다. 1977년부터 2003년까지 7개의 오페라로 구성된 연작 '빛'을 작곡했으며, 2007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클랑' 연작을 작업했다. 그의 음악은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후반 가장 논란이 많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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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04년 3월 7일 쾰른에서
2004년 촬영
본명(정보 없음)
출생1928년 8월 22일
출생지(현재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사망2007년 12월 5일
사망지독일 퀴르텐
국적독일
직업작곡가
장르현대음악
악기(정보 없음)
활동 시기(정보 없음)
학력본 대학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경력
영향(정보 없음)

2. 일대기

쾰른 근교 부르크뫼드라트에서 태어난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은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 오보에 등 여러 악기를 배우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쾰른 음악원에서 프랑크 마르탱에게 작곡을, 쾰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51년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서 카럴 후이바르츠를 만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올리비에 메시앙(분석)과 다리우스 미요(작곡)를 사사했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본 대학교에서 베르너 마이어-에플러에게 음성학, 음향학, 정보과학을 배웠고, 1953년에는 쾰른 라디오 방송국에 음악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전자 음악을 실험했다.

1950년대에 유행하던 점묘주의에서 벗어난 작품번호 1 《콘트라-풍크테》(Kontra-Punkte)로 주목받았으며, 음악 이론 잡지 《Die Reihe》 편집자로 활동하며 새로운 음악 이론을 알렸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연주회와 강습회를 열었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데이비스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초빙 교수로 재직했다. 1971년부터는 쾰른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0년대에는 모멘테, 텔레뮤직, 슈티밍 등 새로운 음악 개념을 제시하며 실험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 1970년대에는 포르멜 기법을 개발하고, 만트라, 기도, 티어크라이스, 시리우스 등 음악극 작품을 시도했다. 그의 음렬주의 음악과 전자 음악심리학음향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백남준, 비틀즈, 크라프트베르크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77년부터 2003년까지는 요일을 소재로 한 7개의 연작 오페라 《빛》(Licht) 작곡에 매진했다. 2007년 12월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기 전까지 창작 활동과 연주회 참여를 이어갔다.

2. 1. 어린 시절과 전쟁 경험 (1928-1945)

쾰른 근교의 Mödrath|뫼드라트de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인 지몬 슈토크하우젠이었고, 어머니 게르트루트(결혼 전 성씨는 슈투프)는 쾰른 만 노이라트에 사는 부유한 농부 집안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 오보에 등 여러 악기를 배우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1932년, 어머니 게르트루트가 3년 동안 세 번의 임신을 겪은 후 정신 붕괴를 겪고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몇 달 후에는 둘째 아들 헤르만-요제프("헤르만첸")가 요절했다. 1935년에는 알텐베르크로 이사하여 그곳 교회에 매료되었고, 1938년에는 알텐베르크 교회의 성찬회에 참여하는 등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했다. 같은 해, 아버지 지몬은 집안의 가정부였던 루치아와 재혼했지만, 카를하인츠와 루치아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알텐베르거 돔, c. 1925, 슈톡하우젠이 처음으로 음악 수업을 받은 곳


1941년, 어머니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같은 병원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이상했다. 그녀가 나치의 "쓸모없는 식객" 살해 정책의 희생자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가족에게 보내진 공식 서신에는 그녀가 1941년 6월 16일에 사망했다고 거짓으로 주장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녀는 1941년 5월 27일 헤센-나사우의 하더마르 살해 시설에서 89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1942년 1월, 카를하인츠는 잔텐에 있는 교사 양성 학교에 기숙하며 피아노 훈련을 계속 받았고, 오보에바이올린도 공부했다.

1944년 말, 슈토크하우젠은 베드부르크에서 들것 운반병으로 징집되었다. 1945년 2월, 그는 알텐베르크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휴가를 나온 지몬은 아들에게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잘 돌보렴."이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실종된 것으로 여겨졌으며 헝가리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2. 2. 전후 음악 교육과 다름슈타트 시대 (1945-1951)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쟁 고아가 된 슈토크하우젠은 농장 일, 댄스 음악 피아노 반주, 피아니스트 등 여러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47년 4월, 쾰른 국립음악대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하여 음악 교육 과정에는 불합격했지만 피아노 과정에는 합격했다. 이후 주차장 관리인, 경비원 등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1948년에는 음악 교육 과정에도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쾰른 국립음악대학교에서 음악 교육학과 피아노를 전공했고, 쾰른 대학교에서 음악학, 철학, 독일학을 공부했다. 헤르만 슈뢰더에게서 화성법과 대위법을 배웠으나, 1950년까지는 작곡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해 말, 쾰른에서 7년간 재직하게 된 스위스 작곡가 프랑크 마르탱의 수업을 들었다.

