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이븐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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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산 이븐 알리는 625년경 메디나에서 태어났으며,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알리의 아들이다. 그는 무함마드의 첫 손자였으며, 무함마드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알리가 암살된 후 칼리파로 추대되었으나, 무아위야 1세와의 갈등 끝에 퇴위하고 정치에서 물러났다. 하산은 670년경 사망했으며,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시아파에서는 그를 두 번째 이맘으로 존경하며, 수니파에서도 아흘 알-바이트의 일원으로서 존경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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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이븐 알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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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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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산 이븐 알리 |
로마자 표기 | Ḥasan ibn ʿAlī ibn Abī Ṭālib |
출생일 | 약 625년 |
출생지 | 메디나, 헤자즈, 아라비아 |
사망일 | 670년 4월 2일 |
사망지 | 메디나, 우마이야 칼리파조 |
매장지 | 알-바키 묘지, 메디나 |
아버지 |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
어머니 | 파티마 빈트 무함마드 |
배우자 | 하프사 빈트 압드 알-라흐만 힌드 빈트 수하일 자다 빈트 알-아샤트 카울라 빈트 만주르 움 바시르 빈트 아비 마스우드 움 이샤크 빈트 탈하 |
자녀 | 압드 알라 이븐 하산 이븐 알리 압드 알-라흐만 아부 바크르 이븐 하산 이븐 알리 암르 비쉬르 이븐 하산 하산 이븐 하산 후세인 (아스람) 무함마드 알-카심 이븐 하산 이븐 알리 탈하 이븐 하산 자이드 파티마 빈트 하산 루카이야 움 알-하산 움 알-후세인 움 살라마 |
종교 | 이슬람교 |
부족 | 쿠라이시 (바누 하심) |
직함 | |
직함 | 칼리파 |
통치 | |
칼리파 재위 | 661년 1월 28일 – 661년 8월 |
전임자 |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
후임자 | 무아위야 1세 (우마이야 칼리파조 칼리파) |
종교적 지위 | |
시아파 이맘 | 제2대 시아파 이맘 |
재임 시작 | 661년 1월 28일 |
재임 종료 | 670년 4월 2일 |
전임자 | 알리 |
후임자 | 후세인 이븐 알리 |
기타 | |
죽음 원인 | 독살 |
2. 초기 생애
하산은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Fatima)와 그의 사촌 알리(Ali)의 첫째 아들로 메디나에서 태어났다. 이슬람력 3년 라마단 15일(서기 625년 3월 2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가장 일반적이며, 이 날짜는 매년 시아파에 의해 기념된다.[3] 나스르와 아프사르딘은 무함마드가 파티마와 알리를 결혼시키라는 신의 명령을 따랐다고 전하며, 이들의 결합이 무슬림들에게 특별한 영적 의미를 지닌다고 서술한다. 수니파 자료에 따르면 알리는 다른 이름을 원했지만, 무함마드가 아이의 이름을 하산(선량한, 덕있는)으로 지었기에 따랐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하산의 탄생을 기념하여 숫양을 희생 제물로 바쳤고, 파티마는 하산의 머리카락을 깎아 그 무게만큼 은을 기부했다.
하산은 무함마드의 첫 손자였으며, 하산과 그의 동생 후세인은 조부 무함마드에게 매우 사랑받았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하산이라는 이름은 신의 계시를 받아 무함마드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하산과 후세인이 천국에서 젊은이들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하디스도 있으며, 시아파는 하산을 외투의 하디스에 나오는 네 사람 중 한 명으로 믿는다.
