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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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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자키 전투는 1582년 6월 13일,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와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미쓰히데가 교토를 장악했으나, 히데요시가 급속도로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히데요시는 덴노 산을 점령하여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고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이 승리로 노부나가의 후계자 지위를 굳히고 일본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전투는 "호라가토게", "덴노잔", "사흘 천하"와 같은 숙어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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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야마자키 전장
날짜1582년 7월 2일
장소야마자키, 야마시로 국
좌표display=it
원인히데요시가 자신의 주군의 살해에 대한 복수를 추구함.
전역센고쿠 시대
결과오다 가문의 승리
영향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권력과 권위를 장악하기 시작함.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아케치 가문의 군대
교전 세력 2오다 가문의 군대
지휘관 및 지도자
아케치 가문아케치 미쓰히데
아케치 히데미쓰
아케치 미쓰타다
아케치 미쓰요시
사이토 도시키즈
사이토 도시키미쓰
이세 사다오키
마쓰다 마사치카
미마키 가네아키
오가와 스케타다
나비카 가몬
쓰마키 노리카타
시바타 가쓰사다
쓰다 노부하루
무라카미 기요쿠니
도다 유키마사
스와 모리나오
아쓰지 사다유키
나미카와 야스이에
미조오 스케토모
호리오 쇼베이
아라키 유키시게
다케다 모토아키
오다 가문하시바 히데요시
오다 노부타카
오다 히데카쓰
하시바 히데나가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
하치야 요리타카
호리오 요시하루
가토 미쓰야스
가토 기요마사
다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기요히데
하치스카 이에마사
구로다 요시타카
호리 히데마사
이코마 지카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오타니 요시쓰구
나카무라 가즈우지
기무라 시게오리
미코다 마사하루
이케다 모토스케
다나카 요시마사
병력 규모
아케치 군10,000 ~ 16,000
오다 군20,000 ~ 36,000
사상자 규모
아케치 군3,000명 사망
오다 군3,300명 사망

2. 배경

사다히데(1807-1873)의 작품인 ''야마자키 전투 전의 군사 회의''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교토 혼노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노부나가를 살해했다.( 혼노지의 변)[1]

당시 오다 가문의 주요 무장들은 각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장상황
시바타 가쓰이에엣추국 우오즈성에서 우에스기와 교전 중 (우오즈성 전투)
다키가와 가즈마스우에노 마에바시성에서 호조를 견제
니와 나가히데오사카·사카이에서 시코쿠 정벌 대기 중
하시바 히데요시빗추 다카마쓰성 근교에서 모리와 교전 중 (주고쿠 전투,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사카이에서 긴슈(近習) 몇 명과 함께 관망 (귀국하던 길인 이이모리 산 부근에서 노부나가 사망 소식을 접함)



하시바 히데요시는 빗추 다카마쓰성에서 모리 가문과 대치 중이었으나, 6월 3일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모리 가문과 화의를 맺었다.[3] 6월 4일 호리오 요시하루, 하치스카 마사카쓰를 입회인으로 하여 시미즈 무네하루할복을 검시하고, 6월 5일부터 6월 6일에 걸쳐 병력을 철수시켜 6월 7일 히메지성을 거쳐 6월 11일 아마가사키에 도착하는, 이른바 「주고쿠 대회군(中国大返し)」이라 불리는 기나이(畿内)로의 회군을 단행하였다.

한편, 아케치 미쓰히데혼노지의 변 이후, 교토와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아즈치성을 점령하는 한편 오미국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 그는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쓰쓰이 준케이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미쓰히데의 요청을 거절하거나 히데요시 편에 가담했다.[1]

2. 1. 혼노지의 변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교토 혼노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노부나가를 살해했다. (혼노지의 변)[1]

당시 오다 가문의 주요 무장들은 각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장상황
시바타 가쓰이에엣추국 우오즈성에서 우에스기와 교전 중 (우오즈성 전투)
다키가와 가즈마스우에노 마에바시성에서 호조를 견제
니와 나가히데오사카·사카이에서 시코쿠 정벌 대기 중
하시바 히데요시빗추 다카마쓰성 근교에서 모리와 교전 중 (주고쿠 전투,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사카이에서 긴슈(近習) 몇 명과 함께 관망 (귀국하던 길인 이이모리 산 부근에서 노부나가 사망 소식을 접함)



