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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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력제(萬曆帝) 주이균(朱翊鈞)은 명나라의 제14대 황제로, 1572년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620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했다. 그는 융경제의 아들이며, 장거정의 보좌를 받아 초기에는 '만력 중흥'이라 불릴 정도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장거정 사후, 정치가 문란해지고, 임진왜란 지원, 당쟁 격화, 환관의 횡포, 재정 악화, 자연 재해 등으로 명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만력제는 후궁의 편애와 황위 계승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며, 후반에는 정치에 무관심하여 조정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여 '고려 황제'로 불리기도 했으며, 만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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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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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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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주익균 (t=朱翊鈞) |
자 | 호: 우재 |
묘호 | 신종 (神宗) |
시호 |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 (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 |
능호 | 정릉, 명십삼릉, 베이징 |
연호 | 만력 (萬曆) |
재위 기간 | 1572년 7월 5일 ~ 1620년 8월 18일 |
즉위일 | 1572년 7월 19일 |
정치 | |
대수 | 제14대 |
전임 | 융경제 |
후임 | 태창제 |
섭정 | 인성황태후 진씨 (1572–1582) 효정황태후 이씨 (1572–1582) 장거정 (1572–1582) |
가계 | |
아버지 | 융경제 |
어머니 | 효정황후 |
배우자 | 효단현황후 (1578년 결혼, 1620년 사망) 효정황태후 (1578년 결혼, 1611년 사망) 소녕황태후 정씨 (1581년 결혼) |
자녀 | 태창제 주상순, 복왕 주상영, 계단왕 수녕공주 |
생애 | |
출생일 | 1563년 9월 4일 |
출생지 | 순천부, 북직례 |
사망일 | 1620년 8월 18일 |
사망 장소 | 자금성 홍덕전 |
기타 | |
왕조 | 명나라 |
가문 | 주씨 |
사후 칭호 | 황제 |
2. 생애
주재후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큰형과 둘째 형이 모두 죽자 유왕세자(裕王世子)에 봉해졌다.[1] 1567년 아버지가 황위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572년 10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1]
만력제는 정치를 잘 알지 못해 즉위 초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에게 맡겼다.[1]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1]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조였다.[1]
만력제 즉위 10년째인 1582년 장거정이 세상을 떠나자, 그동안 억눌렸던 반대파들이 장거정의 비리를 폭로하며 공격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옹호하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가산을 몰수했다. 이후 30년 간 여러 구실을 대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졌고,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 황제 개인의 재산은 늘어 갔지만 국고는 줄어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었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첨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치부에만 열중했다. 술과 여자에도 빠져 민생은 더욱 피폐해졌다.
만력제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원조했고, 닝샤의 파배의 난·보주의 양응룡의 난 진압[11] 등으로 군제가 부패하고 재정이 악화되었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국가 재정을 무시한 채 개인적인 축재에 몰두했다. 관료에게 결원이 생겨도 급료를 아끼고 보충하지 않아 각료가 한 명뿐이거나 지방 장관이 규정의 절반밖에 없는 이상 사태가 발생했다.
악화된 재정에 대한 대책으로 전국에 세감이라 불리는 환관 징세관을 파견하여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세감들이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끝까지 폐지하려 하지 않았다.
국가에 불가결한 지출을 아끼는 한편, 사적인 일에는 엄청난 사치를 부렸다. 정귀비의 아들 복왕 주상순의 결혼식에 30만위안이라는 거액을 사용했다.[12] 이로 인해 민중들의 원한을 샀으며, 후에 주상순은 이자성 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후반생에는 20여 년에 걸쳐 후궁에 틀어박혀 조정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16]
1620년 8월 18일, 만력제는 심한 현기증으로 침대에 누워 지내다 사망했다.[11]
2. 1. 즉위 초 (만력 중흥)
주재후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큰형과 둘째 형이 모두 죽자 유왕세자(裕王世子)에 봉해졌다.[1] 1567년 아버지가 황위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572년에는 10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1] 만력제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에게 맡겼다.[1]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던 인연 때문이었다.[1]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조이기 일쑤였다.[1]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1] 덕분에 명나라는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1]융경제 치세 말기에는 대학사 겸 예부 상서 가오궁이 내각과 정부를 이끌었다.[2] 그러나 만력제가 즉위한 후, 내시 기실감(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내시 기관)의 수장인 환관 봉보는 대학사 장거정과 협력하여 가오궁을 축출했다.[2] 장거정은 그 후 내각의 수장이 되어 1582년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권력을 유지했다.[2] 1550년대 몽골족의 침략에 대응하여 장거정은 유교적 방법이 아닌 법가적 방법을 사용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3] 그는 행정 체계를 간소화하고 군대를 강화하여 지방의 이익을 희생시키면서 정부를 중앙 집권화하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4] 여기에는 지방 서원을 폐쇄하고 감찰을 담당하는 관리들을 내각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 포함되었다.[4] 장거정은 환관, 특히 봉보와 섭정 역할을 한 황제의 어머니의 지지를 받았다.[5] 그는 내각의 동료들을 직접 선택하고 예부와 감찰원을 비공식적으로 통제하여 자신의 추종자들을 중앙 관청과 지방의 요직에 임명했다.[5] 이는 그에게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지만, 명령을 내리거나 요구할 권한은 없었다.[5] 장거정은 또한 관리들이 서로 복수하는 대신 세금을 징수하고 도적을 진압하는 데 집중하도록 유도하려 했다.[5] 그 결과, 명나라 행정부의 효율성은 1572년부터 1582년 사이에 향상되어 제국 초기 시대에만 달성되었던 수준에 도달했다.[5]