{|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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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함마드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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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이븐 압드 엘라흐 | 하디자 |
파티마 | 알리 |
하산 | 후세인 |
알리 |
|}
하산은 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무함마드의 집에서 자랐다.[3] 무함마드는 하산과 후세인을 매우 사랑했으며,[3][26] 기도 중에 엎드려 있을 때 두 소년이 자신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허락했고, 손자가 넘어지자 설교를 중단하고 하산을 안아 올렸다고 한다.[26] 하산은 할아버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추야자를 가져가면서 자기 가족에게는 자선(sadaqa|사다카ar)을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설명했다고 회상했다.[3]
수니파 정전인 『수난 이븐 마자』에 있는 하디스는 하산과 후세인을 천국의 젊은이들의 sayyid|사이이드ar(지도자)로 언급한다.[26] "하산과 후세인을 사랑하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들을 미워하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라는 예언적 하디스도 전해진다.[26] 사히흐 알-티르미지』는 무함마드의 말을 인용하여 "나를 사랑하고 이 둘[하산과 후세인]을 사랑하며,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파티마와 알리]를 사랑하는 자는 나와 함께 승천의 날에 나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라고 전한다.[15]
631-632년 10월, 무함마드와 나즈란의 기독교 공동체는 무바할라(مُبَاهَلَة, 양측이 기도하여 거짓말쟁이에게 신의 저주를 내리도록 하는 것)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는데, 무함마드는 하산, 후세인, 그리고 그들의 부모와 함께 이 행사에 참여했다.[16] 이 행사에서 무함마드는 하산, 후세인, 알리, 파티마를 자신의 망토 아래 모으고 그들을 자신의 아흘 알바이트(أهل البيت)라고 불렀다.[16]
2. 1. 탄생과 가족
하산은 메디나에서 태어났다. 출생 월이 이슬람력으로 샤반(Sha'ban)인지 라마단인지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초기 문헌 대부분은 그의 생일을 이슬람력 3년 라마단 15일(서기 625년 3월 2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 날짜는 매년 시아파에 의해 기념된다.[3] 하산은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Fatima)와 그의 사촌 알리(Ali)의 첫째 아들이었다. 나스르와 아프사르딘은 그들의 결합이 무슬림들에게 특별한 영적 의미를 지닌다고 서술하며, 무함마드가 파티마와 알리를 결혼시키라는 신의 명령을 따랐다고 전한다. 이는 수니파의 알수유티(al-Suyuti) 등도 전하는 바이다. 수니파 자료에 따르면 알리는 다른 이름을 선택했지만, 무함마드가 아이의 이름을 하산(선량한, 덕있는)으로 지었기에 따랐다고 한다.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무함마드는 숫양을 희생 제물로 바쳤고, 파티마는 하산의 머리카락을 깎아 그 무게만큼 은을 기부했다.하산은 무함마드의 첫 손자였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하산이라는 이름은 신의 계시를 받아 무함마드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하산과 그의 동생 후세인은 조부 무함마드에게 매우 사랑받았다고 하며, 이를 증명하는 많은 하디스와 구전 전승이 남아 있다. 또한 하산과 후세인이 천국에서 젊은이들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하디스도 있다. 시아파는 하산을 외투의 하디스에 나오는 네 사람 중 한 명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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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함마드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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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이븐 압드 엘라흐 | 하디자 |
파티마 | 알리 |
하산 | 후세인 |
알리 |
|}
2. 2. 무함마드와의 관계
하산은 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무함마드의 집에서 자랐다.[3] 초기 자료들은 무함마드가 하산과 그의 형 후세인을 매우 사랑했다고 널리 알리고 있으며,[3][26] 무함마드가 기도 중에 엎드려 있을 때 두 소년이 자신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허락했고, 손자가 넘어지자 설교를 중단하고 하산을 안아 올렸다고 전한다.[26] 하산은 나중에 한 번은 할아버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추야자를 가져가면서 자기 가족에게는 자선(sadaqa|사다카ar)을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설명했다고 회상했다.[3]수니파 정전인 『수난 이븐 마자』에 있는 한 하디스는 하산과 후세인을 천국의 젊은이들의 sayyid|사이이드ar(지도자)로 언급한다.[26] 마델룽은 이 하디스가 널리 알려져 있다고 덧붙이며,[3] 베키아 발리에리는 그 진위 여부가 우마이야 왕조의 마르완에 의해 논쟁되었음을 지적한다. 같은 자료와 시아파 정전인 『키타브 알-이르샤드』는 "하산과 후세인을 사랑하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들을 미워하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라는 예언적 하디스를 전한다.[26] 마찬가지로, 수니파 정전인 『사히흐 알-티르미지』는 무함마드의 말을 인용하여 "나를 사랑하고 이 둘[하산과 후세인]을 사랑하며,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파티마와 알리]를 사랑하는 자는 나와 함께 승천의 날에 나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라고 전한다.[15]
631-632년 10월, 무함마드와 나즈란의 기독교 공동체는 결론 없는 논쟁 이후 무바할라(مُبَاهَلَة, 양측이 기도하여 거짓말쟁이에게 신의 저주를 내리도록 하는 것)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마들룽은 무함마드가 하산, 후세인, 그리고 그들의 부모와 함께 이 행사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며,[16] 이것은 시아파의 견해이기도 하다. 반면, 타바리(사망 923년)의 대부분의 수니파 기록에는 이 행사 참여자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일부 수니파 역사가들은 시아파의 견해에 동의한다.[16][14]
이 행사에서 무함마드는 하산, 후세인, 알리, 파티마를 자신의 망토 아래 모으고 그들을 자신의 아흘 알바이트(أهل البيت)라고 불렀는데, 이는 사히흐 무슬림(صحيح مسلم)》과 《사히흐 알 티르미디(صحيح الترمذي)》를 포함한 일부 시아파와 수니파 자료에서 정경으로 인정받는다.[16] 마들룽은 무함마드가 이 중요한 의식에 그들을 포함시킨 것은 그의 가족의 종교적 지위를 높였을 것이라고 제안하며,[16] 라라니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무함마드가 632년 11월 사망했을 때, 하산은 약 7세였다.[3]
3. 알리 칼리파 시대
아버지 알리가 이라크 남부의 군사 도시 쿠파에서 사망하자, 현지 알리 지지자들은 하산을 칼리파로 추대하여 충성을 맹세했다. 이는 알리와 칼리파 자리를 다투던 무아위야에게 위협이 되었다. 무아위야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요르단의 지휘관들에게 전투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고, 하산에게는 칼리파 계승을 포기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무아위야는 하산이 칼리파 계승을 포기하면 내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투를 통해 하산을 복종시키면 절대적인 권력을 얻을 수 있지만, 정당성에 의문이 생기고 문제가 장기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고, 무아위야는 6만 명의 군대를 하산에게 보냈다.[4] 하산 또한 이에 맞서 군대를 보냈다. 양군은 사바트 근교에서 대치했다.
