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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크랜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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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머스 크랜머는 1489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관여하면서 정치에 참여했다. 헨리 8세의 총애를 받아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으며,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하고 잉글랜드 성공회를 창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앤 불린과의 결혼을 승인하고, 1549년 성공회 기도서를 작성하는 등 종교 개혁을 주도했다. 메리 1세 시대에 개신교 신앙을 버리라는 강요를 받았으나, 마지막 순간에 신앙을 지키며 화형으로 순교했다. 크랜머는 잉글랜드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유산은 영어 문학, 잉글랜드 교회, 그리고 성공회 예배에 깊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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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크랜머
기본 정보
토머스 크랜머의 초상화, 1545년
1545년 초상화
직함캔터베리 대주교
재임 시작1533년 12월 3일
재임 종료1555년 12월 4일
이전 대주교윌리엄 워럼
다음 대주교레지널드 폴
출생일1489년 7월 2일
출생지잉글랜드, 노팅엄셔, 애슬록턴
사망일1556년 3월 21일 (66세)
사망지잉글랜드, 옥스퍼드
종교개신교 (성공회)
서명
교회 경력
소속 교회잉글랜드 국교회
교구캔터베리
서품(정보 없음)
주교 서임1533년 3월 30일
주교 서임자존 롱랜드
교육
모교케임브리지 대학교 예수 칼리지

2. 경력

토머스 크랜머는 잉글랜드 노팅엄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549년 성공회의 신학과 전례가 담긴 중요한 문헌인 영문 성공회 기도서(영어: ''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작성하고, 아침·저녁기도와 감사성찬례 때마다 영문 성서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종교개혁 전통은 세계성공회공동체의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주어, 현재 각 지역 성공회 교회들은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이 속한 지역말로 만든 성공회 기도서와 성서를 사용하고 있다. 대한성공회한글 성공회기도서와 한글성서를 사용하고 있으며, 크랜머가 1549년에 작성한 성찬기도 1양식은 현재 대한성공회에서 사용하는 성공회기도서(2004년판)에 포함되어 있다.[3]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489-1527)

토머스 크랜머는 1489년 잉글랜드 노팅엄셔 애슬록턴에서 토머스 크랜머와 아그네스 해트필드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3] 아버지 토머스 크랜머는 문장가 가문 출신으로, 크랜머 홀 영지에서 이름을 따왔으나 재산이 많지는 않았다.[4] 장남 존 크랜머가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았고, 토머스와 동생 에드먼드는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4]

크랜머의 초기 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마을의 문법 학교에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14세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예수 칼리지에 입학했다.[5] 그는 논리학, 고전 문학, 철학을 공부하며 8년 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 기간 동안 중세 스콜라 철학 책을 수집했다.[6] 이후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과 에라스뮈스를 연구하며 3년 만에 석사 과정을 마쳤다.[7] 1515년 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직후 예수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8]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크랜머는 조안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사제가 아니었기에 펠로우십을 포기해야 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버킹엄 칼리지(케임브리지 대학교 매그달렌 칼리지로 개편됨)에서 강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9] 조안이 첫 출산 중 사망하자 예수 칼리지는 크랜머의 펠로우십을 복원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1520년에 성직 서품을 받았고, 1526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0]

케임브리지에서 30년 동안 크랜머의 사상과 경험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는 1520년대 루터교 사상이 확산될 때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성서 학문에 열정적인 인문주의자로 묘사된다. 그의 주석 연구는 초기 마르틴 루터에 대한 반감과 에라스뮈스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준다.[11]

2. 2.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와 정치 참여 (1527-1532)

헨리 8세는 1502년 형 아서가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 캐서린 오브 아라곤과 약혼했다. 이 결혼은 성경 레위기 18장과 20장에서 형수와의 결혼을 금지했기에 논란이 있었다. 1509년 결혼 후, 여러 번 유산 끝에 1516년 메리가 태어났다. 1520년대까지 헨리 8세는 아들이 없어 이를 하나님의 분노로 여겨 교황청에 결혼 무효를 요청했다.[13]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이 문제를 맡았고, 대학 전문가들과 상의했다. 1527년부터 크랜머는 케임브리지 강사 임무 외에도 무효 소송을 도왔다.[14]

1529년 중반, 크랜머는 케임브리지에서 흑사병을 피해 월섬 홀리 크로스 친척 집에 머물렀다.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워드 폭스가 합류해 결혼 무효 문제를 논의했고, 크랜머는 로마 소송 대신 유럽 대학 신학자들 의견을 구하자고 제안했다. 헨리 8세는 관심을 보였고, 토머스 모어의 승인 여부는 불분명하나 결국 실행되어 크랜머는 로마 왕실 팀에 합류해 대학 의견을 수집했다.[15] 에드워드 폭스는 연구를 조정, 국왕의 관할권을 뒷받침하는 ''Collectanea satis copiosa''와 ''The Determinations''를 제작했다.[16]

헨리 8세는 크랜머가 캐서린 오브 아라곤과의 결혼 무효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한스 홀바인 2세의 초상화.


