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르 디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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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르 디스펜서는 1342년경에 태어난 인물로, 1370년 노리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1381년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면모를 보였으며, 1383년에는 플랑드르 십자군을 이끌었으나 실패했다. 롤라드파에 강경하게 대응하며 이단 처벌에 앞장섰고, 1400년 주현절 반란에 연루되기도 했다. 1406년에 사망하여 노리치 대성당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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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르 디스펜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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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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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직함 | 노리치 주교 |
재임 기간 | |
착좌 | 1370년 7월 12일 |
종료 | 1406년 8월 23일 |
이전 | 토마스 퍼시 |
이후 | 알렉산더 토팅턴 |
기타 직책 | 랜드aff 대주교 (1364년경–?) 솔즈베리 참사회원 (?–1370) |
개인 정보 | |
서품 | 1362년 12월 17일 |
축성 | 1370년 4월 20일 |
출생 | 1341년경 |
사망 | 1406년 8월 23일 |
사망 장소 | 엘름햄, 노퍽, 잉글랜드 |
종교 | 로마 가톨릭 |
부모 |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와 앤 페레르 |
모교 | 옥스퍼드 대학교 |
2. 가문과 초기 생애
헨리 르 디스펜서는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1310–1342)와 그의 아내 앤 페러스[1] 사이의 막내아들로, 1342년경 아버지가 반 포위 공격 중 사망한 해에 태어났다.[2] 그의 형제들처럼 군인의 길을 걸어, 맏형 에드워드 디스펜서, 제1대 디스펜서 남작과 함께 1369년 교황 우르바노 5세를 위해 이탈리아에서 싸우기도 했다.[2] 한편으로는 일찍부터 성직자의 길을 걸어, 1353년(11세) 랜다프의 참사가 되었고[5], 이후 솔즈베리 대성당 참사직과 보스워스 교구 사제직을 거쳤으며[6],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민법을 공부했다.[1] 그는 1362년 서품을 받았다.
2. 1. 가문의 배경
르 디스펜서 가문은 원래 프랑스 북동부 고미에쿠르의 영주 가문이었다. 헨리의 할머니인 엘레오노르 드 클레어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손녀였다.헨리의 증조부인 휴 르 디스펜서, 제1대 윈체스터 백작(1262–1326)와 조부인 휴 디스펜서 더 영거(1286–1326)는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증조부 휴 르 디스펜서는 에드워드 2세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왕이 배넉번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권력을 누렸고, 이후 다시 총애를 회복했다. 그의 아들인 헨리의 조부 휴는 왕의 시종관으로 임명되어 아버지보다 더 큰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디스펜서 부자가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이자 남작들은 그들에게 적대감을 품었고, 결국 1321년 이들은 추방당했다.[4] 추방 판결은 곧 무효화되었고 1322년부터 국가 통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1326년 이사벨라 여왕과 그의 연인 로저 모티머가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2세에 대항하면서 디스펜서 부자는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헨리 르 디스펜서는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1310–1342)와 그의 아내 앤 페러스(1367년 사망)[1] 사이의 막내아들이었다. 앤 페러스는 그로비의 랄프 페러스(경)의 딸이었다. 헨리는 1342년경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 해에 반 포위 공격 중 사망했다.[2]
헨리와 그의 세 형제는 모두 군인의 길을 걸었다. 맏형 에드워드 디스펜서, 제1대 디스펜서 남작(1336–1375)[3]은 당대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헨리와 함께 1369년 교황 우르바노 5세가 밀라노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2] 다른 형제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알려진 바가 적다. 휴 르 디스펜서는 해외에서 싸우다 1374년 3월 파도바에서 사망했고, 토마스는 프랑스에서 싸우다 1381년 미혼으로 사망했으며, 길버트 르 디스펜서는 1382년에 사망했다. 그들의 누이인 조안은 1384년 사망할 때까지 샤프츠베리 수도원의 수녀였다.