1950년에는 파울 힌데미트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적인 「도리스를 위한 합창곡」과 12음 기법을 사용한 「소나티네」 등을 작곡했다.

1951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 음악 강습회에 처음 참가하여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황금 송아지의 춤」에는 실망했지만, 올리비에 메시앙의 「음가와 강도의 에튀드」에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같은 강습회에 참가했던 벨기에 작곡가 카럴 후이바르츠를 만나 신빈악파의 작곡법을 배웠다.

2. 3. 파리 유학과 초기 작품 활동 (1952-1960)

1951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 음악 강습회에서 카럴 후이바르츠를 만난 후, 프랑스 파리로 가서 올리비에 메시앙(분석), 다리우스 미요(작곡)에게 배웠다.[10] 1년 정도 메시앙의 악곡 분석 수업을 들으며, 피에르 불레즈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시리얼 작곡법에 대한 숙련도를 높였다.[10]

1953년 쾰른 라디오 방송국에 신설된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전자 음악을 실험하였다.[2] 피에르 셰페르의 파리 구체 음악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Konkrete Etüde''(1952년)를 작곡했고, 1953년 쾰른의 NWDR 스튜디오에서 ''Electronic Studies''(1953년1954년)를 통해 전자 음악으로 전환했다. 1954년 ~ 1956년까지 본 대학교에서 베르너 마이어-에플러와 함께 음성학, 음향학, 정보과학을 배웠다.

음렬주의 음악과 전자음악은 자신이 공부했던 심리학, 음향학 기반에서 기초한다고 하였다.[2] 1950년대에 유행하던 점묘주의적 작곡법에서 탈피한 작품번호 1 《콘트라-풍크테》(Kontra-Punkte, 1952년-1953년)로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55년-1956년에는 전자 음악과 구체 음악을 결합한 "소년의 노래"를 작곡했다.

1955년-1957년에는 3개의 풀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룹펜''을 작곡했다. 이 곡에서는 세 개의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팡파르와 다양한 속도의 악절이 던져져 공간에서의 움직임의 인상을 준다. 1958년-1960년에는 전자 음악과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콘탁테"를 작곡했다.

;주요 작품

  • 《콘트라-풍크테》(Kontra-Punkte, 1952-53)
  • 소년의 노래(1955-56)
  • 그룹펜(1955-57)
  • 콘탁테(1958-60)

2. 4. 1960년대: 새로운 음악 개념과 실험 (1961-1969)

1960년대에 슈토크하우젠은 모멘트 형식, 직관 음악 등 새로운 음악 개념을 제시하며 실험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 라이브 일렉트로닉스 작품도 이 시기에 나왔다.

1966년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NHK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서 《텔레뮤직》(1966) 등을 작곡했다.[11]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프라노 독창, 4개 그룹의 합창과 13악기를 위한 모멘테(1962-64/69),[10] 6명의 연주자를 위한 미크로포니 I(1964), 전자 음악 텔레뮤직(1966),[11] 2시간에 달하는 대곡 힘넨(1966-67),[11] 6명의 가수를 위한 슈티밍(1968) 등이 있다.[11] 슈티밍은 낮은 B플랫 음의 배음만을 기본 구조로 하여 전곡이 구성되어, 호라치우 라두레스쿠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1]

2. 5. 1970년대: 포르멜 기법과 음악극 (1970-1977)

1970년대에 슈토크하우젠은 포르멜 기법을 개발하여 선율적이면서도 총렬주의적인 작품을 작곡했다.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신체 동작을 포함하는 음악극 작품을 시도했다.