이 시기에 하산은 공동체의 분열을 우려하여,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따를 것을 호소했다. 이를 항복 준비로 여긴 일부는 하산에게 반항하여 칼을 겨누기도 했다. 하산은 부상을 입었지만, 충성스러운 병사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우바이두알라처럼 무아위야에게 투항한 지휘관도 있었다.
3. 1. 우스만 옹호
하산은 우스만 이븐 아판(재위 644-656년)이 반란군에 의해 그의 집에 포위되자, 아버지 알리의 요청으로 후세인과 함께 우스만의 집을 지키다 부상당했을 가능성이 있다.[3][4][5] 특히 하산이 방어자 중 한 명이었다는 보고는 마델룽에 의해 수많고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6]이에 앞서 하산은 우스만 이븐 아판에 반기를 들고 알리와 함께 메디나에서 추방된 아부 다르 알-기파리(사망 652년)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부 다르는 권력자들의 악행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기 때문이었다.[1] 우스만의 이복형제 알-왈리드 이븐 우크바가 음주 혐의를 받자, 알리는 하산에게 이슬람 식품법에 따른 40대의 태형을 집행하도록 요청했지만, 하산은 거부했고 대신 압둘라 이븐 자파르가 처벌을 집행했다고 한다.[2]
우스만은 656년 6월 반란군에 의해 집에 포위되었다. 마지막 날, 하산과 대부분의 경비병들은 우스만의 요청에 따라 무기를 내려놓았다고 한다.[2][6] 또 다른 보고에 따르면, 하산은 우스만 암살 현장에 도착하여 암살자들을 확인했다고 한다.[7] 마델룽에 따르면, 하산은 나중에 알리가 우스만을 방어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2]
3. 2. 내전 참여
하산은 초기 3대 칼리파 시대에는 주요 역할을 하지 않았다. 우마르의 국가 연금 제도에서 5,000 디르함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1] 이븐 이스판디야르에 따르면, 하산은 우마르 칼리파 시대에 아몰 원정에도 참여했다고 한다.[2] 하지만 이러한 보고의 진실성은 의문시되어 왔다.[3]하산은 우스만에 반기를 들고 아버지와 함께 메디나에서 추방된 아부 다르 알-기파리(652년 사망)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4] 우스만의 이복형제 알-왈리드 이븐 우크바가 음주 혐의를 받자, 알리는 하산에게 이슬람 식품법에 따른 40대의 태형을 집행하도록 요청했지만, 하산은 거부했다.[5]
656년 6월, 우스만은 반란군에 의해 그의 집에 포위되었다. 하산과 후세인은 알리의 요청으로 우스만의 집을 지키다 부상당했을 가능성이 있다.[6][7][8] 특히 하산이 방어자 중 한 명이었다는 보고는 수많고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9] 하지만 마지막 날, 하산과 대부분의 경비병들은 우스만의 요청에 따라 무기를 내려놓았다고 한다.[10][11] 또 다른 보고에 따르면, 하산은 우스만 암살 현장에 도착하여 암살자들을 확인했다고 한다.[12] 하산은 나중에 알리가 우스만을 방어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13]
알리는 우스만의 암살 후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즉위 직후, 새로운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미망인이자 아부 바크르의 딸인 아이샤, 그리고 무함마드의 동료였던 탈하와 주바이르가 이끄는 반란에 직면했다.[14] 하산과 암마르 이븐 야시르(657년 사망)는 이후 쿠파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어 약 6,000명의 군대를 모았다.[15][16] 그는 또한 쿠파 통치에서 아부 무사 알 아슈아리를 축출하는 데 기여했는데, 후자는 반군에 대한 알리의 노력을 계속 방해했기 때문이다.[17][18][19] 하산은 나중에 낙타 전투(656년)에서 아이샤, 탈하, 주바이르에 맞서 싸웠다.[20]
하산은 또한 무아위야 1세와 시핀 전투(657년)에서 싸웠지만, (수니파) 자료에서는 그를 주요 참여자로 보지 않는다.[21][22] 하산이 알리의 공격적인 전쟁 정책을 비판하며, 그것이 무슬림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했다고 한다.[23] 658년 11월, 알리는 하산에게 자신의 토지 기부금을 관리하도록 맡겼다.[24]
4. 칼리파 즉위와 퇴위
