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김씨
1. 개요
강화 김씨는 경주 김씨에서 분적된 성씨로, 경순왕의 후예이다. 동성동본이지만 시조를 달리하는 3개의 계통이 존재한다. 개성파는 고려 명종 때 참지정사를 지낸 김성을 시조로 하며, 숙천파는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병조참판을 지낸 김광을 시조로 한다. 의주파는 김광의 증손인 김송학을 시조로 한다. 강화 김씨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다양한 관직을 배출하였으며, 문과와 무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 성씨 | 강화 김씨 |
|---|---|
| 한자 표기 | 江華金氏 |
| 관향 | 인천광역시 강화군 |
| 시조 | 김성(金晟), 김광(金光), 김송학(金松鶴) |
| 집성촌 | 경기도 개성시 개풍군 남면 율응리, 평안남도 안주군 운곡면 용천리 |
| 주요 인물 | 김용, 김휜, 김대보, 김대진, 김명호, 김여정, 김시하 |
| 2000년 인구 | 4,441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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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김씨 -
김동진 (작곡가)
김동진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의 작곡가로, 가곡 〈가고파〉, 오페라 《심청전》, 《춘향전》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으나, 만주국 시기 친일 활동 논란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2. 역사
강화 김씨(江華 金氏)는 경순왕의 후예로 경주 김씨(慶州 金氏)에서 분적 하였다.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3계통(系統)이 있다.
* 개성파(開城派)
시조 김성(金晟)은 고려 명종 때 참지정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강화로 하였다. 하음(河陰)은 강화(江華)의 옛 이름이다. 일명 강화파(江華派)라고도 한다.
고려 때 김장생(金長生)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고, 김원벽(金元壁)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김성손(金性孫)은 상장군(上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인보(金仁輔)는 전라우도수군우후(全羅右道水軍虞侯)를 역임하였다. 김의보(金義輔)는 선전관(宣傳官) 감찰(監察)을, 김예보(金禮輔)는 자인현감(慈仁縣監)을 지냈다. 김지보(金智輔)는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김경언(金慶彦)은 삭녕군수(朔寧郡守)를, 김경우(金慶禹)는 서천군수(舒川郡守)를, 김경준(金慶俊)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김성범(金成範)은 명천현감(明川縣監), 수원판관(水原判官),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고, 김성헌(金成憲)은 서천군수(舒川郡守)와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역임하였다.
* 숙천파(肅川派)
시조 김광(金光)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고 평안남도 숙천(肅川)으로 유배 당해 후손(後孫)들이 그를 1세조로 하였다. 그의 선조 김인경(金仁鏡)은 경주인(慶州人)인데 고려 고종 초 거란군을 토벌할 때 판관(判官)으로 큰 공을 세워 정숙공(貞肅公)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김궤(金軌)는 1232년(고종19) 몽고의 침입 때 왕이 강화도(江華)로 몽진할 때 상서(尙書)로서 왕을 호종하였는데 그 후 자손이 강화도(江華)에 남아 살게 되면서부터 본관을 강화도(江華)로 하였다고 한다.
김광(金光)의 아들 김도순(金道淳)은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를 지냈다. 김철손(金哲遜)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김구정(金九鼎)은 부호군(副護軍), 김여전(金汝銓)은 참의(參議)를 지냈다.
* 의주파(義州派)
시조 김송학(金松鶴)은 김광(金光)의 증손(曾孫)이라 하며, 조선조(朝鮮朝)에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를 지냈다. 그의 조부 김태후(金泰후)는 김인경(金仁鏡)의 후손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이며, 벼슬이 훈련원도정(訓鍊院郡正)에 이르렀으나,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강화(江華)로 피신했다. 그러나 류자광(柳子光)의 탄핵으로 평안북도 용천(龍川)에 유배당했다가 이듬해 사면되었으나 돌아오지 않고 용천(龍川)에 세거하면서부터 본관을 강화(江華)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의주파는 일명 용천파(龍川派)라고도 한다.
김계후(金繼厚)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때 화(禍)를 입었다. 절충장군(折衝將軍) 김봉원(金鳳元), 사과(司果) 김지정(金志禎), 부호군(副護軍) 김이순(金履淳) 등의 후손들이 있다.
2.1. 개성파(開城派)
시조 김성(金晟)은 고려 명종 때 참지정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강화로 하였다. 하음(河陰)은 강화(江華)의 옛 이름이다. 일명 강화파(江華派)라고도 한다.
고려 때 김장생(金長生)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고, 김원벽(金元壁)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김성손(金性孫)은 상장군(上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인보(金仁輔)는 전라우도수군우후(全羅右道水軍虞侯)를 역임하였다. 김의보(金義輔)는 선전관(宣傳官) 감찰(監察)을, 김예보(金禮輔)는 자인현감(慈仁縣監)을 지냈다. 김지보(金智輔)는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김경언(金慶彦)은 삭녕군수(朔寧郡守)를, 김경우(金慶禹)는 서천군수(舒川郡守)를, 김경준(金慶俊)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김성범(金成範)은 명천현감(明川縣監), 수원판관(水原判官),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고, 김성헌(金成憲)은 서천군수(舒川郡守)와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역임하였다.
