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요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숭은 당나라의 재상으로, 650년에 태어나 721년에 사망했다. 측천무후 시대에 거란의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으로 발탁되었고, 현종 시대에는 개원의 치를 이끄는 데 기여했다. 그는 국방, 행정, 재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특히 현종에게 10가지 건의를 통해 개혁을 추진했다. 뇌물 수수 혐의를 받은 측근을 옹호하다 재상에서 물러났지만, 현종은 그에게 국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요숭은 검소한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능력 있는 재상과 검소한 삶의 태도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721년 사망 - 겐메이 천황
    겐메이 천황은 덴지 천황의 딸이자 몬무 천황의 어머니로서, 손자 쇼무 천황을 위해 황후의 지위 없이 즉위하여 섭정으로 통치하며 와도개천 주조, 헤이조쿄 천도, 《고사기》 헌상 등의 업적을 남긴 일본 역사상 중요한 여성 통치자이다.
  • 721년 사망 - 킬페리쿠스 2세
    킬페리쿠스 2세는 메로빙거 왕조 출신의 프랑크 왕으로, 715년부터 721년까지 재위했으며, 카를 마르텔과의 대립에서 패배하여 아키텐으로 피신했다가 사망 후 테우데리크 4세가 후계자가 되었다.
  • 싼먼샤시 출신 - 고계흥
    고계흥은 오대 십국 시대에 형남 절도사로 활동하며 후량, 후당, 오나라에 복종하며 세력을 유지했고, 형남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말년에 후당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928년에 사망했다.
  • 싼먼샤시 출신 - 장쯔펑
    장쯔펑은 아역 모델로 데뷔하여 영화 《탕산 대지진》에서 어린 주인공 역할을 맡아 백화장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후, 《치파의 편지》로 금마장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하며 CCTV 선정 '연기파 신세대 4대 여배우' 및 포브스 선정 '중국 유명인 랭킹'과 '30세 이하 엘리트'에 이름을 올린 중국 배우이다.
  • 당 현종 때의 재상 - 양국충
    양국충은 당나라 현종 시기에 양귀비의 친척으로서 현종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렸으나, 안록산과의 갈등을 심화시켜 안사의 난을 초래하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국정 실패로 만고의 역적으로 평가받다가 살해당한 권신이다.
  • 당 현종 때의 재상 - 장열
    장열은 당나라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측천무후부터 현종 시대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며 세 번 재상을 지냈고, 태평공주 제거와 군사 제도 개혁에 기여했으며, 문장에도 능했던 인물이다.
요숭
기본 정보
이름요숭
원지
시호문헌(文獻)
봉작양국공(梁國公)
출생650년경
사망721년 10월 28일
시대당나라
관력
주요 활동정치가
주요 관직병부상서
중서령
상서우복야
집정
가족 관계
아버지요사렴(姚沙廉)
요안례(姚安禮)
아들요이손(姚弈孫)
요담(姚澹)
요향(姚向)
요계(姚係)
손자요여능(姚如能)
요여등(姚如登)
요여권(姚如權)
기타
특기 사항구당서, 신당서에 열전이 있다.

2. 생애

요숭은 696년부터 697년에 걸쳐 거란이 침입했을 때, 국방부에서 근무하며 긴급 서류가 많았음에도 효율적으로 공무를 수행하고 유용한 의견을 제시하여 측천무후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3] 698년, 적인걸의 추천으로 ''동봉각난대평장사''(同鳳閣鸞臺平章事) 직함을 받아 사실상 재상이 되었다.

중종 복위 후 호주(亳州), 상주(常州) 등지의 자사로 잠시 물러났으나,[1] 예종 때 복직했다.[1] 이후 태평공주와 대립하다 신주(申州)자사로 좌천되었다.[1]

712년, 현종이 즉위하자 병부상서 동평장사로 발탁되어 양국공에 봉해졌다.[4] 요숭은 현종에게 다음과 같은 10가지 건의를 올렸다.[4]