장거정은 재임 기간 동안 일조편법으로 알려진 세금 납부 방식을 현물에서 은으로 전환하고, 병농제를 개혁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시행했으며,[6] 1572년부터 1579년까지 요역과 다양한 수수료 및 부과금에 관한 현(縣) 관청의 회계를 개정했다.[7] 1580-1582년에는 새로운 토지대장도 작성되었다.[8] 이러한 개혁은 납세자의 의무를 개정하여 은으로 통일된 납부 방식으로 변경하는 등 제국 전역에서 공식화되었다.[7]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불필요한 활동이 폐지되거나 제한되었고, 국가 지원을 받는 유생의 수가 감소했으며, 지방 당국에 이전 요역의 3분의 1만 요구하도록 촉구했다.[7] 또한, 역참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도 축소되었다.[7]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금은 원래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세금 체납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7] 장거정은 지출보다 수입이 더 많은 흑자를 낼 수 있었다.[9] 이는 명나라가 일반적으로 16세기에 준비금 없이 운영되었기에 중요한 성과였다.[9] 그러나 장거정의 행정부는 돈을 절약하고 세금 징수를 개선하여 상당한 준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9] 1582년, 수도 주변의 곡창에는 9년 치의 곡물이 비축되었고, 호부의 태창(太倉庫)에는 (약 223톤)의 은이 보관되었으며, 사복시(太僕寺)에는 이, 남경에는 이 추가로 비축되었다.[9] 사천, 절강, 광서의 지방 행정부에도 소규모의 준비금이 마련되었다.[9]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장거정 재임 기간 동안에는 제도적인 변화가 없었다.[10] 그는 제국 초기의 질서로 돌아간다는 구호 아래 기존의 절차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10]
몽골족과의 평화를 옹호한 장거정은 탄륜 병부 상서의 선제 공격 제안을 거부했다.[11] 대신 그는 동북 변방의 지휘관인 척계광에게 무장 평화를 유지하도록 명령했다.[11] 이 결정은 국경 군대의 축소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잉여 병사들이 가족 농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12] 장거정은 군사 문제의 중요성이 민간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는 생각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 고위 관료가 군 지도자를 지배하는 것을 반대했다.[13] 그는 척계광, 왕충고(王崇古), 탄륜, 양몽룡(梁夢龍), 이성량과 같은 유능한 군 지도자들을 책임 있는 자리에 임명했다.[13] 또한 국경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방어와 공격을 결합한 조치를 시행했으며, 특히 북서부에서 국경 시장을 개설하여 주변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다.[13]
2. 2. 장거정 사후의 정치 문란
1572년 만력제가 10살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 그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기에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에게 맡겼다. 장거정은 오랜 스승이었지만, 엄격한 교육 방식으로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조였다. 장거정은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하며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덕분에 명나라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만력제 즉위 10년째인 1582년 장거정이 사망하자, 그동안 억눌렸던 반대파들이 장거정의 비리를 폭로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옹호하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가산을 몰수했다. 이후 만력제는 30년 간 여러 구실을 대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졌고,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 황제 개인의 재산은 늘어 갔지만 국고는 줄어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었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첨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치부에만 열중했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
장거정 사후, 황제의 모친,[1] 내각, 이부, 감찰원의 연합이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결성되었으나, 반대파의 반발을 샀다.[2] 내각에 강력한 정치가가 없어 행정을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3] 황제와 반대파 관료 모두 내각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4] 1582년부터 1591년까지 내각은 장사유가 이끌었고, 이후 8년 동안 심일관이 이끌었다. 심일관은 군주와 관료 간의 타협점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2] 1590년, 내각과 이부 및 감찰원 수뇌부의 동맹이 붕괴되면서 심일관은 영향력을 잃었다.[5] 그는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 때문에 1591년 사임해야 했다.[3]
1582년 이후, 황제는 장거정의 반대자 중에서 내각의 수장을 선택했다. 단명했던 왕가병을 제외하고, 장거정의 후계자들은 모두 총애를 잃었고, 재임 중이거나 사후에 감찰관에게 고발당했다.[6]
고헌성을 중심으로 한 반장거정 세력은 장거정 사후 그를 비난하고 추종자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7] 그러나 이는 감찰관이 고위 관료를 비판할 기회를 만들었고, 군주를 분노하게 했다.[8] 장거정의 반대자들은 수많은 분쟁에 휘말려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의 복원을 방해했다.[7] 1585년부터 감찰관들은 황제의 사생활을 비판하기 시작했다.[8] 만력제는 정보원들의 입을 막으려 했고[8] 자신에 대한 논평에 점차 응답을 멈췄다.[9] 1588년, 만력제의 감찰관들은 그가 환관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했고, 황제는 관료들과의 협력을 중단했다. 그는 조회도 취소하고, 군사적 승리 축하 행사에서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료들과의 소통은 서면 보고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는 이에 응답했을 수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통치 말기에는 관직의 인사 변동을 방해하여, 직책을 공석으로 남겨두고 관료들이 서면 동의 없이 떠나도록 허용했다.[10] 1603년까지 9개의 지방 감찰사(13개 중) 직책이 오랫동안 공석이었고, 1604년에는 거의 절반의 태수와 양경의 절반 이상의 대신과 부대신이 공석이었다.[11] 황제는 궁궐 환관 관청의 수장 자리도 의도적으로 공석으로 남겨 환관과 관료 사이의 소통을 약화시키려 했다.[12]
황제의 공식 직무 참여 부족은 세금 징수에 대한 행정 책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11] 군사적 또는 기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는 조언을 구하고 유능한 개인을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행정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고, 종종 이를 우회할 방법을 찾았다.[13] 일부 보고서에는 응답하지 않았지만, 다른 보고서에는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일부 고위직을 공석으로 남겨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대리인의 지시에 따라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고, 국가 행정은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기근 지원, 반란 진압, 국경 분쟁 해결, 기반 시설 유지가 이루어졌다.[14]
매일 수백 건의 보고서가 도착했지만, 만력제는 극히 일부만 읽고 결정했다. 나머지는 위임된 환관들이 처리했다. 이 환관들은 대부분 내각의 권고를 확인했지만, 황제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경우, 때때로 다른 결정을 내렸다.[15]
공무원 개혁 열망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이를 할 수 없었고, 관료들의 결정을 단순히 확인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황제와 관료 양측은 상대방이 적절하게 행동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고 서로를 마비시키는 데 기여했을 뿐이었다.[10]
만력 10년(1582년) 장거정 사망 후 친정을 시작하면서 타락했으며,[16] 정귀비 편애로 인한 황태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다.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을 원조했고, 닝샤의 파배의 난·보주의 양응룡의 난 진압[11] 등으로 군제 부패와 맞물려 재정이 악화되었다.
조정 내에서는 동림당과 환관 세력과 결탁한 비동림당의 다툼(당쟁)이 격화되어 환관이 횡행했으며, 만주의 여진족 또한 누르하치 지휘 아래 명나라 원정군을 격파하는 등 강대해져 국사가 다난해졌다.
