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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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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치구미'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의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승리를 믿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현상은 주로 브라질, 페루 등 일본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나타났으며, 정보 부족, 민족주의적 신념, 경제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브라질에서는 극단적인 조직인 신도연맹을 중심으로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페루에서는 일본 엔화 사기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대 일본 사회에서는 '가치구미'와 '마케구미'라는 용어가 사회 양극화를 나타내는 상류층과 하류층을 지칭하는 은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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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구미
개요
한국어 표기승리조
일본어 표기勝ち組 (かちぐみ)
로마자 표기Kachigumi
영어 표기Winner
반대 의미마케구미 (패배조)
상세 내용
정의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인 사회에서 계층 의식 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
사회 계층 의식 및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용어.
유래전승국을 "승리조"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
특징버블 경제 시기에 사회 현상으로 나타남.
고학력, 고수입, 대기업 근무 등의 특징을 가짐.
사회적 불평등과 격차 사회 심화를 반영하는 용어.
관련 용어닌시키하 (인식파)

2. '가치구미' 현상의 배경과 원인

'가치구미' 현상은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했다.


  • 일본 사회의 양극화: 2003년과 2004년 이후, '가치구미'와 '마케구미'라는 용어는 양극화된 일본 사회의 상류층과 하류층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9]

  • 브라질 이민 사회의 특수성:

'가치구미' 현상의 원인 (브라질)
원인내용
전후 혼란과 사회적 고립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브라질 내 일본인 사회는 일본 영사관 직원 등이 귀국하면서 통제 기관이 부재한 상황에 놓였다.[5] 이는 정신적 불안감을 야기하고 가치구미 현상의 토양이 되었다.
경제적 이익일부 가치구미는 패전으로 가치를 잃은 일본의 구 엔화를 속여 팔아 이익을 취하려 했다.[6] 이들은 패전을 인정한 인식파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치구미'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러가지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유감이지만"이라며 평화를 호소하고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테러 때문에 "일본이 졌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

고도 경제 성장기 말인 1973년, 브라질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가치구미' 가족들은 "일본이 이렇게 풍요로워졌으니, 역시 일본이 이긴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2. 1. 정보 부족과 불신

해외 일본인 사회는 일본 본토와의 정보 교류가 단절되거나 제한되어 객관적인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1941년 6월에 일본어 신문이 폐간된 후, 사람들은 포르투갈어 미디어를 연합국의 선전이라고 생각해 신뢰하지 않고, 일본의 단파 방송에만 의존했다. 이 때문에 유언비어가 퍼지기 쉬웠다.[6]

2. 2. 민족주의적 신념

야마토 민족을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여기는 신념은, 이국에서 고립되어 전쟁 중에 박해받았던 일본인 이민의 마음의 지주로서 '가치구미' 현상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6] 특히 브라질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 이민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고 배일 감정이 높아졌다. 1934년에는 일본 이민을 제한하는 규정이 연방 신헌법에 포함되었고, 1938년에는 일본인 학교가 폐쇄되는 등 일본계는 브라질 사회에서 억압적인 입장에 놓였다.[5]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치구미' 신념을 더욱 강화했을 수 있다.

3. 지역별 '가치구미' 현상

브라질, 페루 외에도 일본 본토의 포로 수용소에서도 '가치구미' 현상이 나타났다.

지역상황
브라질1946년 이후 전승파의 테러가 빈발하고, 일본인과 브라질인 간의 소란, 신도연맹 회원 검거 등으로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후 양국 국교 회복 후에도 대립이 계속되었다.
페루1945년 8월 이후 승리자와 패배자 간의 대립이 발생했으며, 1952년까지도 승리자가 남아있었다. 이들은 전전의 사상을 유지하여 페루 정부의 우려를 샀다.
일본 내 포로 수용소종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승리조"와 "패배조"로 나뉘어 항쟁이 벌어졌다. 1946년 2월 25일에는 경비병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8]


3. 1. 브라질

1946년 3월 이후, 브라질에서는 전승파의 과격 분자 '''특행대'''[1][2]에 의한 테러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같은 해 7월 말에는 일본인과 브라질인 사이에 소란 사건이 일어나 전승파 조직 신도연맹 회원이 검거되었고, 브라질 국민들의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다.[3]

인식파는 미국 총영사관을 통해 전승파의 일본인 친척·친구에게 엽서를 보내도록 의뢰했다. 또한 중립국스웨덴 정부, 미국 국무성, GHQ 및 일본 정부도 협력하여 일본의 신문·영상 필름을 입수하는 등 노력을 펼쳤다. 그 결과, 1947년 1월 암살 사건 이후 대립은 진정되었다.[3]

이후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고, 특명전권대사가 리우데자네이루에 다시 부임한 1950년대 초반까지, 교육 수준이 낮은 지방에 많았던 "승리조"에 대해 대사 자신이 직접 설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4]

"승리"에 대한 착각의 원인에 대해 스와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브라질에서는 일본의 이민에 대한 경계심이 확산되어 배일론이 높아졌다. 바르가스 정권 하의 1934년에는 일본 이민을 제한하는 규정이 연방 신헌법에 포함되었다. 또한 콘세이상 계약[5]에 연방 의회 상원의 허가가 필요해졌으며, 1938년에는 이민의 동화를 촉구하는 "외국인 입국법"이 시행되어 일본인 학교가 폐쇄되는 등, 일본계는 브라질 사회에서 억압적인 입장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 1942년 일본과 브라질의 국교 단절 후, 일본 영사관 직원이나 이민 회사의 사원이 귀국해 버렸기 때문에, 1945년 8월 종전 후 일본인 사회가 통제 기관을 결여하고 있었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


국립국회도서관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 1941년 6월 일본어 신문이 폐간된 후, 포르투갈어 미디어를 연합국의 선전이라고 신뢰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일본의 단파 방송에만 의존하게 되어 유언비어가 퍼지기 쉬워졌다.