  • 무후 시절의 가혹한 형벌과 법령 폐지
  • 변방에서의 전쟁 중지 및 병사 휴식
  • 법의 공평한 집행, 황친과 백성을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대우
  • 환관에게 정치 위임 금지
  • 불필요한 세금 감면 또는 폐지
  • 황족, 외척의 대성(臺省) 관리 임명 금지 및 외척의 정치 관여 제한
  • 천자가 예를 갖추어 현명한 자를 맞이하고 겸허하게 간언 수용
  • 도관이나 절을 더 짓지 말고 궁전 건축도 줄일 것


또한 승려를 가장한 자 12,000여 명을 환속시켰다.[4]

요숭은 경험이 풍부하고 대처가 빠르며 군사에 대한 지식이 많아 현종의 신임을 받았다.[4] 그러나 716년 뇌물 수수 혐의를 받던 막료 조매(趙誨)를 옹호하다 현종의 뜻을 거슬려 재상직을 사임하였다.[5] 재상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현종은 국사에 대한 자문을 요숭에게 구했다.[4]

2. 1. 출생과 초기 관직 생활

650년 섬주(陝州) 협석현(硤石)에서 요의(姚懿, 요선의姚善意)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의는 태종 때 지방관을 지낸 인물로, 요숭은 아버지의 음덕으로 복주(濮州)사창(司倉)의 직무를 맡으며 처음으로 관직에 들어섰다. 이후 고종의 태자 (弘)의 비서관을 거쳐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 있던 696년부터 697년에 걸쳐 거란의 침공에 적절히 대응하였고, 그 정무 처리 능력을 높이 산 측천무후는 그를 시랑, 698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발탁했다.

요숭은 글을 빠르게 쓰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복주(濮州, 대략 현대의 허쩌시, 산둥성)의 식량 공급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다섯 번이나 자리를 옮겼고, 결국 병부의 하급 관리인 하관 낭중(夏官郎中)이 되었다.[1]

2. 2. 측천무후 시대

696년부터 697년에 걸쳐 거란이 침입했을 때, 요숭은 국방부에서 근무하며 긴급 서류가 많았음에도 효율적으로 공무를 수행하고 유용한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 측천무후는 그를 국방부 부장관(夏官侍郎)으로 파격 승진시켰다.[3]

697년, 측천무후의 비밀경찰 관리였던 래준신이 모반 혐의로 많은 관리를 모함하여 처형한 뒤 자신도 처형되자, 측천무후는 래준신의 죽음 이후 모반 혐의에 대한 보고를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요숭은 래준신을 비롯한 비밀경찰 관리들이 허위 혐의를 제기해 왔으며, 앞으로는 모반 혐의 보고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요숭의 발언에 만족한 측천무후는 그에게 돈을 하사했다.

698년, 적인걸의 추천으로 측천무후는 요숭에게 ''동봉각난대평장사''(同鳳閣鸞臺平章事) 직함을 수여하여 사실상 재상으로 삼았다.

702년, 측천무후는 동돌궐 정벌을 계획하고, 자신의 아들 이단 양왕을 군 사령관으로, 무삼사 양왕, 무우녕 건창왕, 재상 위원충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요숭은 이단의 비서실장으로 원정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원정은 실행되지 않았다. 이 무렵, 주(周)나라에 반기를 든 찰리원숭(Zhali Yuanchong)이라는 돌궐 족 추장이 있었는데, 측천무후는 요숭이 찰리와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을 원치 않아 그의 자(字)인 원지(元之)를 사용하도록 했다.

704년, 요숭은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했다. 그해 여름, 측천무후는 그를 이단의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면서도 3품 관료(즉, 재상)와 같은 봉급과 권한을 부여했다.[3]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측천무후는 그를 다시 국방부 장관(夏官尚書) 겸 사실상 재상으로 임명하고, ''동봉각난대삼품''(同鳳閣鸞臺三品)이라는 더 높은 직함을 내렸다. 그러나 요숭은 국방부 장관직을 거절하며, 이단을 섬기는 동안 군대를 지휘하면 이단에게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측천무후는 그를 예부 상서(春官尚書)로 임명했다.