크랜머는 바젤의 인문주의자이자 울리히 츠빙글리, 요하네스 오콜람파디우스 추종자인 시몬 그레나에우스를 통해 대륙 개혁파와 처음 접촉했다. 1531년 중반, 그레나에우스는 국왕과 대륙 개혁가 중개차 영국을 방문, 크랜머와 친분을 쌓고 바젤 귀환 후 마르틴 부처에게 크랜머를 알렸다. 이로써 크랜머는 스트라스부르와 스위스 개혁가들과 관계를 맺었다.[17]

1532년 1월, 크랜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궁정 상주 대사로 임명되어 레겐스부르크로 갔다.[18] 뉘른베르크 루터교 도시를 지나 종교 개혁 영향을 처음 보았다. 제국 의회가 뉘른베르크로 옮겨지자 뉘른베르크 개혁 설계자 안드레아스 오시안더를 만났다. 친구가 된 후, 7월에 크랜머는 오시안더 아내의 조카 마가렛 크랜머와 결혼했다. 학자들은 크랜머가 특정 루터교 원칙을 따랐다고 본다.[19] 그러나 캐서린 조카 카를에게 고모 결혼 무효 지지를 설득 못해 정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20]

2. 3.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과 종교개혁 주도 (1532-1534)

앤 불린의 가족은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는 데 기여했다.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그린 후대 초상화.


1532년 10월 1일, 크랜머는 윌리엄 워럼 대주교의 사망으로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는 국왕의 서신을 받았다.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 임명은 헨리 8세의 구애를 받던 앤 불린의 가족에 의해 성사되었다.[21] 런던에서는 크랜머가 이전에는 교회에서 작은 직책만 맡았었기 때문에 그의 승진 소식에 놀라움을 표했다.[21] 크랜머는 11월 19일에 만토바를 떠나 1월 초에 잉글랜드에 도착했다.[22]

헨리 8세는 크랜머의 캔터베리 승진에 필요한 교황 칙서 비용을 직접 지불했다. 당시 교황 사절은 로마와의 최종적인 단절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 측을 기쁘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 칙서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1533년 3월 26일경 교황 칙서가 도착했고, 크랜머는 3월 30일에 세인트 스티븐 예배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22]

헨리 8세와 앤 불린은 1533년 1월 24일 또는 25일에 은밀히 결혼했는데,[23] 크랜머는 14일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24] 이후 몇 달 동안 크랜머와 국왕은 헨리 8세의 결혼에 대한 법적 절차를 논의했다. 절차가 합의되자 크랜머는 5월 10일에 법정을 열어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을 소환했다. 캐서린은 출석하지 않았고, 5월 23일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다는 판결을 내렸다.[25] 5월 28일,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승인했다. 6월 1일, 크랜머는 직접 앤 불린을 여왕으로 즉위시키고 축성했으며, 앤에게 홀과 왕관을 전달했다.[26]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격분했지만, 잉글랜드와의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피하기 위해 다른 군주들의 압력을 받아 결단력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7월 9일, 그는 헨리 8세와 그의 고문들을 임시 파문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아내로 유지했고, 9월 7일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크랜머는 엘리자베스에게 세례를 주고 그녀의 대부 중 한 명이 되었다.[27]

1533년 6월, 크랜머는 실재 현존을 부인한 존 프리스를 징계하고 화형에 처하는 어려운 과제를 맡았다. 크랜머는 개인적으로 프리스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29] 1534년까지 크랜머는 로마와의 결별을 분명히 하고, 휴 라티머와 같은 사람들을 지원하며 종교 개혁을 지지했다.[30]

2. 4. 종교개혁의 심화와 정치적 갈등 (1535-1542)

토머스 크롬웰은 국왕의 영적 문제에 대한 주요 대리인으로 활동한 섭정이었다. 한스 홀바인의 초상화, 1532–1533년.


크랜머는 자신의 관할 구역 내의 주교들에게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구 방문을 시도했을 때, 보수적인 주교가 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할 수 있는 장소를 피해야 했다. 1535년 크랜머는 존 스톡슬리, 존 롱랜드, 스티븐 가디너를 포함한 여러 주교들과 어려운 만남을 가졌다. 그들은 크랜머의 권력과 직함에 반대했으며, 수장령이 그의 역할을 정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국왕의 수석 장관인 토머스 크롬웰이 섭정으로 임명되어[32] 교회의 수석 대리인이 되었다. 그는 왕의 수장권을 명확하게 구조화하는 또 다른 일련의 제도를 만들었다. 따라서 대주교는 왕의 영적 관할권과 관련하여 섭정 크롬웰에게 가려졌다.[33] 크랜머가 하위 파트너의 위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증거는 없다.[34] 그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성직자 반대자들조차 능가할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다. 이러한 임무는 크롬웰에게 맡겨졌다.[35]

1536년 1월 29일, 앤 불린이 아들을 유산했을 때, 국왕은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 기간 동안 그를 괴롭혔던 성경적 금지 사항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36] 유산 직후, 국왕은 제인 시모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4월 24일까지 크롬웰에게 이혼 사건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37] 이러한 계획을 알지 못한 채, 크랜머는 4월 22일까지 사소한 문제에 대해 크롬웰에게 편지를 계속 썼다. 앤은 5월 2일 런던 탑으로 보내졌고, 크랜머는 크롬웰에 의해 긴급 소환되었다. 바로 다음 날, 크랜머는 여왕의 죄에 대한 의문을 표명하고 앤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강조하는 내용의 편지를 국왕에게 썼다. 그것이 전달된 후, 크랜머는 앤의 결혼이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38] 5월 16일 그는 앤을 탑에서 만나 그녀의 고해성사를 들었고 다음 날 그는 그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틀 후 앤이 처형되었고 크랜머는 그녀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39]

