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도미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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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시모토 도미사부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아사히 신문 기자였다. 그는 1901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여 만주, 중화민국 등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을 12번 역임했으며, 내각관방장관, 건설대신,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운수대신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60년 미일안전보장조약 국회 심의 과정에서 암흑가의 힘을 빌려 데모대를 억제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운수대신 재임 중 전일본공수(全日本空輸) 관련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되어 정계를 은퇴했다.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과정에서 후리시를 신공항 건설 예정지로 발표했으나 지역 주민과의 소통 부재로 반발을 샀으며, 이후 나리타로 변경된 과정에서도 논란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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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도미사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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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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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
출생일 | 1901년 3월 5일 |
출생지 | 일본 이바라키현 나메가타군 이타코시 (현재 이타코시) |
사망일 | 1990년 1월 19일 |
출신 학교 |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졸업 |
이전 직업 | 아사히 신문사 직원 |
소속 정당 | 민주자유당 자유당 무소속 자유민주당 |
칭호 및 훈장 | 훈일등욱일대수장 |
정치 경력 | |
제40대 운수대신 | 내각: 제3차 사토 내각 임기 시작: 1970년 1월 14일 임기 종료: 1971년 7월 5일 |
제27-28대 내각관방장관 | 내각: 제1차 사토 내각 제1차 사토 내각 제1차 개조내각 임기 시작: 1964년 11월 9일 임기 종료: 1966년 8월 1일 |
제26대 건설대신 | 내각: 제1차 사토 내각 제2차 개조내각 겸직: 제6대 긴키권정비장관 제2대 주부권개발정비장관 제15대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 임기 시작: 1966년 8월 1일 임기 종료: 1966년 12월 3일 |
제19대 건설대신 | 내각: 제1차 이케다 내각 겸직: 제7대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 임기 시작: 1960년 7월 19일 임기 종료: 1960년 12월 8일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이바라키현 제1구 당선 횟수: 12회 임기 시작: 1949년 1월 24일 임기 종료: 1980년 5월 19일 |
기타 직책 | |
자유민주당 간사장 | 총재: 다나카 가쿠에이 임기 시작: 1972년 7월 임기 종료: 1974년 11월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총재: 사토 에이사쿠 임기 시작: 1967년 임기 종료: 1968년 |
2. 생애와 경력
이바라키현 이타코시의 운송업체 집안에서 태어났다. 처음 아버지는 "사부로(三郎)"라는 이름을 생각했지만, 친척이 태어난 아이에게 사부로라는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토미사부로(登美三郎)"라고 명명했다. 지바현립 사와라 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는 와세다 대학 웅변회에 소속되어 "투장(闘将)"이라고 불렸다.
1927년 대학 졸업 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여 만주 특파원을 시작으로 중화민국에서 활동했다. 1936년부터 이듬해 1937년 8월까지 난징 지국에서 근무, 난징 통신국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12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 부하 기자 15명 정도를 이끌고 가장 먼저 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시모토는 난징 대학살에 대해 부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외신부장, 동아부장을 역임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해인 1945년에 퇴사했다.
1946년,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고향 이타코시의 정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1947년,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다시 출마하지만 또다시 낙선했다. 1949년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이바라키 1구에서 출마하여 세 번째 도전 만에 최고 득표를 얻어 초선 의원이 되었다. 이후 12번 연속 당선되었다.
당선 후, 주로 우정 관계, 특히 전기 통신 관계의 특정 정치인(族議員)이 되었다. 일본방송협회(NHK) 설치에 힘썼다.
1960년, 새로운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승인을 둘러싼 국회 심의는, 안보 폐기를 내건 일본사회당의 저항으로 혼란을 겪었다. 5월 19일에는 일본사회당 의원을 국회 의사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신조약안을 강행 처리했지만, 국회 밖에서의 안보 투쟁도 점점 격화되었다. 우익 지원 단체와 경찰만으로는 데모대를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자민당의 아이크 환영 실행 위원회에 의해, 하시모토는 암흑가(폭력단) 두목들의 회합에 파견되어, 암세력의 힘을 빌리는 형태를 취했다. 신안보는 성립되었지만, 여러 가지 혼란을 초래했기 때문에, 6월 23일,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총사퇴했다.