이 무렵,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던 장이지는 10명의 고위 불교 승려들을 자신이 정주(定州, 현재의 바오딩, 허베이성)에 건설한 사찰로 옮기려 했다. 승려들이 이를 원치 않아 장이지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요숭에게 청원하자, 요숭은 승려들이 갈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에 장이지는 측천무후에게 요숭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요숭은 재상직은 유지했지만 사복경(司僕卿)으로 강등되었다. 얼마 후, 측천무후는 요숭에게 재상직을 유지하면서 영주의 군 지휘관을 맡겼는데, 이는 동돌궐 정벌을 다시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숭이 영주로 떠나기 전, 측천무후는 그에게 재상으로 적합한 인물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고, 요숭은 장간지를 추천했다. 측천무후는 장간지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705년 봄, 요숭이 여전히 낙양에 머무르는 동안 측천무후가 병에 걸려 국사가 대부분 장이지와 그의 형제 장창종에 의해 결정되었다. 장이지와 장창종이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장간지는 최현위, 경휘, 환언범, 원서기 등 다른 관리들과 이다조, 이단(李湛, 이단의 자는 다름) 등 장군들과 함께 쿠데타를 계획했다. 영주에서 돌아온 요숭에게 장간지와 환언범은 이 계획을 알렸고, 요숭도 이에 합류했다. 곧 쿠데타가 실행되어 장이지와 장창종은 살해되었다. 측천무후는 여전히 황제 칭호를 유지했지만, 아들 이현 태자(전 황제)에게 양위해야 했고, 이현은 중종 황제로 복위했다. 요숭은 쿠데타에 참여한 공로로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졌다.

2. 3. 중종, 예종 시대

장간지에 의해 중종이 복위되었을 때, 요숭은 잠시 호주(亳州), 상주(常州) 등지의 자사로 물러났다.[1] 하지만 예종 때 다시 복직하였다.[1] 이후 태평공주와 대립하다 다시 실각해 신주(申州)자사로 좌천되었다.[1]

710년, 중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그의 죽음이 부인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 이과아에 의해 독살된 것이라고 믿었다. 위황후가 측천무후처럼 "황제"가 되고, 이과아는 태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3] 그러나 당시에는 중종의 후궁 소생 아들 이충모가 문왕으로 즉위하여 상황제가 되었고, 위황후는 황태후이자 섭정이 되었다. 한 달도 채 안 되어, 중종의 여동생 태평공주와 이단의 아들 이융기 린자왕이 이끄는 쿠데타로 위황후와 이과아가 살해되었다. 상황제는 폐위되었고, 전 황제였던 이단이 다시 황제가 되었다(예종으로 즉위).[3] 예종은 당시 서주 자사로 있던 요원지를 불러들여 중앙 정부의 국방부 장관(병부상서)으로 임명하고, 재상 직함인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을 제수했다.[3]

요원지는 또 다른 재상 송경과 함께 중종 재위 기간의 문제적인 정책을 종식시키는 데 집중했는데, 여기에는 문관 제도의 개혁과 조정의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쳐 부당하게 관직을 얻은 관리들의 제거가 포함되었다. 특히 그와 송경이 바로잡으려 한 폐단 중 하나는 중종이 칙령을 검토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검토 기관인 문하성의 검토 없이 수천 명의 관리를 임명한 것이었는데, 예종은 그들의 요청에 따라 이 관리들을 관직에서 해임했다. (중종은 칙령을 검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칙령을 담은 봉투를 기울여 봉했기 때문에, 이 관리들은 "사봉관"(斜封官)으로 알려졌다.)[3] 그해 말, 요원지는 입법 기관(중서성)의 수장이자 재상에게 주어지는 직책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3]

한편, 이융기는 예종의 맏아들이 아니었고, 사망한 유황후의 소생도 아니었지만, 위황후에 대항한 쿠데타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예종의 즉위 이후 황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치 문제로 숙모인 태평공주와 자주 충돌했고, 태평공주는 이융기가 황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을 퍼뜨리려 했으며, 유황후 소생의 맏형 이성기나 그의 사촌 이수례(예종의 형 이현의 아들, 중종과는 다른 인물)이 황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 711년, 송경과 요원지는 정치적 불안정을 종식시키기 위해 이성기와 이수례를 수도 장안에서 벗어나 지방 자사로 임명하고, 태평공주와 그녀의 남편 오유기(무측천의 조카)를 동쪽 수도 낙양에 정착하도록 제안했다. 예종은 태평공주의 정착 장소를 제외한 나머지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녀를 낙양 대신 더 가까운 산시성 윈청 부근의 보주(蒲州)로 보냈다). 그러나 태평공주가 이를 알게 되자 이융기에게 격렬하게 불만을 제기했고, 이융기는 두려움에 떨며 공개적으로 명령을 철회하고 송경과 요원지가 숙모, 형제, 사촌과의 관계를 이간질했다는 이유로 처형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예종은 명령을 취소하고 송경과 요원지를 지방 자사로 강등시켰다. 요원지의 경우, 허난성 신양 부근의 신주(申州) 자사가 되었다.[3]