섭정은 개혁의 속도를 국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보수주의자와 개혁주의자 사이에 균형이 확립되었고, 이는 헨리 교회의 신념을 정의하려는 첫 번째 시도인 ''십조''에서 나타났다. 이 조항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 5개 조항은 전 7개 성사: 세례, 성찬례, 참회 중 3개만 인정함으로써 개혁주의자들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5개 조항은 이미지, 성인, 의례 및 의식, 그리고 연옥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으며, 전통주의자들의 견해를 반영했다. 문서의 두 개의 초기 초안이 보존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신학 팀이 작업한 것을 보여준다. 보수주의자와 개혁주의자 간의 경쟁은 크랜머와 더럼 주교인 커버트 턴스톨이 만든 경쟁적인 편집 수정 사항에서 드러난다. 최종 결과물은 논쟁의 양측을 기쁘게 하고 화나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40] 7월 11일까지 크랜머, 크롬웰, 그리고 성직자들의 일반 회의인 잉글랜드 성직자 회의는 ''십조''에 서명했다.[41]

1536년 말, 잉글랜드 북부는 헨리의 정책에 대한 가장 심각한 반대인 은총의 순례로 알려진 일련의 봉기에 휩싸였다. 크롬웰과 크랜머는 시위대의 분노의 주요 표적이었다. 크롬웰과 국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격렬하게 노력했지만, 크랜머는 조용히 지냈다.[42] 헨리의 정권이 안전하다는 것이 분명해진 후, 정부는 ''십조''의 명백한 부적절성을 개선하기 위한 주도권을 잡았다. 수개월 간의 논쟁 끝에 나온 결과는 "주교의 책"으로 첫 번째 판부터 비공식적으로 알려진 ''기독교인의 제도''였다. 이 책은 1537년 2월, 크롬웰이 명령한 첫 번째 섭정 시노드에서 전체 교회를 위해 처음 제안되었다. 크롬웰이 회의를 열었지만, 시노드가 진행되면서 크랜머와 폭스가 의장직과 조정 역할을 맡았다. 폭스는 최종 편집을 대부분 담당했으며, 그 책은 9월 말에 출판되었다.[43]

출판 후에도 그 책의 지위는 여전히 불분명했는데, 그 이유는 국왕이 그것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는 초안 편지에서 그 책을 읽지 않았지만 인쇄를 지지한다고 언급했다. 그의 관심은 제인 시모어의 임신과 오랫동안 찾던 아들 에드워드의 출생에 가장 쏠려 있었다. 제인은 출산 직후 사망했고, 그녀의 장례식은 11월 12일에 열렸다. 그 달 헨리는 주교의 책 작업을 시작했고, 그의 수정 사항은 크랜머, 샘슨 등에게 의견을 구하기 위해 보내졌다. 헨리에 대한 크랜머의 반응은 동료들보다 훨씬 더 대립적이었고, 훨씬 더 긴 분량으로 썼다.[44] 그들은 믿음에 의한 칭의 또는 ''오직 믿음''(sola fide) 및 예정설과 같은 개혁 신학을 지지하는 명확한 진술을 드러낸다. 그의 말은 국왕을 설득하지 못했다. 새로운 신앙 선언은 1543년 국왕의 책이 출판될 때까지 연기되었다.[45]

1538년, 국왕과 크롬웰은 루터교 군주들과 정치적, 종교적 동맹을 형성하기 위한 상세한 논의를 갖도록 준비했다. 헨리는 1537년 중반부터 슈말칼덴 동맹에서 새로운 대사관을 찾고 있었다. 루터교인들은 이에 기뻐하며, 마틴 루터의 동료인 프리드리히 미코니우스를 포함한 다양한 독일 도시에서 공동 대표단을 보냈다. 대표단은 1538년 5월 27일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국왕, 크롬웰, 크랜머와의 첫 만남 후, 신학적 차이점에 대한 논의는 크랜머의 주재하에 램버스 궁전으로 옮겨졌다. 합의에 대한 진전은 느렸는데, 그 이유는 크롬웰이 회의를 신속하게 진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바빴고, 잉글랜드 측 협상 팀이 보수주의자와 개혁주의자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담은 대주교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이 지쳐가면서 질질 끌었다. 협상은 국왕의 임명자에 의해 치명적으로 무효화되었다. 헨리의 잉글랜드 추밀원에 속해 있던 크랜머의 동료인 에드워드 폭스는 그해 초에 사망했다. 국왕은 그의 대체자로 크랜머의 보수적인 라이벌 커버트 턴스톨을 선택했고, 헨리 곁에 머물면서 조언을 하도록 지시했다. 8월 5일, 독일 대표단이 국왕에게 특히 그들을 걱정시키는 세 가지 사항(강제 성직자 독신, 평신도에게 성배를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 개인 미사의 유지)에 관한 편지를 보냈을 때, 턴스톨은 국왕을 위해 개입하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 결과, 국왕은 독일인들의 주요 관심사를 철저히 기각했다. 크랜머는 독일인들에게 협상을 계속할 것을 간청하며, "위기에 처한 잉글랜드의 수많은 영혼을 고려하라"는 주장을 사용했지만, 그들은 실질적인 성과 없이 10월 1일에 떠났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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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개혁가인 필리프 멜란히톤은 헨리가 자신을 매우 존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539년 초, 멜란히톤은 헨리에게 종교적 견해, 특히 성직자 독신주의에 대한 지지를 비판하는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 4월 말에는 멜란히톤의 권고에 따라 루터교 제후들의 또 다른 대표단이 도착했다. 크롬웰은 새로운 루터교 선교를 지지하는 편지를 국왕에게 썼다. 국왕은 입장을 바꾸기 시작하여 루터교도들에게 손을 내밀기보다는 잉글랜드 내 보수 여론을 얻는 데 집중했다. 1539년 4월 28일, 잉글랜드 의회가 3년 만에 처음으로 소집되었다. 크랜머는 참석했지만, 크롬웰은 건강 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 5월 5일, 귀족원은 교리를 검토하고 결정하기 위해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 통상적인 종교적 균형을 맞춘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철저한 개정을 위해 필요한 세부 작업을 수행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5월 16일, 토머스 하워드 제3대 노퍽 공작은 위원회가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고 언급하고, 귀족원이 여섯 가지 교리적 질문, 즉 결국 ''6개 조항''의 기초를 형성하는 질문을 검토할 것을 제안했다. 그들은 성체 현존, 성직자 독신주의, 고해의 필요성과 같은 교리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을 확증했다.[47] 6개 조항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될 무렵, 크랜머는 아내와 자녀들을 안전을 위해 잉글랜드 밖으로 보냈다. 이 때까지 가족은 조용히 숨겨져 있었고, 아마도 켄트의 포드 팰리스에 있었을 것이다. 이 법안은 6월 말에 의회를 통과했고, 이 법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라티머와 니컬러스 샤크스턴은 그들의 교구를 사임해야 했다.[48]

