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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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오사화는 1498년, 조선 연산군 시기에 일어난 사림파 숙청 사건이다. 성종 사후 연산군이 즉위한 후 편찬된 《성종실록》에 김일손이 쓴 사초가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 사초에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실려 있었는데, 이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었다. 이극돈과 유자광 등 훈구파는 이 사초를 연산군에게 고변했고, 연산군은 사림파를 대거 숙청했다. 김일손은 능지처참,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사림파는 몰락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의 폭정을 심화시키고 언론 탄압을 초래했으며, 조선 왕조 실록 기록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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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8년 한국 - 사화
사화는 조선 시대에 발생한 정치적 숙청 사건으로, 훈구와 사림의 대립, 왕권 강화 시도 등의 원인으로 발생했으며, 사림 세력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사림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 무오사화 - 귀인 윤씨
귀인 윤씨는 세조의 며느리이자 덕종의 후궁으로, 덕종 사후 숙의에 책봉되었다가 귀인에 봉해졌으며, 그녀에 대한 세조의 과도한 은혜 기록이 무오사화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무오사화 - 조의제문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초 회왕을 조상하는 내용으로 지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으며,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사림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필화 사건 - 사상계
사상계는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창간되어 한국 문학 작품과 사회 비평을 게재했으나, 김지하 시인의 저항시 게재 후 폐간되며 유신 체제 언론 탄압의 상징이자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매체였다. - 필화 사건 - 문자의 옥
문자의 옥은 지배 권력이 자신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기 위해 문학 작품을 검열하고 처벌하는 행위로, 송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어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청나라 시대에는 한족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무오사화 | |
---|---|
기본 정보 | |
이름 | 무오사화 |
원어 이름 | 戊午士禍/戊午史禍 |
참가자 | 연산군 유자광 등 훈구파 |
날짜 |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
사망자 | 김일손 등의 사림파 |
결과 | 김종직 부관참시 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 |
원인 |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을 트집 잡음 |
2. 역사적 배경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숙부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세자에 책봉 되면서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1468년 조부 세조 사후에 숙부인 예종이 즉위하였다. 숙부 예종이 즉위 14개월만에 죽었을때, 성종이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훈구파 대신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계승서열을 뛰어넘은 즉위과정으로 인해 성종은 즉위후 정치적인 입지가 매우 좁았고 왕권도 약했다.[4]
성종은 즉위 후 할머니 정희왕후가 7년동안 섭정하는 동안 저자세로 일관하며 때를 기다렸다.[5] 1476년 친정이 시작되자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대거 중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6][7] 세조가 만든 원상제(院相制) 역시 폐지해 버렸다.[8][9] 원상제는 공신 원로들이 실질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왕은 형식적으로 결제만하였던 제도로[10] 왕의 실권 행사를 가로막고 있었다. 계유정란(1453년) 이후 세조시대의 공신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각종 특권을 누리며 매관매직을 하고 전횡을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하였다.[11] 주로 삼사에 기용된 사림파들이[12] 공신들로 구성된 훈구파(勳舊派)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자[13] 양측은 빈번하게 충돌하였다.[14] 그러나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는 성종까지도 말년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그의 아들 연산군은 이런 사림파(士林派)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사림파도 연산군의 국정방식이 못마땅했고 그 결과 삼사는 연산군 즉위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릴 정도로 국왕과도 대립 하였다.[15]
2. 1.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성종은 할머니 정희왕후와 훈구파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 정치적 입지가 좁고 왕권이 약했다.[4] 정희왕후의 섭정 기간 동안 성종은 저자세로 일관하며 때를 기다렸고,[5] 1476년 친정을 시작하면서 태종과 세조 때 숙청된 사림파를 대거 중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6][7] 세조가 만든 원상제(院相制)를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고,[8][9] 왕의 실권 행사를 가로막는 요소를 제거했다.[10] 계유정난 이후 세조 시대의 공신들은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누리며 국정을 농단하였는데,[11] 주로 삼사에 기용된 사림파들이[12] 훈구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며 양측은 빈번하게 충돌하였다.[13][14] 그러나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는 성종의 말년과 연산군 대에 이르러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15]2. 2. 성종의 친정과 사림파 견제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숙부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세자에 책봉 되면서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1468년 조부 세조 사후에 숙부인 예종이 즉위하였다. 숙부 예종이 즉위 14개월만에 죽었을때, 성종이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훈구파 대신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계승서열을 뛰어넘은 즉위과정으로 인해 성종은 즉위후 정치적인 입지가 매우 좁았고 왕권도 약했다.[4]성종은 즉위 후 할머니 정희왕후가 7년동안 섭정하는 동안 저자세로 일관하며 때를 기다렸다.[5] 1476년 친정이 시작되자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대거 중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6][7] 세조가 만든 원상제(院相制) 역시 폐지해 버렸다.[8][9] 원상제는 공신 원로들이 실질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왕은 형식적으로 결제만하였던 제도로[10] 왕의 실권 행사를 가로막고 있었다. 계유정란(1453년) 이후 세조시대의 공신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각종 특권을 누리며 매관매직을 하고 전횡을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하였다.[11] 주로 삼사에 기용된 사림파들이[12] 공신들로 구성된 훈구파(勳舊派)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자[13] 양측은 빈번하게 충돌하였다.[14] 그러나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는 성종까지도 말년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그의 아들 연산군은 이런 사림파(士林派)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사림파도 연산군의 국정방식이 못마땅했고 그 결과 삼사는 연산군 즉위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릴 정도로 국왕과도 대립 하였다.[15]
3. 사화 발생
3. 1. 성종실록 편찬과 사초 문제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실록》 편찬을 명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왕이 사망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실록청을 구성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선례에 따른 것이었다.[16] 1495년 4월부터 춘추관 안에 실록청이 설치되어 성종실록 편찬이 시작되었다.[1]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은[2] 사초를 열람하던 중,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서 자신을 포함한 훈구파의 비리가 상세히 기록된 것을 발견하였다. 이극돈은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 때 불교중흥 정책을 편 세조의 눈에 들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것[17]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었다.[18]이극돈은 김일손에게 내용 삭제를 부탁했으나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자 이극돈은 실록 편찬에 기초가 되는 사초(史草)는 실록편집이 끝나면 파기하여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19] 사초를 유출하여 훈구파였던 유자광과 의논하였다.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들과 악연이 많았다. 함양 학사루(學士樓)에 걸어 놓은 유자광의 시판을 김종직이 철거하며 자신을 무시한 사건으로 개인적인 감정도 품고 있었다.[20][21][22]