기시 노부스케 내각 이후 제1차 이케다 내각의 건설대신 겸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초입각했다. 사토 에이사쿠의 측근으로서,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아이치 기이치, 마쓰노 라이조와 함께 "사토파 5봉행"의 일각을 차지했다.
1970년에는 요도호 하이재킹 사건이 발생했다. 주무대신으로서 범인 측과의 협상에 임했다. 그때, 하시모토는 스스로 인질의 대역이 되는 것을 주장했지만, 사토 에이사쿠는 현직 각료인 하시모토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고 하여,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 정무차관이 인질의 대역을 자원했다. 최종적으로, 야마무라가 인질의 대역이 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정계 입문
이바라키현 이타코시 출신으로, 1927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했으며, 만주 특파원을 시작으로 중화민국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부터 1937년까지 난징 지국에서 난징 통신국장을 맡았으며, 외신부장, 동아부장을 역임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퇴사하였다.[1]1946년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1947년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49년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舊) 이바라키 1구에 입후보하여 첫 당선된 후 12번 연속 당선되었다.[1]
이케다 하야토가 이끄는 제1차 이케다 내각에서 건설대신 겸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처음 입각했으며, 사토 에이사쿠의 측근으로서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아이치 기이치, 마쓰노 라이조와 함께 사토파 5봉행의 일원이었다.
2. 2. 자유민주당 주요 당직 역임
이케다 하야토 내각의 건설대신 겸 수도권 정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첫 입각했으며, 사토 에이사쿠의 측근으로서 다나카 가쿠에이, 호리 시게루, 아이치 기이치, 마쓰노 라이조와 함께 '사토파 5봉행'(佐藤派五奉行)의 한 명으로 꼽혔다.[1]1964년 사토 에이사쿠 내각이 발족한 후에는 내각관방장관, 건설대신,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운수대신을 역임했다.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으며,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맡았다.[1]
2. 3. 전일공 의혹과 몰락
1976년 록히드 사건 수사 과정에서 전일공 의혹(全日空疑獄)이 드러났고, 하시모토는 도쿄지검 특수부에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되었다.[1] 기소 후 자민당을 탈당했으며,[1] 1980년 낙선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그의 선거 기반은 누카가 후쿠시로에게 인계되었으며, 전일공 의혹 재판에서 1심과 2심 모두 징역 2년 6개월, 집행 유예 3년, 추징금 500만엔을 선고받았다.[1] 1990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재판은 공소 기각되었다.
하시모토는 운수대신 재임 중, 전일본공수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다나카 가쿠에이와 함께 체포되어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76년 8월 21일, 록히드 사건의 전일본공수 루트에서, 운수대신 재임 중 전일본공수에 유리한 정책을 도입하는 등의 편의를 봐준 대가로, 전 운수 관료 출신 사장인 와카사 토쿠지가 이끄는 전일본공수 간부로부터 500만엔을 받은 혐의(수탁수뢰 혐의)로 도쿄 지검 특수부에 체포되었다.
기소 후 자민당을 탈당했지만,[1] 후원회인 세이코회(西湖会)는 하시모토를 지원하는 서명 12만 필을 모았다.[3] 같은 해 10월 15일, 자민당 현 연(自民党県連)은 하시모토의 추천을 만장일치로 결정했지만,[4] 같은 해 12월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7년 3월 5일, 조라이시의 자모관음(慈母観音)에서 록히드 사건에 불만을 품은 남자에게 칼로 왼쪽 가슴을 찔려 경상을 입었다. 당시 신변 경호는 자민당 간사장을 사직한 이후 하시모토 측에서 거절하고 있었다.[5]
1980년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여 정계에서 은퇴했다. 지반은 누카가 후쿠시로에게 이어졌다.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는 1심과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추징금 500만엔을 선고받았다.[1] 상고 중이던 1990년 1월 19일 사망하여 향년 88세로 재판은 공소 기각되었다.
