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호노리오 1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노리오 1세는 7세기 교황으로, 캄파니아 출신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앵글로색슨족의 기독교화와 스페인 유대인의 세례를 지원했으며, 그리스도가 하나의 의지만을 가진다는 일의지론 논쟁에 개입했으나,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설을 지지한 혐의로 파문되었다. 이후 호노리오 1세의 파문은 교황 무류성 논쟁의 주요 사례가 되었으며, 현대에는 그의 단의론 지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638년 사망 - 우세남
우세남은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당 태종을 섬기며 홍문관 학사, 비서감 등을 역임했고, 지영에게 서예를 배워 해서에 능했으며, 『공자묘당비』, 『소인사비』, 문집 『우비감집』, 저서 『북당서초』, 『제왕략론』, 『필수론』 등을 남겼다. - 캄파니아주 출신 - 가이우스 루킬리우스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로마 풍자시의 창시자로, 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며 30권의 풍자시를 남겼다. - 캄파니아주 출신 - 교황 펠릭스 4세
교황 펠릭스 4세는 사무니움 출신으로 526년부터 530년까지 교황으로 재임하며, 동고트 왕의 지지 속에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 성당 건축, 성직자 소송 관련 교회법 확립, 준-펠라기우스주의 반대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후계자 지명 문제로 논란을 겪은 인물이며, 그의 축일은 1월 30일이다. - 초기기독교 7대 공의회에서 결의된 이단자 - 오리게네스
3세기 중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이자 성서학자인 오리게네스는 헬라어 문학과 철학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하고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에서 교리학자로 활동하며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일부 논란적인 주장으로 사후 이단으로 정죄받았음에도 그의 성경 해석학과 신학적 업적은 후대 교회와 성서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초기기독교 7대 공의회에서 결의된 이단자 - 에우티케스
에우티케스는 5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도사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한적으로 주장하여 이단으로 비난받았고, 그의 사상은 단성론 논쟁을 촉발했다.
교황 호노리오 1세 | |
---|---|
기본 정보 | |
존칭 | 교황 |
직함 | 로마 주교 |
이름 | 호노리오 1세 |
![]() | |
종교 | 가톨릭교회 |
임기 시작 | 625년 10월 27일 |
임기 종료 | 638년 10월 12일 |
전임자 | 보니파시오 5세 |
후임자 | 세베리노 |
출생지 | 동로마 제국, 캄파니아 |
사망일 | 638년 10월 12일 |
기타 | |
다른 이름 | 호노리오 |
2. 생애
호노리오 1세는 캄파니아 출신의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집정관 페트로니우스였다.[1] 625년 10월 27일에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1] 전임 교황 보니파시오 5세가 사망한 지 이틀 만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1] 이는 당시 로마에 있던 아르메니아의 이삭이 제국의 총독으로서 선출을 승인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
교황이 된 후, 그레고리오 1세를 존경하여 라테라노 궁전에서 세속 성직자보다 수도승을 더 많이 고용했다.[1] 롬바르디아 왕 아달로알드를 지지했지만, 그의 경쟁자인 아리우스파의 아리오알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1] 베네치아-이스트리아의 분열을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라벤나 대주교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1] 앵글로색슨 영국 기독교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비리누스를 웨스트색슨족에게 파견했지만, 켈트족의 부활절 날짜 계산법을 바꾸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1] 톨레도 제6공의회에서는 서고트족 주교들에게 유대인 세례 정책을 계속하도록 촉구했다.[1]
일의지론 논쟁과 관련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세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는 호노리오에게 서한을 보내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논쟁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635년 호노리오의 답변은 논쟁 중단에 동의하며, 예수는 하나의 의지만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4] 그러나 호노리오는 일의지론자가 아니었으며, 그의 서기였던 존 수도원장은 호노리오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만 하나의 의지를 말한 것이라고 증언했다.[5] 요한 4세와 막시무스 고백자도 호노리오의 정통성을 옹호했다.[6] 베다는 호노리오를 성인으로 여겼다고 언급했다.[6] 호노리오는 이슬람의 부상을 인지하고, 그 신조를 아리우스의 신조와 유사하다고 보았다.[7] 638년에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호노리우스는 캄파니아 출신의 부유한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정관 페트로니우스였다.[1] 625년 10월 27일 교황이 되기 전까지 호노리우스 1세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1] 그는 전임 교황 보니파시오 5세가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서품을 받았다.[1] 공석 기간이 짧았던 것은 아마도 로마에 있던 아르메니아의 이삭이 제국의 총독으로서 선출을 승인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1]2. 2. 교황 재위 기간의 활동