만력제는 여전히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국가 재정을 무시한 채 개인적인 축재에 몰두했다. 관료에게 결원이 생겨도 급료를 아끼고 보충하지 않아, 각료가 한 명뿐이거나 지방 장관이 규정의 절반밖에 없는 이상 사태가 발생했다.
악화된 재정에 대한 대책으로 전국에 세감이라 불리는 환관 징세관을 파견하여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세감들이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만력제는 끝까지 폐지하려 하지 않았다.
국가에 불가결한 지출을 아끼는 한편, 사적인 일에는 엄청난 사치를 부렸다. 정귀비의 아들 복왕 주상순의 결혼식에 30만 냥이라는 거액을 사용했다.[12] 이로 인해 민중들의 원한을 샀으며, 후에 주상순은 이자성 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후반생에는 20여 년에 걸쳐 후궁에 틀어박혀 조정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16]

2. 3. 임진왜란 파병과 재정 악화

1590년대 초, 일본의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에 성공했지만,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중국 닝보 항구에 자신의 통치를 확립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명나라 정복을 위한 조선이었다. 중국은 일본의 위협에 강력히 대응했다.
1592년 5월,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하여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조선 국왕은 압록강 조선-명나라 국경 지역으로 도망쳐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만력제는 3천 명의 정찰 부대를 파견했으나, 평양에서 일본군에게 기습당해 전멸했다. 병부 시랑 송응창이 조선 전역 지휘를 위해 요동으로 파견되었고, 대규모 군대가 요동에 집결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리는 일본군에 대한 저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593년 초,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나라군이 전투에 돌입하여, 5월까지 조선-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부산 인근으로 몰아내 휴전을 맺었다.
1596년 10월, 협상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공격했지만, 1597년의 2차 침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80 km 이내까지 접근했지만, 명나라군의 도착으로 동남부로 밀려났다. 이순신이 복귀하여 함대를 지휘하면서 해상에서 우위를 점했고, 일본군은 울산과 순천 사이에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 1598년 5월, 명나라 함대가 조선 함대를 강화했고, 육상에서는 오랜 포위전이 벌어졌다. 1598년 9월 히데요시 사망 후,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다.
임진왜란은 16세기의 가장 큰 군사적 갈등 중 하나였다. 일본은 1차 침략에 15만 명 이상, 2차 침략에 14만 명 이상을 동원했다. 명나라도 1592년에 4만 명 이상, 1597년에 그 두 배 이상을 파병했다. 중국 역사가 리광타오에 따르면, 총 166,700명의 명나라 군인이 조선에 배치되었고, 1700만위안의 은과 물품이 제공되었는데, 이는 명나라 연간 수입의 절반에 해당한다. 조선군은 수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적의 코를 승리의 증거로 가져갔는데, 그 수가 10만에서 20만 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파병은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장거정 사후 만력제는 정귀비 편애로 인한 황태자 책봉 문제, 닝샤의 파배의 난·보주의 양응룡의 난 진압[11]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2. 4. 당쟁과 환관의 발호
장거정이 사망한 후, 황제의 모친,[1] 내각, 이부, 그리고 감찰원의 연합이 제국의 효율적인 행정을 보장하기 위해 결성되었다.[2] 그러나 내각에 강력한 정치가가 부재했기 때문에 행정을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3] 황제와 반대파 관료 모두 내각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4] 1582년부터 1591년까지 내각은 잠시 장사유가 이끌었고, 그 후 8년 동안 심일관이 이끌었다. 심일관은 군주와 관료 간의 타협점을 찾으려 노력하는 한편, 비판을 용인하고 각 부처와 감찰관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는 협력적이고 응집력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5] 1590년, 내각과 이부 및 감찰원 수뇌부의 동맹이 붕괴되면서 심일관은 영향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6] 그는 결국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 때문에 1591년 사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그가 반대파 관료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었다.[7]1582년 이후, 황제는 장거정의 반대자 중에서 내각의 수장을 선택했다(심일관 이후, 이 직책은 왕가병, 왕석작, 그리고 조지고가 1601년까지 역임했다). 단명했던 왕가병을 제외하고, 장거정의 후계자들—심일관, 주갱, 이정기, 엽향고, 그리고 방종철을 포함하여—모두 총애를 잃었고, 재임 중이거나 사후에 감찰관에게 고발당했다.[8]
고헌성을 중심으로 한 반장거정 세력은 장거정이 사망한 후 그를 비난하고 그의 추종자들을 관료 사회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9] 그러나 이는 감찰관이 고위 관료를 비판할 기회를 만들었고, 비판자들이 긍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주를 분노하게 하고 불만을 야기했다.[10] 그 결과, 장거정의 반대자들은 수많은 분쟁에 휘말려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의 복원을 방해했다.[11] 1585년부터, 감찰관들은 또한 황제의 사생활을 비판하기 시작했다.[12] 이러한 비판은 황제가 가혹한 처벌을 가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더욱 거세졌다.[13] 이에 만력제는 자신의 시종들 중 정보원들의 입을 막으려 했고[14] 자신에 대한 논평에 점차 응답을 멈췄다.[15] 그러나 1588년, 만력제의 감찰관들은 그가 자신의 환관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했고, 이는 황제를 충격에 빠뜨려 그는 관료들과의 협력을 중단했다. 그는 그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조회를 취소했다. 그는 군사적 승리 축하 행사에서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관료들과의 소통은 서면 보고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는 이에 응답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통치 말기에 그는 또한 관직의 인사 변동을 방해하여, 직책을 공석으로 남겨두고 관료들이 서면 동의 없이 떠나도록 허용했다. 이는 불법이었지만 처벌받지 않았다.[16]
황제의 공식 직무 참여 부족은 세금 징수에 대한 행정의 책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17] 군사적 또는 기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는 각 부서와 감찰원의 책임 있는 관료들로부터 조언을 구했으며,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기존의 위계에서 벗어난 유능한 개인을 임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행정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고, 종종 이를 우회할 방법을 찾았다.[18] 그는 일부 보고서에 응답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다른 보고서에는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일부 고위직을 공석으로 남겨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대리인의 지시에 따라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고, 국가 행정은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기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지원이 제공되었고,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국경 분쟁은 해결되었고, 기반 시설은 유지되었다.[19]
