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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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미양요는 1871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일어난 군사적 충돌이다. 미국은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미군은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을 점령했지만, 조선의 척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전투에서 미군은 승리했으나, 조선은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했고, 이후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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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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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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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신미양요 |
부분 분쟁 | 한미 관계 |
시기 | 1871년 6월 1일 – 1871년 7월 3일 |
장소 | 강화도 |
결과 | 결정적인 결과 없음 |
관련 전투 | 강화도 전투 (1871년)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
교전국 2 | 조선 |
지휘관 | |
미국 | 존 로저스 윈필드 스콧 슐레이 휴 맥키 |
조선 | 어재연 어재순 |
병력 규모 | |
미국 | 650명 1척의 프리깃함 2척의 슬루프함 2척의 포함 |
조선 | 800명 40문의 포 6개의 요새 4개의 해안 포대 |
피해 규모 | |
미국 | 3명 사망 10명 부상 1척의 포함 손상 |
조선 | 243명 사망 (미국 추정) ~350명 사망 (조선 추정, 자살 포함 가능성 있음) 20명 포로 (이후 석방) 40문의 포획 5개의 요새 파괴 1개의 요새 손상 4개의 해안 포대 파괴 |
2. 명칭
신미양요는 1871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발생한 군사적 충돌로, 조선에서는 신미년에 서양(미국)과 벌인 전쟁 또는 소동이라는 의미로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부른다.[32] 반면 영어권 국가들은 이 사건을 미국 한국 원정(United States expedition to Korea) 혹은 간단히 한국 원정(Korean Expedition)이라고 부른다. 특히 미국에서는 1871년 한국 원정(Korean Campaign 1871)[33] 또는 1871년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이라고도 부른다.[34]
조선은 한국의 역사에서 외국과의 접촉 범위가 가장 좁었던 시대였다. 사대와 선린을 기반으로 중국, 일본 등 매우 제한적인 국가들과 외교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외교는 중국을 중심에 두는 상하 관계로서 인식되었다.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는 한편 이웃한 일본, 류큐, 섬라 등지의 외교 사절에 대해서는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으로 대하였다. 이때문에 17세기 이후 서양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나 이들을 대등한 외교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35] 정조 시기 신해박해 이후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여 여러 차례 박해가 있었다.[36] 1801년 황사영이 베이징 주재 프랑스 주교에게 천주교 포교를 위해 서양 군함 백 척과 수만 명의 병사를 보내달라고 쓴 편지가 발각되는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37] 이 사건 이후 조선은 외국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
3. 배경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 열강들은 아시아 각지를 탐험하고 통상을 앞세워 제국주의적인 침탈을 하고 있었다. 19세기 무렵 서양인들은 조선을 북극보다 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여겼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던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조선을 “자신이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너무나 깊은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외국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섬나라”라고 표현하였으며, “중국 해안에서 증기선을 타고 하루 안에 닿는 이곳에서 …… 반야만적인 정부가 자국 백성의 소원에 반해 ‘출입금지’ 문구를 써 붙이고 전체 문명세계에 도전”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38]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은 여러 차례 조선의 통상 개방을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선은 아편 전쟁의 결과 청나라가 쇠퇴하고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에서 방화를 일삼는 가운데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 해안 방어를 강화하였다.[39] 1866년 9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하여 정족산성의 외규장각을 약탈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40]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가 서양 열강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판단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40], 비변사를 혁파하고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여 군비 강화를 꾀했다.