2. 4. 현종 시대

712년 황태자 였던 이융기(李隆基, 훗날 현종)가 태평공주를 제거하고 즉위한 후, 요숭은 현종에게 발탁되어 병부상서 동평장사가 되었고 양국공에 봉해졌다.[4]

이후 요숭은 현종에게 다음과 같은 10가지 건의를 올렸다.[4]

  • 무후 시절의 가혹한 형벌과 법령 폐지
  • 변방에서의 전쟁 중지 및 병사 휴식
  • 법의 공평한 집행과 황친, 백성을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대우
  • 환관에게 정치 위임 금지
  • 불필요한 세금 감면 또는 폐지
  • 황족 또는 외척의 대성(臺省) 관리 임명 금지 및 외척의 정치 관여 제한
  • 천자가 예를 갖추어 현명한 자를 맞이하고 겸허하게 간언 수용
  • 도관이나 절을 더 짓지 말고 궁전 건축도 줄일 것


요숭은 또한 승려를 가장한 자 12,000여 명을 환속시켰다.[4]

요숭은 경험이 풍부하고 대처가 빠르며 군사에 대한 지식이 많아 현종의 신임을 받았다.[4]

그러나 716년 뇌물 수수 혐의를 받던 휘하 막료 조매(趙誨)를 옹호하다 현종의 뜻을 거슬려 재상직을 사임하였다.[5] 재상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현종은 국사에 대한 자문을 요숭에게 구했다고 한다.[4]

3. 평가

요숭은 송경과 함께 「개원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세를 이끈 공로자로 평가받는다. 《자치통감》에서는 요숭이 임기응변을 중시한 반면, 송경은 법규를 엄격하게 적용했다고 평가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향에도 불구하고 상호 보완하며 개혁을 추진했다. 요숭은 조매 비호 사건으로 재상에서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송경을 추천했다.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두 사람의 열전이 함께 실려 있으며, 당 태종 시기 「정관의 치」를 이끈 두여회방현령에 비견되어 '요송'으로 불렸다.

요숭은 현종 즉위 후 세 번째로 재상에 올라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사치 방지, 형벌 개혁, 조세 감면, 모병제 폐지 등을 통해 민생 안정을 도모했고, 그 결과 호구 증가와 산업 발전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업적은 송경과의 협력을 통해 가능했으며, 후대 역사가들은 이들을 방현령두여회에 빗대어 "요송"이라 칭송했다.

요숭과 송경의 관계는 현대 한국 정치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보와 보수, 개혁과 안정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인들이 상호 협력하여 국가 발전을 이끄는 모습은 이상적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송경과 같은 합리적인 보수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더욱 성숙한 정치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4. 일화

요숭은 뛰어난 능력과 현명한 판단으로 여러 일화를 남겼다.

개원 3년(715년) 산동 지역에 누리(메뚜기) 피해가 발생했을 때 요숭은 적극적인 대처로 백성을 구휼했고, 장열과의 관계에서는 현명한 처세로 자손들을 보호했다. 또한, '반식재상'(伴食宰相) 고사는 요숭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이다.[10] 이러한 일화들은 요숭의 성품과 능력을 잘 보여준다.

4. 1. 누리(메뚜기) 퇴치

개원 3년(715년) 6월, 산동(山東) 지역에 누리(메뚜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관리들은 누리 피해를 하늘의 재앙으로 여겨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숭은 누리를 잡아 죽여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10] 요숭은 적극적으로 누리 살포 계획을 추진하여 들에 불을 놓거나 파묻는 방식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전국에서 잡아들인 누리는 9백만 마리에 달했다고 한다.[10]

716년에 다시 메뚜기 떼가 발생하자, 요숭은 메뚜기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변주(汴州, 현재의 카이펑) 태수 니약수(倪若水)는 이 명령에 반대하며, 권력자들이 덕을 쌓아야 메뚜기를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황제의 감찰관이 변주에 들어가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에 요숭은 니약수에게 다음과 같은 공식 명령을 내렸다.