개혁가들의 좌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9월까지 헨리는 그 법안의 결과와 그 공포자들에게 불만을 품었고, 충실한 크랜머와 크롬웰은 다시 총애를 받았다. 국왕은 그의 대주교에게 크롬웰의 지시 아래 1539년 4월에 처음 출판된 영어 성경 번역인 대역 성경에 대한 새로운 서문을 쓰라고 요청했다. 서문은 독자들에게 보내는 설교의 형태였다. 크롬웰에게는 헨리와 독일 공주의 여동생인 앤 오브 클레베스 간의 왕실 결혼 계획이 국왕에게 받아들여진 것이 기뻤다. 크롬웰의 견해에 따르면, 이 결혼은 슈말칼덴 동맹과의 연락을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 헨리는 1540년 1월 1일에 처음 만났을 때 앤에게 실망했지만, 크랜머가 주례한 결혼식에서 1월 6일에 마지못해 그녀와 결혼했다. 헨리가 왕실 이혼을 요청하기로 결정하면서 결혼은 비극으로 끝났다. 이로 인해 헨리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고 크롬웰은 그 결과를 겪었다. 노퍽 공작을 포함한 그의 옛 적들은 약해진 크롬웰을 이용했고, 그는 6월 10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크랜머를 포함한 모든 친구들의 지지를 즉시 잃었다. 크랜머는 앤 불린을 위해 했던 것처럼, 크롬웰의 과거 업적을 옹호하는 편지를 국왕에게 썼다. 헨리의 앤 오브 클레베스와의 결혼은 크랜머와 가디너가 이끄는 부총독 종교 회의에 의해 7월 9일에 신속하게 무효화되었다.[50]

무효화 이후, 크롬웰은 7월 28일에 처형되었다.[51] 크랜머는 이제 정치적으로 두드러진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그 부담을 짊어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52] 헨리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헨리의 권위에 매달렸다. 국왕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그 대가로 크랜머는 국왕에게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다.[53] 1541년 6월 말, 헨리는 새로운 부인인 캐서린 하워드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를 처음 방문했다. 크랜머는 런던에 남아 국왕의 부재 시 문제들을 처리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의 동료는 재상 토머스 오들리, 소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였다. 이것은 크랜머가 교회 밖에서 맡은 첫 번째 주요 책임이었다. 10월, 국왕과 왕비가 자리를 비운 동안, 존 래슬스라는 개혁가가 크랜머에게 캐서린이 간통을 저질렀다고 폭로했다. 크랜머는 오들리와 시모어에게 이 정보를 전달했고, 그들은 헨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국왕의 분노를 두려워한 오들리와 시모어는 크랜머에게 헨리에게 알리라고 제안했다. 크랜머는 만성절 미사 중에 헨리에게 메시지를 몰래 전달했다. 조사를 통해 결혼 부정 행위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고, 캐서린은 1542년 2월에 처형되었다.[54]

2. 5. 헨리 8세 말년과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종교개혁 (1543-1549)

헨리 8세의 만년에, 크랜머는 스테판 가디너를 포함한 보수 세력의 견제를 받았지만, 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종교 개혁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1544년 5월 27일, 최초의 공식 자국어 예배인 권고와 연도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성인에게 호칭을 사용하지 않도록 개혁한 예배였다. 영국 하원에는 개혁파 의원들이 선출되었고, 이들은 6개 조항과 참된 종교 진흥법의 영향을 억제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을 도입했다.[61]

1546년, 가디너, 노퍽 공작, 브리엇즐리, 에드먼드 보너 등 보수 세력은 개혁가들을 공격하려 했지만, 존 더들리 등 개혁 성향 귀족들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크랜머는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의 임종 때 그의 손을 잡고 개혁된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왕에 대한 마지막 의무를 다했다. 그는 헨리 8세의 죽음을 애도하며 수염을 길렀는데, 이는 옛 교회와의 결별을 의미했다.[62]

에드워드 6세 시대에 크랜머는 보호경 에드워드 시모어의 지원 아래 본격적인 종교 개혁을 추진했다. 1547년 8월, 왕실 시찰단은 각 교구에 설교집을 비치하도록 지시했는데, 이 책에는 크랜머가 작성한 4편의 설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믿음에 부속된 선행의 설교"에서 그는 수도원 제도와 전례 낭송 및 의식의 중요성을 공격하고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63] 또한, 각 교구에는 "경건함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는 모든 이미지를 제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64][65]

크랜머는 마르틴 부처를 비롯한 대륙의 개혁 신학자들과 교류하며, 성찬례에 대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피터 마터와 베르나르디노 오키노 등 이탈리아 개혁 신학자들을 잉글랜드로 초청하여 신학 논의를 이어갔다.[66] 1549년 3월, 스트라스부르에서 추방된 마르틴 부처와 파울 파기우스를 잉글랜드로 초청하여 대학에 배치하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설교자를 양성하고 전례와 교리 개혁을 추진했다.[68]

