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한경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한경직은 평안남도 출신의 목사로,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며 한국 개신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숭실대학교와 미국 유학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영락교회를 설립하여 1973년까지 담임 목사로 활동했으며, 1992년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그는 반공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서북청년회 조직에 관여하고 군사정권을 옹호하는 등 논란을 겪기도 했다. 2000년 사망했으며, 자서전 '나의 감사'를 남겼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평안남도 출신 - 송종의
    송종의는 1941년 평안남도 중화군 출생의 대한민국 법조인으로, 검사로 재직하며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등 요직을 역임하고 법제처장을 지냈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 밤나무 심기, 천고법치문화재단 설립 등의 활동을 했으나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 구속영장 청구 결재, 형제복지원 사건 조사 거부 등 여러 논란에도 연루되었다.
  • 평안남도 출신 - 김형직
    김형직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의 아버지로, 조선국민회에 참여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북한에서는 항일 독립운동 지도자로 추앙받지만 반공주의적 성향을 가졌다는 증언도 있다.
  • 일제강점기의 목회자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목회자 - 심명섭
    심명섭은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목사로,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고 황민화 기독교를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으며, 광복 후 동생 심훈의 시집을 간행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 오산고등학교 (서울) 동문 - 함석헌
    함석헌은 평안북도 출신의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서,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펼치며 '씨알의 소리'를 통해 '씨알사상'을 알렸고, 비폭력·민주·평화 사상으로 '한국 간디'라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 오산고등학교 (서울) 동문 - 하하
    하하는 1979년생 대한민국의 방송인이자 가수로, 《무한도전》, 《런닝맨》 등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MC와 가수로 활동하며, 2012년 가수 별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고 있다.
한경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 접두사목사
이름한경직
존칭 접미사B. S., B.A., B. D.
1991년의 한경직 (왼쪽)
1991년의 한경직 (왼쪽)
출생 이름한경직
출생일1902년 12월 9일
출생지대한제국 간리
사망일2000년 4월 19일
사망지서울특별시, 대한민국
국적대한민국
다른 이름한 목사
시민권대한민국
출신 학교숭실대학교
엠포리아 대학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직업성직자, 신학자, 작가
부모한도풍 & 이씨 부인
종교기독교 (장로교)
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안수1933년
저술한경직 컬렉션
May the Words of My Mouth
소속 교회영락교회, 서울
한국어 이름
한글한경직
한자韓景職
로마자 표기Han Gyeong-jik
매큔-라이샤워 표기Han Kyŏngjik
교회 정보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노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
직책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전임자이원영 목사
후임자이대영 목사
목회의산노회 목사 안수
가족 정보
배우자김찬빈 사모
자녀딸 한순희 (1918년~), 아들 한혜원 (1938년~2021년) 목사
기타 정보
아호추양(秋陽)
경력서울 영락교회 원로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초빙교수

2. 생애

한경직은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 마을에서 한도풍(韓道豊)과 청주 이씨 가문의 여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추양(秋陽)이다. 1914년에 김병삼의 딸이었던 3살 연상의 김찬빈과 결혼하여 1918년에 딸 한순희 권사, 1938년에 아들 한혜원 목사를 낳았다.

어린 시절 기독교에 입문하여 선교사가 세운 진광소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기독교 계열 학교인 정주오산학교에 진학하여 제10회로 졸업하고,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22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이과에 입학하였다.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한경직은 1926년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캔자스주장로교 계열 학교인 엠포리아 대학교를 거쳐,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 졸업이후 예일대학교 대학원 등록을 앞두고 폐결핵으로 뉴멕시코 알버커크 요양원과 덴버에서 2년 6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목회자를 하기로 결심하고 1932년에 귀국하여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목 겸 교사,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1933년 신의주에서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고, 중국 안동 제1교회에서 개최한 '평안북도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5년 신의주 매지동 6번지에 건평 360평의 2층 교회당을 건축했으나 1942년 일본제국 당국으로부터 유학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목회지에서 추방되어 1939년 5월 설립한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 부양 사역에 전념하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기독교가 탄압받으면서 교회 문을 닫아야 했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뒤에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병직, 윤하영 목사와 함께 신의주자치회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으나 신의주 지역에 소련군정의 실시와 함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삼팔선 이남 지역으로 월남하였다.