매일 수백 건의 보고서가 만력제의 책상에 도착했지만, 그는 그 중 극히 일부만 읽고 결정했다. 나머지는 황제의 "홍필"을 갖춘 위임된 환관들이 처리했다. 이 환관들은 대부분 내각의 권고와 제안을 확인했지만, 황제가 내각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경우, 때때로 다른 결정을 내렸다.[20]
공무원 개혁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이를 할 수 없었고, 또한 관료들의 결정을 단순히 확인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황제와 관료 양측은 상대방이 적절하게 행동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고 서로를 마비시키는 데 기여했을 뿐이었다.[21] 이러한 중앙에서의 분쟁의 결과로, 국가의 시골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다.[22]
1596년 8월, 좋지 않은 세금 징수와 그해 4월 화재로 소실된 자금성 재건의 막대한 비용으로 국고가 고갈되자, 만력제는 수년 동안 하급 관리들이 제안했던 은광 개발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환관, 황실 근위대 장교, 그리고 호부의 대표로 구성된 팀을 베이징 외곽으로 파견하여 새로운 은광을 설립했다. 그는 또한 같은 임무를 맡은 황실 근위대 장교를 허난성에 파견했으며, 몇 주 안에 다른 장교와 환관들이 산둥성, 산시성, 저장성, 산서성으로 파견되었다.[23] 환관을 각 지역에 파견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는데, 사업, 무역, 광업은 그들이 수입을 올릴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24] 그러나 며칠 안에 이 계획은 베이징의 지역 당국으로부터 반대에 부딪혔는데, 그들은 베이징 근처 산에 있는 황실 무덤에 대한 잠재적 위협과 여전히 불법 채굴에 종사하고 있는 광부들을 모집하는 어려움에 대해 우려를 제기했다. 이에 황제는 무덤에 대한 보호 구역을 지정했지만 광산 운영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지방의 부유한 유력자들을 임명하여 광산을 관리하고 필요한 투자를 감독하도록 했다.[25]
자신의 권위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유교 관료들은 국가가 사업에 참여하여 국민과 이윤을 놓고 경쟁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념적 근거로 황제의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또한 황제가 신뢰할 수 없고 "광산 도적"이라고 비하하는 광부들을 고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황제의 광업 참여에 반대했다. 유력자들과 관료들이 반대한 또 다른 이유는 경쟁 권력 집단인 환관들이 광산 운영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 채굴은 황제의 환관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전문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복잡한 작업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제는 부유한 지방 유력자들을 광산 관리자로 임명하여 광산 세금을 납부하고 은을 인도하도록 했는데, 이는 광산의 수익성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은 채굴은 지하에서 부유한 자들의 금고로 옮겨져 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효과를 낳았다. 미국의 역사가 해리 밀러는 만력제의 행동을 "부유한 자들에 대한 경제 전쟁"이라고 직설적으로 묘사했다.[27]
1597년, 조선에서 전쟁이 재개되자 황제는 추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28] 그는 유력자들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안적인 환관 지역 행정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광산세 조사관('광세'; 礦使; 문자 그대로 '광산 사절')은 1598~1599년에 황제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광산세(礦稅) 외에도 무역 및 기타 세금 징수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황제는 이 조사관들에게 현 및 부 당국, 심지어 순무까지 감독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 결과, 황실 조사관들은 더 이상 지방 문무 당국의 의견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그들에게 임무를 할당하고 저항할 경우 투옥할 수도 있었다. 황제는 광산세와 환관들의 행동에 대한 관리들의 항의를 무시했지만, 환관들의 보고서와 제안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베이징에 도착한 날 종종 즉시 대응했다. 1599년, 그는 환관들을 주요 항구로 파견하여 공식적인 문민 행정 권한을 인수했다. 황제는 1599년 봄, 세금 징수 권한을 광산 조사관에게 공식적으로 이관함으로써 권력을 옹호하는 관리들과의 분쟁을 마침내 해결했다. 이러한 환관 권력의 확대와 그들의 운영은 유교 지향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황제가 정부 수입을 희생하면서 개인 금고를 채우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중국 역사상 가장 탐욕스러운 통치자 중 한 명이라는 평판을 얻게 했다.
미국 역사가 리처드 폰 글라한에 따르면, 은광에서 나오는 세입은 1597년 이전에는 연간 수백 킬로그램에 불과했지만 1597~1606년에는 연평균 3,650kg으로 크게 증가했다. 가장 성공적인 해인 1603년에는 수입이 6,650kg에 달해 채굴량의 약 30%를 차지했다. 현대 중국 역사가 왕춘유와 두와얀의 추정에 따르면, 광산세는 국가에 300만 냥(110ton의 은)을 추가로 벌어들였고, 환관 조사관은 그보다 8~9배 더 많은 은을 보유했다. 다른 추정에 따르면 1596~1606년에 광산 조사관은 국가에 최소 596만 냥의 은을 공급했지만 ~을 자신들이 보관했다. 관리들이 자신의 지위로 이익을 얻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환관들은 징수된 자금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1605/1606년이 되자, 황제는 유력자 관료뿐만 아니라 환관들도 부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광산세가 좋은 점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 결과, 1606년 1월, 그는 대안적인 행정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국가 광산 운영을 폐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세금 징수는 전통적인 당국으로 반환되었다. 유력자들은 환관들의 행동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고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백성과 국가 간의 재정 거래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이러한 통제력의 상실은 백성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에 대한 인식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것은 굴욕적인 경험이었고 자연 질서를 파괴했다. 그러나 1606년까지 유력자들은 백성과 국가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았다.
명나라 행정 체제에서 최종 권한은 군주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정력적이고 유능한 통치자가 필요했다. 통치자가 무능한 경우, 견제와 균형 시스템은 집단 지도 체제를 낳았다. 이는 권력이 여러 당국에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15세기 중반에는 한 부서의 범위를 벗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 토론(''회관추거''; 문자 그대로 '관리들을 소집하여 집단으로 추천하다')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모임에는 수십 명의 관리들이 참여하여 정치 및 인사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여론(''공론'')의 중요성이 커지고 군주의 전제 권력이 제한되었다.