1549년에는 1549년 ''공동 기도서''가 출판되어 영어 예배가 확산되었다. 크랜머는 이 기도서의 편집과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솔즈베리 예식, 헤르만 폰 비드의 저작, 오시안더와 유스투스 요나스 등 루터교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다.[72] 1549년 통일법을 통해 기도서 출판을 지지하고 성직자 결혼을 합법화했다.[71] 그러나 데번과 콘월 등 일부 지역에서는 기도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2. 6.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종교개혁 완성과 몰락 (1549-1553)


  • -는 크랜머와 여러 해 동안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잉글랜드로 피신해야 했다. 세이무어의 섭정 하에 개혁가들은 체제의 일부가 되었고, 1547년 8월 각 교구에 설교집 사본을 구하도록 지시했으며, 여기에는 크랜머가 쓴 4편의 설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크랜머는 수도원 제도와 전례 낭송 및 의식에 관련된 행위의 중요성을 공격하며,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63] 각 교구에는 "경건함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는 모든 이미지"를 제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64][65]


크랜머는 슈말칼덴 동맹과의 초기 접촉 이후 마르틴 부처와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뮐베르크 전투에서 동맹에 대한 카를 5세의 승리로 잉글랜드는 박해받는 개혁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유일한 주요 국가가 되었다. 크랜머는 부처에게 성찬 신학에 대한 질문을 담은 서신(현재 분실)을 보냈고, 부처는 1547년 11월 28일 답신에서 인간의 실재적 임재를 부인하고 화체설과 성찬례 숭배를 비난했다. 이 서신은 잉글랜드로 피신하도록 초청받은 피터 마터와 베르나르디노 오키노를 통해 크랜머에게 전달되었으며, 마터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서신 ''Ad Caesarium Monachum''을 가져와 크랜머의 성찬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66][67]

1549년 3월, 스트라스부르는 마르틴 부처와 파울 파기우스에게 떠나도록 강요했고, 크랜머는 즉시 그들을 잉글랜드로 초청하여 대학에 배치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4월 25일 도착 후, 크랜머는 18년 만에 부처를 직접 만나 기뻐했다.[68] 그는 새로운 세대의 설교자를 훈련시키고 전례와 교리의 개혁을 돕기 위해 이 학자들을 필요로 했다. 크랜머는 얀 라스키를 초청했지만, 오시안더와 멜란히톤을 설득하지는 못했다.[69]

1549년 ''공동 기도서''의 표지


예배에 영어 사용이 확산되면서, 완전하고 통일된 전례의 필요성이 분명해졌고, 1549년 ''공동 기도서''가 될 초기의 회의가 1548년 9월 처트시 수도원과 윈저 성에서 열렸다. 구성원들은 보수주의자와 개혁주의자 간에 균형을 이루었으며, 12월 14일부터 19일까지 귀족원에서 성찬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크랜머는 이 토론에서 자신이 육체적 실재설 교리를 포기했고 성찬의 임재는 단지 영적인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70] 의회는 1549년 통일법을 통과시켜 기도서 출판을 지지했으며, 성직자 결혼을 합법화했다.[71]

기도서의 어느 정도가 크랜머의 개인적인 작곡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편집과 책의 전체 구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73]

새로운 기도서의 사용은 1549년 6월 9일에 의무화되었으나, 데번과 콘월에서 기도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군은 여섯 조항의 복원, 평신도에게 성찬 빵만 주고 미사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한 기도 복원, 수도원 재건 등을 요구했다. 크랜머는 이러한 요구에 대한 왕에게 강력한 답변을 썼고, 7월 21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공식적인 교회 노선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의 설교 초안은 그의 경력 전체에서 그의 설교에 대한 유일하게 현존하는 서면 샘플이며, 그가 반란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 피터 마터와 협력했음을 보여준다.[75]

서머셋 섭정은 기도서 반란 등으로 인해 추밀원에서 분열되었고, 1549년 10월 13일 무혈 쿠데타로 그의 보호관 지위가 끝났다. 더들리의 쿠데타 뒤에도 개혁자들은 새로운 정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영국 종교 개혁은 계속해서 성과를 굳혀나갔다.[76] 시모어는 곧 풀려나 의회로 복귀했고, 크랜머는 니콜라스 리들리를 런던 교구로 전임시킬 수 있었다.[77]

존 후퍼
츠빙글리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았으며, 더 급진적인 개혁을 옹호했다.

크랜머와 부처 사이의 협력의 첫 번째 결과는 첫 번째 에드워딘 서품집이었으며, 1550년에 출판되었다. 크랜머는 부처의 초안을 채택하여 부제, 사제, 주교를 임명하기 위한 세 가지 의식을 만들었다. 같은 해 크랜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에 대한 참되고 가톨릭적인 교리의 옹호''를 저술했다. 서문에서 그는 로마와의 갈등을 요약하며, 실체 변화, 육적인 실재 현존, 그리고 미사의 희생적인 본성을 잡초의 뿌리라고 비유했다.[78]

부처는 영국 종교 개혁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 진행 속도에 대해 우려했다. 크랜머는 부처에게 기도서가 단지 첫 번째 단계일 뿐이며, 그 초기 형태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확신시켰다.[79] 의복 논쟁 동안 크랜머와 리들리는 그들의 입장을 고수했고, 존 후퍼는 투옥되었다가 결국 굴복했다. 개혁에 대한 크랜머의 비전은 정부의 권위 아래 신중한 단계를 통해 유지되었다.[80]

1551년 10월 16일, 시모어가 반역 혐의로 체포되면서 크랜머의 정치적 역할은 줄어들었다. 12월에 시모어는 재판을 받았고, 중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552년 1월 22일에 처형되었다.[81] 이것은 크랜머와 더들리 사이의 불화를 시작했고, 섭정 위원회가 교회 재산을 점차적으로 몰수하면서 그해 동안 불화가 심화되었다.[82]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크랜머는 교회법 개정, 기도서 개정, 교리 선언문 작성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83]

피터 마터
는 영국 종교 개혁에서 크랜머를 크게 도왔다.