알리가 하리지파(Kharijites)인 압드 알라흐만 이븐 물잠(Abd al-Rahman ibn Muljam)에 의해 암살당한 후, 하산은 쿠파에서 칼리프로 인정받았다.[1] 알리는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았지만, 무함마드 가문(아흘 알-바이트(ahl al-bayt))만이 칼리파 자격이 있다고 자주 언급했기에, 하산은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졌다.[2] 알리의 군대에 있던 무함마드의 동료들은 하산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
쿠파 대모스크(Great Mosque of Kufa) 취임 연설에서 하산은 아흘 알-바이트를 칭송하며 꾸란 42:23절을 인용했다.[9] 까이스 이븐 사드(Qays ibn Sa'd)는 하산에게 먼저 충성을 맹세하며 꾸란, 순나(sunna), 그리고 불의에 대한 지하드(jihad)를 조건으로 제시했으나, 하산은 마지막 조건을 কৌশल्या(교묘하게) 피했다.[10] 하산은 쿠파 사람들의 지지에 대해 이미 우려하고 있었고, 비현실적인 약속을 피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10] 알 발라두리(al-Baladhuri)에 따르면, 이 맹세는 "하산과 전쟁을 벌이는 자들과 전쟁을 벌이고, 하산과 평화를 유지하는 자들과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이는 사람들이 무아위야(Mu'awiya)와의 평화 의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11]
무아위야는 하산의 칼리파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이슬람교도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하산에게 칼리파직 포기를 제안했다. 무아위야는 하산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안전과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14] 하산은 쿠란과 순나 준수, 후계자 협의회(슈라) 임명, 백성 안전 보장, 지지자 사면 등을 조건으로 무아위야에게 통치를 넘기겠다고 답했다.[15] 결국 하산은 7개월 만인 661년 8월에 칼리파직에서 퇴위했다.[16] 이 해는 '통일의 해'로 불리며, 무아위야 칼리파 시대의 시작으로 간주된다.[17]
항복식에서 무아위야는 하산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하산은 자신과 후세인 이븐 알리가 무함마드의 유일한 손자이며 칼리파 권리가 자신에게 있지만,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항복했다고 밝혔다.[18] 무아위야는 이전에 했던 약속들을 번복하며, 전쟁을 단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18]
이후 하산은 쿠파를 떠나 메디나로 갔으나, 무아위야는 쿠파 근처 하리지파 반란 진압을 요청했다. 하산은 평화를 위해 칼리파직을 포기한 것이지, 무아위야를 위해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며 거절했다.[19]
4. 1. 무아위야와의 갈등
알리가 하리지파(Kharijites)인 압드 알라흐만 이븐 물잠(Abd al-Rahman ibn Muljam)에 의해 암살당한 후, 하산은 쿠파에서 칼리프로 인정받았다.[1] 알리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지만, 무함마드 가문(아흘 알-바이트(ahl al-bayt))만이 칼리파 자격이 있다고 자주 말했기에, 하산은 유력한 후계자였다.[2] 알리의 군대에 있던 무함마드의 동료들은 하산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것으로 보인다.[3]쿠파 대모스크(Great Mosque of Kufa)에서의 취임 연설에서 하산은 아흘 알-바이트(ahl al-bayt)를 칭송하며 꾸란 42:23절을 인용했다.[9]
까이스 이븐 사드(Qays ibn Sa'd)는 하산에게 먼저 충성을 맹세하며 꾸란, 순나(sunna), 그리고 불의에 대한 지하드(jihad)를 조건으로 내걸었으나, 하산은 마지막 조건을 피했다.[10] 하산은 쿠파 사람들의 지지에 대해 이미 걱정하고 있었고 비현실적인 약속을 피하려 했을 수 있다.[10] 알 발라두리(al-Baladhuri)에 따르면, 이 맹세는 "하산과 전쟁을 벌이는 자들과 전쟁을 벌이고, 하산과 평화를 유지하는 자들과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고, 이는 사람들이 무아위야(Mu'awiya)와의 평화 의도를 의심하게 했다.[11]