하시바 히데요시는 빗추 다카마쓰성에서 모리 가문과 대치 중이었으나, 6월 3일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모리 가문과 화의를 맺었다. 6월 4일 호리오 요시하루, 하치스카 마사카쓰를 입회인으로 하여 시미즈 무네하루의 자결을 검시하고, 6월 5일부터 6월 6일에 걸쳐 병력을 철수시켜 6월 7일 히메지성을 거쳐 6월 11일 아마가사키에 도착하는, 이른바 「주고쿠 대회군(中国大返し)」이라 불리는 기나이(畿内)로의 회군을 단행하였다.

2. 2. 히데요시의 주고쿠 대회군

하시바 히데요시혼노지의 변 소식을 6월 3일에 듣고 즉시 모리씨와 화친을 맺었다.[3] 4일에는 호리오 요시하루, 하치스카 마사카쓰를 입회인으로 하여 시미즈 무네하루할복을 검증하고, 5일부터 6일에 걸쳐 철병했다. 히데요시는 군사를 이끌고 6일에 누마(오카야마성 동쪽), 7일에 히메지성, 11일에는 아마가사키(아마가사키시)에 도착하여, "주고쿠 대반전"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속도로 기나이로 급행했다.

히데요시는 교토로 진군하면서 셋쓰 지역 호족들의 동향을 우려했다. 이들이 아케치 미쓰히데 측에 붙으면 단기 결전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나카가와 기요히데에게 "상님(노부나가)·전하(노부타다)는 위난을 벗어나 제소로 향한다"는 거짓 서신을 보냈다.

한편, 오사카에서는 시코쿠 초소카베 씨 정벌을 위해 집결해 있던 고베 노부타카(오다 노부타카)·니와 나가히데혼노지의 변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졌으나, 미쓰히데가 아즈치·오미 방면 평정을 우선하면서 오사카·셋쓰 방면에 대한 대응은 늦어졌다. 5일에 나가히데와 노부타카는 미쓰히데와 내통 의혹이 있었던 쓰다 노부스미를 자결하게 하는 등 체제를 정비하고 미쓰히데와 대치했다.

그 결과, 나카가와 기요히데·다카야마 우콘을 비롯한 셋쓰 지역 호족들 다수가 히데요시 군에 가담했고, 노부타카·나가히데도 4천 명의 병사를 모아 합류하여, 최종적으로 히데요시 군은 2만 명이 넘었다.

하시바 군은 12일에 도미다에서 군의를 열었다. 히데요시는 총대장으로 나가히데, 다음으로 노부타카를 추천했지만, 양측으로부터 요청받아 자신이 사실상의 맹주가 되었다(명목상의 총대장은 노부타카).

2. 3. 아케치 미쓰히데의 상황

혼노지의 변 이후, 아케치 미쓰히데교토와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즈치성을 점령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가족들을 보호하려 했다. 또한, 오미국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

미쓰히데는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여러 다이묘들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특히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쓰쓰이 준케이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편에 가담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1]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아들 다다오키의 아내가 미쓰히데의 딸 타마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쓰히데의 요청을 거절하고 머리를 깎고 은거에 들어갔다. 쓰쓰이 준케이는 처음에는 미쓰히데에게 협력하는 듯 했으나, 결국 하시바 히데요시 편에 가담했다.[1]

결과적으로 미쓰히데는 노부타카와 니와 나가히데 등 오다 가문의 주요 세력들이 히데요시에게 합류하면서 병력에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빠른 진군은 미쓰히데가 충분한 지원군을 확보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