헨리 8세가 로마와 결별한 후 교회 내 통치를 정의하는 원래의 가톨릭 교회법 개정이 필요했다. 크랜머는 1551년 12월에 작업 재개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고, 피터 마터를 위원회에 영입했으며, 라스키와 후퍼에게도 참여를 요청했다. 크랜머와 마터는 영국에서 개혁된 교회법의 성공적인 시행이 국제적인 중요성을 가질 것이라고 인식했다. 크랜머는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의 모든 개혁 교회를 모아 트리엔트 공의회에 맞서려 했다. 1552년 3월, 크랜머는 유럽 최고의 개혁가인 불링거, 존 칼빈, 멜란히톤을 영국으로 초청하여 에큐메니컬 공의회에 참여하도록 했지만, 반응은 실망스러웠다.[84] 크랜머는 칼빈에게 "그동안 우리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영국 교회를 개혁하고, 그 교리와 법률이 성경의 모범에 따라 개선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82] 이 프로젝트의 부분적인 원고 한 부가 남아 있었는데, 크랜머와 마터의 수정 및 주석이 달려 있었다. 최종 버전이 의회에 제출되었을 때, 크랜머와 더들리 사이의 불화는 완전히 끝나 더들리는 교회법 법안을 상원에서 효과적으로 무산시켰다.[85]

첫 번째 기도서와 마찬가지로, 개정의 기원과 참여자는 불분명하지만, 크랜머가 프로젝트를 이끌고 그 발전을 지휘한 것은 분명했다. 1549년 말, 캔터베리 회의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고, 1550년 말, 마터와 부처의 의견이 요청되었고, 그들은 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86]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교인들에게 제공할 때 완전히 다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영적인 임재에 대한 견해가 명확해졌다. 새로운 예문은 어떤 빵이라도 사용할 수 있으며, 남은 빵이나 포도주는 사제가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하여, 성찬의 요소들을 어떤 물리적인 임재와도 분리했다. 새로운 책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가능성을 없앴다.[87] 책의 사용을 승인한 1552년 통일법은 11월 1일부터 배타적으로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최종 버전은 더들리의 개입으로 인해 거의 막바지에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 존 녹스는 성찬 때 무릎을 꿇는 관행을 공격했고, 1552년 9월 27일, 추밀원은 새 기도서 인쇄를 중단하고 크랜머에게 이를 개정하도록 지시했다. 크랜머는 전례에 대한 변경 사항을 결정하는 것은 왕의 동의를 받은 의회의 권한이라고 주장했다.[88] 10월 22일, 추밀원은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성찬 때 무릎을 꿇는 것은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담은 소위 ''검은 예문''을 추가하기로 결정했다.[89]

결국 ''42개 조항''이 된 선언문의 기원도 불분명하다. 크랜머는 조항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에큐메니컬 공의회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1552년 9월까지, 조항 초안은 크랜머와 존 체크에 의해 작업되었다. ''42개 조항''이 1553년 5월에 최종적으로 출판되었을 때, 표지에는 공의회가 조항에 동의했으며 왕의 권한으로 출판되었다고 명시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며, 크랜머는 이 문제에 대해 추밀원에 불만을 제기했지만, 당국은 조항이 공의회 기간 동안 개발되었다고 언급했다. 추밀원은 크랜머에게 조항에 서명하도록 주교들에게 요구하는 불행한 임무를 부여했는데, 그들 중 많은 수가 이에 반대했다. 크랜머가 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서명이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90]

1553년에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노섬벌랜드 공작존 더들리의 책략으로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옹립되면서 크랜머는 위기에 처했다. 계획이 실패한 노섬벌랜드 공작은 처형되었고, 새로 즉위한 메리 1세는 제인 옹립에 가담한 크랜머를 런던 탑에 투옥시켰다. 여왕은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국교회는 곤경에 처했다. 심문과 법정에 불려 나온 크랜머는 교리 토론에 참석하고 필사적으로 여왕에게 사면을 청원했지만 거부당했으며, 1555년 9월에 열린 재판에서 이단 낙인이 찍히고 파문과 사형이 결정되었다.[122]

2. 7. 메리 1세 시대의 박해와 순교 (1553-1556)

로마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성공회개신교 탄압으로 휴 레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 등과 함께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강요와 회유로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개신교 신앙을 버린다는 믿음철회서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입장을 바꾸고 순교하였는데, 순교 직전 믿음철회서에 서명한 오른손을 불에 집어넣었다.[124]

폭스의 순교사(1563) 중 삽화, 크랜머의 순교


그는 화형대에서 강요와 회유로 개신교 신앙을 저버린 것을 후회하며 믿음철회서에 서명한 오른 손이 가장 먼저 불에 타야한다며, 교황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적이자, 적그리스도라 말하고 화형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크랜머, 리들리, 라티머, 옥스퍼드 순교자를 묘사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


