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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루킬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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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로마의 시인으로, 로마 풍자시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그는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비판하고 풍자했으며, 30권의 풍자시를 남겼다. 루킬리우스는 기사 계급 출신으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교류하며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키웠다. 그의 작품은 일상생활, 정치, 도덕 등을 다루며, 호라티우스, 유베날 등 후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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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루킬리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가이우스 루킬리우스
국적로마
직업풍자 시인
생애
출생알 수 없음
출생지세사 아룬카
사망기원전 103년경
사망지나폴리
안장지알 수 없음
친척알 수 없음
경력
군 복무기병대
복무 기간알 수 없음
계급기병
참전누만티아 전쟁 (기원전 134년)
작품 활동
주목할 만한 작품풍자시
기타
영향알 수 없음
관련 인물알 수 없음

2. 생애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라티움의 스에사 아울른카(현재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주 세사 아우룬카)에서 태어났다.[4] 기사 계급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 환경 덕분에 뛰어난 교육을 받고 고대 그리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로마로 이주하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사교 모임에 참여하면서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렐리우스 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이러한 환경은 그의 문학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스키피오의 업적과 미덕을 찬양하는 풍자시를 쓰기도 했다.

그의 정신적 경향은 그라쿠스 형제의 혁명으로 이어진 혼란스럽고 붕괴적인 시대적 특징에 영향을 받았다. 루킬리우스는 키케로, 호라티우스, 페르시우스, 유베날, 퀸틸리아누스 등의 언급을 통해 로마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고, 로마 고유의 연극적 오락 형식을 발전시켜 풍자시를 창작했다. 또한, 서간문 형식을 사용하고, 일상생활, 정치, 사회 문제 등 당대 로마의 현실을 반영한 소재를 다루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지배 계급의 부정부패와 도시 대중의 타락을 비판하면서도, 스토아적 엄격함이나 수사학적 분노 대신 솔직하고 용감한 정신으로 풍자했다.

그의 성격과 취향은 호라티우스와 유사했지만, 혐오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했다. 공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문학가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대의 현실을 관찰하고 비판했다.

루킬리우스의 문학 유산은 약 1,100개의 단편으로 남아 있으며, 대부분 후기 문법학자들이 보존한 것이다. 그는 30권의 풍자시집을 남겼으며, 각 책은 서로 다른 작품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트로카이오스와 이암보스 운율을 사용했지만, 후에는 육보격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산만하고 부주의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힘이 넘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대화, 서간문, 가상 담화 등 다양한 형식을 사용하고,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일화와 우화를 통해 풍자했다. 호라티우스는 루킬리우스의 표현, 형식, 주제, 풍자 대상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생애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으며, 예로니모에 따르면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문

예로니모가 제시한 루킬리우스의 출생 및 사망 연도는 각각 기원전 148년과 기원전 103년이지만, 첫 번째 날짜는 다른 기록과 맞지 않아 오류로 보이며 실제로는 기원전 18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의 누이 루실리아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어머니이자 폼페이우스의 할머니였다.

벨레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루킬리우스는 기원전 134년 누만티아 공방전에서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 휘하에서 복무했다. 호라티우스는 루킬리우스가 스키피오 및 렐리우스와 매우 친밀했으며, 자신의 풍자 시에서 스키피오의 업적과 미덕을 칭송했다고 언급했다.

루킬리우스의 풍자 시집 조각(XXVI–XXIX)은 스키피오 생전에 쓰였음을 보여준다. 일부는 시인과 그의 위대한 친구가 서신을 주고받거나 논쟁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준다. "''Percrepa pugnam Popilli, facta Corneli cane''" ("Popillius의 전투에 대해 외치고 코르넬리우스의 업적을 노래하라")는 기원전 138년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레나스의 패배를 스키피오의 성공과 대조하는 구절로, 누만티아 함락 소식이 생생했을 때 쓰인 것으로 보인다.