3. 나리타 공항 문제
하시모토 도미사부로는 1965년 관방장관 시절, 신 도쿄 국제공항 건설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공항 부지 선정 과정과 강제 대집행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의 소통 부재, 일방적인 결정 등으로 나리타 공항 문제를 야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1년 운수대신 재임 중 나리타 공항 예정지의 대집행(成田空港予定地の代執行)을 실시하여 많은 부상자와 체포자가 발생했다. 하시모토는 대집행 마지막 날인 3월 6일, "이제 반대파 농민들도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고 발언하고 현장을 떠나 반대파의 분노를 샀으며,[14][15] 이후 더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16]
1971년 5월 28일, 미사토쿠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 위원장 토무라 이치사쿠(戸村一作)와 회담을 가졌으나, "공항 용지 내에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회담은 20분 만에 결렬되었다.[17]
3. 1. 나리타 공항 문제 관련 논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는 신 도쿄 국제공항 건설과 관련하여 여러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공항 부지 선정 과정과 강제 대집행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의 소통 부재, 일방적인 결정, 폭력 사태 유발 등의 문제가 있었다.지바현 측의 항의로 최초의 후리시 결정은 연기되었고, 결국 규모와 위치를 변경하여 각의 결정이 이루어졌지만, 이미 후리시에 진입해 있던 일본 공산당(日本共産党)과 일본 사회당이 주민들의 반대 운동을 조직하여 미사토쿠 투쟁(三里塚闘争)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나리타 공항 문제(成田空港問題))[6][7][8][9]
1966년 3월 11일 각의에서 후리시 신공항 건설 촉진에 대해 발언하고 승인을 받았다.[12]
나리타로 계획이 변경된 경위에 대해 항공국 참사관이었던 테즈카 요시나리(手塚良成)는 하시모토 관방장관이 갑자기 계획안을 변경하고 SST가 올 46년(쇼와)까지 만드는 것을 우선시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운수성은 공항 계획 규모의 대폭 축소를 받아들여 1966년 6월 29일에 미사토쿠 이전안을 발표하고, 다음 날 7월 4일에 각의 결정이 이루어졌다.[13]
3. 1. 1. 후리시 결정 과정의 불투명성
1965년 11월 18일,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하시모토 도미사부로는 현안이었던 신 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지에 대해 "관계 각료협의회에서 신공항을 후리시로 결정했다. 내일 각의결정(閣議決定)한다"고 갑작스럽게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다.[6]이에 대해 지역에 대한 사전 설명이 전혀 없었고, 요양 중이던 토노우 타케토(友納武人) 지바현 지사(千葉県知事)를 대신해 직무를 수행하던 부지사 카와카미 기이치(川上紀一)도 당일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듣는 등 갑작스러운 결정에 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다.[7][8][9] 이 배경에는 후리시에 이은 후보지로 가스미가우라(霞ヶ浦) 연안이 거론되었고, 현지인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행방군에서의 반대 운동을 받아 하시모토가 책동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7][8][9]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에 따르면, 자신이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의 지시를 받아 자신의 선거구가 있는 이바라키현(茨城県)에 공항 건설을 준비하고 있던 중 자유민주당 총재선거(自由民主党総裁選) 직전에 사토가 갑자기 지바현으로 결정했다고 통보받았다고 하시모토가 회고했으며, 3선을 노리는 사토가 가와시마 쇼지로(川島正次郎)의 협력을 얻기 위해 거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0] 그러나 사토가 3선을 달성한 총재 선거는 이보다 3년 후인 1968년 11월이며, 1963년 12월 11일에는 운수성 항공심의회가 후리시를 최유력 후보로 지목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주장은 시간적 일관성이 맞지 않는다.
또한 가와시마 쇼지로(川島正次郎)는 원래 도쿄만(東京湾) 매립에 의한 신공항 건설을 지지하고 있었고,[11] 후리시 결정 직후 지바현 부지사였던 카와카미 기이치(川上紀一)가 가와시마에게 문의했을 때, 가와시마가 "각료협의회의 결정은 전혀 몰랐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고, 사전 협의를 받지 못한 지바현이 "(운수대신과의) 회견을 거절한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는 증언[8]과도 모순된다.