『다이코키』에 따르면, 미쓰히데 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부대주요 인물병력
미노중사이토 도시미쓰, 사이토 도시야스, 사이토 도시무네, 시바타 가쓰사다2000
오미중아베 사다마사, 아베 사다히로, 미조오 시게토모 (아케치 시게토모), 야마자키 나가노리, 기무라 요시키요3000
야마시로·탄바중쓰다 시게히사, 마쓰다 마사치카, 나미카와 야스이에2000
옛 아시카가 막신이세 사다오키, 스와 모리나오, 미마키 가네아키2000
가와치중쓰다 마사토키2000
미쓰히데 본대아케치 히데미쓰, 아케치 미쓰치카, 야스다 구니쓰구, 후지타 교세이 등5000
기타오가와 스케타다, 신시 사다쓰라, 가니 요시나가, 시오야테이 세이타카, 쓰다 노부하루 (= 쓰다 헤이조로 보는 설이 있음) 쓰마키 히로타다 등



총 병력은 약 1만 6천 명이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참가했다. 다만, 아케치 오숙로 중 미쓰히데의 사촌인 아케치 미쓰타다만이 니조 성 공격 시 부상으로 인해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1]

3. 전투 경과

양측 군은 12일경부터 엔묘지 강(지금의 고이즈미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하시바 군은 전날 밤 나카가와 기요히데, 다카야마 우콘 등 셋쓰 지역 출신 병사들이 야마자키 마을을 점거하여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이케다 쓰네오키 등이 우익에, 구로다 요시타카, 하시바 히데나가, 미코다 마사하루 등이 덴노 산(해발 270m) 산자락의 구 사이고쿠 가도를 따라 포진했다. 히데요시의 본진은 더 뒤쪽의 호샤쿠지에 있었다. 이에 맞서 아케치 군은 고보즈카에 있는 미쓰히데의 본진 앞에 사이토 도시미쓰, 아베 사다유키, 가와치 지역 병사, 구 막부 병사 등이 동서로 걸쳐 방어선을 펴고 요격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야마자키에는 늪지가 펼쳐져 있어 대군이 통과할 수 있는 곳은 덴노 산과 늪 사이의 좁은 공간뿐이었고, 아케치 군이 그 출구를 막고 있는 형세였다.

13일(비가 왔다고도 한다)에도 대치는 계속되었다. 이날 오후 4시경 덴노 산 산자락을 가로질러 다카야마 우콘 부대 옆으로 이동하려던 나카가와 기요히데 부대를 아케치 군의 이세 사다오키 군세가 습격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사이토 도시미쓰 부대도 다카야마 우콘 부대를 공격하여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이토 도시미쓰, 이세 사다오키 부대의 맹공을 받은 나카가와 기요히데, 다카야마 우콘 두 군세는 궁지에 몰렸으나, 히데요시 본대에서 호리 히데마사의 원군이 도착해 버틸 수 있었다. 덴노 산 산기슭에 포진해 있던 구로다 요시타카, 하시바 히데나가, 미코다 마사하루 등의 부대는 나아가 나카가와 기요히데, 다카야마 우콘 양 군단의 측면을 찌르려 덴노 산 중턱으로 진격해온 마쓰다 마사치카, 나미카와 야스이에 두 부대와 교전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전황이 크게 흔들린 것은 한 시간 뒤 요도강(옛 흐름)을 따라 북상해 온 이케다 쓰네오키, 모토스케 부자와 가토 미쓰야스가 이끄는 군세가 비밀리에 엔묘지 강을 건너 아케치 측의 쓰다 노부하루를 기습하면서부터였다. 쓰다 노부하루 부대는 삼면으로 공격당해 혼란을 겪었고, 이케다 쓰네오키 부대에 이어 니와, 노부타카 군세도 우익에서 일제히 몰려와 미쓰히데 본대의 측면을 찔렀다. 이에 나카가와 기요히데, 다카야마 우콘 두 군세도 사이토 도시미쓰, 이세 사다오키 두 군단을 격퇴하며 아케치 군은 결국 완패한다.

미마키 가네카타 군세가 막는 사이 아케치 미쓰히데는 쇼류지 성으로 퇴각했지만, 주력 부대였던 사이토 도시미쓰 군대가 무너져 전선을 이탈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구로다 요시타카 등의 부대와 교전하던 마쓰다 마사치카, 퇴각하는 후미를 방어하던 이세 사다오키 등이 난전 중 전사하였다.