그레고리오 1세를 존경했던 호노리오 1세는 라테라노 궁전 직원으로 세속 성직자보다 수도승들을 더 많이 고용했다.[1] 그는 폐위된 가톨릭 롬바르디아 왕 아달로알드를 지지했지만, 아달로알드의 아리우스파 라이벌 아리오알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1] 그는 베네치아-이스트리아의 분열을 해결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로마에 대한 종속에 불만을 품었던 라벤나 대주교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1] 호노리오는 앵글로색슨 영국 기독교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웨스트색슨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비리누스를 파견했지만, 켈트족이 그들의 체계인 부활절 날짜 계산법을 버리도록 설득하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1] 톨레도 제6공의회에서 호노리오는 서고트족 주교들에게 그레고리오 1세가 제정한 정책인 유대인의 세례를 계속하도록 촉구했다.[1]호노리오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에너지와 하나의 의지만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인 일의지론에 대한 초기 논의에 참여했다. 이는 그리스도가 인간적이고 신성한 두 가지 에너지와 두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과 대조된다.[2] 콘스탄티노플의 세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는 호노리오에게 일에너지론 논쟁을 알리는 서한을 보내며, 그리스도가 하나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두 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나 분쟁으로 교회의 일치가 위험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세르기우스는 두 에너지의 교리는 예수가 상반되는 두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3] 635년 교황 호노리오의 답변은 모든 에너지에 대한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했으며, 예수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손상된 인간의 본성을 취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 이전에 존재했던 인간의 본성을 취했기 때문에 상반되는 두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하나의 의지만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4]
그러나 호노리오는 그의 후대 고발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일의지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방에서는 그가 일의지론자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져 있었고, 그의 서기이자 서한의 저자인 존 수도원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의지를 말했을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인간적인 본성이라는 이중적인 본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분의 인간성만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 때문에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육체의 의지와 영의 의지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분의 인간성과 관련하여 그분은 하나의 자연적인 의지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5]
호노리오의 거의 바로 후임자인 요한 4세도 호노리오가 "하나의 의지"라는 문구를 사용할 때 "인간의 본성만을, 신성한 본성까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6] 막시무스 고백자 성인은 호노리오의 정통성을 옹호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교황 호노리오에 대해 서술하면서, 존경받는 베다는 그의 끊임없는 성스러움을 언급하는데,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이 점을 간과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베다가 사후에도 호노리오를 성인으로 여겼다는 것은 그의 영국 민족사 2권 17~19장에서 그가 호노리오를 훌륭한 목자로 여러 번 언급한 것과, 성 베르톨푸스 수도원장의 전기에서 그가 호노리오를 가리켜 지금은 복되신 분, 지금은 성인이라고 부르고, 다른 것들 중에서도 "호노리오는 존경받는 주교였으며, 사고가 지혜롭고, 조언을 잘하고, 교리가 명료하며, 온화함과 겸손함으로 유명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거룩한 교황은 언급된 베르톨푸스 아버지에게, 즉 사도좌의 특권을 원하는 직책을 제공했습니다. 이전에 언급된 수도원의 주교들 중 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통치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베다가 호노리오에 대해 한 말입니다. 만약 그가 적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를 정죄된 이단자로 여겼다면, 그는 결코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6]
호노리오는 이슬람의 부상을 알고 있었고, 이 종교의 신조를 아리우스의 신조와 매우 흡사하다고 여겼다.[7]
3. 단의설 논쟁과 정죄
호노리오 1세는 선종한 지 40년 후인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설과 함께 정죄받았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주장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며, 모든 부분에서 그들을 따랐던 로마의 주교 호노리오"라고 언급했다.[23]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13회기에서는 호노리오 1세가 세르기우스 총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세르기우스의 견해에 동조하고 그의 불결한 교리를 인정했다는 이유로 그를 정죄하고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서 축출한다고 선언했다. 제16회기에서는 "파란의 테오도로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세르기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키루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호노리오(1세)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피로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라고 선언했다.[9][10]
교황 레오 2세는 호노리오 1세에 대한 단죄를 최종 확인했다. 레오 2세는 호노리오 1세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가르침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지 않고, 불경하게도 배신함으로써 교회의 순수성이 오염되도록 방치하였다"고 비판했다.[15]