1375년, 헨리의 조카인 토마스 르 디스펜서, 제1대 글로스터 백작이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의 뒤를 이었다. 토마스는 리처드 2세를 복위시키려 했던 주현절 봉기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2. 2. 초기 생애와 교육
1353년 11세의 나이에 헨리는 랜다프[5]의 참사가 되었고, 1년 뒤에는 솔즈베리 대성당의 참사직을 확보했다. 그는 19세가 되기 전에 보스워스[6]의 교구 사제가 되었으며, 1361년 2월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민법을 공부하는 석사 과정에 있었다.[1] 1362년 12월 17일에는 서품을 받았고, 1364년 4월 20일까지 랜다프의 부제가 되었다.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 캡그레이브는 헨리가 1369년 교황 우르바노 5세를 위해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밀라노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싸웠다고 기록했다. 캡그레이브는 "이 시기에 헨리 르 디스펜서 경은 승진하기 전까지 이탈리아에서 큰 전사였다"고 전한다.[2]
3. 노리치 주교 임명과 활동
헨리 르 디스펜서는 1370년 교황 칙서에 의해 노리치 주교로 임명되어 영적 권한과 세속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의 주교 재임 기간은 잉글랜드 내 사회적 혼란과 서구 분열이라는 교회사의 격동기와 겹쳤으며, 이 시기 그의 활동은 특히 군사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주요 활동으로는 1381년 농민 반란 당시 자신의 교구인 노퍽 지역에서 발생한 봉기를 직접 군대를 이끌고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노스 월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반란 주동자 처형 등 강경한 대응으로 인해 지역 내에서 인기를 잃고 암살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다.[2][8]
또한, 1383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요청으로 플랑드르 지역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 지지자들을 상대로 한 십자군(디스펜서의 십자군)을 이끌었다. 초기에는 일부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프르 포위 공격 실패와 프랑스군의 개입으로 결국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 두 사건은 그의 주교로서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그의 호전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3. 1. 노리치 주교 임명
1370년, 당시 솔즈베리의 참사회원이었던 디스펜서는 1370년 4월 3일자 교황 칙서에 의해 노리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4월 20일 로마에서 성성식을 거행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1370년 7월 12일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자신의 교구의 영적 권한을, 8월 14일 국왕으로부터 세속적 권한을 받았다.3. 2. 1381년 농민 반란 진압
1381년 농민 반란 동안, 켄트와 에식스의 반란군은 런던으로 진격하여 런던 탑을 점령했다. 리처드 2세는 농민의 요구에 동의하는 척하며 도시 외곽에서 반란군을 만났으나, 그 자리에서 농민 지도자 와트 타일러가 살해되면서 반란은 종결되었고 왕의 약속은 철회되었다.반란은 곧 노리치 교구를 포함한 잉글랜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나, 2주도 채 안 되어 진압되었다. 6월 14일, 반란군 무리가 테트퍼드에 도착하면서 봉기는 노퍽 남서부를 거쳐 늪지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지역 염색공 제프리 리스터가 이끄는 반란군은 노퍽 북동부를 가로지르며 봉기를 촉구했다. 며칠 동안 반란군은 노리치, 킹스린, 스와팜 등지로 집결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던 노리치는 리스터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점령당했고, 그들은 도시에 진입하여 적들의 재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노리치 반란군은 이후 그레이트 야머스로 이동하여 법적 기록과 토지 소유주의 재산을 파괴했으며, 노퍽 북동부를 이동하는 다른 반란군들도 법원 문서와 세금 문서를 파괴했다. 노퍽 전역에서 약탈과 강탈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디스펜서는 당시 노리치에서 서쪽으로 약 약 160.93km 떨어진 러틀랜드의 벌리 영지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무장한 채 피터버러, 케임브리지, 뉴마켓을 거쳐 노퍽으로 급히 돌아왔다. 처음에는 창병 8명과 소수의 궁수만 있었지만, 이동하는 동안 추종자들이 합류하여 노퍽 해안 근처의 노스 월섬에 도착했을 때는 상당한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반란군이 참호를 파고 임시 요새를 구축하여 방어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국의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엄에 따르면,[2] 노스 월섬 전투에서 헨리 르 디스펜서는 직접 공격을 이끌었고, 백병전에서 적들을 제압했다. 많은 농민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반란 지도자 제프리 리스터는 곧 교수형, 거세형 및 사지 절단형에 처해졌다. 디스펜서는 리스터의 처형을 직접 감독했다. 이후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의 교구 내 다른 반란군들을 처리했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인 가혹함 때문에 그는 노퍽 지역에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고, 이듬해에는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조직되기도 했다. 이 계획은 공모자 중 한 명이 제때 밀고하여 발각되었고, 음모자들은 당국에 의해 처리되었다.[2][8]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후, 디스펜서는 노리치 대성당에 '디스펜서 후진'(Despenser Retable) 제작을 의뢰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 후진(제단 뒤 장식)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 장면들을 묘사한다. 이는 디스펜서가 그리스도처럼 민중들도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려 했던 의도일 수 있다.[9] 이 작품은 현재 노리치 대성당의 성 루크 예배당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10]
3. 3. 1383년 디스펜서의 십자군
1378년 교황 우르바노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로베르 드 제네바가 경쟁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클레멘스 7세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아비뇽으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시작된 서구 분열은 교회에 큰 위기를 초래했고, 기독교 유럽 전역에 경쟁과 갈등을 일으켰다. 이 문제는 훗날 콘스탄츠 공의회 (1414–1418)에서 해결되었다.