하시바 군도 전선 부대의 소모가 심했고 해가 저물면서 추격이 잦아들었으나, 아케치 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쇼류지 성은 대규모 병력을 수용할 수 없는 평지성이었기에 병사들이 탈주하여 7백 명으로 줄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쇼류지 성을 몰래 빠져나와 사카모토 성으로 도망치던 중, 교토시 후시미구 오구루스(현재 '아케치 덤불'이라고도 함) 덤불에서 현지 백성에게 기습당해 죽창에 찔려 절명했다는 설과, 간신히 탈출했지만 힘이 다해 가신의 가이샤쿠(介錯)로 할복했다는 설이 있다.[1]

3. 1. 양측의 배치

미쓰히데일본어는 야마자키 지역에서 쇼류지 성과 요도 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히데요시 군대의 규모를 파악하고 군대가 분산된 상태에서 성 안에 갇히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쓰히데는 남쪽에서 전투를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야마자키는 강과 산 사이에 위치하여 미쓰히데에게 그의 군대가 한 번에 상대해야 하는 적의 수를 줄일 수 있는 요충지를 제공했다.[1]

한편,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마을 외곽에 있는 덴노산이 교토로 가는 길의 전략적 통제에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나카가와 기요히데 휘하의 부대를 보내 이 지역을 확보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군대의 대다수를 이끌고 야마자키로 향했다. 그의 군대는 덴노 산을 점령하여 상당한 이점을 얻었다.[1][2]

미쓰히데는 작은 강(엔묘지 강, 현재의 고이즈미강) 뒤에 군대를 배치했는데, 이는 훌륭한 방어 위치를 제공했다.

6월 12일, 양군은 엔메이지 강(고이즈미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하시바 군은 나카가와 기요히데, 다카야마 우콘 등 셋쓰 지역 출신 병사들이 야마자키 마을을 점거하여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이케다 쓰네오키 등이 우익에, 구로다 요시타카, 하시바 히데나가, 미코다 마사하루 등이 덴노 산(해발 270m) 산자락의 구 사이고쿠 가도를 따라 포진했다. 히데요시의 본진은 더 뒤쪽의 호쇼지에 배치되었다.

이에 대해 아케치 군은 고보즈카에 있는 미쓰히데의 본진 정면에 사이토 도시미쓰, 아베 사다유키, 가와치 지역 병사, 구 막부 병사 등이 동서로 걸쳐 방어선을 치는 듯 포진하며, 맞이하여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당시 야마자키에는 늪지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대군이 통과할 수 있는 것은 덴노 산과 늪 사이의 좁은 공간에 한정되어, 아케치 군이 그 출구에 뚜껑을 덮은 형태가 되었다.

3. 2. 전투의 시작

6월 13일 오후 4시경, 덴노 산 산기슭을 가로질러 가던 나카가와 기요히데 부대를 아케치 미쓰히데 군의 이세 사다오키 부대가 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1] 이에 호응하여 사이토 도시미쓰 부대도 다카야마 우콘 부대를 공격하여 격전이 벌어졌다. 나카가와 기요히데다카야마 우콘 부대는 사이토 도시미쓰와 이세 사다오키 부대의 맹공에 궁지에 몰렸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대에서 호리 히데마사의 원군이 도착하여 버틸 수 있었다.

3. 3. 히데요시 군의 반격

덴노 산에서 구로다 요시타카, 하시바 히데나가, 미코다 마사하루 등이 아케치 군을 압박했고, 요도강을 따라 북상한 이케다 쓰네오키, 가토 미쓰야스 부대가 아케치 군의 측면을 공격했다.[1][2]

덴노 산 산기슭에 포진해 있던 구로다, 히데나가, 미코다 등의 부대는 앞으로 나아가 나카가와, 다카야마 양 군단의 측면을 찌르려 덴노 산 중턱으로 진격해온 마쓰다 마사치카, 나미카와 야스이에 두 부대와 교전,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다.