1970년에 작곡된 《만트라》(Mantra)는 두 대의 피아노와 링 변조를 위한 작품으로, 포르멜 기법의 초기 예시를 보여준다.[10]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작곡된 《기도》(Inori)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무용과 같은 신체 동작을 음악적 표현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했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작곡된 《티어크라이스》(Tierkreis)는 12궁도(황도 12궁)를 주제로 한 12개의 선율로 구성된 작품으로, 다양한 악기 편성으로 연주될 수 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작곡된 《시리우스》(Sirius)는 소프라노, 베이스, 트럼펫, 베이스클라리넷과 전자 음악을 위한 음악극 작품으로, 지구와 우주를 탐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2]

2. 6. 연작 오페라 《빛》 (1977-2003)

1977년부터 2003년까지 요일을 소재로 한 7개의 연작 오페라 《빛》(Licht) 작곡에 전념하였다. 이 작품은 종교적, 신화적 요소를 담고 있으며, 다양한 음악적, 연극적 실험을 보여준다.[11]

2. 7. 마지막 작품: 《클랑》 (2004-2007)

2004년부터 그는 하루 24시간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연작 《클랑》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7년 12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3. 주요 작품 경향

슈토크하우젠은 총렬주의에 기반한 "점묘 음악"에서 시작하여, "군의 음악", "모멘트 형식"을 거쳐 멜로디와 총렬주의를 통합한 "포르멜 기법"으로 자신의 작곡 기법을 발전시켰다.[10] 또한 전자 음악을 작곡하고, 생 연주를 전자적으로 변조하는 라이브 일렉트로닉스 작품도 제작했으며,직관 음악으로 불리는 불확정성과 다의성을 시도한 시기도 있었다.[10]


  • 총렬주의: 올리비에 메시앙의 "음가와 강도의 모드"의 영향을 받아, 음악의 여러 요소(음높이, 음가, 강세 등)를 수열로 조직하여 작곡하는 기법이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확장한 개념이다.
  • 점묘 음악: 총렬주의에 기반하여, 개별 음들이 점처럼 분산되어 나타나는 음악이다. 초기 작품인 Kreuzspiel(1951), Klavierstücke I–IV(1952) 등에서 나타난다.
  • 군의 음악: 개별 음이 아닌 음들의 집합체인 '군'을 중심으로 작곡하는 기법이다. 1952년부터 슈토크하우젠의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Klavierstück I(1955)에서 처음으로 공개 설명되었다.
  • 모멘트 형식: 각 부분이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형식으로, Kontakte(1958–60), Momente(1962–64/69) 등에서 나타난다.
  • 전자 음악: 전자적으로 생성되거나 변조된 소리를 사용하는 음악이다. Electronic Studies(1953, 1954), Gesang der Jünglinge(1955–56) 등에서 나타난다.
  • 공간 음악: 음향의 공간적 배치를 음악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는 음악이다. Gesang der Jünglinge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 직관 음악: 악보 대신 텍스트 지시문을 통해 연주자의 즉흥 연주를 유도하는 음악이다.
  • 포르멜 기법: 짧은 선율 소재를 바탕으로 작품 전체의 구조를 조직하는 기법이다.
  • 라이브 일렉트로닉스: 생 연주를 전자적으로 변조하는 기법이다.

4. 작품 목록

슈토크하우젠은 370개의 개별 작품을 작곡했다. 그는 종종 음악적 전통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났으며 그의 작품은 올리비에 메시앙, 에드가르 바레즈, 안톤 베베른의 영향을 받았으며, 영화와 피에트 몬드리안[1][2][3]파울 클레와 같은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4]


