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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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검모잠은 《구당서》에 기록된 인물로, 고구려 멸망 후인 670년 4월 궁모성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신라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보호를 요청했으나, 신라 문무왕의 명으로 금마저에 정착하게 된 시점을 전후하여 안승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3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고구려 남부 지역이 신라에 항복한 시점에 활동했으며, 드라마 《삼국기》, 《연개소문》, 《대조영》 등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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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모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검모잠 |
한자 표기 | 劍牟岑 |
로마자 표기 | Geom Mojam |
기본 정보 | |
본명 | 검모잠(劍牟岑)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수림성 |
사망일 | 670년 |
사망지 | 미상 |
매장지 | 미상 |
국적 | 고구려 |
가문 | 미상 |
가족 정보 |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부친 | 미상 |
모친 | 미상 |
관직 정보 | |
관직 | 대형(大兄) |
주군 | 보장왕, 보덕왕 |
전임자 | 초임 |
후임자 | 미상 |
군사 정보 | |
소속 | 고구려 부흥군 |
복무 | 고구려군 |
지휘 | 고구려 부흥군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고구려-당 전쟁, 고구려 부흥운동 |
2. 생애
《구당서》에는 겸모잠(鉗牟岑)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림성(水臨城) 출신인 그는 고구려 멸망 2년 후인 670년 궁모성(窮牟城)에서 군사를 일으켜 부흥운동을 시작했다.[3]
신라의 도움으로 압록강을 넘어 요동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나, 당나라 군대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했다. 검모잠 세력은 패강 방면으로 이동하며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을 죽였다. 이후 서해 사야도(史冶島)에서 고구려 왕족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4] 황해남도 한성(漢城)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신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신라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金馬渚)에 정착하게 했다.[2] 이 무렵 검모잠은 안승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검모잠이 군사를 일으킨 668년에서 670년 사이, 고구려 남부 지역은 신라에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2. 1. 고구려 부흥운동
《구당서》 고종본기에는 '''겸모잠(鉗牟岑)'''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림성(水臨城) 사람이라고만 알려진 그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2년이 지난 670년(경오년, 당 고종 함형(咸亨) 원년) 4월에 궁모성(窮牟城)[3]에서 거병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했다.[2]검모잠이 거병했을 당시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군에 소속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한때 압록강을 넘어 요동까지 진출했고, 당의 지시를 받던 말갈족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으나, 고간(高侃)·이근행(李謹行) 등이 이끄는 증원병력이 계속해 투입되어 전투를 치른 끝에 다시 남쪽으로 물러났었다. 검모잠 세력은 패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당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을 죽이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서 만난 고구려의 옛 왕족인 안승을 왕으로 삼고[4] 한성(漢城: 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휘하의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어 보호를 요청했다.[2]
興滅國繼絶世, 天下之公義也. 惟大國是望. 我國先王以失道見滅, 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永世盡忠.|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의(公義)입니다. 오직 대국(大國)[5]에 바랄 뿐입니다. 우리의 선왕께서 도를 잃어 멸망하였으나, 지금 신(臣)들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얻어 받들고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건대 대국[6]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검모잠중국어
이때 신라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전라 익산시)에 정착하라고 하명하였다.[2] 이 시기를 전후해 검모잠은 안승에게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검모잠이 거병하였던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던 668년부터 670년의 시점으로써 3차 고구려-당전쟁 당시 고구려 남부 지역은 신라에 항복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2. 신라와의 협력
670년 4월, 검모잠이 거병했을 당시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군에 소속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한때 압록강을 넘어 요동까지 진출했고, 당의 지시를 받던 말갈족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으나, 고간(高侃)·이근행(李謹行) 등이 이끄는 증원병력이 계속해 투입되어 전투를 치른 끝에 다시 남쪽으로 물러났었다. 검모잠 세력은 패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당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을 죽이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서 만난 고구려의 옛 왕족인 안승을 왕으로 삼고[4] 한성(漢城: 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휘하의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어 보호를 요청했다.[2]이때 신라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전라 익산시)에 정착하라고 하명하였다.[2] 이 시기를 전후해 검모잠은 안승에게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검모잠이 거병하였던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던 668년부터 670년의 시점으로써 3차 고구려-당전쟁 당시 고구려 남부 지역은 신라에 항복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3. 최후
670년 검모잠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끌다가,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서 만난 고구려의 옛 왕족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4] 한성(漢城: 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후 검모잠은 안승에게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3. 검모잠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On the Goguryeo diaspora see
http://www.korea.net[...]
2004-11-29
[2]
서적
삼국사기
1145
[3]
문서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의 옛 이름이 궁홀(弓忽) 또는 검모현(劍牟縣)ㆍ궁모현(窮牟縣)으로도 불린다는 단재 신채호의 지적이 있다.
[4]
서적
삼국사기
1145
[5]
문서
대국은 신라를 가리킨다.
[6]
문서
대국은 신라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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