루킬리우스가 14세에 군 복무를 하고, 그 나이에 스키피오, 렐리우스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15세에서 19세 사이, 즉 기원전 133년에서 기원전 129년 스키피오 사망 사이에 새로운 종류의 작품으로 성공을 거두기에는 판단력과 경험이 부족했을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루킬리우스의 삶, 성격, 생각을 묘사한 구절("''Satires'', ii. 1, 33")에서 "''quo fit ut omnis Votiva pateat veluti descripta tabella Vita senis''," ("그에 따라 늙은 (위대한) 사람의 전체 삶이 서약된 태블릿에 쓰여진 것처럼 펼쳐질 수 있다")라는 표현은 루킬리우스가 46세에 사망했다면 그 힘을 잃게 된다.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라티움의 스에사 아울른카(현재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주 세사 아우룬카)에서 태어났다.[4] 루킬리우스의 출생 연도는 기원전 180년, 170년, 168년, 148년 등 여러 설이 있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기사 계급 출신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뛰어난 교육을 받아 고대 그리스어를 구사했다. 젊은 시절 로마로 이주하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사교 모임에 소속되어 교우 관계를 넓혔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으며, 기원전 134년 누만티아 전쟁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부대에 기병으로 종군한 기록이 있다. 루킬리우스는 기원전 103년 또는 기원전 102년경에 네아폴리스(현재의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2. 2. 교육과 교우 관계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뛰어난 교육을 받아 고대 그리스어를 구사했다.[4]

젊은 시절 로마로 이주하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주최하는 사교 모임에 소속되어 교우 관계를 넓혔다.

2. 3. 로마에서의 활동과 죽음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생애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으며, 예로니모에 따르면 나폴리에서 사망했다.[3] 그는 기사 계급에 속했는데, 이는 호라티우스가 자신을 루킬리우스의 재산보다 못하다고 언급한 사실로 알 수 있다.[3] 비록 유력한 원로원 가문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할 수 있었다.[3] 그는 "낮은 신분에서 벗어난 당대 몇 안 되는 뛰어난 시인 중 한 명"이었다.[3]

벨레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기원전 134년 누만티아 공방전에서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 휘하에서 복무했다. 호라티우스는 스키피오 및 렐리우스와 매우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으며(풍자 시 2.1), 전자의 업적과 미덕을 자신의 풍자 시에서 찬양했다고 언급했다. 세상에 처음 공개된 것으로 보이는 그의 풍자 시집 조각(XXVI–XXIX)은 스키피오가 살아 있을 때 쓰였음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 중 일부는 시인을 그의 위대한 친구와 서신을 주고받거나 논쟁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Percrepa pugnam Popilli, facta Corneli cane''" ("Popillius의 전투에 대해 외치고 코르넬리우스의 업적을 노래하라", 621 Marx)는 기원전 138년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레나스의 패배를 스키피오의 뒤이은 성공과 대조하는 구절로, 누만티아 함락 소식이 여전히 신선했을 때 쓰인 것으로 보인다.

루킬리우스가 14세에 군 복무를 하고, 그 나이에 스키피오와 렐리우스의 친밀한 관계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15세에서 19세 사이, 즉 기원전 133년에서 기원전 129년 스키피오의 사망 사이에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작품 저자로 세상에 나타났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려면 특히 판단력과 경험의 성숙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당대에 누렸던 인기는 국가의 어떠한 관직도 맡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망 시 공적인 장례를 치렀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3. 작품

루킬리우스는 중년부터 풍자시를 쓰기 시작하여 30권에 달하는 『풍자시집』을 발표했다. 『풍자시집』은 대부분 육보격 형식을 사용했으며, 스캔들, 교우 관계, 사회, 정치, 인물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호메로스의 장황한 문체 등을 풍자하고, 그리스 비극시와 서사시를 패러디하는 등 고전 그리스 시대의 시를 강하게 비판했다.

『풍자시집』은 대부분 유실되어 현재는 단편만 남아있다. 단편은 주로 후대 저작자들이 인용하는 형태로 남아있다. 1597년, 네덜란드 고전학자 프란시스쿠스 도우사가 『풍자시집』 단편을 수집, 정리하여 발표했다.

