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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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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종은 조선의 제18대 왕으로, 1641년 청나라 심양에서 효종과 인선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국외에서 태어난 유일한 조선 국왕이며, 1659년 효종 사후 즉위했다. 현종 재위 기간 동안 1, 2차 예송 논쟁이 발생하여 정쟁이 심화되었으며, 1662년 대동법을 호남 지역에 실시하고, 군비 강화에 힘썼다. 또한, 경신대기근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인 안추원 사건을 겪었다. 1674년 3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능은 숭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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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선 현종의 수결
현종의 수결
이름이연
이연 (I Yeon)
경직 (Gyeongjik)
양성헌 (Yangseongheon)
시호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 (Sunmun Sugmu Gyeongin Changhyo Daewang)
묘호현종 (Hyeonjong)
중국 시호장각왕
왕위
왕위 계승조선 국왕
재위 기간1659년 6월 - 1674년 9월
즉위일 (음력)1659년 5월 9일
퇴위일 (음력)1674년 8월 18일
재위 유형재위
전임자효종
후임자숙종
왕세손
재위기간1649년 2월 18일 ~ 1649년 5월 13일 (음력)
전임자왕세손 홍위 (단종)
후임자왕세손 정 (의소세손)
왕세자
재위기간1649년 5월 13일 ~ 1659년 5월 9일 (음력)
전임자왕세자 호 (효종)
후임자왕세자 순 (숙종)
출생과 사망
출생일1641년 3월 14일
출생일 (음력)1641년 2월 4일
출생지무크덴, 대청
사망일1674년 9월 17일
사망일 (음력)1674년 8월 18일
사망지창덕궁, 한성, 조선
묻힌 곳구리시, 동구릉 숭릉
가족 관계
아버지효종
어머니인선왕후
배우자명성왕후
결혼1651년
자녀숙종 (조선) 외 1남 3녀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가문
왕가전주 이씨
종교
종교조선 유교 (성리학)

2. 생애

성은 '''이'''(李), 휘는 '''연'''(棩), 초명은 원(遠)이다. 효종인선왕후의 아들이며, 왕비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청나라 심양)의 질관(質館)에서 태어났으며, 왕비 외에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은 유일한 왕이기도 하다.

1641년 아버지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할 때 태어났으며, 1645년 귀국하였다. 아버지가 왕세자가 되면서 원손(元孫)이 되었고, 1649년에는 단종 이후 200년 만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 효종이 즉위하자 왕세자가 되었으며,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현종의 재위 기간은 서인남인 사이의 치열한 예송(禮訟)으로 특징지어진다. 1659년 효종 승하 시 발발한 기해예송과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사망 시 발발한 갑인예송 등 두 차례에 걸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제(服制)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는 단순한 예법 논쟁을 넘어 효종의 왕위 계승 정통성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였기에 붕당 간의 정치적 대립을 심화시켰다.

현종은 양란으로 혼란해진 국가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효종이 추진하던 명분론적 북벌론은 현실적인 이유로 중단되었으나, 군비 강화는 지속하여 1665년 강화도에 신무기를 배치하고 1669년 어영병제에 의한 훈련별대를 창설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 재정 구조 재건을 위해 대동법을 호남 지역까지 확대 실시하고, 양전 사업과 오가작통법 시행을 통해 조세 기반을 다졌으며, 공명첩 발급 등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고자 했다. 또한 동성동본 금혼 제도를 강화하고, 정족산성에 새로운 사고(史庫)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하게 했으며, 동활자 주조 사업을 완성하는 등 제도 정비와 문화 사업에도 힘썼다.

외교적으로는 청나라의 지속적인 견제와 간섭 속에서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던 안추원이 탈출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려다 발각된 사건(안추원 사건)은 양국 간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10][11] 치세 후반기에는 경신대기근이라는 미증유의 기근과 천재지변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격변 속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1674년 8월 18일, 창덕궁 재려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숭릉(崇陵)이다. 묘호는 '''현종'''(顯宗)이며, 시호는 '''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이다.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장각왕'(莊恪王)은 그 안에 담긴 복종의 의미 때문에 조선에서는 치욕으로 여겨져, 외교 문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공식 기록에서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8]

2. 1. 탄생과 즉위

성은 '''이'''(李), 휘는 '''연'''(棩), 초명은 원(遠)이다. 효종인선왕후의 아들이며, 왕비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1641년(인조 19년) 2월 4일, 청나라 심양의 질관(質館)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효종(당시 봉림대군)과 어머니 인선왕후(당시 풍안부부인 장씨)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 중이었다. 현종은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청나라)에서 태어난 인물이다.[2][3] 이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격파하고 1644년 수도를 베이징으로 공식적으로 옮기기 전인 선양 시절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기질이 특이하고 용모가 장대하였다고 전해진다.