1871년 미국 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하기로 결정하고 주청 미국 공사 프레더릭 로의 지휘 아래 5척의 군함을 파병하였다.[45] 외교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조선 침공을 강행하였고 《뉴욕 헤럴드》는 “이교도들과의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45] 미국은 프랑스 신부 리델을 길잡이로 삼아 5척의 군함과 1,200여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강화도 앞 물치도에 함대를 정박시킨 미군은, 음력 4월 23일 초지진을 공격하였다.[31]
3. 1.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은 신미양요에서의 승리를 통해 조선이 협상에 나설 것을 기대했지만,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이 사건은 오히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강화하고, 외국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반대하는 여론을 불러일으켰다.[20] 조선은 곧바로 더 현대적인 무기로 무장한 대규모 증원군을 보내 미군과 대치했다. 불리한 상황을 인지한 미국 함대는 결국 7월 3일 중국으로 철수했다.[21]
이후 외국 선박에 대한 공격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1876년, 일본 선박이 강화도에 접근하여 서울 공격 위협을 가하자, 조선은 일본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유럽 국가 및 미국과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3. 2. 미국의 초기 접촉 시도
1866년 말 로버트 슈펠트[41]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진상 조사와 거문도의 해군 기지 설립 조사를 지시받고 조선으로 향했다. 슈펠트를 태운 와츄세트호는 음력 병인년 12월 18일(양력 1867년 1월 23일) 황해도 장연 앞 바다에 정박하였는데, 이들이 그곳을 대동강 하구로 오인하였기 때문이다. 슈펠트는 최대한 존대하며 통상을 희망하는 문서를 조선 조정에 보냈으나, 조선은 비록 화목을 구한다고 하나 속 뜻을 알기 어렵다는 이유로 장현 현감에게 슈펠트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지시하였다.[42] 1867년 미국은 군함 새넌도어 호를 보내 다시 한번 셔먼호의 생존 선원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였고, 조선은 이미 생존 선원이 없다는 답변을 하였다. 새넌도어 호는 처음에는 대포를 쏘며 무력시위를 하였으나 조선 역시 새넌도어 호의 종선에 총을 쏘며 완강히 저항하자 별다른 소득없이 철수하였다.[43] 1868년 페비거는 셔먼호의 생존 선원 석방을 위한 특사 파견과 새넌도어 호의 종선에 총격을 가한 사건에 대한 사과와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조선 정부의 답신이 없으면 미국 군함이 다시 올 것이란 협박을 남겼다.[44]
3. 3. 미국의 외교적 노력과 조선의 대응
1870년 프레더릭 로는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로 부임한 뒤 미 해군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와 원정 계획을 수립하였다. 로는 청나라의 총리아문을 통해 조선에 사전에 자신들의 목적을 통지하도록 하였다. 1871년 음력 1월 17일에 발송된 편지에서 로는 자신을 “대아미리가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흠명출사조선지공사(欽命出使朝鮮之公使)”로 소개하며 미국의 요구사항을 조선 조정에 전달하였다. 편지에 적힌 주요 내용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한 자국 선박의 항해 안전 보장과 일본의 예와 같은 통상조약의 체결이었다. 그는 편지 말미에 “화친을 구하는데도 갖은 방법으로 거절하면 불목을 부를 것이니 또 누구를 탓하겠는가”라며 무력 사용을 협박하기도 하였다.[46] 편지를 받은 조선은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기로 하였고,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평안감사였던 박규수가 답신을 보냈다. 박규수는 《미국봉합전체자》(美國封函轉遞咨)에서 “위험에 빠진 선원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고, 셔먼호는 경계를 무단 침범하여 발생한 일이란 것을 누차 해명하였는데 이제와서 다시 문제를 삼는 까닭을 모르겠다. 미국 상선이 우리나라 사람을 먼저 능멸하지 않았다면 조선 관민이 어찌 먼저 남에게 능멸을 가하겠는가”라고 오히려 미국의 잘못을 지적하였고,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우리는 중국의 번국이니 사대를 하는 신하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외교를 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47] 박규수의 이러한 답신은 흥선대원군과 박규수가 이 시기에 쇄국론과 개국론으로 대립했다는 통설과 달리 사실은 긴밀히 협조해 미국과의 분쟁에 대처했다는 새로운 평가의 근거가 되었다.[48]
4. 전투
1871년 5월 16일,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는 기함 USS 콜로라도를 비롯한 전함 5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였다. 미군 함대는 아산만 풍도 앞에 정박하고 작은 배에 병력을 나누어 강화도 인근을 정탐하였다.