  • 콘트라-풍크테 (1953)
  • 소년의 노래 (1956)
  • 5개의 목관악기를 위한 다(多)속도 (1956)
  • 전자 음향,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접촉 (1960)
  • 피아노곡I - XIX
  • 모멘테 (1977)
  • 헬리콥터 현악 4중주 (1994)
  • 피아노 곡 I~IV (1952)
  • 피아노 곡 V~X (1954-55)
  • 세 그룹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룹펜 (1955-57)
  • 네 그룹의 오케스트라와 네 그룹의 합창을 위한 카레 (1959-60)
  • 전자 음악과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콘탁테 (1958-60)
  • 소프라노 독창, 4개 그룹의 합창, 13명의 기악 연주자를 위한 모멘테 (1962-64, 완성 버전 1969)
  • 오케스트라, 4개의 정현파 발생기와 4개의 링 변조기를 위한 Mixtur|믹스투르영어 (1964)
  • 전자 음악 텔레뮤직 (1966)
  • 전자 음악 힘넨 (1966-67)
  • 15개의 직관 음악 Aus den sieben Tagen|일곱 날로부터영어 (1968)
  • 한 명의 연주자와 단파 라디오를 위한 Spiral (Stockhausen)|슈피랄영어 (1968)
  • 두 명의 피아니스트를 위한 만트라 (1970)
  • 무용수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기도 (1973-74)
  • 띠아크라이스(황도대) (1975)
  • 전자 음악과 트럼펫, 소프라노 독창, 베이스 클라리넷, 베이스 독창을 위한 음악극 시리우스 (1975-77)
  • 클라리넷 (또는 다양한 독주 악기)을 위한 우정을 담아서 (1977)
  • 빛 (슈토크하우젠) (LICHT) (1977-2003)
  • * 빛으로부터 목요일 (1978-80)
  • * 빛으로부터 토요일 (1981-83)
  • * 빛으로부터 월요일 (1984-88)
  • * 빛으로부터 화요일 (1977/1987-91)
  • * 빛으로부터 금요일 (1991-94)
  • * 빛으로부터 수요일 (1995-97)
  • ** 헬리콥터 현악 사중주
  • * 빛으로부터 일요일 (1998-2003)
  • 클랑 (하루의 24시간) (KLANG) (2004-2007, 미완성)
  • * 우주의 맥박


1960년, 슈토크하우젠은 《소년의 노래》(Gesang der Jünglinge) 이후 처음으로 성악곡 작곡으로 돌아와 4개의 오케스트라와 4개의 합창을 위한 《카레》(Carré)를 작곡했다. 2년 후, 그는 소프라노 독창, 4개의 합창단과 13명의 기악 연주자를 위한 광범위한 칸타타 《모멘테》(Momente, 1962-64/69)를 시작했다. 1963년, 슈톡하우젠은 무제한의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기본적인 음 소재와 해당 소재가 적용될 복잡한 변환 시스템을 담은 "실현을 위한 2 × 7 페이지"인 《플러스-마이너스》(Plus-Minus)를 만들었다. 1960년대 후반 동안, 그는 《프로세션》(Prozession, 1967), 《단파》(Kurzwellen), 《스파이럴》(Spiral, 1968)과 같은 라이브 연주를 위한 작품에서 "과정 작곡"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했으며, 《7일에서》(Aus den sieben Tagen, 1968)와 《다가올 시간을 위해》(Für kommende Zeiten, 1968–70)의 언어적으로 묘사된 "직관적 음악" 작품에서 절정에 달했다. 《옐렘》(Ylem, 1972)과 《헤르스트무지크》(Herbstmusik, 1974)의 처음 세 부분과 같은 그의 후기 작품 중 일부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과정 작곡의 여러 작품은 엑스포 70에서 열린 종일 프로그램에 선보였으며, 슈톡하우젠은 이를 위해 두 개의 비슷한 작품, 2명의 연주자를 위한 《폴》(Pole)과 3명의 연주자를 위한 《엑스포》(Expo)를 작곡했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톱》(Stop, 1965), 목관 5중주를 위한 《작별》(Adieu, 1966), 유니버설 에디션의 알프레드 칼무스를 기리기 위해 1968-69년에 작곡된 《Dr. K 섹스텟》과 같은 다른 작품에서 그는 연주자들에게 더 제한적인 즉흥 연주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전자를 위한 《믹스투어》(Mixtur, 1964/67/2003), 탐탐, 2개의 마이크, 2개의 가변저항이 있는 필터(6명의 연주자)를 위한 《미크로포니 I》(Mikrophonie I, 1964), 합창단, 햄몬드 오르간, 4개의 링 변조기를 위한 《미크로포니 II》(Mikrophonie II, 1965) 및 피드백이 있는 멜로디 악기를 위한 《솔로》(Solo, 1966)에서 라이브 전자를 개척했다. 즉흥 연주 또한 이 모든 작품, 특히 《솔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또한 테이프 레코더를 위한 두 개의 전자 작품, 《텔레뮤직》(Telemusik, 1966)와 《힘넨》(Hymnen, 1966–67)를 작곡했다. 후자는 부분적으로 즉흥 연주하는 솔리스트가 있는 버전과 오케스트라가 있는 4개의 "영역" 중 세 번째 버전으로도 존재한다. 이 시기에 슈톡하우젠은 세계 전통에서 미리 존재하는 음악을 자신의 작품에 통합하기 시작했다. 《텔레뮤직》은 이러한 경향의 최초의 명백한 사례였다.