1645년(인조 23년), 아버지 효종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원손(元孫)이 되었다. 1649년(인조 27년) 2월 18일에는 왕세손에 봉해졌는데, 이는 단종 이후 약 200년 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5월 13일 효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51년(효종 2년) 11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훗날의 명성왕후)과 혼인하였다. 1659년(효종 10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2. 2. 예송 논쟁

현종 시대에는 효종인선왕후의 죽음 이후 왕실 최고 어른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복제, 服制)을 둘러싸고 서인남인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예송(禮訟)이 벌어졌다. 이는 단순한 예법 논쟁을 넘어, 효종의 왕위 계승 정통성과 관련된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기 때문에 붕당 간의 대립이 극심했다.

첫 번째 예송은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이 승하했을 때 발생했으며(기해예송), 두 번째 예송은 1674년(현종 15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일어났다(갑인예송). 두 차례의 논쟁에서 서인과 남인은 각기 다른 예법 해석을 내세우며 격렬하게 대립했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으나, 2차 예송에서는 현종남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국 주도권이 남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인 정권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여 숙종경신환국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6년간 정국을 이끌었다. 현종은 이후 예송과 관련한 논쟁을 다시 벌이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2] 예송 논쟁은 현종 시대 내내 조선 정치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으며, 붕당 정치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 2. 1. 1차 예송 (기해예송)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복제, 服制)을 두고 서인남인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1차 예송 또는 기해예송이라고 한다.[1][2]

당시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 예법에 따르면 부모상에는 3년상을 입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고 왕위를 계승한 경우였기에 문제가 복잡했다. 특히 왕위를 계승한 차남에 대한 복제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해석의 차이가 발생했다.[2]

  • 서인 (송시열 중심):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아들들 중 장남이 아닌 아들(중자, 衆子)의 예에 따라 자의대비는 1년상(기년복, 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사망했을 때 자의대비가 장자의 예에 따라 3년상을 입었던 전례를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1][2]
  • 남인 (허적 중심):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사실상 장남과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장남의 예에 따라 자의대비가 3년상(참최복, 斬衰服)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이는 왕통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1][2]


이 논쟁은 단순한 예법 논쟁을 넘어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대한 해석과 직결되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최종 결정은 당시 젊은 국왕이었던 현종에게 달려 있었다. 현종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1년상으로 결정했다. 이는 서인 세력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판단으로 해석된다.[2][3]

그러나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을 영의정 자리에서 해임하지 않았다. 이는 특정 붕당에 힘이 쏠리는 것을 막고 왕권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2][3] 하지만 기해예송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인조반정 이후 형성되었던 양당 간의 정치적 공존 관계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2]

2. 2. 2. 2차 예송 (갑인예송)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비(妃)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자의대비가 며느리의 상(喪)을 당하여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2차 예송 또는 갑인예송이라 한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은 처음에 기년복(1년 상복)으로 정했다가 이를 대공복(9개월 상복)으로 바꾸어 주장했다. 이에 남인은 대공복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기년복(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강하게 맞섰다.

이번 논쟁에서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남인의 의견을 따랐다. 현종이 남인이 주장한 기년복을 채택하면서, 1차 예송 이후 정권을 잡아왔던 서인 세력은 실각하고 남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종은 이후 예송과 관련한 논쟁을 다시 벌이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고 경고하였다. 이 결정으로 숙종1680년 경신환국을 통해 정국을 전환하기 전까지 약 6년간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현종의 결정은 남인 세력이 서인보다 더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송 논쟁은 현종이 1675년 세상을 떠난 후에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며, 아들인 숙종이 즉위한 후에야 비로소 모든 논쟁이 금지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 논쟁은 당시의 공식적인 역사 기록 편찬에도 영향을 미쳐, 처음에는 남인들이 주로 집필했으나 이후 서인 역사가들에 의해 수정되기도 하였다.

2. 3. 제도 정비

현종은 양란 이후 흔들린 조선의 지배 질서를 다시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아버지 효종이 추진하던 명분 중심의 북벌론은 중단했지만, 국방력 강화에는 계속 힘썼다. 1665년(현종 6년)에는 통제영에서 불랑기 50정과 정찰자포 200문을 제작하여 강화도에 배치했으며, 1669년(현종 10년)에는 어영병제에 따른 훈련별대를 새롭게 창설했다.

