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야 다케노리
1. 개요
가스야 다케노리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이어진 무가 가문 출신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베쓰쇼 씨의 가신이었다. 1577년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가담하여 미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세력을 키웠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점령지 대관을 담당했고, 도요토미 히데쓰구 실각 당시 그를 감금하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패배 후 몰락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여러 다이묘 가문에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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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마국 사람 -
후지와라 세이카
후지와라 세이카는 1561년에 태어나 1619년에 사망한 일본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기반으로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고 하야시 라잔 등을 제자로 두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유학을 강의하고 『촌철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
하리마국 사람 -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나가마사는 일본 전국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 인질 생활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 참전을 거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후쿠오카 번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참전과 잔혹 행위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
1562년 출생 -
정기룡
정기룡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국방력 강화에 힘쓴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773년 충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
1562년 출생 -
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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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무장 -
오다 나가마스
오다 나가마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워 유라쿠류를 창시한 다인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호 유라쿠는 도쿄도 유라쿠초 지명의 유래 설이 있다. -
센고쿠 무장 -
사나다 노부시게
2. 생애
1562년 하리마국에서 태어난 가스야 다케노리는 고데라 마사토키의 여동생의 아들로, 아사마사(토모마사)를 형으로 두었다. 어머니는 가스야 아사사다와 이혼 후 시무라씨와 재혼했으나, 남편과 사별 후 다케노리를 아사마사에게 맡겼다. 아사마사는 다케노리를 양자로 삼았고, 다케노리는 이에 대한 감사로 가스야(糟屋)를 성으로 삼았다.
157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하리마 공략 당시 고테라 다카타카의 설득으로 미키 합전에 참전, 노구치 성 공략과 미타니노카미쓰키 성 방어 등 미키 성 공방전에 참여했다. 1580년 가독을 상속받아 중국 전역에 종군,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야마자키 전투와 오다 노부나가 장례식에 참례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사쿠마 모리마사 휘하의 야도야 시치자에몬을 죽여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일등창' 칭호를 받고 3,000석을 받았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병사 150명을 이끌고 본진을 지켰고, 1586년 호코지 대불 건립 작사봉행 및 종오위하 내선정에 서임되었다. 1587년 규슈 정벌에서 배 조달과 하카타 성 축성(실제 이루어지지 않음)에 종사했다.
1588년 고노제이 천황의 주라쿠다이 행차에 동행했고,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히데요시 주위를 지켰다. 1591년 오미국과 우다에서 검지봉행과 히데요시 창입지(직할령) 대관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 메쓰케로 나고야 성에 출병, 오다 히데노부 부대에 속해 조선으로 건너가 점령지 대관을 담당하고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했다. 오타 이치키치, 신조 나오타다와 함께 조선 백성 귀환 훈령을 발표하고, 이듬해 강화 협상으로 귀국했다. 1594년 후시미 성 공사에 참여했다.
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 실각 후, 히데쓰구를 후시미의 다케노리 저택에 감금했고, 시즈가타케 전투 전공으로 하리마에서 6,000석을 추가로 받아 가고가와 성주, 1만 2,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 사망 후 유품으로 금 10매를 받았다.
그의 형은 센고쿠 시대 무장인 가스야 토모마사(糟屋友政)였고, 그의 조카는 유명한 궁수이자 아이즈 번의 가신인 가스야 타케나리(糟屋武成)였다. 오늘날, 가스야 다케노리의 특별히 긴 창(무기)은 나가하마성에 있는 나가하마 시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1. 출신
가스야 다케노리는 1562년 하리마의 시무라 모(某)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고데라 마사토키의 여동생으로, 가스야 아사사다에게 시집가 아사마사(토모마사)를 낳았다. 이후 이혼하고 하리마 국인(쿠니진)인 시무라씨와 재혼하여 다케노리를 낳았다. 어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후, 다케노리를 장남 아사마사에게 맡겼다. 가스야씨의 당주가 된 아사마사는 이부동생인 다케노리를 양자로 삼아 길렀다. 다케노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여 시무라 성을 버리고 가스야(糟屋)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편, 다케노리가 가스야 노리요리(겐반윤)의 차남이었다는 다른 설도 있다.
『관정중수제가보』에는 다케노리가 가스야 타다야스(효고스케)의 넷째 아들인 가즈마사(数政)라는 또 다른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의 동생 아야키의 아들 마사타다가 기본(하타모토)이 되어 가문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스루가국이나 도토미국 출신으로, 가스야씨의 기존 경력과는 모순되어 관련성이 의심스럽다.
2.2. 도요토미 가문에서 입신
1577년 하시바 히데요시의 하리마 공략 당시 고테라 다카타카의 설득으로 미키 합전에 참전했다. 노구치 성 공략을 시작으로 미키 성 공방전에서 미타니노카미쓰키 성을 지키는 등 포위망의 일익을 담당했다.
1580년 가독을 상속받은 후, 중국 전역에 종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자 히데요시의 중국 대귀환에 따라 야마자키 전투에 참가했고, 오다 노부나가의 장례식에도 참례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사쿠마 모리마사 휘하의 야도야 시치자에몬을 죽이는 공을 세워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일등창'이라는 칭호를 받고, 하리마국 가고군 2,000석, 가와치 군 1,000석을 합쳐 3,000석을 받았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칠본창과 함께 마와리슈로서 병사 150명을 이끌고 본진을 지켰다. 1586년 호코지 대불(교토 대불) 건립의 작사봉행을 맡았고, 종오위하 내선정에 서임되었다. 1587년 규슈 정벌에 종군하여 히데요시로부터 배를 조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후 하카타에서 성 축성에 종사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588년 고노제이 천황의 주라쿠다이 행차 시 천황의 행렬에 동행했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히데요시의 주위를 지키거나 후방 지원을 담당했다.