4. 1. 조선의 방어 준비
조선 조정은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 군함이 올 것이라는 예고를 받았기 때문에 답변을 보내지 않고 교전을 준비하였다. 미국 군함이 영종도에 이르자 사람을 보내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미군은 직급이 낮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53] 1871년 6월 1일,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은 강화도에 군사와 군량을 보내기로 결정하고,[54] 어재연을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하여 방어하게 하였다.[55]4. 2. 강화 해협 전투
6월 1일, 미국 함대 중 두 척이 손돌목을 지나자 조선군이 대포로 포격하였다. 미국 군함은 응사하며 빠르게 빠져나갔다.[56] 미군은 손돌목의 포격을 빌미로 강화도를 공격하였다.[57]6월 2일 광성진 앞 염하에 집결한 미군 함대가 포격을 개시하였다. 포격을 마친 함대는 남하하여 손돌목을 지날 때 또다시 포격을 가하였다.[61] 조선도 응사하여 미국 함선 일부가 파손되었으나,[62] 미국 함대의 피해는 경미하였다.[63]
몇 차례의 포격전이 있은 후 상호 교섭을 시작하였다. 미국 측 로우 공사가 해변에 편지를 쓴 장대를 꽂아두면 조선 측이 이를 읽은 후 답신하였다. 미국은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였고, 진무사(鎭撫使) 정기원은 미국의 손돌목 침입이 불법이며 조선은 다른 나라와 교섭하지 않으니 즉시 물러가라 답신하였다. 미군은 물치도로 물러가며 2-3일 안에 답신이 없을 경우 공격할 것이란 최후 통첩을 남겼다.[64]
6월 10일 미군은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군함 2척의 지원을 받으며 24척의 종선에 나누어 탄 651명의 병력이 상륙하였고, 초지진을 수비하던 조선군이 백병전을 벌이며 저항하였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패퇴하였다.[65] 6월 11일 미군은 대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으며, 조선군은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화력 열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남기고 덕포진으로 패퇴하였다.[66]
미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미군 기함 콜로라도호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군 함선에 승선했을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으며, 미군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지자 살해되었다고 대답하였다. 미국 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광성보 전투에서 보복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67]
8시간가량 치러진 이 전투에서 조선 측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 미군은 광성진의 관아를 불태우고 초지진을 거점으로 삼아 주둔하였다.[68] 한편, 고종실록은 이날 전투의 사상자를 전사 53명, 부상 2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69]

4. 3. 전력
미국 원정대는 5척의 군함, 500명 이상의 해군과 100명의 해병을 포함하여 총 65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5]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의 지휘 아래 있었다.[6]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문의했으나, 조선은 보상을 피하려 했다. 미국은 탐사 의도만 있음을 알렸지만, 조선은 외국 선박의 한강 항해를 금지했기 때문에 미국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항해를 강행했다.[8]
6월 1일, 조선 요새는 강화도 해협으로 항해하는 미국 함대에 발포했다. 조선군의 포격은 제대로 조준되지 않아 미국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9] 미국은 10일 이내에 사과를 요구했지만, 응답이 없자 요새에 대한 공격을 결정했다.[7]
4. 3. 1. 미군
미국은 500명 이상의 선원과 100명의 해병대로 구성된 650명의 병력과 콜로라도, 알래스카, 팔로스, 모노캐시, 베네시아 다섯 척의 전함을 준비했다.[58] 기함에는 해군 소장 존 로저스와 주청 미국 공사 프레더릭 로가 탑승해 있었다.[59][60]함선 종류 | 함선 이름 | 비고 |
---|---|---|
기함 | 콜로라도 | 존 로저스 제독, 프레더릭 로 주중 미국 대사 탑승[6][7] |
전함 | 알래스카 | |
전함 | 팔로스 | |
전함 | 모노캐시 | |
전함 | 베네시아 |
4. 3. 2. 조선군
어재연 장군이 "호랑이 사냥꾼"으로 알려진 조선군을 이끌었다.[6] 조선군은 조총, 대포, 회전식 후장총 등 구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4. 4. 피해
조선 측에서는 어재연 중군을 비롯한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전사했다. 미군 측에서는 휴 맥키 해군 대위(중위)를 포함하여 3명이 전사했다.[26]4. 4. 1. 조선
조선군 주요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이름 | 직책 |
---|---|
어재연 | 중군 |
어재순 | 어재연의 동생 |
이현학 | 대솔군관 |
임지팽 | 겸종 |
김현경 | 천총 |
박치성 | 광성진 별장 |
유예준 |
4. 4. 2. 미국
미군 주요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계급 | 이름 | 비고 |
---|---|---|
해군 대위 (중위) | 휴 맥키 | 조선군이 유일하게 사살 |
견습수병 | 불명 | 아군 오사 및 실족사 |
해병상병 | 제임스 도허티 | 아군 오사 및 실족사 |
6월 10일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공격했고, 6월 11일에는 광성진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26]
5. 전투 이후
광성보 전투 후에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70] 어재연이 전사하자 조선은 김선필을 진무중군으로 임명하고[71] 초지진에 주둔한 미군을 야간에 기습하였다.[72] 미군은 사방이 포위된 진지를 버리고 퇴각하였는데, 애초의 제한적 공격이 목표를 달성하였다는 판단과 염하를 항해하며 다수의 전함이 암초에 부딪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73] 미군은 물치도로 퇴각하여 20일 동안 포로 석방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였다.[68] 조선 조정은 어재연을 병조판서에 추증하는 등 전사자를 추증하고 공적을 세운 사람들을 표창하였다.[74] 한편 초지진과 광성진의 불탄 민가에 대한 구제조치를 취하였다.[75]