재정 구조를 다시 세우기 위해 호구(인구) 수를 늘리고 농업을 발전시키며, 세금 징수 체계를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호구 수를 늘리기 위해 1660년(현종 1년)에는 양민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했고, 이듬해에는 도성 안의 자수사(慈壽寺)와 인수사(仁壽寺) 두 절을 폐지하고 어린 승려들을 다시 속세로 돌아오게 했다. 1670년(현종 11년)에는 산간 지역에 숨어 사는 유민들을 찾아내 호적에 올렸으며, 1672년(현종 13년)에는 국경을 몰래 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을 마련했다. 또한 호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오가작통사목을 제정했다.

농업 발전을 위해서는 1662년(현종 3년) 전주, 익산 등지에 관개 시설을 만들어 물을 댈 수 있는 농경지 면적을 늘렸고, 이듬해에는 각 도에 관개 시설 점검 관리(양관, 量官)를 보내 시설 상태를 점검하게 했다. 세금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1660년에는 호남 지방 산간 지역 군현에 대동법을 시행했고, 1663년(현종 4년)에는 호남대동청을 설치했다. 1662년에는 경기도에 토지 측량 담당 관리(균전사, 均田使)를 임명하여 토지 측량 사업인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1669년에는 세곡 운반선(조운선)의 파선 사고를 막기 위해 충청도 안흥량에 남창(南倉)과 북창(北倉)을 설치하고, 위험한 뱃길 구간은 육로로 운반하도록 했다.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60년부터 명예직 벼슬 증서인 영직첩(影職帖)과 이름이 비어 있는 임명장인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급했는데, 이는 이후 정부의 재정 확보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면서 결과적으로 신분제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1669년에는 양인 수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공노비나 사노비라도 양인 신분의 아내에게서 낳은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합법적으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문화 사업에도 힘써, 1660년 강화도 정족산성에 새로운 사고(史庫)를 마련하고 1665년에 다시 베껴 쓴 역대 실록을 보관하게 했다. 1668년(현종 9년)에는 교서관에서 활자 주조를 시작하여 1672년에는 큰 글자 6만 6천여 자, 작은 글자 4만 6천여 자에 이르는 동활자 주조를 완성했다. 또한 천문학과 인쇄술 발전을 장려했다.

사회 제도로는 1669년 송시열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姓)이 같으면 본관(本貫)이 다르더라도 혼인하지 못하게 하는 동성동본 금혼 제도를 강화했으며, 친족 간의 결혼도 법으로 금지했다. 또한 문묘 안에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묘(啓聖廟)를 세웠다.

2. 4. 대청 외교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관념적으로 북벌론을 유지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청나라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청나라는 자국 내 명나라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조선의 군사력 증강을 경계하였다. 청나라는 칙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군비 확충, 무기 및 화약 제조, 성곽 축조 등을 감시하였고, 삼전도비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도 확인하며 압박을 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664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던 안추원이 탈출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려다 발각된 사건(안추원 사건)은 양국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10] 청나라는 이 사건과 조선의 유황 보유를 문제 삼아 1666년 칙사를 파견하여 조선 조정을 압박했으나, 현종의 외교적 노력으로 벌금을 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11]

명나라 멸망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강성해지면서 효종 때부터 추진되었던 북벌 계획은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워 중단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군사력을 확장하고 재건하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갔다.

현종 사후 청나라로부터 '장각왕(莊恪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8], 시호에 포함된 '삼갈 각(恪)' 자가 조선 국왕의 순종을 강요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기에 조선에서는 이를 치욕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청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제외한 『조선왕조실록』, 국왕의 행장, 능지문 등 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는 이 시호를 기록하지 않거나 삭제하였다. 이는 겉으로는 청에 사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속으로는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조선의 복잡한 대청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8]