1591년 오미국 검지봉행이 되어 마스다 나가모리 등과 함께 검지를 실시했고, 사카타군 내 히데요시 창입지(직할령) 1만 2,000석의 대관에도 임명되었다. 우다에서도 검지봉행과 히데요시 창입지 대관을 역임했다.
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메쓰케로서 가타기리 가쓰모토 등과 함께 나고야 성으로 출병, 오다 히데노부 부대에 속하여 조선으로 건너갔다. 점령지 대관을 담당하고, 오타 이치키치, 신조 나오타다와 함께 조선 백성들에게 귀환을 촉구하는 훈령을 발표하는 등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했다. 이듬해 강화 협상으로 귀국했다.
1593년 하리마 미키 군 내 히데요시 창입지 1만 석의 대관에 임명되었다. 나카가와 히데시게가 다른 곳으로 봉해진 후 미키 성 역대 성주 중 한 명으로 다케노리의 이름이 전해진다. 1594년 후시미 성 공사에도 참여했다.
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실각하자, 히데쓰구를 후시미의 다케노리 저택에 감금했다. 히데쓰구 사건 직후, 과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하리마에서 6,000석을 추가로 받아 가고가와 성주, 1만 2,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 사망 후 유품으로 금 10매를 받았다.
2.3. 만년
가스야 다케노리의 만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정확한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무칙(宗孝)은 관가에의 전투에서 패배 후 처벌받았으나, 후에 용서받고 1602년에 하타모토로 채용되어 500석의 적은 녹봉을 받는 도쿠가와 가신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설에서는, 무칙은 은거하고 아들 하치베에에게 가문을 잇게 하여 존속을 도모했으나, 1601년 가을에 무칙이, 1602년 봄에 하치베에가 사망하여 1602년 9월 15일에 영지를 몰수당했다는 설이 있다. 같은 해 음력 10월(11월), 스루가 이마가와씨의 가신이었던 동생 가스야 다지마노카미 아야요시의 아들 마사타다가 도쿠가와 가에 섬기고 있었으므로, 그가 가스야 가를 상속받아 500석을 받았다고도 한다.
한편, 『고코가와시지』에 따르면, 무칙은 후시미에서 독으로 분로쿠 연간에 사망했고, 아들 소쿄가 뒤를 이어 관가에의 전투에 서군으로 참가했으나 패배하여 처벌받았다. 1602년에 영지 1만 2천 석을 회복했지만,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전사했다. 가스야 씨의 보디사인 쇼묘지의 사적에는 소쿄가 1623년 8월 14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1602년부터 1610년 사이에 무칙과 하치베에 야스나가가 비추 쿠니요시 성에 봉해졌다고도 전해진다.
3. 기타
오늘날 가스야 다케노리의 특별히 긴 창은 나가하마 시립 박물관인 나가하마성에 전시되어 있다.
가스야 다케노리는 스스로도 매우 유명했지만, 다른 유명한 친척들도 있었다. 그의 형은 센고쿠 시대 무장인 가스야 토모마사였고, 그의 조카는 유명한 궁수이자 아이즈번의 가신인 가스야 타케나리였다.
3.1. 일화
구로다 요시타카가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창술 사범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자, 다케노리는 이를 승낙하고 시즈가타케賤ヶ岳일본어 전투에서 사용했던 창을 주려 했다. 그러나 나가마사는 "예로부터 창술 사범을 두어 공을 세운 예는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이에 다케노리는 나가마사가 장차 큰 공을 세울 인물이라 평했다(名将言行録일본어).
나라현 우다시의 고신지悟真寺일본어는 분로쿠 4년(1595년)에 가스야나이젠다다시(加須屋内膳正일본어)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전해지며, 가스야의 성금이 남아있다.
시가현 나가하마시의 나가하마 시립 나가하마성 역사박물관에는 다케노리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메이스케미쓰(銘助光일본어)의 다이신 야리(大身槍일본어, 다이라 삼각창)가 소장되어 있다. 마쓰다이라가 가전에 따르면, 이 집안에서 조야집으로 시집간 딸이 조야가 단절될 때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3.2. 자손
구로다 24기 중 한 명인 마스다 마사치카(益田正親)의 부인은 다케노리(武則)의 차남인 가토 곤자에몬(加藤權左衛門)의 딸로 여겨진다.
다케노리의 아들인 쥬자에몬은 아버지의 개역 후, 1607년(게이초 12년)에 가가번주인 마에다 도시나가에게 500석으로 고용되었다고 한다.
다케노리의 동생인 스케베의 아들 가스야 다케나리는 아이즈번주 호시나 마사유키의 부름을 받아 아이즈번 궁술 히키류 도설파의 조상이 되었고, 후에 '천하의 삼사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돗토리번주 이케다 가문에도 다케노리의 일족으로 알려진 가계가 모시고 있으며, 이 가문에는 다케노리가 히데요시로부터 받았다고 전해지는 비단 두건이 전해져 내려온다.
다케노리의 동생인 다케마사는 오사카 여름의 진을 치르고 현재의 가코가와시 요네다초 뱃사공에서 귀농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