1498년 7월 1일, 유자광, 노사신, 윤필상등 훈구파 대신들은 연산군을 찾아가 김일손 등이 쓴 사초의 내용을 비밀리에 알렸다.[23] 도승지 신수근이 사관의 참여를 막았기 때문에[24] 사관이 배석하여 대화내용을 기록할 수 없었다.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이 많았던 연산군은 내용을 보고받은 직후 사초를 왕에게 올리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고 사건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3. 2. 이극돈과 유자광의 모의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사초 내용 삭제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19] 실록 편찬 후 사초는 파기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19] 이극돈은 사초를 유출하여 훈구파였던 유자광과 의논하였다.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들과 악연이 깊었다. 사림파 대간들은 유자광이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의 출세를 반대했고, 함양 학사루에 걸어 놓은 유자광의 시판을 김종직이 철거한 사건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20][21][22]유자광은 노사신, 윤필상 등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였다. 1498년 7월 1일, 이들은 연산군을 찾아가 김일손 등이 쓴 사초의 내용을 비밀리에 알렸다.[23] 도승지 신수근이 사관의 참여를 막아[24] 사관이 배석하여 대화 내용을 기록할 수 없었다.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불만이 많았던 연산군은 내용을 보고받은 직후 사초를 왕에게 올리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고 사건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1494년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한 후, 1495년 4월부터 춘추관 안에 실록청이 설치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1498년,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1]에 김종직이 세조의 정권 찬탈을 비판한 “조의제문”(조의제문한국어)과 자신에 대한 상소문을 발견한 당상관 이극돈은 그 사실을 훈구파의 실력자 유자광에게 상의했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연산군에게 상소했다.
3. 3.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세조 비판
김일손의 사초에는 세조가 신임한 승려 학조(學祖)가 술법으로 궁액(宮掖)을 움직이고, 세조의 총신이자 훈구파인 권람이 노산군의 후궁인 숙의 권씨의 노비와 전답을 취한 일 등 세조대의 불교 중흥책과 훈구파의 전횡을 비판한 글들이 있었다.[25] 또한 지난 계유정란(1453)때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고 황보인과 김종서는 절개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라 기록하고 이개, 박팽년 등 절의파의 행적을 긍정적 입장에서 기술하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세조가 인륜을 저버리고 며느리들을 탐했다고 의심할 만한 내용들도 있었다.[26]사초에는 기본적으로 세조의 업적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 정책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사림파의 입장이 담겨져 있었다.[25] 그 중에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김일손이가 사초에 실은 것을 발견하고 이를 크게 문제 삼았다.[27]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하여[28] 그 속뜻을 주석으로 달아 연산군에게 올렸다.[27] 《조의제문》은 진나라 말 숙부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으로, 이 글은 바로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를 들어 비판한 것이었다.
1494년 12월에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1495년 4월부터 “춘추관” 안에 실록청이 설치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었다.[1] 1498년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에, 그의 스승인 김종직이 세조의 정권 찬탈을 비판한 “조의제문”과 자신에 대한 상소문을 발견한 당상관 이극돈은 그 사실을 훈구파의 실력자 유자광에게 상의했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생전 김종직으로부터 그 정치적 태도를 엄하게 비판받고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연산군에게 상소했다.
3. 4. 사림파 숙청과 연산군의 폭정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 등을 능지처참하고,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거 유배시켰으며,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하였다.[29] 이 사건으로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사림파는 몰락하였다.[29]훈구파들은 김일손의 불충하고 불순한 행위가 그의 스승 김종직의 영향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사림파의 일망타진에 나섰다.[29] 유자광은 조의제문의 각 구절을 세조의 계유정난과 단종의 죽음에 빗대어 풀이하며, 김종직을 대역죄로 다스리고 그의 문집을 모두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3] 정문형 등도 조의제문을 보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8]
유자광은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자신의 시를 새긴 현판을 철거하고 불태운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42] 그는 무오사화를 주도하며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갚고, 사림파를 제거하려 하였다.[42]
4. 결과 및 영향
4. 1. 정치적 영향
4. 2. 언론 탄압과 표현의 자유
4. 3.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날짜는 음력이다.5. 현대적 해석 및 평가
참조
[1]
문서
조선왕조실록 편찬을 위한 사관의 왕의 언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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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戊午士禍]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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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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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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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를 읽는 33가지 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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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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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戊午士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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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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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 [金馹孫] - 직필(直筆)의 사관(史官), 사화(士禍)로 희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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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 [金馹孫] - 직필(直筆)의 사관(史官), 사화(士禍)로 희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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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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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 [柳子光] - 서자에서 일등공신에 오른 논쟁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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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제문 [弔義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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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 사초를 매개로 삼사에게 경고한 조선 최초의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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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 [金馹孫] - 직필(直筆)의 사관(史官), 사화(士禍)로 희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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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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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사초를 들여올 것을 명하니 이극돈 등이 일부를 절취하여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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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1일 을사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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