1968년, 슈톡하우젠은 쾰른 보컬 앙상블을 위해 낮은 B-플랫의 배음만을 기반으로 한 1시간 길이의 작품인 성악 6중주 《슈티밍》(Stimmung)을 작곡했다. 그 다음 해, 그는 4개의 오케스트라 그룹을 위한 《프레스코》(Fresco)를 만들었는데, 이는 《방랑음악》("로비 음악") 작품이었다. 이것은 의 베토벤홀 강당 단지 내의 로비와 부지에서 약 5시간 동안 연주될 예정이었으며, 시설의 강당에서 열리는 그의 음악 콘서트(부분적으로 동시 진행) 그룹의 전후 및 진행 중에 연주되었다. 이 전체 프로젝트는 《베토벤홀을 위한 음악》(Musik für die Beethovenhalle)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것은 슈톡하우젠이 1967년과 1968년 다름슈타트에서 진행한 두 개의 집단 작곡 세미나 프로젝트, 《앙상블》(Ensemble)과 《한 집을 위한 음악》(Musik für ein Haus)에서 선례가 있었으며, 1971년 5개의 공간적으로 분리된 그룹을 위한 "공원 음악" 작품 《별의 소리》(Sternklang), 같은 해에 작곡된 오케스트라 작품 《트랜스》(Trans), 13개의 동시 "솔리스트와 듀엣을 위한 음악 장면"인 《리에주를 위한 알파벳》(Alphabet für Liège, 1972)으로 이어졌다.

슈토크하우젠은 2003년에 「빛」을 완성한 후, 2004년부터 사망한 2008년까지 1일 24시간을 음악화하려는 24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 「클랑 - 1일의 24시간」(2004년-2007년)의 작곡에 전념했다. 1970년대 이후의 포르멜 기법을 대신하여 2옥타브의 24음으로 구성된 시리얼이 이 연작의 기초가 되었다[5]

5. 교육 활동

슈토크하우젠은 1953년부터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 음악 강습회에서 강연을 시작했고, 1957년에는 작곡 강사로 초빙되었다. 1963년에는 쾰른 현대 음악 강습(후에 쾰른 현대 음악 연구소)을 창설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9]

1977년부터 오페라 <빛>의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교직을 사임했지만, 1998년부터는 퀴르텐에서 "슈토크하우젠 강습회"를 개최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9] 이 강습회에서는 자신의 작품과 음악 어법을 상세히 강의하고, 작품의 정통적인 연주 해석을 후세 연주자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타악기 연주자 스튜어트 게르버와 클라리넷 연주자 미켈레 마렐리 등이 이 강습회를 통해 기량을 연마했으며, 바리톤 가수 마츠다이라 케이, 소프라노 가수 쿠도 아카네, 피아노 연주자 호도 레이코 등의 일본인 연주자들도 이 강습회에서 배웠다. 슈토크하우젠 사후에도 이 강습회는 계속되고 있다.

5. 1. 주요 제자

지르베르 아미, 클라렌스 바로우, 코르넬리우스 카르듀, 장-클로드 엘로이, 에트베시 페테르, 제라르 그리제, 요크 헬러, 헬무트 라헨만, 루카 롬바르디, 존 맥과이어, 호르헤 페이싱요, 호라치우 라두레스쿠, 볼프강 림, 시노하라 마코토, 로저 스몰리, 클로드 비비에, 라 몬테 영, 한스 첸더, 울리히 주세 등이 슈토크하우젠에게 지도를 받았다.[9]

6. 평가 및 영향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은 20세기 후반, 현대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친 주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음악은 전자 음악, 총렬주의, 공간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후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6]