2. 4. 1. 안추원 사건

안추원(安秋元)은 경기 풍덕(현 개풍군) 사람으로, 병자호란 당시 12살의 나이에 강화도에서 몽고인에게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는 한인에게 넘겨져 노비 생활을 하였고, 주인이 죽자 고국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한 차례 실패 끝에 1664년(현종 5년), 30여 년 만에 심양에서 탈출하여 조선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백성들이 국경을 넘나드는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고 있었으나, 현종은 안추원의 입국 사실을 보고받고 그를 고향으로 돌아가 살도록 조치하였다.[10]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안추원은 부모와 형제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지자 다시 청나라로 들어가려다 발각되었다. 이 일이 심양을 거쳐 북경에 보고되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1666년(현종 7년), 청나라는 조선 정부가 청나라 백성인 안추원의 밀입국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점과 조선이 유황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아 칙사를 파견하여 실상을 조사하였다. 청나라 칙사는 현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일을 소홀히 처리한 관련 대신들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이에 현종은 북쪽을 향해 땅을 치며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으니 대신들의 사형을 면해달라고 간청하였고, 결국 조선이 청나라에 벌금을 내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11]

2. 5. 경신대기근

현종 치세 후반기인 1670년부터 1671년까지 조선은 극심한 자연재해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시기에는 유례없이 추운 날씨가 지속되고 심각한 흉작이 겹치면서 경신대기근이라는 치명적인 기근이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정확한 사망자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기근으로 인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백성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은 이러한 미증유의 기근과 각종 천재지변으로 인한 국가적 시련 속에서 예송 논쟁과 같은 정치적 문제까지 겹쳐 많은 고심을 해야 했다.

2. 6. 최후 및 능묘

1674년(현종 15년) 8월 7일, 현종은 재신들을 만나려 했으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다음 날인 8월 8일에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고열 증상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8월 15일, 병세가 매우 위중해지자 종묘사직, 산천에 기도를 올렸으며, 대왕대비 조씨의 명으로 현종의 거처를 옮겼다.

결국 8월 18일, 창덕궁 재려에서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이는 어머니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반년 만의 일로, 국상 중에 몸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숭릉(崇陵)이다.

묘호는 '''현종'''(顯宗)으로 정해졌는데, '현(顯)'은 '행실이 나라 안팎에 널리 드러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호는 '''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이며, 이후 '''소휴연경돈덕수성'''(昭休衍慶敦德綏成)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올려졌다.

으로부터 받은 시호는 '장각왕'(莊恪王)이었다.[8] 시호에 '삼갈 각(恪)' 자를 사용한 것은 조선 국왕이 청나라에 순종적이기를 바라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 시호를 치욕으로 여겨, 치세 중의 공식 기록에서는 철저히 배제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조선 국왕의 행장, 『능지문』 등 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삭제되었으며, 외교 문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청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시호 자체는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조선이 사대의 예를 갖추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청에 대한 깊은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8]

2. 7. 묘호 및 시호

1674년 승하 후 묘호는 '''현종'''(顯宗)으로 정해졌다. '현(顯)'은 '행실이 나라 안팎에 드러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호는 '''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이며, 후에 '''소휴연경돈덕수성'''(昭休衍慶敦德綏成)이라는 존호가 더해졌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숭릉(崇陵)으로, 명성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한편,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는 '장각왕'(莊恪王)이었다.[8] 시호에 사용된 '각(恪)'이라는 글자는 '삼가다', '공손하다'는 뜻으로, 조선 국왕이 청나라에 순종하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에서는 이를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로부터 받은 치욕적인 시호로 받아들였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행장, 능지문 등 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이 시호를 의도적으로 삭제했다. 외교 문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겉으로는 사대주의 예를 갖추면서도 속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8]

3. 가족 관계


  • '''아버지''': 효종(孝宗, 1619년 7월 3일 ~ 1659년 6월 23일) - 제17대 국왕
  • '''어머니''':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9년 2월 9일 ~ 1674년 3월 19일) - 덕수 장씨
  • * 조부: 인조(仁祖, 1595년 12월 7일 ~ 1649년 6월 17일)
  • * 조모: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년 8월 16일 ~ 1636년 1월 16일) - 청주 한씨
  • * 외조부: 신풍부원군 장유(新豊府院君 張維, 1587년 ~ 1638년)
  • * 외조모: 영가부부인 김씨(永嘉府夫人 金氏)

  • '''왕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 1642년 6월 13일 ~ 1684년 1월 21일) - 청풍 김씨[5]
  • * 장인: 청풍부원군 김우명(淸風府院君 金佑明)
  • * 장모: 덕은부부인 송씨(德恩府夫人 宋氏)
  • * 장남(1남): 숙종대왕 순(肅宗大王 焞, 1661년 10월 7일 ~ 1720년 7월 12일) - 제19대 국왕
  • * 장녀: 공주(公主, 1658년 ~ 1658년)[12][13] - 조졸
  • * 차녀(2녀): 명선공주(明善公主, 1659년 ~ 1673년 8월 2일)[14] - 미혼
  • * 3녀: 명혜공주(明惠公主, 1662년 ~ 1673년 4월 27일)[15] - 미혼
  • * 4녀: 명안공주 온희(明安公主 溫姬, 1665년 ~ 1687년 5월 16일)[16] - 해창위 오태주(海昌尉 吳泰周)에게 하가[6]