3. 1. 형식과 내용

루킬리우스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고, 로마 고유의 연극적 오락 요소를 발전시켜 풍자시를 창작했다. 그는 주로 친숙한 서간문 형식을 사용했다.[3] 그의 글은 스타일, 내용, 정신 면에서 모두 독창적이었다. 서사시와 비극 시의 관습적인 언어를 조롱하고 패러디했으며, 교육받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사용하던 일상 언어를 사용했다. 호라티우스가 비판했던 그리스어 단어, 구절, 인용구의 빈번한 사용은 당시 로마인들이 그리스 철학, 수사학, 에서 얻은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기에 라틴어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3]

루킬리우스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글의 내용을 그리스 시나 과거에서 가져오는 대신,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의 일상생활, 정치, 전쟁, 사법, 식사, 돈, 스캔들, 악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3] 그는 지배 계급의 부정부패, 중산층의 속물근성, 도시 대중의 부패와 매수를 폭로하려는 정직한 열망을 가지고, 개인적 야망이나 당파적 목적 없이 매우 솔직하고 독립적이며 용감하게 글을 썼다. 그는 스토아적 엄격함이나 수사학적 분노 없이 당대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다루었다.[3]

그의 성격과 취향은 페르시우스나 유베날보다는 호라티우스와 더 유사했지만, 그는 철저하게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의 자유가 극대화되고 공적, 사적 적개심이 가장 거침없이 표출되었던 시대에 살았으며,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세상과 사회에 속한 사람의 정신으로 당대의 공적 생활을 바라보았다. 그의 공적 미덕과 사적 가치에 대한 이상은 이전 세대의 훌륭한 군인 및 정치가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다.[3]

루킬리우스의 문학 유산은 약 1,100개에 달하는 단편들로 남아있으며, 대부분은 후기 문법학자들이 특이한 언어 사용을 설명하기 위해 보존한 것이다. 그는 30권의 풍자시집을 남겼으며, 각 책은 서로 다른 작품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먼저 쓰여진 작품은 트로카이오스와 이암보스 운율로 쓰인 26권에서 29권으로, 엔니우스와 파쿠비우스가 사용했던 것이다.[3] 이 책들에서 그는 호라티우스와 다른 고대 작가들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전의 비극 및 서사 시인들에 대한 비판을 했다. 눔안티아 전쟁이 최근에 끝났고, 스키피오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언급했지만, 철학자 카르네아데스가 죽었다고 언급된 1권은 기원전 128년에 사망했으므로, 스키피오가 죽은 후에 쓰여졌음이 분명하다.[3]

루킬리우스의 풍자시 대부분은 육보격으로 쓰였지만, 일부 단편들을 통해 판단해 볼 때, 그는 트로카이오스 사행시를 썼을 때 육보격에서 얻을 수 없었던 부드러움, 명료함, 단순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다양한 작품을 구성할 때, 자신의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산만한 방식으로 다루었으며, 때로는 대화, 서간문, 가상의 담화 형식을 채택하고, 종종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며, 자신의 여행, 모험, 목격한 장면, 사적인 명상과 경험을 표현했다.[3] 호라티우스처럼 그는 자신의 관찰을 개인적인 일화와 우화로 설명했다. 그 단편들은 호라티우스가 표현뿐만 아니라, 풍자시의 형식, 주제, 풍자하는 사회적 악덕과 등장인물의 유형에서도 얼마나 자주 그를 모방했는지를 보여준다.[3]

루킬리우스는 중년기부터 풍자시를 쓰기 시작하여 30권에 달하는 『풍자시집』을 발표했다. 30권의 대부분은 헥사메트로스 형식을 사용했으며, 스캔들, 교우 관계, 사회, 정치, 인물 등을 풍자했다. 호메로스의 장황한 문체 등을 풍자하고, 그리스 비극 시와 서사시 등을 패러디했다. 그는 특히 고전 그리스 시대의 시인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호라티우스나 유베날리스와 같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30권의 『풍자시집』 대부분은 유실되었고, 현재는 단편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단편은 후대의 저작자들이 저작에 인용하는 형태로 남아 있으며, 1597년에는 네덜란드 고전학자 프란시스쿠스 도우사가 『풍자시집』의 단편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을 발표했다.

