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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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마쿠라 대지진은 1293년 가마쿠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여러 역사 기록에 피해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지진으로 인해 겐초지가 붕괴되고 화재가 발생했으며, 유이가하마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견되는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지진의 영향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호조 사다토키가 다이라노 요리쓰나를 토벌하는 헤이젠몬의 난이 일어났고, 조정에서는 에이닌으로 개원했다. 도쿄 대학 지진 연구소는 2008년 미우라 반도의 퇴적물 분석을 통해 쓰나미의 흔적을 발견했으며, 지진의 원인과 규모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현재는 사가미 트로프와 고즈-마쓰다 단층대의 연동으로 발생한 지진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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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에서 발생한 Mw 9.0~9.1 규모의 초대형 해구형 지진인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은 대규모 쓰나미를 동반하여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대규모 재해를 야기했으며, 연동형 지진으로 지구 자전축 이동과 같은 지구적 규모의 영향과 지진 예측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냈다.
가마쿠라 대지진 | |
---|---|
개요 | |
명칭 | 가마쿠라 대지진 |
일본어 명칭 | ja |
지진 정보 | |
발생 일시 (율리우스력) | 1293년 5월 19일 |
발생 일시 (일본, 정응 연호) | 正応 6년 4월 12일 |
발생 시각 | 06:00 |
위치 | 간토 지방 남부 가마쿠라 부근 |
좌표 | 위도 35.2, 경도 139.4 |
깊이 | 알 수 없음 |
규모 | 8.0 (일본 기상청 규모) |
지진 피해 | |
사망자 | 23,000명 이상 (또는 수천 명) |
쓰나미 | 발생 |
영향 지역 | 일본 (가마쿠라) |
기타 정보 | |
관련 연구 | 이시바시 가쓰히코, 1257(正嘉元)년과 1293(正応六)년의 가마쿠라 대지진: 사료에 의한 사가미 트로프 거대 지진의 재확인 이시바시 가쓰히코, 1293년 영인 가마쿠라 지진과 사가미 트로프 거대 지진의 재래 시간 |
2. 지진 발생 기록 및 피해
여러 역사 기록에 에이닌 가마쿠라 지진의 발생 시각과 피해 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가마쿠라 막부의 호지승 친겐의 『친겐 승정 일기(親玄僧正日記)』, 『가마쿠라 연대기 이면 기록』(『호조 9대기』), 『가마쿠라 대일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겐초지, 다이지지, 주후쿠지, 엔가쿠지 등이 붕괴되거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대규모 산사태와 토사 재해가 발생했다. 또한, 유이가하마 도리이 부근에서 많은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사망자는 수천 명에서 23,034명에 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6][7]
이 지진으로 인한 혼란은 헤이젠몬의 난의 계기가 되었으며, 조정에서는 지진과 가뭄을 중시하여 에이닌으로 개원을 실시했다.[9] 2008년 도쿄 대학 지진 연구소의 조사 결과, 미우라 반도에서 대쓰나미의 흔적이 발견되어,[10][11] 이 지진이 사가미 트로프 연안의 거대 지진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2]
판 사이의 상대 속도와 지진 미끄럼률을 고려하면, 사가미 트로프 연안에서 판 사이 거대 지진의 재래 간격은 200~300년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1923년 간토 대지진과 1703년 겐로쿠 지진 이전에는 판 사이 거대 지진 기록이 없었다. 중세 시대 가마쿠라 부근에 피해를 입힌 M7급 지진 중 하나가 사가미 트로프 연안의 거대 지진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에이닌 가마쿠라 지진은 그 유력한 후보 중 하나로 여겨진다.
미네기시 스미오는 이 지진을 직하형 지진으로 추정하고 진원지를 사가미 육지의 단자와 부근으로 보았으며, 마그니튜드는 7.1로 추정했다. 2014년 내각부 지진 조사 위원회는 M8급의 사가미 트로프 지진으로 평가했지만,[13]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14] 2015년 4월, 정부 지진 조사 위원회는 사가미 트로프와 고즈-마쓰다 단층대가 연동하여 지진이 발생했다는 평가를 내렸다.[15]
2. 1. 역사 기록
가마쿠라 막부의 호지승 친겐이 쓴 『친겐 승정 일기(親玄僧正日記)』(『다이고지 일기』)에는 지진 발생 시각이 쇼오 6년 4월 13일 묘시(오전 6시경)로 기록되어 있다[6]. 이 기록에는 겐초지가 무너지고 불타 없어졌으며, 유이가하마 도리이 근처에서 140명이나 되는 시체가 뒹굴었고,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적혀 있다.『가마쿠라 연대기 이면 기록』(『호조 9대기』)에는 지진 발생 시각이 쇼오 6년 4월 13일 인시(오전 4시경)로 기록되어 있다[6]. 이 기록에는 각지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하여 다이지지가 흙더미에 휩쓸렸고, 주후쿠지·엔가쿠지가 무너져 화재가 발생했으며, 23,03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적혀 있다.