호노리오 1세에 대한 정죄는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을 둘러싼 논쟁의 주요 사례로 제시되었다.[12] 그러나 호노리오 1세의 사례는 교황 무류성에 반대되는 사례로 취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호노리오 1세가 서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나타냈을 뿐, 교좌에서 단의설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거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 무류성을 지지한 측에서는 호노리오 1세가 단의설을 추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교황으로서 이단의 뿌리를 단호하게 뿌리 뽑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만한 지도력과 이단에 대한 부주의함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설(單意說)이 이단으로 규정됨에 따라 호노리오 1세는 파문되었다. 이후 호노리오 1세가 단죄된 것이 자신의 잘못된 사상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호노리우스 논쟁)이 벌어졌고, 제1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쟁점이 되었으나 파문은 취소되지 않았다.
3. 1. 단의설 논쟁 개입
호노리오 1세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에너지와 하나의 의지만 가지고 있다는 일의지론에 대한 초기 논의에 참여했다. 이는 그리스도가 인간적이고 신성한 두 가지 에너지와 두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과 대조된다.[2] 콘스탄티노플의 세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는 호노리오에게 일에너지론 논쟁을 알리는 서한을 보냈고, 호노리오의 635년 답변은 모든 에너지에 대한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예수는 아담의 타락 이전에 존재했던 인간의 본성을 취했기 때문에 상반되는 두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하나의 의지만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4]그러나 호노리오는 일의지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의 서기였던 존 수도원장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의지를 말했을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인간적인 본성이라는 이중적인 본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분의 인간성만을 염두에 두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5] 호노리오의 후임자인 요한 4세도 호노리오가 "하나의 의지"라는 문구를 사용할 때 "인간의 본성만을, 신성한 본성까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막시무스 고백자 또한 호노리오의 정통성을 옹호했다.[6]
681년 제3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의설(單意說)이 이단으로 규정됨에 따라 호노리우스는 파문되었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것이 자신의 잘못된 사상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제1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쟁점이 되었으나 파문은 취소되지 않았다.
3. 2. 옹호론
681년 제3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의설(單意說)이 이단으로 규정됨에 따라 호노리우스는 파문되었다. 이후 호노리우스가 단죄된 것이 자신의 잘못된 사상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호노리우스 논쟁)이 벌어졌다. 1869년 비오 9세가 개최한 제1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쟁점이 되었으나 파문은 취소되지 않았다.3. 3.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선종한 지 40년 후에 열렸으며, 이 회의에서 호노리오 1세는 단의설과 함께 정죄받았다.[23] 공의회는 단의설을 주장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열거하며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며, 모든 부분에서 그들을 따랐던 로마의 주교 호노리오"라고 언급했다.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13회기에서는 호노리오 1세가 세르기우스 총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세르기우스의 견해에 동조하고 그의 불결한 교리를 인정했다는 이유로 그를 정죄하고 교회에서 축출한다고 선언했다. 제16회기에서는 "파란의 테오도로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세르기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키루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호노리오(1세)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피로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라고 선언했다.[9][10] 제17차 회의에서는 호노리오 1세가 교회 전체에 스캔들과 오류를 끊임없이 야기했으며, "전례 없는 표현으로 신자들에게 단의론(monothelitism) 이단을 퍼뜨렸고", "불경건한 아폴리나리우스, 세베루스, 테미스티우스의 미친 거짓 교리에 동의"했다고 결론지었다.[11]
교황 레오 2세는 호노리오 1세에 대한 단죄를 최종 확인하며,[14] 호노리오 1세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가르침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지 않고, 불경하게도 배신함으로써 교회의 순수성이 오염되도록 방치하였다"고 말했다.[15]
이러한 호노리오 1세에 대한 정죄는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을 둘러싼 논쟁의 주요 사례로 제시되었다.[12] 그러나 호노리오 1세의 사례는 교황 무류성에 반대되는 사례로 취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호노리오 1세가 서신을 통해 개인적인 생각을 나타냈을 뿐, 교좌에서 단의설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거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 무류성을 지지한 측에서는 호노리오 1세가 단의설을 추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교황으로서 이단의 뿌리를 단호하게 뿌리 뽑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만한 지도력과 이단에 대한 부주의함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설(單意說)이 이단으로 규정됨에 따라 호노리오 1세는 파문되었다. 이후 호노리오 1세가 단죄된 것이 자신의 잘못된 사상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 호노리우스 논쟁)이 벌어졌다.