에드워드 6세는 병에 걸렸고, 의회는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들었다. 1553년 5월, 의회는 에드워드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대륙의 개혁가들에게 보냈다. 이 서한 중 하나는 멜란히톤에게 보낸 것으로, 그는 1551년 2월 마틴 부처의 사망 이후 공석이 된 케임브리지의 학장직을 맡기 위해 잉글랜드로 오라는 초대장이었다. 헨리 8세와 크랜머는 이전에 멜란히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의회는 여행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선금을 보내는 등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다. 크랜머는 그에게 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하는 개인적인 편지를 보냈다.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멜란히톤은 잉글랜드로 가지 않았다. 의회는 헨리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이자 가톨릭 신자인 메리 대신, 에드워드의 사촌이자 개신교 신자인 제인 그레이 부인을 왕위에 앉히도록 여러 재판관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1553년 6월 17일, 국왕은 제인이 자신을 계승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는 세 번째 계승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크랜머는 에드워드와 단독으로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고, 에드워드와의 면담은 의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에드워드는 그에게 자신의 유언에 적힌 내용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크랜머가 제인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것은 6월 19일 이전에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는데, 그날 새로운 계승을 인정하기 위한 소집을 소집하라는 왕명서가 발송되었기 때문이다.[91]

7월 중순, 메리를 지지하는 반란이 발생했고, 의회에서 제인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다. 메리가 여왕으로 선포되자 더들리, 리들리, 체이크, 제인의 아버지인 서퍽 공작은 투옥되었다. 대주교에 대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8월 8일, 그는 기도서의 의식에 따라 에드워드의 장례식을 집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페터 마터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잉글랜드를 탈출하라고 조언했지만, 자신은 머물기로 선택했다. 개혁 성직자들은 해임되었고, 에드먼드 보너와 같은 보수 성직자들은 이전 지위를 회복했다. 크랜머는 그가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미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는 소문이 거짓이라고 선언하고 "우리의 주군이신 에드워드 6세 국왕에 의해 시행된 모든 교리와 종교는 지난 천 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사용된 어떤 것보다 더 순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다."라고 말했다.[92] 정부는 크랜머의 선언을 반역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9월 14일 스타 체임버에서 의회 앞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날 그는 마터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크랜머는 휴 라티머, 니컬러스 리들리와 함께 투옥되기 위해 타워로 곧바로 보내졌다.[93]

1553년 11월 13일, 크랜머와 다른 4명은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수많은 증인들은 크랜머가 이단을 장려하고 이단적인 저작물을 썼다고 증언했다. 1554년 2월까지 제인 그레이와 다른 반역자들이 처형되었고, 이후 개혁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관심이 쏠렸다. 1554년 3월 8일, 추밀원은 크랜머, 리들리, 라티머에게 이단 혐의로 두 번째 재판을 받기 위해 옥스퍼드의 보카르도 감옥으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이 기간 동안 크랜머는 스트라스부르로 도망간 마터에게 편지를 밀반출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의 필체로 쓰여진 마지막 생존 문서였다. 그는 교회의 절망적인 상황이 결국 구원받을 것이라는 증거라고 말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허락하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썼다.[94] 크랜머는 17개월 동안 보카르도 감옥에 격리되어 있었고, 1555년 9월 12일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비록 잉글랜드에서 열렸지만, 재판은 교황의 관할하에 있었고, 최종 판결은 로마에서 내려질 것이었다. 심문 과정에서 크랜머는 자신에게 제시된 모든 사실을 인정했지만, 반역, 불복종 또는 이단을 부인했다. 라티머와 리들리의 재판은 크랜머의 재판 직후에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판결은 거의 즉시 내려졌고, 그들은 10월 16일에 화형에 처해졌다. 크랜머는 그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탑으로 이송되었다. 12월 4일, 로마는 크랜머를 성직 면제에서 박탈하고 세속 당국에 그의 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95]

토머스 크랜머의 재판 (1580)


말년에 크랜머의 상황이 바뀌면서 여러 철회가 이루어졌다. 12월 11일, 그는 보카르도에서 나와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학장의 집에 수감되었다. 이 새로운 환경은 그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학계에 속해 있었고, 손님처럼 대우받았다. 후안 데 비야가르시아라는 도미니크 수도사가 그에게 접근하여 교황 수위권과 연옥 문제를 논쟁했다. 1월 말부터 2월 중순까지 작성된 그의 처음 네 번의 철회에서 크랜머는 국왕과 여왕의 권위에 복종하고 교황을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했다. 1556년 2월 14일, 그는 성직에서 강등되어 보카르도로 돌아갔다. 그는 거의 양보하지 않았고, 에드먼드 보너는 이러한 인정에 만족하지 않았다.

2월 24일, 옥스퍼드 시장에게 영장이 발부되었고, 크랜머의 처형 날짜는 3월 7일로 정해졌다. 영장이 발부된 지 이틀 후, 다섯 번째 진술서가 발표되었는데, 이는 진정한 철회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진술서였다. 크랜머는 모든 루터교 및 스위스 종교 개혁 신학을 부인하고, 교황 수위권과 성체 변화를 포함한 가톨릭 신학을 완전히 받아들였으며, 가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는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성사 사면을 요청하고 받았으며, 미사에 참여했다. 크랜머의 화형은 연기되었고, 교회법의 일반적인 관행에 따라 그는 사면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메리는 더 이상 연기가 불가능하다고 결정했다. 그의 마지막 철회는 3월 18일에 발표되었다. 그것은 망가진 인간의 징표였고, 죄의 광범위한 고백이었다.[96] 교회법에서 이단자를 철회할 경우 사면해야 한다는 조항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크랜머를 본보기로 삼기로 결심하고, "그의 불법과 완고함이 하나님과 폐하에게 너무나 컸기 때문에 폐하의 관용과 자비가 그에게 적용될 수 없었습니다."라고 주장하며 그의 처형을 강행했다.[97]