3. 2. 후대에 미친 영향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로마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키케로와 호라티우스는 루킬리우스를 높이 평가했으며, 페르시우스, 유베날, 퀸틸리아누스 역시 그의 작품을 존경했다.[3] 루킬리우스는 국가 관직을 맡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망 시 공적인 장례를 치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3]

루킬리우스는 로마식 풍자시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그는 기존의 혼합된 형태였던 "사투라"에 사람, 도덕, 정치, 문학 등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을 부여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풍자 장르를 확립했다.[3]

형식 면에서 루킬리우스의 풍자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고, 로마 고유의 연극적 오락에서 발전했다. 그는 주로 친숙한 서간문 형식을 사용했다.[3] 그의 글은 내용과 정신 면에서도 독창적이었다. 그는 서사시와 비극 시의 언어를 조롱하고 패러디했으며, 당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했다.[3]

루킬리우스는 그리스 시의 내용 대신,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의 일상생활, 정치, 사회 문제 등을 다루었다.[3] 그는 지배 계급의 부정부패, 중산층의 속물근성, 도시 대중의 타락 등을 비판했으며, 스토아 철학이나 수사학적 분노 대신 솔직하고 독립적인 태도를 보였다.[3]

그의 성격과 취향은 페르시우스나 유베날리스보다는 호라티우스와 더 유사했다. 그러나 그는 혐오감을 강하게 표현했으며, 자유로운 발언과 적개심이 만연했던 시대적 특징을 반영했다.[3]

루킬리우스의 문학 유산은 약 1,100개의 단편으로 남아 있으며, 대부분 후기 문법학자들이 보존한 것이다.[3] 그는 30권의 풍자시집을 남겼으며, 각 책은 서로 다른 작품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작품은 트로카이오스와 이암보스 운율로 쓰였으며, 후기 작품은 육보격을 주로 사용했다.[3]

그의 풍자시는 매우 산만하고 부주의한 인상을 주지만, 동시에 힘이 넘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다양한 형식을 사용했으며, 개인적인 경험, 관찰, 일화, 우화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3] 호라티우스는 루킬리우스의 풍자시 형식, 주제, 사회적 악덕 묘사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3]

루킬리우스는 중년 이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30권의 『풍자시집』은 대부분 육보격 형식을 사용하며, 스캔들, 사회, 정치, 인물 등을 풍자했다. 호메로스의 문체와 그리스 비극시, 서사시 등을 패러디하고 비판하기도 했다.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 등 후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풍자시집』의 대부분은 유실되었고, 현재는 단편만이 남아있다. 1597년, 네덜란드의 고전학자 프란시스쿠스 도우사가 단편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책을 발표했다.

4. 평가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로마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작품과 생애는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그는 로마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루킬리우스는 지배 계층의 부정부패와 무능함, 중산층의 허영심, 도시 빈민들의 타락과 매수 등을 가감 없이 풍자했다. 귀족 출신임에도 권력층의 위선과 특권 의식을 비판하며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그의 비판 정신은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3]

키케로, 호라티우스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으며, 페르시우스, 유베날, 퀸틸리아누스는 그를 존경했다.[3] 그는 공직을 맡지 않았음에도 사후 공적인 장례식이 치러질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3]

작품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약 1,100개의 단편이 남아 그의 문학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 단편들은 대부분 후기 문법학자들이 그의 독특한 언어 사용을 설명하기 위해 보존한 것이다. 30권의 풍자시집을 남겼으며, 각 책은 서로 다른 작품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작품은 트로카이오스와 이암보스 운율로, 후기 작품은 대부분 육보격으로 쓰였다. 그는 다양한 형식과 주제를 다루면서, 자신의 생각과 경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대화, 서간문, 가상의 담화 형식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이야기하기도 했다.[3]

4. 1. 로마 풍자시의 창시자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로마 문학에서 풍자시라는 장르를 창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전까지 로마에 존재했던 '사투라'라는 거칠고 예술성이 부족한 혼합물에 사람, 도덕, 매너, 정치, 문학 등에 대한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성격을 부여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풍자(satire)의 개념을 처음으로 확립했다.[3]

형식 면에서 루킬리우스의 풍자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 예술 형식이 도입되기 전, 로마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토착적인 연극적 오락이 발전한 형태였다. 또한, 그는 주로 친숙한 서간문 형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글은 스타일, 내용, 정신 면에서 모두 독창적이었다.[3]

루킬리우스는 서사시와 비극 시의 관습적인 언어를 조롱하고 패러디했으며, 교육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교류에서 사용하던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호라티우스가 비판했던 것처럼, 그는 그리스어 단어, 구절, 인용구를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 철학, 수사학, 를 접하면서 얻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인상을 표현하기에 라틴어가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3]