월남하여 1945년 12월 2일에 미군정으로부터 일본이 남긴 종교 적산이었던 서울시 영락동 소재 천리교 경성교구본부(경성 분소) 터를 불하받아 북한에서 월남한 피난민 중심의 교회인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다. 27명으로 시작한 베다니전도교회는 창립 1년 만에 1500명으로 성장하여 1946년 11월 베다니전도교회를 영락교회로 개명하고, 1947년 한국에서 최초로 2부제 예배를 실시하고, 1949년에는 교인이 6000명으로 늘었다. 일본 가마쿠라 고아원을 인수하여 영락보린원을 창설하고, 대광중학교·대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49년 영락교회 석조 예배당을 신축하고, 1950년 보성여자중고등학교를 재건하고, 기독교아동복지회(CCF)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대한민국 장로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월남민 출신의 반공주의 목사로도 알려졌다. 이 시기에 서북청년회 조직의 창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미군정 시기에 여순 반란이 있었던 1949년 말에 십자군 전도대를 만들어 전국 순회 전도집회를 개최하였으며 한국 전쟁중인 1950년, 대전에서 기독교구국회를 출범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53년 영락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고아를 수출하는 사업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에 추대되고, 기독교 계열의 저개발국 아동 후원단체인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54년 영락모자원을 설립하고, 자신의 모교이자 1938년 평양에 소재하면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했던 숭실대학교를 서울시에서 재건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제6대 숭실대학 학장을 지냈다. 1958년 학교법인 영락학원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지내고, 1962년 서울여자대학 2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1967년숭실대학교 이사장에 올랐다.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55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를 놓고 박형룡의 예장합동과 한경직의 예장통합으로 갈라섰다.

1961년 5월 16일 남로당 출신으로 여순 반란에 가담했던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민간사절단이라는 특사로 김활란 등 개신교계 인사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쿠데타 당위성을 설명했으며 이후 반공연맹 임원 등을 맡아 예배와 각종 집회를 통해 군사정권을 옹호하였다.

1969년 영락여자신학교 설립하고,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하고, 1971년 장로회신학대학 4대 이사장을 추대되었다.

1973년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한국교회진흥원 설립하여 원장을 하고,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아세아연합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74년 예장통합 서울노회 공로목사에 추대되고, 1976년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외항선교회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고인들이 사형선고 20시간 만에 사형에 처하는 등 인권 문제가 거론되자 각 교단들이 기독교범교단지도자협의회를 결성하면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던 한경직은 "최근 인도차이나 사태에 따른 공산주의의 위협을 중시해 이에 대해 최대의 관심을 기울인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6월 22일 개신교 보수세력이 중심이 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40만 명이 모인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에서 한경직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남침야욕에 혈안이 돼 있다"고 지적하면서 "나라 없이는 신앙도 자유도 재산도 모두 잃게 되므로 자유 민주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깨어나 함께 기도하자"는 내용으로 대회사를 했다.

1977년 숭실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협의회 총재에 추대되고, 1984년 (재)남강문화재단 이사장 및 고려청자헌납위원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1985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모교를 빛낸 영예의 동문상'을 수상하고, 1988년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준비위원회 대표회장을 역임하고,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명예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사랑의쌀나누기운동 명예회장을 역임하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을 거쳐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4월 29일 "노벨 종교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였다. 1992년 6월 18일 열린 시상식 감사예배에서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는데 그 죄를 제대로 참회하지 않았다"면서 "일생의 짐이었는데 우상숭배의 죄를 이제야 참회한다”며 눈물을 흘렸다.

1997년 (사)한국군복음화운동 명예회장을 역임하고, 199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훈받았다.