3. 4. 정죄 이유에 대한 논쟁 (호노리오 논쟁)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680년에 단의설과 함께 교황 호노리오 1세를 정죄하였다. 공의회는 단의설을 주장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열거하며 "언제나 그들과 함께하며, 모든 부분에서 그들을 따랐던 로마의 주교 호노리오"를 언급했다.[23]공의회 제13회기에서는 "한때 로마 교황이었던 호노리오를 정죄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서 축출한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는 호노리오 1세가 세르기우스 총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세르기우스의 견해에 동조하고 그의 교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23] 제16회기에서는 "파란의 테오도로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세르기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키루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호노리오(1세)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피로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라고 선언했다.[23]
교황 레오 2세는 호노리오 1세에 대한 단죄를 최종 확인했다.[23] 레오 2세는 호노리오 1세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가르침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지 않고, 불경하게도 배신함으로써 교회의 순수성이 오염되도록 방치하였다"고 비판했다.[24] 《가톨릭 백과사전》은 "어떤 가톨릭교도도 호노리오를 변호할 수 없다. 그는 이단자였다."라고 지적했다.[24]
호노리오 1세에 대한 정죄는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 논쟁의 주요 사례로 제시되었다.[12] 그러나 호노리오 1세의 사례는 교황 무류성에 반대되는 사례로 취급되지 않았다. 호노리오 1세는 서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나타냈을 뿐, 교좌에서 단의설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거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12] 또한, 교황 무류성 지지 측은 호노리오 1세가 단의설 추종 때문이 아니라, 이단의 뿌리를 단호하게 뿌리 뽑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태만한 지도력과 이단에 대한 부주의함을 보였기 때문에 정죄받았다고 주장했다.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설이 이단으로 규정되면서 호노리오 1세는 파문되었다. 이후 호노리오 1세가 단죄된 것이 자신의 잘못된 사상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호노리우스 논쟁)이 벌어졌다. 1869년 비오 9세가 개최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쟁점이 되었으나 파문은 취소되지 않았다.
4. 교황 무류성 논쟁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680년에 교황 호노리오 1세를 단의설과 함께 정죄하였다. 공의회는 결의문에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며, 모든 부분에서 그들을 따랐던 로마의 주교 호노리오"라고 언급하였다.[23]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13회기에서는 "한때 로마 교황이었던 호노리오를 정죄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서 축출한다. 그 이유는 그가 세르기우스 총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가 모든 점에서 세르기우스 총대주교의 견해에 동조했으며, 그의 불결한 교리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제16회기에서는 "파란의 테오도로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세르기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키루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호노리오(1세)를 이단자로 정죄한다! 피로스를 이단자로 정죄한다!"라고 선언하였다.