1382년 가을과 겨울, 플랑드르는 프랑스 샤를 6세의 침공을 받았다.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가 이끄는 플랑드르 군은 루즈베케 전투에서 패배했고, 국가는 클레멘스 7세를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프랑스 왕에게 굴복해야 했다. 플랑드르의 상황에 대응하여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십자군을 선포하는 교서를 발표했으며, 플랑드르에서 클레멘스 7세의 추종자들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이끌 지도자로 디스펜서 주교를 선택했다. 교황은 디스펜서에게 임무 수행을 위한 특별한 권한과 함께, 십자군에 참여하거나 지원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전면 면죄부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평민들과 리처드 2세 국왕 모두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플랑드르를 상대로 한 십자군에 열정적이었다. 프랑스 군대의 진격으로 중단되었던 영국 양모 스테이플에서의 수입을 재개할 수 있었고, 국왕이나 그의 삼촌 대신 주교를 파견함으로써 인기가 없던 존 오브 곤트의 카스티야 원정 계획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프랑스 군대를 이베리아 반도에서 멀어지게 하고, 앵글로-플랑드르 관계를 강화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십자군을 승인하는 또 다른 장점은 그 비용을 정부가 아닌 교회가 부담한다는 점이었다. 농민 반란 이후, 정부는 프랑스와의 새로운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의 정치적 부담을 두려워했다.
1382년 12월 6일, 리처드 2세는 십자군을 잉글랜드 전역에 공표하도록 명령했다.[2] 그 달 말, 디스펜서 주교와 그의 부하들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십자가를 받았다. 1383년 2월 의회는 성직자에게 군사적 임무를 맡기는 것을 망설였지만, 결국 지난 10월 국왕에게 플랑드르 전쟁 수행을 위해 부여했던 보조금을 디스펜서에게 할당했다.[11] 국왕의 유일한 조건은 십자군이 프랑스 및 그 동맹군을 상대로 공격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윌리엄 보샴, 제1대 버가베니 남작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교는 교서 발표 명령을 내렸고,[12] 대주교 역시 이를 따랐다.[13] 이 계획은 수도사들에 의해 열렬히 지지받았고, 모든 곳에서 막대한 기부금이 모였다. 특히 헨리 나이턴에 따르면[14] "잉글랜드의 부유한 귀부인들"로부터 많은 기부가 이루어졌다. 영국군은 1383년 5월 칼레에 상륙하여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그라블린을 공격했다. 그라블린, 됭케르크 및 인근 지역(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린헤, 뉘포르트 마을 포함)은 곧 함락되었다. 5월 25일, 십자군은 됭케르크 근처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지휘하는 프랑스-플랑드르 연합군을 격퇴했다.[15][16] 이후 디스펜서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십자군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 여겨진 이프르를 포위 공격하도록 설득당했다. 그는 이 도시 공격을 꺼렸지만, 그의 겐트 동맹군과 일부 장교들은 이프르 점령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프르 주민들은 영국군과 그 동맹군이 도착하여 1383년 6월 8일 도시를 공격했을 때 포위에 잘 대비하고 있었다. 외곽 교외의 주택들은 버려졌고, 그곳의 목재는 흙으로 만든 성벽과 도시의 돌문들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파리에는 포병 화약 재고를 보충하기 위한 임무가 파견되었다. 이 도시는 이프르의 성주 존 도울트레의 지휘 아래 잘 조직되었으며, 다양한 방어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성벽은 낮았지만, 이중 습지, 말뚝으로 강화된 높은 가시 덤불 울타리, 나무 요새 및 사격대 등으로 잘 보호되었다.