2.2. 숙천파(肅川派)
시조 김광(金光)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고 평안남도 숙천(肅川)으로 유배 당해 후손(後孫)들이 그를 1세조로 하였다. 그의 선조 김인경(金仁鏡)은 경주인(慶州人)인데 고려 고종 초 거란군을 토벌할 때 판관(判官)으로 큰 공을 세워 정숙공(貞肅公)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김궤(金軌)는 1232년(고종19) 몽고의 침입 때 왕이 강화도(江華)로 몽진할 때 상서(尙書)로서 왕을 호종하였는데 그 후 자손이 강화도(江華)에 남아 살게 되면서부터 본관을 강화도(江華)로 하였다고 한다.
김광(金光)의 아들 김도순(金道淳)은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를 지냈다. 김철손(金哲遜)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김구정(金九鼎)은 부호군(副護軍), 김여전(金汝銓)은 참의(參議)를 지냈다.
2.3. 의주파(義州派)
시조 김송학(金松鶴)은 김광(金光)의 증손(曾孫)이라 하며, 조선조(朝鮮朝)에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를 지냈다. 그의 조부 김태후(金泰후)는 김인경(金仁鏡)의 후손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이며, 벼슬이 훈련원도정(訓鍊院郡正)에 이르렀으나,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강화(江華)로 피신했다. 그러나 류자광(柳子光)의 탄핵으로 평안북도 용천(龍川)에 유배당했다가 이듬해 사면되었으나 돌아오지 않고 용천(龍川)에 세거하면서부터 본관을 강화(江華)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의주파는 일명 용천파(龍川派)라고도 한다.
김계후(金繼厚)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때 화(禍)를 입었다. 절충장군(折衝將軍) 김봉원(金鳳元), 사과(司果) 김지정(金志禎), 부호군(副護軍) 김이순(金履淳) 등의 후손들이 있다.
3. 본관
강화(江華)는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우리나라 다섯 번째 섬으로 일찌기 단군신화(檀君神話)에도 등장한 유서 깊은 고장이다. 옛날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이며, 고구려 때에는 혈구군(穴口郡), 신라 때에는 해구군(海口郡)이라 하였으며, 940년(고려 태조 23) 강화(江華)로 개칭 되었다. 1232년(고려 고종 11) 몽골의 침입 때와 조선 병자호란 때에는 임시수도(臨時首都)의 역할을 하였고, 한양의 관문에 위치한 까닭으로 근세(近世)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운양호 사건(雲揚號事件)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1906년(광무 10)에 강화군이 되었다가, 1995년 경기도에 속하였다가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4. 분파
5. 주요 인물
5.1. 고려
고려 시대의 강화 김씨 인물로는 추밀원부사를 역임한 김장생(金長生), 문하시중과 찬성사를 역임한 김원벽(金元壁), 상장군을 역임한 김성손(金性孫) 등이 있다. 김성손의 아들 김인보(金仁輔)는 전라우도수군우후를 역임했다.
김의보(金義輔)는 선전관과 감찰을, 김예보(金禮輔)는 자인현감을, 김지보(金智輔)는 훈련원판관을 역임했다. 김경언(金慶彦)은 삭녕군수를, 김경우(金慶禹)는 서천군수를, 김경준(金慶俊)은 통정대부에 올랐다. 김성범(金成範)은 명천현감, 수원판관, 호조정랑을, 김성헌(金成憲)은 서천군수와 김해부사를 역임하였다.
5.2. 조선
고려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낸 김장생(金長生)을 비롯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및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김원벽(金元壁), 상장군(上將軍) 김성손(金性孫)과 그의 아들 전라우도수군우후(全羅右道水軍虞侯) 김인보(金仁輔) 등이 있었다. 선전관(宣傳官)과 감찰(監察)을 지낸 김의보(金義輔), 자인현감(慈仁縣監)을 지낸 김예보(金禮輔),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을 지낸 김지보(金智輔)도 있었다.
삭녕군수(朔寧郡守) 김경언(金慶彦), 서천군수(舒川郡守) 김경우(金慶禹), 통정대부(通政大夫) 김경준(金慶俊)이 있었다. 명천현감(明川縣監), 수원판관(水原判官),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한 김성범(金成範)과 서천군수(舒川郡守)와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지낸 김성헌(金成憲)도 강화 김씨 인물이다. 김광(金光)의 아들로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를 지낸 김도순(金道淳),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철손(金哲遜), 부호군(副護軍) 김구정(金九鼎), 참의(參議) 김여전(金汝銓)도 있었다. 무과 급제 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화(禍)를 입은 김계후(金繼厚), 절충장군(折衝將軍) 김봉원(金鳳元), 사과(司果) 김지정(金志禎), 부호군(副護軍) 김이순(金履淳) 등이 강화 김씨의 인물이다.
6. 과거 합격자
6.1. 문과
김용(金鎔)은 1546년(명종 1)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함흥판관,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를 지냈다. 김휜金萱)은 1646년(인조 24)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다.
6.2. 무과
김대보(金大寶)는 1583년(선조 16)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보인(保人)으로 급제하였다. 김대진(金大進)은 1637년(인조 15)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수문장(守門將)으로 급제하였다. 김명호(金明浩)는 1651년(효종 2)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부사과(副司果)로 급제하였다. 김여정(金汝錠)은 1652년(효종 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급제하였다. 김시하(金時夏)는 1672년(현종 13)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한량(閑良)으로 급제하였다. 이 외에도 김무남(金武男), 김시명(金始鳴), 김윤찬(金胤贊), 김의담(金義淡), 김의익(金義益), 김이도(金履道), 김정묵(金正默), 김중익(金重益) 등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6.3. 사마시
김용(金鎔), 김훤(金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