만력제 재위 기간 동안 집단적으로 해결된 문제 중 하나는 고위 관료 임명이었다. 만력제 즉위 초, 장거정은 집단 토론을 성공적으로 폐지하여 황제에게 자신의 제안에 따라 고위 관료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장거정 사후 토론이 부활하면서 황제의 권한은 다시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력제는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려 노력했는데, 예를 들어 1591년 그는 다른 관리들과 상의하지 않고 현 예부상서 조지고를 수석 대학사로 임명하겠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이 결정은 인사부 장관 륙광조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그는 이것이 적절한 절차를 위반하고 정부의 의사 결정 과정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륙광조와 다른 사람들은 공개 토론을 통해 후보자를 집단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개별적인 편견과 무지를 제거하므로 더 공정하고 공정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황제는 부분적으로 물러나 앞으로 적절한 절차를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집단 토론 없이 고위 관료를 간헐적으로 임명하는 것을 계속했고, 이는 항상 관리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명나라 말기에는 여론이 개인의 의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정치 및 행정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의사 결정은 설문지와 투표 용지를 통해 관리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또한 관리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의 업무 수행이 상사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에 의해서도 평가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595년 인사부 장관 손필양은 여러 관청의 상황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사용하여 만력제에게 특정 관리를 절강에서 해임하도록 설득했다. 설문 조사에는 부패 및 기타 범죄 혐의를 포함한 많은 부정적인 의견이 접수되었다. 이 전례 없는 사건은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조지고는 익명 설문 조사가 평가의 주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익명의 출처에서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아무도 범죄 혐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손필양은 그들이 기소되거나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므로, 그 개인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자신을 옹호했다. 그는 관리를 평가할 때 설문 조사를 통해 그 개인의 무모함에 대한 널리 퍼진 의견을 공정하게 발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문관 평가 개혁으로 인해 그들의 경력은 동료들이 작성한 익명 설문 조사를 통해 부와 감찰관에 의해 결정된 그들의 평판에 달려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집단 토론과 함께 만력제 재위 기간 동안 여론의 중요성을 높여, 관리 집단이 여론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는 동안 격렬한 공개 토론과 갈등을 초래했으며, 군주의 권위와 그의 발언의 무게는 감소했다.
만력 10년(1582년)에 장거정이 사망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만력제는 타락했으며, 총희 정귀비의 편애로 인한 황태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다. 또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서는 종주국으로서 조선을 원조했으며, 그 외에도 닝샤의 파배의 난·보주의 양응룡의 난 진압[11] 등으로 군제의 부패와 맞물려 재정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조정 내에서는 고헌성이 부흥시킨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림당과 위충현 등 환관 세력과 결탁한 비동림당의 다툼(당쟁)이 격화되어 환관이 횡행하게 되었으며, 만주의 여진족 또한 누르하치의 지휘 아래 명나라의 원정군을 격파하는 등 강대해져 국사가 다난해졌다.
그러나 만력제는 여전히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국가 재정을 무시한 채 개인적인 축재에 몰두했다. 관료에게 결원이 생겨도 급료를 아끼고, 이를 보충하지 않는 등 기행을 저질렀으며, 이 때문에 한때는 각료가 한 명밖에 없거나 지방 장관이 규정의 절반밖에 없는 등 이상 사태가 발생했다.
더욱 악화된 재정에 대한 대책으로(혹은 자신의 저축을 늘리기 위해) 전국에 세감이라 불리는 환관 징세관을 파견하여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이 수탈에 반대하는 민중들에 의해 세감들이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만력제는 끝까지 폐지하려 하지 않았다.
2. 5. 민생 악화와 통치 체제 붕괴
1572년 10살의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오른 만력제는 초기에는 정치를 잘 알지 못해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에게 맡겼다. 장거정은 엄격한 교육 방식으로 만력제의 숨통을 조였지만, 사심 없고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하며 개혁을 추진하여 명나라의 기틀을 다졌다.[11]1582년 장거정이 세상을 떠나자, 그동안 억눌렸던 반대파들이 장거정의 비리를 폭로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옹호하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가산을 몰수했다. 이후 만력제는 30년 간 정사를 돌보지 않고, 국고를 축내며 개인 재산을 불리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자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었고, 만력제는 아첨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치부에만 열중했다. 술과 여자에도 빠져 민생은 더욱 피폐해졌다.[12]
명나라 행정 체제에서 최종 권한은 군주에게 있었지만, 만력제는 무능력하여 견제와 균형 시스템은 집단 지도 체제를 낳았다. 15세기 중반에는 여러 부서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관추거'(관리들을 소집하여 집단으로 추천)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모임에는 수십 명의 관리들이 참여하여 정치 및 인사 문제를 논의했고, 그 결과 여론(''공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군주의 전제 권력은 제한되었다.
만력제 재위 기간 동안 집단적으로 해결된 문제 중 하나는 고위 관료 임명이었다. 즉위 초, 장거정은 집단 토론을 폐지하고 황제에게 자신의 제안에 따라 고위 관료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장거정 사후 토론이 부활하면서 황제의 권한은 다시 제한되었다. 1591년 만력제는 다른 관리들과 상의하지 않고 예부상서 조지고를 수석 대학사로 임명하겠다고 발표하여 인사부 장관 륙광조의 비판을 받았다. 륙광조는 이것이 적절한 절차를 위반하고 정부 의사 결정 과정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황제는 부분적으로 물러나 앞으로 적절한 절차를 따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집단 토론 없이 고위 관료를 간헐적으로 임명하는 것을 계속했고, 이는 항상 관리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명나라 말기에는 여론이 개인의 의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의사 결정은 설문지와 투표 용지를 통해 관리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1595년 인사부 장관 손필양은 여러 관청의 상황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사용하여 만력제에게 특정 관리를 절강에서 해임하도록 설득했다. 조지고는 익명 설문 조사가 평가의 주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손필양은 관리를 평가할 때 설문 조사를 통해 그 개인의 무모함에 대한 널리 퍼진 의견을 공정하게 발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옹호했다.
문관 평가 개혁으로 인해 관리들의 경력은 동료들이 작성한 익명 설문 조사를 통해 부와 감찰관에 의해 결정된 그들의 평판에 달려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집단 토론과 함께 만력제 재위 기간 동안 여론의 중요성을 높여, 관리 집단이 여론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는 동안 격렬한 공개 토론과 갈등을 초래했으며, 군주의 권위와 그의 발언의 무게는 감소했다.
만력제는 정귀비를 총애하여 황태자 책봉 문제를 일으켰고,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을 원조했으며, 닝샤의 파배의 난·보주의 양응룡의 난 진압 등으로 군제가 부패하고 재정이 악화되었다.
조정 내에서는 고헌성이 부흥시킨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림당과 위충현 등 환관 세력과 결탁한 비동림당의 다툼(당쟁)이 격화되었고, 만주의 여진족 또한 누르하치의 지휘 아래 강대해졌다.