영국군은 첫날 템플 게이트를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다음 3일 동안 도시의 문들을 동시에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포위 첫 주가 끝나기 전에 증원군이 도착하여 도시 벽을 완전히 포위했고 외부 해자가 흙으로 메워졌다. 8일째(6월 15일) 디스펜서는 포병으로 메스네스 게이트에 포격을 가해 손상을 입혔지만, 도시 방어를 돌파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포위 공격의 다음 날 동안 지속적인 포병 공격은 전반적으로 효과가 없었고, 디스펜서 군대의 공격은 모두 격퇴되었다. 해자를 배수하려는 시도는 이프르 측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지만 실패했고, 포위된 사람들은 부르고뉴 공작과 루이 르 말레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며 도시를 돕기 위한 대규모 프랑스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8월 8일, 8주간의 노력 끝에 디스펜서는 갑자기 포위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동맹군을 남겨둔 채 철수했다.
이프르에서의 실패 이후, 주교의 군대는 분산되었다. 일부는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일부는 주교와 함께 남았으며, 다른 이들은 토마스 트리벳 경과 휴 칼벌리 경의 지휘 아래 부르부르와 베르그로 퇴각했다. 주교와 칼벌리는 프랑스로 진격하고 싶어했지만, 윌리엄 엘럼 경, 트리벳 및 다른 지휘관들은 거절했다. 주교는 피카르디에 잠시 진입한 후, 그라블린으로 후퇴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 및 그 동맹군과의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협상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디스펜서와 칼벌리가 피카르디로 이동했을 때 마주친 일부 프랑스 군대는 싸우기를 꺼렸다. 만약 리처드 2세 국왕이 대규모 영국군과 함께 해협을 건넜다면, 이 원정은 성공했을 수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사기가 저하되고 질병에 시달리던 영국군에게 소년 왕 샤를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도착은 결정적이었다. 샤를 6세는 8월 2일에 왕의 군기를 받았고, 그의 군대는 8월 15일에 아라스에 집결했다. 그들은 플랑드르로 진격하여 8월 말까지 테루안, 9월 5일 드리냠, 9월 7일 베르그(이로 인해 트리벳과 엘럼은 부르부르와 그라블린으로 퇴각해야 했다), 9월 9일 됭케르크를 점령했다. 9월 12일에는 부르부르가 포위되었다. 이틀 후 브르타뉴 공작은 프랑스군을 설득하여 항복 협상을 하도록 했고, 영국 수비대는 도시에서 안전하게 퇴각하도록 허가받았다. 그 후 프랑스 군대는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그라블린을 포위했다. 그곳에서 디스펜서의 허가 없이 수비대는 뇌물을 받았고, 주교의 재무는 를 챙겼다. 디스펜서는 처음에 항복 조건을 거부했지만, 며칠 후 그라블린은 결국 포기되었고, 디스펜서는 그곳을 약탈하도록 명령했다. 10월 말까지 남은 십자군들은 영국 해협을 건너 돌아왔다.