그는 단순히 스타일만 독창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글의 내용도 그리스 시나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의 공적, 사적 삶을 구성하는 일상생활, 정치, 전쟁, 사법 행정, 음식, 돈, 스캔들, 악덕 등 친숙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는 지배 계급의 부정부패와 무능함, 중산층의 속물근성, 도시 대중의 부패와 매수를 폭로하려는 정직한 열망을 가지고, 개인적인 야망이나 당파적 목적 없이 매우 솔직하고 독립적이며 용감하게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스토아학파처럼 엄격하거나 수사학적인 분노를 드러내지는 않았다.[3]

그의 성격과 취향은 페르시우스나 유베날보다는 호라티우스와 더 유사했다. 그러나 그는 호라티우스와 달리 철저하게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의 자유가 극대화되고 공적, 사적 적개심이 가장 거침없이 표출되었던 시대에 살았으며, 이는 그의 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킬리우스는 당대의 공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세상과 사회에 속한 사람의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전 세대의 훌륭한 군인 및 정치가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공적 미덕과 사적 가치에 대한 이상을 형성했다.[3]

루킬리우스는 30권의 풍자시집을 남겼는데, 각 책은 서로 다른 작품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작품은 트로카이오스와 이암보스 운율로 쓰였으며, 후기 작품은 대부분 육보격으로 쓰였다. 그는 다양한 형식과 주제를 다루면서, 자신의 생각과 경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매우 자유롭게 표현했다. 때로는 대화 형식을, 때로는 서간문이나 가상의 담화 형식을 사용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이야기하기도 했다.[3]

호라티우스는 루킬리우스를 모방하여 풍자시의 형식, 주제, 사회적 악덕과 등장인물의 유형 등을 다루었다.[3]

4. 2. 사회 비평가로서의 면모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로마 문학에서 시적 풍자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이전의 로마인들에게 "사투라"라고 알려진 거칠고 예술성이 부족한 혼합물에 사람, 도덕, 매너, 정치, 문학 등에 대한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3] 이는 훗날 풍자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되었다.

루킬리우스는 형식 면에서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의 풍자는 그리스 예술 형식이 도입되기 전 로마에서 인기 있던 토착적인 연극적 오락의 발전된 형태였다. 그는 주로 친숙한 서간문의 형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글의 스타일, 내용, 정신은 형식만큼이나 독창적이었다.[3]

그는 서사시와 비극 시의 관습적인 언어를 조롱하고 패러디했으며, 교육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교류에서 사용했던 언어를 사용했다. 호라티우스가 비난했던 그리스어 단어, 구절, 인용구의 빈번한 사용은, 그리스 철학, 수사학, 와의 첫 접촉에서 얻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인상을 표현하기에 자신의 언어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실제 관행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3]

루킬리우스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글의 내용을 그리스 시나 과거에서 가져오는 대신, 기원전 2세기 마지막 4분의 1세기 로마의 공적 및 사적 삶을 구성하는 친숙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는 일상생활, 정치, 전쟁, 사법 행정, 음식, 돈, 스캔들, 악덕 등을 소재로 삼았다.[3]

그는 지배 계급의 부정과 무능함, 중산층의 속물적인 목표, 도시 대중의 부패와 매수를 폭로하려는 정직한 열망을 가지고, 사적인 야망이나 당파적 목적 없이, 매우 솔직하고 독립적이며 용감한 정신으로 이 일을 했다. 그는 당대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다루는 어조에서 스토아적 엄격함이나 수사학적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3]

그의 성격과 취향은 페르시우스나 유베날보다는 호라티우스와 더 유사했다. 그러나 그는 호라티우스와는 달리 철저하게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의 자유가 극대화되고 공적 및 사적 적개심이 가장 거침없이 표출되었던 시대에 살았으며, 이는 주요 인물들의 특징이었다. 루킬리우스는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세상과 사회에 속한 사람의 정신으로 당대의 공적 생활을 바라보았다. 그의 공적 미덕과 사적 가치에 대한 이상은 이전 세대의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군인 및 정치가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다.[3]

참조

[1] 간행물 Jerome's Dates for Gaius Lucilius
[2] 간행물 Jerome's Dates for Gaius Lucilius
[3] 서적 History of Rome to A.D. 565 The Macmillan Company
[4] 뉴스 Lucìlio, Gaio https://www.treccani[...] 2022-02-12
[5] 뉴스 Lucìlio, Gaio https://www.treccani[...] 202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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