그러나 만력제는 여전히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국가 재정을 무시한 채 개인적인 축재에 몰두했다. 관료에게 결원이 생겨도 급료를 아끼고 보충하지 않아 각료가 한 명밖에 없거나 지방 장관이 규정의 절반밖에 없는 이상 사태가 발생했다. 더욱 악화된 재정에 대한 대책으로 전국에 세감이라 불리는 환관 징세관을 파견하여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고, 이에 반대하는 민중들이 세감들을 잇따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만력제는 끝까지 폐지하려 하지 않았다.
국가에 불가결한 지출을 아끼는 한편, 사적인 일에는 엄청난 사치를 부렸다. 정귀비의 아들인 복왕 주상순의 결혼식에 30만위안이라는 거액을 사용했고, 이는 민중들의 원한을 샀다. 후반생에는 20여 년에 걸쳐 후궁에 틀어박혀 조정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 6. 최후
만력제는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1620년, 심한 현기증을 느껴 침대에 누워 지냈다. 마침내 1620년 8월 18일에 사망했다.[11] 그가 죽은 다음 날, 황제 금고에서 변방 군대에 백만 냥의 은을 이송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이틀 뒤, 요동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금고에서 백만 냥이 추가로 보내졌다. 또한 칙령은 채광 및 무역 부과금 폐지, 그리고 그것들을 징수하는 환관들의 해임을 요구했다. 8월 28일, 만력제의 장남 주상락이 태창제로 즉위했다.[12]태창제는 동림당의 대표자들과 동조자들에게 의존했고, 그들은 곧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병에 걸려 1620년 9월 26일에 사망했다. 그의 15세 아들 주유교가 천계제로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젊은 황제는 목공일에 흥미를 느껴 가구와 궁궐의 나무 모형을 만들었지만, 공식적인 임무는 즐기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정부 내에서 관료와 환관 집단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동림당이 우위를 점했지만, 1624년부터는 환관 위충현이 조정에서 권력을 잡았다. 1627년, 천계제가 죽은 후, 그의 동생 주유검이 숭정제로 즉위하여 위충현의 일당을 제거했다. 그러나 의심이 많고 목적의식이 부족하여 관료들 간의 파벌주의를 통제하고 유능한 행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다.
정부가 내부 갈등에 휩싸이는 동안, 1620년대에는 농촌의 상황이 악화되었다. 1628년부터 북중국은 반란 농민(이자성의 난)과 정부군 사이의 전쟁으로 황폐해졌다. 그 결과, 굶주린 사람들이 도시로 도망쳤고, 시골에서는 모든 현이 파괴되었다. 지주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에 대해 품은 깊은 원한에 충격을 받았고, 국가 행정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점령했고, 숭정제는 자살했다. 북경 북쪽에 있는 명나라 국경 군대를 지휘했던 장군 오삼계는 청나라 (누르하치가 세운 여진족 국가에서 1630년대 중반에 개명)에 항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지주들과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아, 청나라 군대는 빠르게 반란군을 물리치고 북중국을 장악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들은 또한 국가 남부를 정복했다. 1662년, 청나라 군대를 이끈 오삼계는 운남에서 마지막 명나라 황제인 주유랑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3. 조선과의 관계
만력제는 명나라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될 만큼 평판이 좋지 않지만,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고 재정적으로도 지원하여 '고려황제'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1]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송시열이 제자 권상하에게 만력제와 숭정제의 제사를 지낼 사당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충북 화양계곡의 만동묘(萬東廟)이다. 만동묘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려 지금은 묘정비만 남아있다.[1]
1590년대 초,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지배와 중국 닝보 항구에서의 통치 확립이라는 야망을 드러냈다.[2] 그는 명나라 정복을 위해 먼저 조선을 침략했고,[3] 1592년 5월,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하여 빠르게 진격했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4] 만력제는 3천 명의 소규모 정찰 부대를 파견했으나, 이들은 평양에서 일본군에게 기습당해 전멸했다.[5]
이후 명나라는 병부 시랑 송응창을 파견하고 요동에 대규모 군대를 집결시켰다.[6] 1593년 초,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나라군은 조선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부산 인근으로 몰아냈고, 일본은 휴전에 합의했다.[7]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공격했다.[8] 2차 침략에서 일본군은 서울 근처까지 접근했지만, 명나라군의 도착으로 동남부로 밀려났다.[9]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울산과 순천 사이에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10]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다.[11]
임진왜란은 16세기 가장 큰 군사적 갈등 중 하나였으며, 명나라는 1592년에 4만 명 이상, 1597년에 그 두 배 이상의 군대를 파병했다.[12] 중국 역사가 리광타오에 따르면, 총 166,700명의 명나라 군인이 조선에 배치되었고, 1700만 냥의 은과 물품이 제공되었는데, 이는 명나라 연간 수입의 절반에 해당한다.[13]
3. 1. 임진왜란 파병에 대한 현대 한국의 시각
임진왜란에 대한 만력제의 적극적인 정책은 현대 한국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만력제는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고려황제'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이는 명나라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전반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만력제에 대한 인식과는 대조적으로,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보여준 그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조선에서는 만력제와 숭정제를 기리기 위해 송시열과 그의 제자 권상하가 충북 화양계곡에 만동묘를 세웠다. 만동묘는 '황하가 만 번 굽이쳐도 결국 동해로 흐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대명천지', '숭정천하'와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조선이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켰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만동묘는 도산서원과 함께 조선의 4대 서원으로 꼽혔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으로 인해 현재는 묘정비만 남아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복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배라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하여 빠르게 진격했고, 조선은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만력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초기에는 소규모 부대를 파견했으나, 이후 이여송이 지휘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 수군, 특히 이순신의 활약은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8년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임진왜란은 종결되었다.