『가마쿠라 대일기』에는 쇼오 5년 4월 12일과 쇼오 6년 4월 12일 두 날짜의 지진 기록이 있는데, 쇼오 5년의 기사는 연호 오류로 추정된다[7]. 당시에는 하루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기록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8]. 『가마쿠라 대일기』에는 다음 날에도 여진으로 보이는 지진 기록이 남아 있으며, 건물 붕괴와 다수의 토사 재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친겐 승정 일기』에 따르면 이후 21일까지 간헐적으로 지진이 이어졌으며, 특히 21일에는 하루에 6번이나 진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지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22일 가마쿠라 막부집권·호조 사다토키는 당시 막부 내에서 횡포를 부리던 다이라노 요리쓰나(고엔)의 저택을 습격하여 요리쓰나 부자를 제거했다 (헤이젠몬의 난). 조정에서는 지진과 이후 발생한 가뭄 등을 중요하게 여겨 같은 해 8월 5일(9월 6일)에 에이닌으로 개원을 실시했다[9].
2008년, 도쿄 대학 지진 연구소는 미우라 반도 고아미다이 만의 퇴적물을 분석한 결과, 13세기경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쓰나미의 흔적을 발견했다[10][11].
이 지진 발생 약 36년 전인 쇼카 원년 8월 23일(1257년 10월 2일)에도 간토 지방 남부에 피해를 입힌 쇼카 가마쿠라 지진(M7.0 - 7.5)이 발생했다.
사가미 트로프 연안에서는 판 사이 거대 지진의 재래 간격을 200-300년 정도로 추정한다. 그러나 1923년 간토 대지진과 1703년 겐로쿠 지진 이전의 판 사이 거대 지진은 역사 기록상 알려져 있지 않았다. 중세에는 1241년, 1257년, 1293년, 1433년 등 가마쿠라 부근에 피해를 입힌 M7급 지진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 중 하나가 사가미 트로프 연안의 거대 지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본 지진에 쓰나미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친겐 승정 일기』에 있는 유이가하마 도리이 근처에서 140명이나 되는 시체가 뒹굴었다는 기술은 쓰나미에 의한 것일 가능성도 있으며, 본 지진은 사가미 트로프 연안의 거대 지진의 유력한 후보로 여겨진다[12].
미네기시 스미오는 『중세 재해·전란의 사회사』(2011년)에서 직하형 지진으로 매우 강했으며, 진원지는 사가미 육지의 단자와 부근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추정 마그니튜드는 7.1로 하고 있다.
2014년, 내각부의 지진 조사 위원회는 M8급의 사가미 트로프 지진으로 평가했다[13]. 그러나 본 지진은 사가미 트로프 거대 지진의 유력 후보[12]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지진 조사 위원회는 역사 지진학적인 검토를 충분히 하지 않고 본 지진을 M8급의 사가미 트로프 연안의 판 사이 지진으로 인정했다. 1257년의 쇼카 가마쿠라 지진도 함께 다시 검토한 후에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14].
2015년 4월, 정부의 지진 조사 위원회는 평가를 변경하여 사가미 트로프와 분기 단층인 고즈(국부) - 마쓰다 단층대가 연동하여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다[15].
2. 2. 여진 및 추가 피해
가마쿠라 막부의 승려 친겐이 작성한 『친겐 승정 일기(親玄僧正日記)』에 따르면, 지진 발생 이후 21일까지 단속적으로 지진이 계속되었으며, 특히 21일에는 하루에 6번이나 진동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9]3. 지진의 영향
에이닌 가마쿠라 지진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친겐 승정 일기(親玄僧正日記)에는 겐초지가 붕괴 후 화재로 소실되었고, 유이가하마 도리이 부근에서 140명이나 되는 시체가 뒹굴었으며,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6] 『가마쿠라 연대기 이면 기록』(『호조 9대기』)에는 대규모 산사태가 각지에서 발생하여 다이지지가 토사에 휩쓸렸고, 주후쿠지·엔가쿠지가 붕괴되어 화재가 발생했으며, 23,03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가마쿠라 대일기』에는 다음 날에도 여진으로 보이는 지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건물 붕괴와 다수의 토사 재해 등이 발생했다.[6] 『친겐 승정 일기』에는 21일까지 단속적으로 지진이 이어졌으며, 특히 21일에는 하루에 6번이나 진동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6]
이 지진은 사가미 트로프 연안의 거대 지진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12] 2014년, 내각부 지진 조사 위원회는 M8급 사가미 트로프 지진으로 평가했으나,[13] 2015년 4월 평가를 변경하여 사가미 트로프와 분기 단층인 고즈(국부) - 마쓰다 단층대가 연동하여 지진이 일어났다고 발표했다.[15]
3. 1. 정치적 격변: 헤이젠몬의 난