이후 니약수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요숭의 명을 따랐다.

4. 2. 장열과의 관계

장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속이 좁고 성질이 급한 장열이 죽은 뒤 자신의 자손에게 해를 끼칠까 걱정한 요숭은 아들들에게 자신의 영전에 옥으로 만든 기물을 놓아두었다가, 장열이 문상을 와서 그것에 눈독을 들이면 그 기물을 주면서 요숭의 비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라고 일렀다. 그렇게 하면 큰 화는 면할 수 있을 것이지만, 만약 장열이 옥 기물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면 곧장 장안을 떠나 지방으로 가서 숨어 살라고 명했다. 평소 재물에 욕심이 많았던 장열은 요숭의 영전에 놓인 옥 기물에 눈독을 들였고, 요숭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 기물을 바치면서 장열에게 아버지 요숭의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장열은 그 말대로 요숭의 비문을 지어주었다. 이후 집권한 장열은 이미 죽은 요숭을 칭송하는, '여덟 개의 기둥이 하늘로 치솟아'(八柱承天)로 시작하는 온갖 미사여구로 된 비문을 직접 지었다. 그 내용을 황제 현종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널리 다 알았기에, 요숭의 자손에게 해를 끼쳐봤자 결국 자신에게 그 욕이 다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끝내 요숭의 자손에게 해를 끼치지 못했다고 한다.[10]

4. 3. 반식재상(伴食宰相)

요숭이 자리를 비우게 되어 황문감(黄門監) 노회신이 정무를 대행하게 되었는데, 요숭에 비해 재결도 늦고 업무 처리도 깔끔하지 못해 중요한 업무가 지체되는 일이 많았다.[10]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노회신을 요숭보다 능력도 처지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회식이나 하는 대신이라며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고 비웃었다.[10] (단, 노회신 본인은 이러한 야유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10] 오늘날까지 능력과 실권이 부족한 대신을 '''반식 대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

5. 가족

요숭에게는 왕씨, 정씨, 유씨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1] 세 아들 요이(姚彝), 요이(姚异), 요이(姚弈)와 딸 요씨 부인이 있었다.[1]

5. 1. 부인

부인
왕씨
정씨
유씨


5. 2. 자녀

배우자자녀비고
왕씨 부인 (女王氏)요이(姚彝)장남, 716년 사망
정씨 부인 (夫人鄭氏)요이(姚异)차남
유씨 부인 (夫人劉氏)
불명요이(姚弈)삼남
불명요씨 부인(姚氏)


6. 기타

716년 휘하 막료 조매(趙誨)가 뇌물 수수 혐의를 받자 그를 옹호하다가 현종의 뜻을 거슬러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낙양(洛陽) 자혜방(慈惠坊)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근신하였는데, 현종은 그 후에도 늘 사람을 시켜 국정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721년 9월 3일(정미)에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허난 이천현(伊川县) 팽파향(彭婆鄕) 허영촌(许营村) 북쪽에 있다.[1]

참조

[1] 서적 Jiu Tang Shu
[2] 서적 Jiu Tang Shu
[3] 서적 New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4] 서적 New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5] 웹사이트 漢川草廬-二十四史-新唐書-卷七十四‧表第十四 http://www.sidneyluo[...] 2009-03-13
[6] 문서 本来元之は彼の字であったが、[[突厥]]の叱列元崇が背いた際に、武則天の命で同表記の「元崇」を避けて元之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7] 문서 玄宗が即位し元号を「開元」と改元した際に、「元」の字を避けて姚崇とした。
[8] 문서 이 이름은 원래는 요숭 본인의 자(字)였는데 [[돌궐]](突厥)의 질열원숭(叱列元崇)이 배신하자 측천무후의 명으로 「원숭」이라는 이름을 피해 원지로 불렸다고 한다.
[9] 문서 현종의 연호 「개원」의 한 글자 「원」을 피해서 고친 이름이다.
[10] 서적 착점 - 인생의 한 수 어디에 둘 것인가 에버리치홀딩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