전투 이후 조선은 미군과의 접촉 담당을 강화부 진무사에서 부평부사 이기조로 바꾸었다. 부평부사는 격렬한 어조로 미국을 비난하면서 결사 항전의 뜻을 전했다.[77] 이러한 상호 교신 이후 조선과 미군은 교신을 중단하였고, 미군은 더 이상 협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포로를 자진 석방한 뒤 철수하였다.[68]
6. 영향과 평가
신미양요는 미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결사 항전하여 서양의 배(이양선)를 몰아낸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일본이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였다.[78] 미국은 참전한 9명의 수병과 6명의 해병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하였다.[79]
미국의 이러한 함대 재편과 조선 침공은 미국도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외 팽창 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조선 백성들의 서양에 대한 반감(배외 감정)만 더욱 높이게 되었다.[80]
7. 기록
신미양요 당시 인천도호부 부사였던 구완식의 조카 구연상은 서울에서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있다가 이양선이 출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에 가서 머물며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를 작성하였다. 《소성진중일지》에는 조선의 방비 태세와 미국 해군의 동향을 관찰한 것이 자세히 적혀있다.[82] 일지에 따르면 조선은 4월 5일 이양선이 출몰하였다는 경기감영의 장계가 보고된 이후 해안 경계를 강화하였고, 4월 12일 호도 앞 바다에 정박한 미군 함대에 역관을 보내 출몰 이유를 물었다. 미군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청나라 사람과 조선의 역관이 대화를 하였으며, 미국 측은 “미국 정1품 제도독(提都督) 흠차대신(欽差大臣)[83] 누비적(鏤斐迪)[84] 이 멀리서 온 일은 조선국의 대관이 온 후에 말하겠다”하고 더 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이후 조선은 남양, 인천, 영종, 강화 등지에 불랑기포, 쇠뇌, 대연환(大鉛丸) 등의 무기를 보내는 한편, 어재연을 진무중군으로 임명하여 방어케 하였으나 광성보에서 전몰한다. 《소성진중일지》에는 이후 미군이 물러갈 때까지 부평도호부가 미국과 서신을 주고 받은 내용과 대원군의 척화 의지 표명 등이 실려 있다.
미군은 공식 보고서와 펠리체 베아토의 사진 촬영을 통해 기록을 남겼고[85], 이 외에도 참전 군인 윌리엄 그리피스 등의 기록과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피스는 광성보 전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45]
: 흰옷을 입은 243명의 시체가 성채 안과 주변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는 다 밖으로 튀어나온 흩어진 솜 갑옷을, 아홉 겹으로 솜을 두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중에 진동했다. …… 어떤 부상자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미국인 체포자들을 더 끔찍이 두려워하며 서서히 불에 타 죽어 갔다. ……
7. 1. 조선측 기록
신미양요 당시 인천도호부 부사였던 구완식의 조카 구연상은 서울에서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있다가 이양선이 출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에 가서 머물며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를 작성하였다. 《소성진중일지》에는 조선의 방비 태세와 미국 해군의 동향을 관찰한 것이 자세히 적혀있다.[82] 일지에 따르면 조선은 4월 5일 이양선이 출몰하였다는 경기감영의 장계가 보고된 이후 해안 경계를 강화하였고, 4월 12일 호도 앞 바다에 정박한 미군 함대에 역관을 보내 출몰 이유를 물었다. 미군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청나라 사람과 조선의 역관이 대화를 하였으며, 미국 측은 “미국 정1품 제도독(提都督) 흠차대신(欽差大臣)[83] 누비적(鏤斐迪)[84] 이 멀리서 온 일은 조선국의 대관이 온 후에 말하겠다”하고 더 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이후 조선은 남양, 인천, 영종, 강화 등지에 불랑기포, 쇠뇌, 대연환(大鉛丸) 등의 무기를 보내는 한편, 어재연을 진무중군으로 임명하여 방어케 하였으나 광성보에서 전몰한다.《소성진중일지》에는 이후 미군이 물러갈 때까지 부평도호부가 미국과 서신을 주고 받은 내용과 대원군의 척화 의지 표명 등이 실려 있다.
7. 2. 미군측 기록
미군은 공식 보고서와 펠리체 베아토의 사진 촬영을 통해 기록을 남겼고[85], 이 외에도 참전 군인 윌리엄 그리피스 등의 기록과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피스는 광성보 전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45]: 흰옷을 입은 243명의 시체가 성채 안과 주변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는 다 밖으로 튀어나온 흩어진 솜 갑옷을, 아홉 겹으로 솜을 두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중에 진동했다. …… 어떤 부상자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미국인 체포자들을 더 끔찍이 두려워하며 서서히 불에 타 죽어 갔다. ……
8. 사적의 정비
1976년 대한민국 정부는 광성보 등 강화도의 전적지를 복원, 보수하였다.[86]
9. 어재연 장군기
어재연 장군기(帥자기)는 전리품으로 강탈된 후 미국 애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2007년 10월 18일 한국에 장기임대 형태로 반환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를 거쳐, 현재는 강화박물관에서 장기 전시되고 있다.[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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