목회자 은퇴 후 25년간 남한산성 우거처에서 거주하다 노환으로 영락교회와 영락여자신학원 내 사택으로 옮겨 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2000년 4월 19일 98세로 사망하여 4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葬)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어 영락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경직 목사가 남긴 재산은 "말년에 타고 다녔던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입던 옷가지, 생필품이 전부였다"고 유족이 밝혔다.

한경직 목사는 생전에 자서전 출간에 대한 여러 청탁을 받았으나, 책을 쓸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여러 번 거절하다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는 말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외손녀 부부 앞에서 1975년에 구술하여 노트를 작성한데 이어 1981년 구술 녹음 자료를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정리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담은 자서전 '나의 감사'를 2010년에 출판하고 2019년 11월 1일에 영문판 ‘My Gratitude'을 출판했다.[8]

한경직은 평원군(Pyongwon County) 간리(Kan-ri), 대한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숭실대학교(이학사, 1925년), 엠포리아 대학교(문학사, 1926년), 프린스턴 신학교(신학사, 1929년)를 졸업했다. 1933년 한국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한경직은 1945년 영락교회를 설립하여 1973년까지 담임목사로 섬겼으며, 사망할 때까지 명예목사로 봉직했다. 그가 템플턴상을 수상했을 당시, 영락교회의 교인 수는 6만 명에 달하여 세계 최대 장로교회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500개의 자매교회를 설립했다.[4]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한경직은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 마을에서 한도풍(韓道豊)과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추양(秋陽)이다.[4] 어린 시절 기독교에 입문하여 선교사가 세운 진광소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기독교 계열 학교인 정주오산학교를 졸업하였다.[8]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22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이과에 입학하였다.[8]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한경직은 1926년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캔자스주장로교 계열 학교인 엠포리아 대학교를 거쳐,[4]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였다.[8]

2. 2. 목회 활동과 월남

한경직은 1933년 중국 안동 제1교회에서 개최한 '평안북도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5년 신의주 매지동 6번지에 건평 360평의 2층 교회당을 건축했으나 1942년 일본제국 당국으로부터 유학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목회지에서 추방되어 1939년 5월 설립한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 부양 사역에 전념하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기독교가 탄압받으면서 교회 문을 닫아야 했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뒤에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병직, 윤하영 목사와 함께 신의주자치회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으나 신의주 지역에 소련군정의 실시와 함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삼팔선 이남 지역으로 월남하였다. 월남하여 1945년 12월 2일에 미군정으로부터 일본이 남긴 종교 적산이었던 서울시 영락동 소재 천리교 경성교구본부(경성 분소) 터를 불하받아 북한에서 월남한 피난민 중심의 교회인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다. 27명으로 시작한 베다니전도교회는 창립 1년 만에 1500명으로 성장하여 1946년 11월 베다니전도교회를 영락교회로 개명하고, 1947년 한국에서 최초로 2부제 예배를 실시하고, 1949년에는 교인이 6000명으로 늘었다. 일본 가마쿠라 고아원을 인수하여 영락보린원을 창설하고, 대광중학교·대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49년 영락교회 석조 예배당을 신축하고, 1950년 보성여자중고등학교를 재건하고, 기독교아동복지회(CCF)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대한민국 장로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월남민 출신의 반공주의 목사로도 알려졌다. 이 시기에 서북청년회 조직의 창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2. 3. 사회 참여와 논란

한경직과 윤하영 목사가 작성한, 1945년 9월 26일자 영문(英文) 비밀 청원서가 2017년 8월 발견되었다.[9] 이 문서는 광복 직후 소련군 점령하 평안북도 일대의 상황을 미국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Merrell H. Benninghoff)에게 신의주 지역에서 소련군이 벌이는 공산주의 정치활동에 대해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베닝호프는 이를 미 국무부에 보내며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한경직은 "상상을 넘어선다"며 소련군의 만행을 자세히 기술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탈취했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10][11]