4. 롤라드파와의 갈등
1381년부터 잉글랜드 정치 엘리트 사이에서는 롤라드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있었다. 롤라드파는 1370년대에 처음 등장하여 잠시 상류층의 호감을 얻기도 했지만, 1382년에는 당국에 이단자를 구금하고 교회 법정에서 심문할 권한이 주어졌다. 리처드 2세는 통치 후반기에 종교적 정통성을 유지하는 데 점점 더 강한 의지를 보였고, 롤라드파를 탄압하기 위해 더욱 가혹하게 행동했다. 그의 뒤를 이은 헨리 4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단 소멸령(De heretico comburendo)을 도입하여 이단자와 성경 소지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디스펜서는 자신의 교구에서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연대기 작가 토머스 왈싱엄은 디스펜서가 롤라드파에 대해 취한 조치를 칭찬하며 다른 주교들과 비교하기도 했다. 왈싱엄에 따르면, 디스펜서는 자신의 교구에서 롤라드파에 속한 사람이 설교할 경우 불태우거나 참수할 것이라고 공언했으며, 이러한 단호한 태도 덕분에 그의 교구 내에서는 신앙과 종교가 온전히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디스펜서가 항상 이단자를 극도로 잔혹하게 다룬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99년 5월 1일, 노퍽의 교구 목사이자 롤라드였던 윌리엄 소트리는 디스펜서의 주교 관저인 사우스 엘름햄 홀에서 심문을 받았다. 소트리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이단 사상을 철회했고, 심각한 처벌은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런던으로 이주한 소트리는 다시 이단적인 설교를 했고, 이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아룬델의 주의를 끌었다. 소트리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 소환되었다. 디스펜서는 이 회의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1401년 2월 23일에 서면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재판 결과 소트리는 이단 사상을 재차 퍼뜨린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401년 스미스필드에서 쇠사슬에 묶여 화형에 처해졌다.[1]
5. 말년과 죽음
플랑드르에서 돌아온 직후, 디스펜서 주교는 1383년 10월 26일 국왕 앞에서 의회에 의해 탄핵되었다. 재상 마이클 드 라 폴은 디스펜서가 칼레에서 군대를 제대로 소집하지 않았고, 충분한 병력을 모집하지 않았으며, 군 지휘관 선정에 문제가 있었고, 세속 영주의 원정 지휘를 허용하지 않아 국왕을 속였으며, 군대를 너무 일찍 해산했다고 비난했다. 디스펜서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이프르에 충분한 병력이 집결했고, 지휘관 선택은 적절했으며, 국왕의 명령을 거부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정 실패의 책임이 그에게 돌아갔다. 그의 세속 재산은 몰수되었고, 프랑스에서 얻은 이익으로 원정 비용을 변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디스펜서의 몰락은 오래가지 않았다. 1385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침입하자 당시 18세였던 리처드 2세 국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17] 디스펜서를 포함한 주요 인물들이 이 대규모 군대에 합류하여 북쪽으로 향했다. 잉글랜드 군대는 에든버러에 도착하여 약탈했지만, 당시 스코틀랜드는 이미 황폐화되어 약탈할 것이 거의 없었다. 존 오브 곤트는 파이프로 더 진격하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결국 잉글랜드로 후퇴했다. 이 스코틀랜드 원정은 디스펜서가 군대와 함께한 마지막 주요 활동 중 하나였다.
군 경력이 끝난 후에도 헨리 르 디스펜서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교구와 자신의 대성당 교회 내에서 평신도들을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자신의 주교로서의 권리와 특권을 지키는 데 열정적이었다. 또한 롤라디에 맞서 교회의 정통성을 강하게 옹호했다.
10년 넘게 디스펜서는 노리치 대성당의 참사회 및 다른 종교 공동체와 갈등을 겪었는데, 주된 이유는 주교가 그들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1394년, 수도사들은 디스펜서를 상대로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게 항소하여 일부 승리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395년 교황은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코트니에게 중재를 명령했다. 리처드 2세의 지시에 따라 양측은 코트니 대주교와 왕실 평의회 앞에 섰지만, 1396년 코트니가 사망하면서 분쟁 해결은 1398년까지 미뤄졌다. 결국 왕실 위원회는 디스펜서의 손을 들어주었다. 교황 보니파시오는 수도원의 재항소 후 1401년에 이 결정을 무효화했지만, 디스펜서는 이를 무시했다. 결국 수도사들은 주교와 합의하여 상당 부분의 자율성을 포기해야 했다.[18]