  • '''형제자매'''
  • * 누나: 숙신공주(淑愼公主, 1634년 ~ 1645년)
  • * 누나: 숙안공주(淑安公主, 1636년 ~ 1697년)
  • * 누나: 숙명공주(淑明公主, 1640년 ~ 1699년)
  • * 여동생: 숙휘공주(淑徽公主, 1642년 ~ 1696년)
  • * 여동생: 숙정공주(淑靜公主, 1645년 ~ 1668년)
  • * 여동생: 숙경공주(淑敬公主, 1648년 ~ 1671년)
  • * 의붓누나: 의순공주(義順公主, 1635년 ~ 1662년) - 금림군 이개윤의 딸, 효종의 양녀

  • '''손자'''
  • * 영조 - 제21대 국왕 (숙종의 아들)

4. 기타

1666년 현종 재위 중,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은 13년 넘게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했다.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을 저술했고, 이 책은 유럽에 조선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4]

1670년부터 1671년까지 조선은 극심한 추위와 흉작으로 인해 경신대기근이라는 참혹한 기근을 겪었다. 정확한 사망자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수십만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추진했던 북벌 계획을 중단했다. 이는 조선이 청나라의 조공국이 된 현실적인 상황과,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의 강성한 국력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현종은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고 국가를 재건하는 노력을 지속했다. 또한 천문학 연구와 인쇄술 발전을 장려했으며, 동성동본 사이의 결혼을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현종은 167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숙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5. 현종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뉴스 https://www.kpanews.[...] 2024-01-14
[2] 뉴스 https://www.kpanews.[...] 2024-01-14
[3] 웹사이트 Imperial Palaces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in Beijing and Shenyang https://whc.unesco.o[...] 2024-01-14
[4] 웹사이트 Dutch museum opens in honor of Hamel https://www.korea.ne[...] 2024-01-14
[5] 문서 Not to be confused with another [[Empress Myeongseong|Myeongseong]], with the same Sino-Korean syllable yet with different hanja, who was his son Sukjong's [[Sukjong of Joseon#Queen Inhyeon (1667–1701)|second wife]]'s great-great-great-grand-niece.)
[6] 문서 Personal name Yi On-hui ({{Korean|hangul=이온희|labels=no}})
[7] 뉴스 조선 후기 왕들,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철저히 숨겼다 https://www.chosun.c[...] 2007-09-11
[8] 뉴스 清の諡号を隠した朝鮮後期の国王たち http://www.chosunonl[...] 2007-09-16
[9] 뉴스 명안공주 明安公主,1667~1687 https://www.doopedia[...] 2022-07-23
[10] 문서 《[[현종실록]]》 9권, 현종 5년(1664년 청 강희(康熙) 3년) 8월 12일 (신미)
[11] 문서 《[[현종실록]]》 12권, 현종 7년(1666년 청 강희(康熙) 5년) 7월 17일 (병신)
[12] 문서 《[[승정원일기]]》 효종 9년(1658년) 4월 28일과 6월 3일 기록에는 세자빈이 낳은 [[군주 (칭호)|군주]]아기씨(郡主阿只氏)의 출생과 사망에 따른 상사를 전교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3] 문서 《[[승정원일기]]》 150책 (탈초본 8책) 효종 9년(1658년 청 순치(順治) 15년) 6월 3일 (기사)
[14] 문서 맹주서의 아들 신안위(新安尉) 맹만택(孟萬澤)과 혼인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혼례전에 [[명선공주]]가 죽자 [[조선 현종|현종]]은 신안위의 작호를 삭탈하고 맹만택의 새로운 혼인을 허락하였다.
[15] 문서 신정의 아들 동안위(東安尉) 신요경(申堯卿)과 혼인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혼례전에 [[명혜공주]]가 죽자 [[조선 현종|현종]]은 동안위의 작호를 삭탈하고 신요경의 새로운 혼인을 허락하였다.
[16] 문서 [[대한민국의 보물 (제1201호 ~ 제1300호)|보물 제1220호]] 《[[명안공주 관련 유물|명안공주 작명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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