2. 4. 국제 활동과 템플턴상 수상

한경직은 1973년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된 이후, 한국교회진흥원을 설립하여 원장을 맡았고,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아세아연합신학원 이사장도 역임하였다. 1983년에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협의회 총재에 추대되었고, 1985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모교를 빛낸 영예의 동문상'을 수상했다. 1988년 다시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1989년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준비위원회 대표회장을 역임하고,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명예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4월 29일, 한경직은 "노벨 종교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였다. 1992년 6월 18일 열린 시상식 감사예배에서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는데 그 죄를 제대로 참회하지 않았다"면서 "일생의 짐이었는데 우상숭배의 죄를 이제야 참회한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템플턴상을 수상했을 당시, 영락교회의 교인 수는 6만 명에 달하여 세계 최대 장로교회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500개의 자매교회를 설립했다.

2. 5. 말년과 죽음

한경직은 1973년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한국교회진흥원 설립하여 원장을 하고,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에 추대되었다.[8] 그리고 아세아연합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8] 1983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협의회 총재에 추대되고,[8] 1984년 (재)남강문화재단 이사장 및 고려청자헌납위원회 고문에 위촉되었다.[8] 1985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모교를 빛낸 영예의 동문상'을 수상하고,[8] 1988년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에 추대되었다.[8]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준비위원회 대표회장을 역임하고,[8]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명예이사장을 역임하였다.[8]

1990년 사랑의쌀나누기운동 명예회장을 역임하고,[8]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을 거쳐[8]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8] 1992년 4월 29일 "노벨 종교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였다.[8] 1992년 6월 18일 열린 시상식 감사예배에서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는데 그 죄를 제대로 참회하지 않았다"면서 "일생의 짐이었는데 우상숭배의 죄를 이제야 참회한다”며 눈물을 흘렸다.[8]

1997년 (사)한국군복음화운동 명예회장을 역임하고,[8] 199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훈받았다.[8] 목회자 은퇴 후 25년간 남한산성 우거처에서 거주하다 노환으로 영락교회와 영락여자신학원 내 사택으로 옮겨 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2000년 4월 19일 98세로 사망하여 4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葬)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어 영락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8] 한경직 목사가 남긴 재산은 "말년에 타고 다녔던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입던 옷가지, 생필품이 전부였다"고 유족이 밝혔다.[8]

한경직은 평원군(Pyongwon County) 간리(Kan-ri), 대한제국에서 태어났다.[4] 그는 숭실대학교(이학사, 1925년), 엠포리아 대학교(문학사, 1926년), 프린스턴 신학교(신학사, 1929년)를 졸업했다.[4] 1933년 한국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한경직은 1945년 영락교회를 설립하여 1973년까지 담임목사로 섬겼으며, 사망할 때까지 명예목사로 봉직했다.[4] 그가 템플턴상을 수상했을 당시, 영락교회의 교인 수는 6만 명에 달하여 세계 최대 장로교회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500개의 자매교회를 설립했다.[4]

3. 논란과 비판

3. 1. 신사참배 참회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1992년 당시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한 목사의 친일 고백은 교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충격을 주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지만 한국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3. 2. 서북청년회 관련 논란

한경직은 과거 서북청년회 조직의 창립에 관여하였다.[12] 서북청년회는 여성과 유아를 포함한 민간인을 학살하였다.[12]

한경직은 당시 공산당이 많아 지방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서북청년회를 조직했으며, 이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했다고 언급하였다.

3. 3. 군사정권 협력 논란

4. 사후 평가

한경직은 리더십과 겸손함으로 알려져 있다. 영락교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교회는 아니지만, 여전히 가장 유명한 개신교 교회로 남아있다. 영락교회의 초기 사역은 한경직 목사와 마찬가지로 주로 북한 탈북민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영락교회의 특징이다.[5]

그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은 한국 전쟁 중 어린이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활동이었다. 이 활동은 미국 복음주의자인 로버트 피어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미 진행 중이었다. 두 사람은 협력하여 오늘날 세계 최대의 인도주의 단체인 월드비전의 기반을 구축했다.