피에르 불레즈는 슈토크하우젠을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칭송했으며,[18]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역시 《콘트라-풍크테》를 비롯한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슈토크하우젠의 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탄식》, 《악장》, 《변주곡: 올더스 헉슬리를 추모하며》 등의 작품에서 《구르펜》을 비롯한 슈토크하우젠 음악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6]

해리슨 버트위슬, 브라이언 퍼니호, 리처드 배럿 등 영국의 작곡가들도 슈토크하우젠의 영향을 받았다. 버트위슬은 《제트마세》와 《구르펜》, 퍼니호는 《피아노 소품 I–IV》, 《십자놀이》, 《대위점》, 배럿은 《만트라》, 《구르펜》, 《카레》, 《피아노 소품 X》, 《이노리》, 《유빌레움》 등에서 받은 영향을 언급했다.

프랑스의 장-클로드 엘루아는 슈토크하우젠을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꼽았으며, 네덜란드의 루이 앤드리센과 독일의 볼프강 림은 《모멘테》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덴마크의 페르 뇌르고르는 《콘탁테》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2004년, 쾰른 사운드 스튜디오 N에서 ''Sonntag aus Licht''의 ''Angel Processions'' 녹음 믹스다운 작업 중인 슈톡하우젠


슈톡하우젠(정중앙), 알폰스 및 알로이스 콘타르스키가 이란 시라즈 예술 축제에서 공연하는 ''Mantra''를 위한 믹싱 데스크에 앉아있다, 1972


슈토크하우젠의 영향력은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분야까지 뻗어 나갔다. 비틀즈, 크라프트베르크, 프랭크 자파를 비롯하여, Can, 코일, 비에르크, 소닉 유스, 마일스 데이비스, 허비 행콕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23] 테크노힙합의 샘플링 기법 역시 그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로빈 매코니는 슈토크하우젠의 음악이 "매우 뛰어난 깊이와 합리적인 완결성"을 지니고 있으며, 베토벤에 비견될 만큼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크리스토퍼 발렌타인은 슈토크하우젠이 실험 음악과 아방가르드 음악 사이의 변증법이 나타나는 중요한 지점에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슈토크하우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신앙심은 초기부터 만년까지 많은 작품에 반영되었다. 《소년의 노래》는 《구약성서》를, 《클랑》의 2시간째 《기쁨》은 성가 《오소서, 창조주이신 성령이여》를 텍스트로 사용했고, 《그룹》의 악보 마지막에는 "DEO GRATIAS(신에게 감사)"라고 적혀 있다. 그는 2005년 방일 강연에서 "나의 모든 작품은 신을 찬양하기 위해 작곡되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17]

하지만, 그의 독특한 성격과 언행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그를 "오만", "에고이스트", "과대망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19][20]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격의 없고 진솔한 모습, 팬들과의 소통, 강습회 참가자들의 질문에 대한 진지한 답변 등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21] 잉고 메츠마허는 슈토크하우젠이 "정말로 마음이 넓고, 타인에게 원조를 아끼지 않고, 항상 사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6. 1. 논란

슈토크하우젠의 음악은 "세상을 형성하고 변화시키며, 삶과 현실의 진실, 정신에 의해 결정되는 미래로의 창조적인 출발"에 대한 높은 기대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새로운 음악 역사상 그 어떤 것보다도 양극화 효과를 가지며,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격렬한 반대, 심지어 증오를 유발한다"라고 평가받는다.

1968년 학생 봉기 이후, 독일 음악계는 정치화되었고, 슈토크하우젠은 좌파 진영으로부터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코넬리우스 카르듀와 콘라트 뵈머는 스승이었던 슈토크하우젠을 비난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슈토크하우젠이 엘리트주의적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그가 신비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1969년 11월 15일, 슈토크하우젠의 작품 ''프레스코'' 초연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리허설부터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1분에 1옥타브보다 빠르지 않은 글리산도"와 같은 지시에 이의를 제기했고, 일부는 예술가 노조에 문의하기도 했다. 초연 중에는 "슈토크하우젠 동물원. 먹이를 주지 마세요."와 같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등장했고, 일부 음악가들은 항의하며 공연장을 떠났다. 결국 공연은 예정된 4~5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260분 만에 종료되었다.