임진왜란은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군사적 충돌 중 하나였으며, 명나라는 막대한 군사력과 재정을 투입하여 조선을 지원했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명나라의 지원과 조선군의 저항으로 국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4. 평가
만력제와 그의 치세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다양하며,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환관 유약우(劉若愚)가 쓴 《탁중지》(酌中志)는 당시 궁중 생활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전통적인 중국 역사 서술은 만력제를 명나라 쇠퇴와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묘사한다. 고전적인 역사가들은 그의 탐욕, 환관 권력 남용, 정부 내 파벌주의, 은둔, 사치스러운 묘지 건설, 정치적 실책 등을 비판한다. 《명사》는 그를 게으르고 이기적인 통치자로 묘사하며, 후궁에만 관심이 있고 국사를 소홀히 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중화민국 시기 사학자들과 레이 황과 같은 서양 역사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만력제는 장거정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문민 관료를 통제하며 파벌주의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통치 초기 30년 동안 군사 문제에 헌신했으며, 살후 전투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지원하고 이여백과 같은 장교들을 보호했다. 명나라 군대는 만력 시대에 몽골과의 국경을 통제하고, 버마 국경 분쟁에 개입하고, 임진왜란에 참여하는 등 여러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만력제 치세는 명나라의 쇠퇴기였지만, 외국의 은 유입으로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문화적으로도 최성기를 맞았다. 경덕진에서는 만력 적회 등 도자기 명품이 탄생했다.[13] 또한, 《본초강목》 출판을 지원하여 중국 본초학 발전에 기여했다.
명 13릉에 있는 만력제의 능묘인 정릉은 1956년 발굴되었으나, 문화 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해 유해가 소각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처럼 만력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의 치세가 명나라 쇠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4. 1. 긍정적 평가
만력제 시대에는 산업, 특히 비단, 면, 도자기 생산이 크게 발전했다. 산시성의 섬유 산업은 많은 사람들을 고용했고, 광둥성에는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규모 철강 공장이 등장했다. 농업 생산의 전문화와 지역 간 무역도 크게 증가했다. 쑤저우, 상하이 쑹장, 자싱, 난징과 같은 장난 지역의 도시들이 크게 번성했다. 비단과 금융 산업으로 유명한 쑤저우는 16세기 말 인구가 5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쑹장은 면화 재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생산량의 상당 부분은 은과 교환되어 수출되었다. 1560년부터 1640년까지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는 1,000톤의 은을 태평양을 통해 운송했으며, 그 중 900톤이 중국으로 들어갔다. 같은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으로 6~7배 더 많은 은을 보냈다. 이러한 외국의 은 유입은 경제의 상업화를 이끌었으며, 면화, 비단과 같은 산업, 도시와 무역의 성장을 가져왔다.
16세기 동안, 명나라는 점차 ''자오상마이반''(召商買辦|정부가 사상에게 구매중국어) 정책으로 전환했다. 예를 들어, 가정제 시대에 정부는 쑤저우와 항저우의 국영 섬유 공장에 의존하는 대신 은으로 옷을 구매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후 사라지고 사설 공장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상인들이 더 이상 국가 기구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었고 가격과 계약 규모를 협상할 수 있었던 시장 경제의 등장을 의미했다. 국가 계약은 사기업의 성장을 장려했으며, 국영 공장의 생산 품질은 저하되었다. 1575년에는 군대가 사용할 수 없는 방패 5,000개를 반환해야 했다. 16세기 말까지 군 장교들은 국영 작업장에서 생산된 물품의 사용을 거부하고 대신 시장에서 장비를 구매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은을 요구했다.
1581년 토지세 징수를 간소화하기 위해, 내각대학사 장거정은 새로운 지적도 작성을 옹호했다. 1581~1582년에 걸쳐, 토지를 측량하고, 경계를 표시하고, 크기를 계산하고, 소유자와 임차인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지적도도 작성되었다. 장거정의 지적도는 후기 명나라와 청나라의 지적도의 기초가 되었다.
만력제의 치세는 명나라의 퇴폐와 쇠퇴기였지만, 이 시기에 외국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문화적으로도 최성기를 맞아 경덕진에서 만력 적회 등 도자기 명품이 탄생했다.[13]
당시 과거 문헌의 수정 등을 많이 포함하여 칭찬과 비난이 격렬했던 《본초강목》을 헌상받아 이를 절찬하고 출판 편의를 제공하는 등, 중국 본초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명 13릉에 있는 만력제의 능묘인 정릉은 1956년 5월부터 1년 동안 발굴되어 공개되었다. 이것은 중국 최초의 학술적인 고대 황제 능묘 발굴이었다. 유해의 모발에서 혈액형이 AB형임이 판명되었다.
4. 2. 부정적 평가
만력제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를 깊은 수렁에 빠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황제 개인의 재산을 늘리는 데만 열중했고, 국고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었고,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다. 술과 여자 문제도 심각했다.[13]역사가들은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평가한다. 당대와 후대를 통틀어 명나라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될 만큼 평판이 좋지 않다.[13]