템플턴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상금을 팔아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 은퇴 후에는 산속의 소박한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그의 아들들이 그의 사역으로부터 상속을 받거나 그의 지위를 계승하지 않도록 했다. 영락교회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5]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13]

5. 가족 관계


  • 아버지 : 한도풍
  • 어머니 : 청주 이씨 부인
  • 부인 : 김찬빈, 김병삼의 딸.
  • * 딸 : 권사 한순희(1918년~ )
  • * 아들 : 목사 한혜원(1938~2021년)

6. 저서

한경직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56년 《건국과 기독교》를 시작으로, 《신자의 사회적 사명》(1959년), 《창조적 생활의 비결》(1962년), 《팔복》(1966년), 《민주국가의 정신적 기초》(1968년) 등을 출간했다. 1970년대에는 《내일을 사는 인생》(1978년)을 저술했고, 1980년대에는 《주님의 손》(1984년), 《예수를 바라보자》(1985년), 《사도 바울에게 배운다》(1985년), 《한국교회를 말한다》(1985년), 《한경직 주기도문 강해》(1985년), 《한경직 십계명 강해》(1985년), 《한경직 사도신경 강해》(1985년), 《한경직 신앙상담》(1986년),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1987년), 《한경직 설교자료》(1987년), 《열매맺는 신앙생활》(1987년), 《한경직 신상보훈 강해》(1988년), 《영원한 만남의 기도》(1988년), 《영혼의 샘》(1989년) 등을 출간하여 신앙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1990년대에는 《주의 말씀 나의명상》(1991년), 《한경직 컬럼》(1991년), 《나의 인생 길의 아름다운 명상》(1992년), 《병상에서의 묵상》(1995년), 《장로 시무 핸드북》(1996년), 《기독교란 무엇인가》(1999년), 《신랑 신부에게(베스트주례콜렉션)》(1998년) 등을 통해 삶의 지혜와 신앙적 가르침을 전했다. 2000년대에는 《하나님의 영으로(메시지북)》(2001년),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2002년), 《나의 감사(한경직 구술 자서전)》(2010년), 《한경직 목사의 시사 설교 모음집》(2010년), 《한경직 목사의 절기 설교 모음집》(2010년) 등을 출간했다. 이 외에도 ''죽기 전 3년! 한경직 목사 이야기''(2005)가 출간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South Korean Pastor Wins Templeton Prize https://www.orlandos[...] Religious News Service 2018-11-21
[2] 웹사이트 Kyung-Chik Han collection https://search.libra[...] 2018-05-26
[3] 웹사이트 Templeton Foundation Press: Sir John Templeton https://web.archive.[...] 2008-01-04
[4] 뉴스 CHRONICLE - New York Times https://query.nytime[...] New York Times
[5] 웹사이트 A Crisis of Integrity in Seoul, the Megachurch Capital of the World https://crcc.usc.edu[...]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2020-04-25
[6] 웹사이트 (10)청주 한씨(淸州韓氏)-642,992명 http://www.seoulecon[...] 2014-07-06
[7] 웹사이트 김명혁 목사, “한경직 목사의 위대함은 약함 http://www.christian[...]
[8] 웹사이트 한경직 목사가 직접 구술한 자서전 <나의 감사> http://www.christian[...]
[9] 웹사이트 국사편찬위원히 전자사료관 pp.1~7 http://archive.histo[...] 2018-07-24
[10] 뉴스 광복 직후 소련군 만행 폭로…故 한경직 목사 ‘비밀청원서’ 발견돼 http://www.joongang.[...] 중앙일보 2017-08-16
[11] 뉴스 故 한경직 목사가 증언한 해방 후 북한, '비밀청원서' 발견 http://www.ytn.co.kr[...] YTN 2017-08-16
[12] 웹사이트 서북청년회 https://ko.wikipedia[...]
[13] 뉴스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8-08-22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