슈토크하우젠의 발언 중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은 9.11 테러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테러를 "예술의 최대 걸작", "루치펠가 행하는 전쟁의 예술"이라고 표현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각계에서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 결과 슈토크하우젠의 연주회가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발언은 인터뷰 중 발언이 왜곡된 것이었으며, 최초 보도를 한 함부르크의 신문사는 며칠 후 오보를 인정하고 사과 기사를 게재했다.

7. 수상 경력

연도상 이름비고
1964독일 축음기 비평가상[7]
1966, 1972SIMC상이탈리아, 오케스트라 작품 부문 [7]
1968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음악 그랑프리[7]
1968그랑프리 뒤 디스크프랑스 [7]
1968, 1969, 1971에디슨상네덜란드 [7]
1974독일 연방 공로 훈장 1등급[7]
1981이탈리아 음악 평론가상'빛의 목요일'
1982독일 축음기상독일 음반 아카데미 [7]
1983디아파종 도르프랑스, 빛의 목요일 [7]
1985예술 문화 훈장 (Commandeur de l'Ordre des Arts et des Lettres)프랑스 [7]
1986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7]
1990아르스 일렉트로니카상오스트리아, 린츠 [7]
1992국제 음악 협의회 피카소 메달[7]
1992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공로 메달[7]
1992, 1994, 1997, 2000, 2001, 2003, 2004, 2005, 2009독일 음악 출판 협회상루치페르의 춤 (1992), 야레스라우프 (1994), 벨트파르라멘트 (1997), 에바의 첫 번째 출생 (2000), 헬리콥터 현악 사중주 (2001), 미카엘리온 (2003), 멈춤과 시작 (2004), 호흐차이텐 (2005), 모멘테 (2009) [7]
1995함부르크 자유 한자 도시 바흐상[7]
1996에디슨상네덜란드, 만트라 [7]
1996쾰른 문화상[7]
2001폴라 음악상왕립 스웨덴 예술 아카데미 [7]


참조

[1] 웹사이트 Stockhausen: The Father of Electronic Music https://sites.barbic[...]
[2] 서적 Stockhausen 1989
[3] 웹사이트 STOCKHAUSEN: Helicopter String Quartet - Arditti Quartet (DVD) https://www.classics[...] 2024-06-12
[4] 논문 Making the Postwar Avant-garde More German https://www.proquest[...] 2015-12
[5] 뉴스 How Stockhausen made pop weird https://www.irishtim[...]
[6] 서적 Craft and Stravinsky 1960
[7] 웹사이트 Karlheinz Stockhausen: Short Biography http://www.karlheinz[...]
[8] 웹사이트 Gemeinde Kürten website https://web.archive.[...] 2008-12-10
[9] 웹사이트 公式サイトのプレスリリース http://www.stockhaus[...]
[10] 문서 パリのシュトックハウゼン 1952.1.16〜1953.3.27
[11] 서적 ラルース世界音楽事典 1989
[12] 문서 Texte zur Musik Vol.15
[13] 문서 Stockhausen Edition no.80, Version 1998
[14] 웹사이트 KARLHEINZ STOCKHAUSEN: CARRÉ http://www.karlheinz[...] 2021-07-09
[15] 웹사이트 Stockhausen Books http://www.stockhaus[...] 2021-07-09
[16] 문서 『ExMusica』プレ創刊号、180頁
[17] 문서 松平敬「シュトックハウゼン《宇宙の脈動》について」『ベルク年報』第13号所収より
[18] 문서 清水穣「NACH・KLANG―シュトックハウゼン追悼」『音楽の友』2008年2月号
[19] 웹사이트 松平敬「シュトックハウゼン来日公演レポート」 http://matsudaira-ta[...]
[20] 웹사이트 松平敬「シュトックハウゼン講習会2001レポート」 http://matsudaira-ta[...]
[21] 서적 新しい音を恐れるな 春秋社 2010
[22] 웹사이트 巨星シュトックハウゼンを知る(上) https://www.suntory.[...] 2021-07-09
[23] 웹사이트 Stockhausen and the Beatles http://www.stockhaus[...]
[24] 웹사이트 Karlheinz Stockhausen: Short Biography http://www.karlheinz[...] 2021-11-01
[25] 웹사이트 Gemeinde Kürten website https://web.archive.[...] 2008-12-10
[26] 문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27] 웹인용 Polar Music Prize https://web.archive.[...] 201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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