1399년 3월 3일, 존 오브 곤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헨리 볼링브로크가 랭커스터 공작위를 계승했지만, 리처드 2세는 그의 상속 재산을 몰수했다. 이에 볼링브로크는 파리에서[19] 잉글랜드로 돌아와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로 결심하고 1399년 7월 레이븐스퍼에 상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헨리 르 디스펜서는 리처드 2세에게 충성을 지켰다. 그는 7월 10일까지 세인트 알반스에 도착하여 요크 공작의 군대를 지원했다. 이후 요크 공작과 함께 아일랜드에서 돌아오는 리처드 2세를 맞이하려 이동했지만, 볼링브로크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리처드 지지자들을 차단했다. 디스펜서는 7월 말 버클리 성에서 요크 공작과 함께 있다가 볼링브로크와 합의했지만, 주교는 복종을 거부하다 체포되어 잠시 투옥되었다.[20] 9월 30일, 볼링브로크가 런던에서 헨리 4세로 즉위하는 것을 디스펜서도 지켜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1399년 10월 6일 새 국왕의 첫 의회에 참석하여 리처드 2세의 투옥에 동의했다. 이후 디스펜서의 교구 내 영향력은 감소하고, 권력은 토머스 어핑엄 경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21]
1400년 1월, 리처드 2세 복위를 목표로 한 주현절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 반란에는 디스펜서의 조카인 토머스 르 디스펜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결국 처형당했다. 토머스는 리처드 2세에 의해 글로스터 백작이 되었으나, 1399년 글로스터 공작의 아들 사망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백작위를 잃은 상태였다. 그는 러틀랜드, 켄트, 헌팅던 백작 등과 음모에 가담했다. 그들이 사이렌세스터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을 때 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토머스의 숙소가 불탔고, 그는 도주하여 배를 탔으나 선장에 의해 브리스톨로 끌려가 1월 13일[22] 군중에게 넘겨져 참수되었다.[23]
반란 이후 헨리 르 디스펜서 역시 연루 혐의를 받았다. 그는 1401년 1월 20일, 토머스 애런델 대주교의 감시 하에 의회에 출석했다.[24] 그곳에서 그의 정적인 토머스 어핑엄 경이 그를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거짓 고발했다. 그러나 디스펜서는 1401년 국왕으로부터 사면을 받아 헨리 4세와 화해했다.
헨리 르 디스펜서는 1406년 8월 23일에 사망했고, 노리치 대성당의 높은 제단 앞에 묻혔다. 그를 기리는 놋쇠 비문이 새겨졌으나 후에 파괴되었다.
6. 가계도
헨리 르 디스펜서는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1310–1342)와 그의 아내 앤 페러스(1367년 사망)[1], 그로비의 랄프 페러스(경)의 딸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헨리는 1342년경에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반 포위 공격 중에 사망했다.[2]
헨리와 그의 세 형제는 모두 군인이 되었다. 맏형 에드워드 디스펜서, 제1대 디스펜서 남작(1336–1375)[3]은 당대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헨리와 함께 1369년 교황 우르바노 5세가 밀라노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에 참여했다.[2] 다른 형제들인 휴 르 디스펜서는 해외에서 싸우다 1374년 3월 파도바에서 사망했고, 토마스는 프랑스에서 싸우다 1381년 미혼으로 사망했으며, 길버트 르 디스펜서는 1382년에 사망했다. 유일한 누이인 조안은 1384년 사망할 때까지 샤프츠베리 수도원의 수녀였다.
르 디스펜서 가문은 원래 프랑스 북동부 고미에쿠르의 영주 가문 출신이었다. 헨리의 할머니 엘레오노르 드 클레어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손녀였다.
헨리의 증조부 휴 르 디스펜서, 제1대 윈체스터 백작(1262–1326)와 조부 휴 디스펜서 더 영거(1286–1326)는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은 신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사벨라 여왕과 그의 연인 모티머가 에드워드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몰락하여 처형되었다. 휴 르 디스펜서는 에드워드 2세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배넉번 전투 패배 전까지 권력을 누렸고, 이후 다시 총애를 받았다. 그의 아들인 휴 디스펜서 더 영거는 왕의 시종관으로 임명되어 더 큰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디스펜서 부자가 축적한 부와 오만한 태도는 남작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1321년에 추방되었다.[4] 추방 판결은 곧 무효화되었고 1322년부터 국가 통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1326년 이사벨라 여왕이 반기를 들면서 두 사람 모두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1375년, 헨리의 조카인 토마스 르 디스펜서, 제1대 글로스터 백작이 아버지 에드워드의 뒤를 이었다. 토마스는 주현절 봉기 당시 리처드 2세를 복위시키려다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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