3. 1. 2. 대집행 강행과 폭력 사태
1965년 11월 18일, 관방장관이었던 하시모토 도미사부로는 신 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지를 후리시로 결정했다고 갑작스럽게 발표했다.[6] 이는 지역에 대한 사전 설명 없이 이루어진 결정이었으며, 당시 지바현 지사 대행을 맡고 있던 카와카미 기이치(川上紀一) 부지사도 당일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듣게 된 상황이었다.[7][8][9] 이러한 배경에는 후리시의 대안으로 거론되던 카스미가우라 연안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의식한 하시모토의 책동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7][8][9]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에 따르면, 하시모토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총리의 지시로 이바라키현에 공항 건설을 준비하던 중 자유민주당 총재선거(自由民主党総裁選) 직전에 갑자기 지바현으로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회고했다.[10] 이시하라는 사토가 3선을 위해 카와시마 마사지로(川島正次郎)의 협력을 얻고자 거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시간적 일관성이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10]
1966년 6월 29일, 운수성은 공항 계획 규모를 대폭 축소한 미사토쿠 이전안을 발표했고, 다음 날인 7월 4일에 각의 결정이 이루어졌다.[13]
1971년, 운수대신 재임 중이던 하시모토는 나리타 공항 예정지의 대집행(成田空港予定地の代執行)(제1차 대집행)을 강행하여 많은 부상자와 체포자가 발생하는 큰 사건을 초래했다. 대집행 마지막 날인 3월 6일, 하시모토는 "이제 반대파 농민들도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현장을 떠났다.[14] 이는 반대파의 분노를 샀고,[15] 9월에 실시된 제2차 대집행에서는 도호봉십자로 사건(東峰十字路事件)을 비롯한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16]
1971년 5월 28일, 하시모토는 나리타 시장 선거 지원을 위해 나리타를 방문했다가 공항 반대파와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공항 건설은 중단하지 않는다", "공항 용지 내에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등의 발언으로 회담은 20분 만에 결렬되었다.[17]
3. 1. 3. 지역 주민과의 소통 부재
1965년 11월 18일, 관방장관이었던 하시모토 도미사부로는 신 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지에 대해 "후리시로 결정했다. 내일 각의결정(閣議決定)한다"고 갑자기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다.[6] 이는 지역에 대한 사전 설명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고, 지바현 지사(千葉県知事) 대리였던 카와카미 기이치(川上紀一)도 당일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듣게 되는 등 갑작스러운 결정에 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다.[7][8][9]이 배경에는 후리시에 이은 후보지로 가스미가우라(霞ヶ浦) 연안이 거론되었고, 현지인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행방군(行方郡)에서의 반대 운동을 받아 하시모토가 책동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7][8][9]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에 따르면, 자신이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의 지시로 이바라키현(茨城県)에 공항 건설을 준비하던 중 자유민주당 총재선거(自由民主党総裁選) 직전에 사토가 갑자기 지바현으로 결정했다고 통보받았다고 하시모토가 회고하며, 사토가 카와시마 마사지로(川島正次郎)의 협력을 얻기 위해 거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0] 그러나 이 주장은 시간적 일관성이 맞지 않고, 카와시마가 도쿄만(東京湾) 매립에 의한 신공항 건설을 지지했다는 점,[11] 지바현 측이 사전 협의를 받지 못했다는 증언[8]과도 모순된다.
1971년 나리타 공항 예정지의 대집행(成田空港予定地の代執行)(제1차 대집행) 후, 미사토쿠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三里塚芝山連合空港反対同盟) 위원장 토무라 이치사쿠(戸村一作)가 하시모토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하시모토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공항 용지 내에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응수하는 등 회담은 20분 만에 끝났다.[17]
4. 평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략적인' 정치가로 알려져 있으며, 간사장 시절에는 실무를 제1 부간사장인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맡겼다. 이 경험은 다케시타가 경험과 인맥을 쌓는 계기가 되었고, 2000년 사망할 때까지 자민당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되었다.[18]
한편, 독실한 신앙심으로도 유명했는데, 불교계 고승들의 정치 비판에 대해 종교인의 역할을 강조하며 반론한 일화[18], 전국 중증심신장애아(자)를 지키는 모임에서 보인 따뜻한 모습[19], 고향 발전에 기여하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습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이시하라 유지로를 좋아하여 이시하라 프로모션의 빚을 전액 대신 갚아주겠다며 참의원 선거 출마를 권유하기도 했다.