다카기 토시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 승리조 사람들의 기본 사상에는, 이국에서 고립되어 전쟁 시에 박해받았던 이민의 마음의 지주로서 존재했던, 야마토 민족을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하는 생각이나 신념이 있었다.
  • "광신" 제1권에서, 승리조 중에는 실제로는 패전으로 가치를 잃은 일본의 구 엔 지폐를 속여 팔아넘기려는 자도 있었고, 그런 자가 인식파에 대한 살해·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6]


승리조는 광신의 발현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유감이지만"이라며 평화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테러 때문에 "일본이 졌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고도 경제 성장기 말인 1973년, 브라질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승리조" 가족 3가구는 "일본이 이렇게 풍요로워졌으니 역시 일본이 이긴 거야."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1946년 1월 신엔 전환으로 휴지 조각이 된 구 지폐를 '가치구미'에게 속여 판매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7] 구 엔 지폐를 구매하기 위해 농장을 판 사람도 있었고,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자살이나 가족 해체 등의 비극이 잇따랐다. 브라질에 대량의 구 엔 지폐를 반입한 자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고다마 기관의 관여가 의심되었으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7]

3. 2. 페루

페루에서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의 승리를 믿는 '가치구미'와 패전을 인정한 사람들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다. 1952년 3~5월 오카야스가 현지를 방문했을 때에도 페루에 거주하는 일본인 7,000~10,000명 중 700~800명의 '가치구미'가 남아 있었다. 이들은 오카야스에게 면회를 요청했지만, 일본의 패전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1]

'가치구미'가 생겨난 원인 중 하나는 종전 무렵 유대인 상인들이 상하이 방면에서 일본 엔화를 팔기 위해 페루에 찾아와, 대본영 발표를 과장하여 일본의 승리를 선전하고 일본 군함이 일본계 사람들을 데리러 온다고 부추긴 것이다.[1]

'가치구미'는 기원절을 기념하고 교육칙어를 낭독하는 등 전전(戰前)의 사상과 교육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페루 정부도 이를 우려했다.[1]

3. 3. 일본 내 포로 수용소

1945년 12월 2일, 인도 정부는 사와다 렌조 전 버마 대사, 이소다 사부로 전 육군 중장을 데오리 수용소(아지메르 근교)에 파견하여 종전을 설명하게 했지만, 사와다와 이소다를 가짜로 의심하는 사람이 나타나 수습되지 않았다. 이윽고 수용소 내에서 "승리조"("가치구미")와 "패배조"("마케구미") 간의 항쟁이 시작되었고, 1946년 2월 25일에는 소란 상태가 된 "승리조"에 대해 경비병이 발포하여 17명이 사망했다.[8]

4. '가치구미' 관련 사기 사건

'가치구미' 관련 사기 사건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 번째는 패전으로 가치를 잃은 일본의 구 엔화를 속여 파는 행위였고, 두 번째는 '가치구미'가 '패배조'를 속여 구 일본 엔화를 샀다가 피해를 보는 경우였다.[6]

이러한 사기 사건의 배경에는 '가치구미'의 승리 신념과 더불어, 이국에서 고립되어 전쟁 시기에 박해받았던 이민들의 불안정한 심리가 있었다. 또한, 일부 '가치구미'는 광신적인 믿음에 빠져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유감이지만"이라며 평화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테러의 위협 때문에 "일본이 졌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6]

4. 1. 구 일본 엔화 사기

1946년 신엔 전환으로 가치를 잃은 구 일본 엔화를 '가치구미'에게 속여 판매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7] 구 일본 엔화를 구매하기 위해 농장을 판 사람도 있었으며,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자살하거나 가족이 해체되는 등의 비극이 잇따랐다.[7] 브라질에 대량의 구 일본 엔화를 반입한 사람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상하이와 홍콩에서 대량의 구 일본 엔화를 수집했던 고다마 기관의 관여가 의심되었으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7]

5. 현대 일본 사회에서의 '가치구미'와 '마케구미'

2000년대 초반부터 '가치구미'와 '마케구미'라는 용어는 양극화된 일본 사회의 상류층과 하류층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9]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サンパウロ州ツパーン
[4] 서적
[5] 서적
[6] 뉴스 ノンフィクション 高木俊朗の「狂信」 1970-09-02
[7] 뉴스 ブラジル日系移民 「コダマ」によみがえる悪夢 敗戦時、日本円を売った黒幕 1976-03-08
[8] 뉴스 終戦間もないインド収容所 邦人17人殺される 1976-05-31
[9] 논문 階層意識としての勝ち組・負け組 準拠集団に関するインターネット調査結果の分析 (2) https://ci.nii.ac.jp[...]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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