전황이 크게 흔들린 것은 한 시간 뒤 요도강(옛 흐름)을 따라 북상해 온 이케다 쓰네오키, 모토스케 부자와 가토 미쓰야스가 이끄는 군세가 비밀리에 엔묘지 강을 건너 아케치 측의 쓰다 노부하루를 기습하면서 부터였다. 쓰다 부대는 삼면으로 공격당해 잡병이 도망가는 혼란을 겪었고, 이케다 부대에 이어 니와, 노부타카 군세도 우익에서 일제히 몰려와 미쓰히데 본대의 측면을 찔렀다. 이에 따라 고전하던 나카가와, 다카야마 두 군세도 사이토, 이세 두 군단을 격퇴해 전군이 동요하게 된 아케치 군은 결국 완패한다.

3. 4. 아케치 군의 패배

히데요시 군의 맹공으로 아케치 군은 전열이 무너졌다. 미마키 가네카타 군세가 막는 사이에 미쓰히데는 쇼류지 성으로 퇴각했지만, 주력 부대였던 사이토 도시미쓰 군대가 무너져 달아나고 전선을 이탈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구로다 요시타카 등의 부대와 교전하던 마쓰다 마사치카, 퇴각하는 후미의 방어를 맡은 이세 사다오키 등이 난전 중 전사하였다.[1]

하시바 군도 전선 부대의 소모가 심했고 해가 저물면서 추격이 잦아들었으나, 아케치 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쇼류지 성은 대규모 병력을 수용할 수 없는 평지성이었기에 병사들이 탈주하여 7백 명으로 줄었다. 미쓰히데는 쇼류지 성을 몰래 빠져나와 자신의 거성 사카모토 성으로 도망치던 중 사망한다. 교토시 후시미구 오구루스(小栗栖, 현재 '아케치 덤불'이라고도 함) 덤불에서 현지 백성에게 기습당해 죽창에 찔려 절명했다는 설과, 간신히 탈출했지만 힘이 다해 가신의 가이샤쿠(介錯)로 할복했다는 설이 있다.[1] 미쓰히데는 전투 후 약 2주 후에 나카무라라는 강도에게 살해된 것으로 여겨진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16일, 히데요시 군은 나가하마성의 쓰마키 노리타카, 사와야마성의 아라키 유키시게, 야마모토 산성의 아베 사다유키·사다히로 부자, 야마자키 가타이에 등 도망쳤던 자들의 항복을 받아 오미를 평정했다.[1] 17일에는 사이토 도시미쓰가 잠복해 있던 가타타에서 생포되어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 또는 책형에 처해졌다.[1]

7월 19일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미쓰히데 측 장수였던 다케다 모토아키가 니와 나가히데에게 공격받아 자결했고, 교고쿠 다카쓰구는 여동생 또는 누나인 류코(마쓰노마루도노)를 히데요시에게 바치고 항복했다.

현재 덴노잔 산중에는 "히데요시 깃발을 세운 소나무"가 남아 있으며, 전투 경과를 해설하는 석판 등이 설치되어 있다.

4. 1. 아케치 가문의 몰락

아케치 히데미쓰는 14일 우치데노하마에서 호리 히데마사에게 패배한 뒤, 사카모토 성에서 가보를 넘겨주고 아케치 미쓰히데의 처자를 죽인 후 미조오 시게토모, 아케치 미쓰타다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1] 나카가와 기요히데, 다카야마 우콘단바 가메야마 성으로 진군하여 아케치 미쓰요시를 자결하게 하고 성을 점령하였다.[1] 이로써 아케치 가문은 승적에 있던 사람 등을 제외하고 멸망하였다.[1]

4. 2. 히데요시의 권력 장악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복수를 완수하고, 기요스 회의를 통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지위를 확립했다. 이후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을 위한 과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미쓰히데가 패배한 원인으로는 우선 양측의 병력 차이를 들 수 있다. 히데요시의 움직임은 미쓰히데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신속했다. 또한, 히데요시는 주고쿠 평정을 위해 노부나가 군의 주력을 맡고 있었고, 기나이의 유력 다이묘였던 호소카와, 쓰쓰이 등 주변 세력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미쓰히데는 병력을 오미 방면에 할애하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충분한 병력을 갖추지 못했다. 결국 미쓰히데는 교토와 서쪽 지방을 잇는 마지막 요새인 야마자키에서 결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히데요시 측 역시 강행군으로 병사들이 피로하다는 불안 요소가 있었지만, 대체로 전략 단계에서 이미 대세는 결정된 상황이었다.