크랜머는 마지막으로 철회를 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옥스퍼드의 성 마리아 교회에서 열리는 예배에서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미리 연설문을 쓰고 제출했고,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1556년 3월 21일, 그의 처형일 강단에서 그는 기도와 국왕과 여왕에게 복종하라는 권고로 시작했지만, 준비된 원고에서 벗어나 그의 설교를 완전히 예상치 못하게 끝냈다. 그는 강등 이후 자신의 손으로 쓰고 서명한 철회를 부인했고, 그 결과 그의 손이 먼저 불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리고 교황에 관해서는, 나는 그를 그리스도의 적으로, 그의 모든 거짓 교리와 함께 적그리스도로 거부합니다."라고 말했다.[98] 그는 강단에서 끌려 나와 라티머와 리들리가 6개월 전에 불태워졌던 곳으로 끌려갔다. 불꽃이 그를 감싸자, 그는 오른손을 불 속에 집어넣어 "그 부끄러운 손"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그의 유언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봅니다."였다.[99]

3. 평가와 유산

크랜머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가톨릭 전기 작가들은 그를 비원칙적인 기회주의자, 니고데모[105], 왕의 폭정의 도구로 묘사하기도 한다. 반면, 일부 개신교 전기 작가들은 크랜머가 자신의 원칙을 배반한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106] 그러나 양측 모두 크랜머를 헌신적인 학자이자, 인간적인 약점과 강점을 동시에 가진 개혁가로 보는 데에는 동의한다.[107]

크랜머의 가장 큰 업적은 왕의 수위권 유지와 개혁 신학 및 실천의 확산이었다. 학자들은 크랜머가 영어와 잉글랜드 문화 정체성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103] 그의 산문은 영어 발전에 공헌했고, ''성공회 기도서''는 영어 문학의 중요한 작품으로, 400년 동안 성공회 예배를 이끌었다.[104]

엘리자베스 1세는 엘리자베스 종교 정착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켰다. 엘리자베스 1세가 재건한 교회는 1552년 9월의 에드워드 시대 교회의 모습을 반영했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기도서는 크랜머의 1552년 판에서 "검은 루브릭"을 제외한 내용이었다. 1563년의 회의에서는 채택되지 않았던 ''42개 조항''이 성찬 교리 영역에서 수정되어 ''39개 조항''으로 확정되었다. 에드먼드 그린달과 같은 망명자들은 크랜머를 모범으로 삼아 그의 업적을 지지하고 확장했다.[102]

크랜머의 가족사는 다음과 같다. 1539년에 유럽 대륙으로 망명했다가 에드워드 6세 즉위 직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크랜머는 아내 마가레테와 자녀들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메리 1세 즉위 후, 마가레테는 독일로 피신했고, 아들 토마스는 크랜머의 형제에게 맡겨져 대륙으로 보내졌다. 마가레테는 이후 크랜머가 선호한 출판업자 에드워드 위처치와 결혼했고, 부부는 메리 1세 치세 이후 영국으로 돌아와 서리에 정착했다. 크랜머의 두 자녀는 모두 후손 없이 사망하여 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101]

3. 1. 긍정적 평가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549년 성공회의 신학과 전례가 담긴 중요한 문헌인 영문 성공회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작성하고, 아침·저녁기도와 감사성찬례 때마다 영문 성서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종교개혁 전통은 세계성공회공동체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주어, 현재 각 지역 성공회 교회들은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이 속한 지역말로 만든 성공회 기도서와 성서를 사용하고 있다. 대한성공회한글 성공회기도서와 한글성서를 사용하고 있으며, 크랜머가 1549년에 작성한 성찬기도 1양식은 현재 대한성공회에서 사용하는 성공회기도서(2004년판)에 수록되어 있다.[1]

3. 2. 유산

크랜머가 제정한 성공회 기도서(영어: ''The Book of Common Prayer'')는 오늘날까지도 세계성공회공동체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그의 종교개혁은 잉글랜드 교회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순교는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104]

로마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의 탄압으로 화형당할 때, 크랜머는 강요와 회유로 개신교 신앙을 버린 것을 후회하며, 믿음 철회서에 서명한 오른손이 먼저 불에 타야 한다고 말하며 적그리스도를 언급하며 최후를 맞았다.[124]

순교자 기념관에 있는 크랜머 동상


크랜머의 신학적 입장은, 츠빙글리의 견해에 영향을 받았지만, 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학자들은 그가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하며, 그의 산문은 영어 발전에 기여했고, ''성공회 기도서''는 영어 문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103]

잉글랜드 교회는 크랜머를 그의 사망일인 3월 21일에 개혁 순교자로 기념하며, 잉글랜드 교회 성인 달력에서 소 축제로 기념한다.[108][109] 미국 성공회 교회의 미국 성공회 전례 달력은 그를 (휴 래티머 및 니컬러스 리들리)와 함께 10월 16일에 "선택적 준수일"로 기린다.[1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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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서적
[106] 기타
[107] 기타
[108] 웹사이트 Holy Days in the Calendar of the Church of England http://www.churchofe[...] 2012-03-22
[109]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2021-03-27
[110] 웹사이트 Martyrs' Cross, Broad Street, Oxford https://www.oxfordhi[...] 2024-06-08
[111] 서적 Lesser Feasts and Fasts 2018 https://books.google[...] Church Publishing, Inc. 2019-12-17
[11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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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기타
[124] 서적 "'I pray God to grant that I may endure to the end': A New Look at the Martyrdom of Thomas Cranmer" The Boydell Pres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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