스우프, 케네스 M.는 중화민국의 사학자들이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유교 학자들이 만력제에 대해 적대감을 품은 것은 국가에 대한 다른 비전과 당시 행정을 통제하던 문관들의 불만을 받아들여 군인들을 보호하려는 황제의 입장에서 비롯되었다. 심지어 만력제에 대한 현대 중국 연구에서도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을 계속 고수한다. 또한 서양 역사학은 중국 유교의 관점을 채택하여 이를 영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찰스 후커의 《명나라 전기 사전》(1976)과 레이 황이 그의 저서 《1587, 의미 없는 해: 쇠퇴하는 명나라》(1981) 및 《케임브리지 중국사, 제7권》의 만력제에 관한 장(1988)에서 묘사한 것이다. 만력제를 고립되고 좌절된 황제로, 자신의 관료주의에 의해 "갇힌" 인물로 묘사하는 서양의 인식은 주로 레이 황의 작품에 기인한다.[13]
명나라 정치 시스템의 몰락은 이념적이고 도덕적인 원칙에 대한 의존에서 비롯될 수 있다. 장거정이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효과적인 통치를 추구했을 때,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사생활에 초점을 맞춰 부도덕하고 부당하다고 간주하면서 비판했다. 이로 인해 그의 정책의 실질적인 결과에 대한 초점이 부족해졌다. 장거정 사후, 정부는 파벌로 분열되어 감찰원과 각 부서의 관료들이 갈등을 겪고 장거정의 지지자들을 숙청했다. 그 결과 중요한 개혁이 소홀해졌고, 황제의 우유부단함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황제는 관료들의 생각에 따라 통치하는 데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압력을 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효과적인 전제 군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다. 또한 후계자 문제에 대한 그의 잘못된 처리는 고공과 장거정이 시도했던 것처럼, 정부 구조 조정을 위한 잠재적인 중심지로서의 내각을 제거했다. 내각의 대학사들이 황제를 지지하는 것으로 의심받아, 통치자와 정부 사이의 중재 능력을 박탈했기 때문이다.[13]
만력제는 장거정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군사력을 증강하고, 문민 관료를 통제하고, 파벌주의를 줄이고, 문관보다는 군인에게 더 많이 의존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통치 초기 30년 동안 그는 군사 문제에 크게 헌신했으며, 1619년 원정을 포함하여 군대에 자금을 할당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619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부의 표적이 된 이여백과 같은 장교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만력 시대에 명나라 군대는 몽골과의 국경을 통제하고, 버마의 국경 분쟁에 개입하고, 몽골과 만주에서 약탈을 감행하고, 녕하에서 주요 반란을 진압하고, 임진왜란에 참여하고, 사천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소규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20만 명의 군인을 파견했다. 그러나 살후 전투 이후, 명나라는 파벌 갈등에 휩싸여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탓하기 시작했다. 후기 중국 유교 학자들은 살후에서의 패배를 강조하고, 환관, 군인, 황제가 이전에 거둔 승리를 축소했다.[13]
《명사》는 "명나라는 만력에 망한다"고 평했다.[13]
문화 대혁명 초기의 1966년 8월 24일, 구사상·구문화 파괴를 내건 홍위병에 의해 정릉에서 "비판회"가 열렸고, 홍위병의 탄핵 연설 후, 보존되어 있던 만력제의 유해는 효단현황후, 효정태후의 유해와 함께 휘발유를 뿌려 소각되었다.[13]
5. 가족 관계
봉호 | 시호 | 성명 | 생몰년도 | 비고 |
---|---|---|---|---|
황귀비 | 효정황태후 | 왕씨(王氏) | 1565년 ~ 1611년 | [20][21] |
황귀비 | 공각혜영화정황귀비 (恭恪惠榮和靖皇貴妃) | 정씨(鄭氏) | 1565년 ~ 1630년 | 정귀비;[22] |
경비 | 공순영장단정황귀비 (恭順榮莊端靜皇貴妃) | 이씨(李氏) | ? ~ 1597년 | [23] |
단비 | 주씨(周氏) | 단비 주씨 | ||
영비 | 단정영비(端靖榮妃) | 왕씨(王氏) | ? ~ 1591년 | 영비 왕씨 |
현비 | 위씨(魏氏) | 1567년 ~ 1606년 | 신빈 위씨 | |
소비 | 선의소비(宣懿昭妃) | 유씨(劉氏) | 1557년 ~ 1642년 | 소비 유씨;[24] |
의비 | 영혜의비(榮惠宜妃) | 양씨(楊氏) | ? ~ 1581년 | 의비 양씨 |
순비 | 청혜순비(淸惠順妃) | 이씨(李氏) | ? ~ 1623년 | |
덕비 | 장정덕비(莊靖德妃) | 허씨(許氏) | ? ~ 1602년 | 덕비 허씨 |
순비 | 온정순비(溫靜順妃) | 상씨(常氏) | 1568년 ~ 1594년 | 순비 상씨 |
희비 | 왕씨(王氏) | ? ~ 1589년 | 희비 왕씨 | |
덕빈 | 이씨(李氏) | 1567년 ~ 1628년 | 덕빈 이씨 | |
영빈 | 이씨(李氏) | 1568년 ~ 1626년 | 영빈 이씨 (만력제) | |
경빈 | 소씨(邵氏) | ? ~ 1606년 | 경빈 소씨 | |
순빈 | 장씨(張氏) | ? ~ 1589년 | 순빈 장씨 | |
화빈 | 양씨(梁氏) | 1562년 ~ 1643년 | 화빈 양씨 | |
도빈 | 경씨(耿氏) | 1568년 ~ 1589년 | 도빈 경씨 | |
시어 | 호씨(胡氏) | 1594년 ~ ? | 시어 호씨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비고 | |
---|---|---|---|---|---|---|
장남 | 황태자 | 주상락(朱常洛) | 1582년 ~ 1620년 | 효정황태후 왕씨 | 태창제 | |
차남 | 빈왕(邠王) | 애(哀) | 주상서(朱常溆) | 1585년 | 공각황귀비 정씨 | 요절 |
3남 | 복왕(福王) | 충(忠) | 주상순(朱常洵) | 1586년 ~ 1641년 | 공각황귀비 정씨 | [25] |
4남 | 원왕(沅王) | 회(懷) | 주상치(朱常治) | 1587년 ~ 1588년 | 공각황귀비 정씨 | 요절 |
5남 | 서왕(瑞王) | 주상호(朱常浩) | 1590년 ~ 1644년 | 단비 주씨 | [26] | |
6남 | 혜왕(惠王) | 주상윤(朱常潤) | 1594년 ~ 1647년 | 공순황귀비 이씨 | [27] | |
7남 | 계왕(桂王) | 단(端) | 주상영(朱常瀛) | 1597년 ~ 1644년 | 공순황귀비 이씨 | [28] |
8남 | 영왕(永王) | 사(思) | 주상부(朱常溥) | 1604년 ~ 1606년 | 청혜순비 이씨 | 요절 |
장녀 | 영창공주 | 주헌영(朱軒媖) | 1582년 ~ 1647년 | 효단현황후 | ||
차녀 | 운화공주 | 주헌주(朱軒姝) | 1584년 ~ 1590년 | 공각황귀비 정씨 | 요절 | |
3녀 | 정락공주 | 주헌규(朱軒媯) | 1584년 ~ 1585년 | 단정영비 왕씨 | 요절 | |
4녀 | 운몽공주 | 주헌원(朱軒嫄) | 1584년 ~ 1587년 | 효정황태후 왕씨 | 요절 | |
5녀 | 선거공주 | 주헌길(朱軒姞) | 1584년 ~ 1585년 | 덕빈 이씨 | 요절 | |
6녀 | 영구공주 | 주헌요(朱軒姚) | 1588년 ~ 1589년 | 공각황귀비 정씨 | 요절 | |
7녀 | 수령공주 | 주헌위(朱軒媁) | 1592년 ~ 1634년 | 공각황귀비 정씨 | ||
8녀 | 태순공주 | 주헌희(朱軒姬) | 1592년 ~ 1593년 | 덕빈 이씨 | 요절 | |
9녀 | 향산공주 | 주헌등(朱軒嬁) | 1598년 ~ 1599년 | 덕빈 이씨 | 요절 | |
10녀 | 천태공주 | 주헌미(朱軒媺) | 1605년 ~ 1606년 | 청혜순비 이씨 | 요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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