4. 1. 긍정적 평가
- 독실한 신앙심으로 유명했다. 간사장 시절, 불교계 고승들의 방문을 받은 하시모토는 고승들의 정치 비판에 "젊은이들이 묘한 신흥종교에 빠지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마음의 의지할 곳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역할도 크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의 빈틈을 메우는 것은 종교인의 의무가 아닌가. 그런데 여러분들은 종조가 고생해서 쌓아 올린 번영 위에 안주하여 오히려 잘난 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이야말로 스스로 거리 설법을 하여 젊은이들을 구하기 위해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론했다. 고승들조차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18]
- 1965년 6월 26일, 전국 중증심신장애아(자)를 지키는 모임 제2회 전국대회에서 사토 수상의 대리로 연단에 선 하시모토는 준비해 온 축사를 읽지 않고, "여러분의 슬픔을 슬픔으로, 불행을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것만큼의 애정이 우리 정치가들에게는 없었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인사했다.[19]
- 고향 조라이의 히노데 지구 구획정리 사업을 추진했는데, 초기부터 지구 내에 자모관세음보살의 미도 건설을 목표로 하는 대표로서 지도했다. 1975년에 다나카 가쿠에이 등을 초청하여 자모관음 수운산 조온사의 낙성대법요를 거행했다.(조라이정 나미가에사토 지구 정비 조합 「신천지의 창성」등)
- 배우 이시하라 유지로를 사모하여 이시하라 프로모션이 떠안고 있던 빚을 전액 대신 갚아주겠다며 참의원 선거 출마를 권유한 적이 있다.
- 체포 직전에는 시부야구 도미가야의 자택에 돌아가지 않고, 사무소가 있던 사방회관에 틀어박혔다. 보도진이 몰려들어 인근 주민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병약한 아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고 한다.
4. 2. 부정적 평가
5.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선거일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총선 | 1946년 | 22회 | 중의원 의원 | 낙선 | 중선거구제 | |||||
총선 | 1947년 | 23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당 (1945년) | 25,882표 | 10.9% | 5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49년 | 24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민주자유당 | 54,060표 | 22.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52년 | 25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당 (1950년) | 37,331표 | 12.3%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53년 | 26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당 (1950년) | 54,887표 | 17.7%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55년 | 27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당 (1950년) | 38,922표 | 12.3%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58년 | 28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6,860표 | 21.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60년 | 29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9,923표 | 2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63년 | 30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8,202표 | 22.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67년 | 31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0,460표 | 21.7%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69년 | 32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6,082표 | 20.7%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72년 | 33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00,909표 | 25.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76년 | 34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무소속 | 73,034표 | 18.6%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79년 | 35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무소속 | 73,643표 | 18.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 | 1980년 | 36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1구 | 무소속 | 70,020표 | 14.7% | 5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참조
[1]
웹사이트
橋本 登美三郎(ハシモト トミサブロウ)とは
https://kotobank.jp/[...]
2020-01-01
[2]
서적
情と理<上>
講談社
[3]
뉴스
巧妙な出馬要請工作 着々と新顔つぶし 橋本擁立の西湖会
朝日新聞
1976-10-02
[4]
뉴스
橋本推薦を決定 自民党茨城県連
朝日新聞
1976-10-16
[5]
뉴스
橋本元運輸相刺される 犯人逮捕 茨城県の慈母観音で
朝日新聞
1977-03-05
[6]
서적
ドキュメント成田空港
東京新聞出版局
[7]
서적
まぼろしの国際空港 : 「富里」のたたかいの記録
社会新報
[8]
간행물
成田空港問題シンポジウム記録集 資料編
成田空港問題シンポジウム記録集編集委員会
[9]
학술지
成田空港を決めたのは誰か
[10]
서적
国家なる幻影〈上〉 わが政治への反回想
文春文庫
[11]
서적
ドキュメント成田空港
東京新聞出版局
[12]
웹사이트
内閣公文・運輸・航空・航空施設・第1巻
https://www.digital.[...]
2018-12-20
[13]
서적
はるかなる三里塚
講談社
[14]
뉴스
朝日新聞
1971-03-07
[15]
서적
三里塚からの農民宣言―とりもどそう、緑と大地を!
七つ森書館
1990-03-29
[16]
서적
三里塚アンドソイル
平原社
[17]
서적
成田空港365日
崙書房
[18]
웹사이트
重症心身障害児者守る会50周年 記念誌を出版
https://www.fukushis[...]
2019-02-25
[19]
뉴스
ロッキード24時 愛妻家
朝日新聞
197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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