4. 3. 한국사에 미친 영향

야마자키 전투에서 승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후 기요스 회의를 거쳐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지위를 굳혔다. 이는 10년 후 임진왜란으로 이어진다.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 진출 야욕을 품게 되면서 조선은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된다.[1]

5. 전설과 속설

두 세력이 다투는 상황에서 유리한 쪽에 붙어 기회를 엿보는 행위를 '''호라가토게(洞ヶ峠)'''라고 한다. 사물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고비나 운명의 갈림길을 '''덴노잔(天王山)'''이라고 한다( "천하를 가르는 덴노잔"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지만, 올바른 사용법은 아니다). 권력을 극히 짧은 기간만 잡는 것을 '''사흘 천하(三日天下)'''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야마자키 전투에서 유래한 일본어의 숙어이다. 다만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설에 유래하고 있다.

히고 호소카와 가문에 전해지는 『아케치 미쓰히데 공 가계 각서』에는, 혼노지의 변아케치 미쓰히데가 호소카와 후지타카, 다다오키 부자에게 아군이 될 것을 설득한 서장이 수록되어 있다. 그 속에서 미쓰히데는 변 후에 참내하여, 종삼위·중장에 서임된 후 정이대장군의 선하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 이 사료의 신빙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변 후의 정국이 미쓰히데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틀림없다.

5. 1. 호라가토게

두 세력이 다투는 상황에서 유리한 쪽에 붙어 기회를 엿보는 행위를 '''호라가토게(洞ヶ峠)'''라고 한다. 이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쓰쓰이 준케이가 상황을 관망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쓰쓰이 준케이가 실제로 호라가토게에 포진했다는 것은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태합기』와 같은 책에는 미쓰히데가 호라가토게에 포진하여 준케이를 기다렸다고 쓰여 있다. 『증보 쓰쓰이 가기』에는 준케이가 시마 사콘의 권유로 호라가토게에 포진했다고 쓰여 있지만, 이 책은 오류가 많아 신뢰하기 어렵다. 다만, 기회를 엿보는 준케이라는 인식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당시 준케이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5. 2. 덴노잔

사물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고비나 운명의 갈림길을 "덴노잔(天王山)"이라고 한다.[2] "천하를 가르는 덴노잔"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지만, 올바른 사용법은 아니다.[2] 야마자키 전투는 덴노 산 점령이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여겨져 『태합기』나 『가와스미 태합기』에 쓰여 있다.[2] 『다케모리 가기』에서는 이 설을 과도하게 주장하여 구로다 요시타카가 덴노잔을 빨리 점령하는 쪽이 승리한다고 주장했고,[2] 『에이겐 시단 기년록』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덴노잔 서쪽의 오자키를 점령했다고 쓰여 있지만,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인명까지 쓰여 있다.[2] 그러나 이러한 덴노잔 쟁탈전은 양질의 사료에서는 전혀 확인할 수 없다.[2] 즉, 덴노잔 쟁탈전이 승패를 결정지었다는 것은 날조이며 사실이 아니다.[2] 덴노잔에서의 전투가 있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1차 사료는 확인되지 않으며, 과거에 널리 사용되었던 "덴노잔의 전투"는 현재 "야마자키 전투(야마자키 합전)"라고 불리고 있다.[2]

5. 3. 사흘 천하

매우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잡는 것을 비유하는 '사흘 천하(三日天下)'라는 말은 아케치 미쓰히데의 통치 기간이 짧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천하는 '사흘 천하'에 비유되지만, 실제로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부터 야마자키 전투가 벌어진 같은 달 13일까지로, 11일 또는 12일간이었다.

참조

[1] 서적 Toyotomi Hideyoshi Osprey Publishing 2010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3] 서적 織田信長 天下一統の謎 学研
[4] 뉴스 「光秀本陣跡」決定的に 秀吉軍防御?の堀跡発見 http://www.asahi.com[...] 201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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