교황 레오 2세는 호노리오 1세에 대한 단죄를 최종 확인하였다. 레오 2세는 호노리오 1세에 대해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가르침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지 않고, 불경하게도 배신함으로써 교회의 순수성이 오염되도록 방치하였다"고 말했다.[24] 《가톨릭 백과사전》 역시 "어떤 가톨릭교도도 호노리오를 변호할 수 없다. 그는 이단자였다. 단지 추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단자였다."라고 지적하였다.[24]
1869년 비오 9세에 의해 소집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을 둘러싼 논쟁의 주요 사례로 호노리오 1세에 대한 정죄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호노리오 1세의 사례는 교황 무류성에 반대되는 사례로 취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호노리오 1세는 서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나타냈을 뿐, 교좌에서 단의설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거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 무류성을 지지한 측에서는 호노리오 1세가 단의설을 추종했기 때문에 정죄받은 것이 아니라, 교황으로서 이단의 뿌리를 단호하게 뿌리 뽑을 수 있고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만한 지도력과 이단에 대한 부주의함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설이 이단으로 규정됨에 따라 호노리오 1세는 파문되었다. 이후 호노리오 1세가 단죄된 것이 자신의 잘못된 사상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호노리우스 논쟁이라고 한다.
5. 현대의 평가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단의설(單意說)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호노리오 1세를 파문했다.[8] 이후 호노리오 1세가 단죄된 이유에 대한 논쟁( 호노리우스 논쟁)이 벌어졌다. 주된 논점은 그가 잘못된 사상을 가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였다.[12]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호노리오 1세가 세르기우스 1세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불경건한 교리를 확인했다고 비난했다.[9][10] 또한, 교회 전체에 스캔들과 오류를 야기했으며, 신자들에게 단의론 이단을 퍼뜨렸고, 불경건한 아폴리나리우스, 세베루스, 테미스티우스의 거짓 교리에 동의했다고 결론지었다.[11]
교황 레오 2세는 공의회의 결정을 확인하며 "참된 신앙의 정의를 완벽하게 선포했다"고 칭찬하고, 호노리오 1세를 파문했다.[13][14][15] 호노리오 1세의 파문은 레오 2세의 후임 교황들과[16] 이후의 공의회들에[17] 의해 반복되었고, 18세기까지 브레비아리 강론에 포함되었다.
1869년 비오 9세가 개최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이 문제가 쟁점이 되었으나 파문은 취소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교황 무류설(papal infallibility) 반대자들의 강력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12]
현대에 와서 호노리오 1세가 실제로 단성론 교리에 대해 세르기우스 1세와 동의했는지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존 B. 버리는 호노리오 1세가 문제의 요점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신학 문제보다는 문법 문제로 여겼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하나의 에너지"와 "두 개의 에너지"를 정확히 동일하게 놓았으며, "경솔한 침묵의 경제" 때문에 파문되었다고 주장한다.[18]
6. 이슬람의 부상에 대한 인식
호노리오 1세는 이슬람의 부상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슬람교의 신조를 아리우스의 신조와 매우 흡사하다고 여겼다.[7]
참조
[1]
서적
A Dictionary of Popes: From Peter to Pius XII
[2]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Monothelitism and Monothelites
http://www.newadvent[...]
[3]
서적
[4]
서적
[5]
서적
Patrologia Graeca
[6]
서적
Controversies of the Christian Faith
https://isidore.co/C[...]
Keep the Faith, Incorporated
2016
[7]
서적
[8]
서적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Rutgers University Press
[9]
서적
The Seven Ecumenical Councils of the Undivided Church
https://archive.org/[...]
James Parker & Co
2021-09-09
[10]
서적
Sacr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https://babel.hathit[...]
2021-09-09
[11]
서적
[12]
백과사전
[13]
서적
Condemnation of Pope Honorius
[14]
서적
Analecta romana
https://archive.org/[...]
Desclée Lefebvre
1899
[15]
서적
[16]
서적
Religion past & present : encyclopedia of theology and religion
Brill
2007-2013
[17]
서적
Histoire des Conciles, vol III.
1909
[18]
서적
[19]
웹사이트
Pope Honorius I
https://en.wikisourc[...]
Robert Appleton Company
[20]
서적
Timeline of the Popes
[21]
서적
Formation and Reflections of Medieval Rome
[22]
웹사이트
Pope Honorius 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2-04-12
[23]
웹인용
The Eclipse of the Church
http://www.eclipseof[...]
2013-12-14
[24]
웹사이트
quotations from the CATHOLIC ENCYCLOPEDIA: Pope Honorius I
http://www.newadven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