1293년 4월 22일,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 호조 사다토키는 가마쿠라 대지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막부 내에서 횡포를 부리던 다이라노 요리쓰나(고엔)의 저택을 습격하여 요리쓰나 부자를 토벌하였다. 이를 헤이젠몬의 난이라고 한다.[9]3. 2. 연호 변경
조정에서는 지진 발생 및 이후 6월부터 8월까지 발생한 가뭄 등을 중시하여, 쇼오 6년 8월 5일(1293년 9월 6일)에 에이닌으로 개원을 실시했다.[9]3. 3. 쓰나미 발생 가능성
도쿄 대학 지진 연구소는 2008년 미우라 반도 고아미다이 만의 퇴적물을 분석하여 13세기경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쓰나미의 흔적을 발견했다[10][11] . 가마쿠라 막부의 호지승 친겐이 작성한 『친겐 승정 일기(親玄僧正日記)』에는 유이가하마 도리이 부근에서 140명이나 되는 시체가 뒹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쓰나미에 의한 피해일 가능성이 있다[12] .4. 지진의 원인 및 분석
가마쿠라 막부의 호지승 친겐이 작성한 『친겐 승정 일기(親玄僧正日記)』(『다이고지 일기』)와 『가마쿠라 연대기 이면 기록』(『호조 9대기』)에는 지진 발생 시각이 쇼오 6년 4월 13일 묘시(오전 6시경) 또는 인시(오전 4시경)로 기록되어 있다.[6] 『가마쿠라 대일기』에는 쇼오 5년 4월 12일과 쇼오 6년 4월 12일 두 날짜의 지진이 기록되어 있지만, 쇼오 5년의 기사는 연호의 오류로 여겨진다.[7] 당시에는 하루의 경계를 해 뜨기 전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엄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13일 오전 4시"이지만, 당시에는 "12일 밤 인시"와 같은 표기도 있을 수 있었다.[8]
『친겐 승정 일기』에는 겐초지가 붕괴 후 화재로 소실되었고, 유이가하마 부근에서 140명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가마쿠라 연대기 이면 기록』에는 대규모 산사태로 다이지지가 매몰되고, 주후쿠지·엔가쿠지가 붕괴되어 화재가 발생했으며, 23,03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가마쿠라 대일기』에는 다음 날에도 여진으로 보이는 지진이 있었고, 건물 붕괴와 토사 재해 등이 발생했다고 한다. 『친겐 승정 일기』에는 21일까지 지진이 계속되었으며, 특히 21일에는 하루에 6번 진동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가마쿠라 막부집권 호조 사다토키는 다이라노 요리쓰나를 토벌했다 (헤이젠몬의 난).[9] 조정에서는 지진과 가뭄을 이유로 에이닌으로 개원했다.[9]
2008년 도쿄 대학 지진 연구소는 미우라 반도 고아미다이 만에서 13세기경 대쓰나미의 흔적을 발견했다.[10][11]
이 지진 약 36년 전인 쇼카 원년(1257년)에도 쇼카 가마쿠라 지진(M7.0 - 7.5)이 발생했다.
4. 1. 사가미 트로프 거대 지진 가능성
사가미 트로프 연안에서는 판 사이 거대 지진의 재래 간격을 200-300년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2] 그러나 역사 기록상으로는 1923년 간토 대지진과 1703년 겐로쿠 지진 이전의 판 사이 거대 지진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12] 한편, 중세에는 1241년, 1257년, 1293년, 1433년 등 M7급으로 여겨져 온 가마쿠라 부근에 피해를 입힌 지진이 몇 차례 있었다.[12] 이 중 어느 것이 사가미 트로프 연안의 거대 지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2]에이닌 가마쿠라 지진에 쓰나미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친겐 승정 일기』에 있는 유이가하마의 도리이 부근에서 140명이나 되는 시체가 뒹굴었다는 기술은 쓰나미에 의한 가능성도 있으며,[12] 이 지진은 사가미 트로프 연안의 거대 지진의 유력한 검토 후보로 여겨진다.[12]
2014년, 일본 내각부의 지진 조사 위원회는 이 지진을 M8급의 사가미 트로프 지진으로 평가했다.[13] 그러나, 역사 지진학적인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1257년의 쇼카 가마쿠라 지진도 함께 재검토한 후에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14] 2015년 4월, 정부의 지진 조사 위원회는 평가를 변경하여, 사가미 트로프와 분기 단층인 고즈-마쓰다 단층대가 연동하여 지진이 일어났다고 발표했다.[15]
4. 2. 규모 추정
미네기시 스미오는 『중세 재해·전란의 사회사』(2011년)에서 이 지진을 직하형 지진으로 보고, 진원지를 사가미 육지의 단자와 부근, 추정 규모는 7.1로 기록했다.[12]2014년, 일본 내각부의 지진 조사 위원회는 이 지진을 M8급의 사가미 트로프 지진으로 평가했다.[13] 그러나 역사 지진학적인 검토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었고, 1257년 쇼카 가마쿠라 지진과 함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14]
2015년 4월, 일본 정부의 지진 조사 위원회는 평가를 변경하여, 사가미 트로프와 분기 단층인 고즈-마쓰다 단층대가 연동하여 발생한 지진이라고 발표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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