알리와 전쟁을 치렀던 무아위야는 하산의 칼리파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준비했다.[12] 그는 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마스킨(Maskin)으로 진군하며, 동시에 하산에게 칼리파 주장을 포기하라는 서신을 보냈다.[13] 무아위야는 하산이 퇴위하면 내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4]
하산은 무함마드 사후 아부 바크르에 대한 알리의 주장과 같이, 무함마드의 가족이 지도자로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하며 무아위야에게 충성을 요구했다.[15] 무아위야는 무슬림들이 아흘 알-바이트의 장점을 알지만, 칼리파를 쿠라이시족 내에 유지하기 위해 아부 바크르를 선택했다고 답했다.[16] 하산은 무아위야가 이슬람에서 진정한 공로가 없고 무함마드의 숙적 아부 수피얀의 아들이라고 비판했다.[17] 무아위야는 자신의 통치 경험과 군사력을 내세워 칼리파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며, 종교적 우선순위보다 세속적 자질이 중요함을 시사했다.[18] 이는 이후 수니파 이슬람의 정치와 종교 분리 교리로 이어졌고, 시아파 이슬람은 모든 권위를 무함마드의 가족에게 부여했다.[19]
무아위야의 진군 소식에 하산은 동원령을 내렸으나 초기 반응은 미미했다.[20] 일부 부족장들이 무아위야에게 뇌물을 받았기 때문일 수 있다.[21] 하산은 우바이드 알라 이븐 아바스(Ubayd Allah ibn Abbas)를 1만 2천 명의 선봉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마스킨에서 무아위야를 저지하게 했다.[22]
마스킨에서 선발대가 기다리는 동안, 하산은 알마다인(Al-Mada'in District) 근처에서 반란에 직면했다. 하산은 전쟁보다 평화를 선호한다고 연설했는데, 이는 병사들이 싸우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23] 이 연설을 하산의 평화 추구 신호로 받아들인 하리지파(Kharijites) 지지자들이 하산의 천막을 약탈했다.[24] 하산은 알자라 이븐 시난(al-Jarrah ibn Sinan)에게 공격받아 부상을 입었고,[25] 치료를 위해 알마다인 총독의 집으로 옮겨졌다.[26] 이 공격 소식은 하산 군대의 사기를 더욱 저하시켰다.[27]
4. 2. 평화 협정과 퇴위
Hasan ibn Aliar은 알마다인(Al-Mada'in District) 근처 군영에서 반란에 직면했다. 아부 하니파 디나와리(Abu Hanifa Dinawari)의 기록에 따르면, 하산은 알마다인 외곽에 도착했을 무렵 자신의 군대의 결의에 대해 우려하여 사바트(Sabat)에서 군대를 멈추고 전쟁보다 평화를 선호한다는 연설을 했다. 이는 그의 병사들이 싸우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하산이 평화를 추구할 의향이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 이 연설을 계기로, 하산 군대 내의 하리지파(Kharijites) 지지자들이 그의 천막을 약탈하고 기도용 깔개를 빼앗았다. 하산이 안전한 곳으로 호송되는 도중, 하리지파인 알자라(al-Jarrah ibn Sinan)가 하산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히며 "당신은 아버지처럼 불신자가 되었다"고 외쳤다. 알자라는 제압당해 살해되었고, 심하게 출혈하는 하산은 알마다인 총독인 사드 이븐 마수드 알타카피(Sa'd ibn Mas'ud al-Thaqafi)의 집으로 치료를 위해 옮겨졌다. 이 공격 소식은 하산의 군대 사기를 더욱 저하시켜 대규모 탈영으로 이어졌다.
무아위야는 이슬람교도들의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하산이 자신의 뜻에 따라 칼리파직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그 대가로 무아위야는 하산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의 안전을 보장하며, 많은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산은 이 제안을 원칙적으로 수락하고 자신의 대표를 무아위야에게 보냈고, 무아위야는 그들을 하산에게 carte blanche와 함께 다시 보내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적도록 했다. 하산은 쿠란과 순나를 준수한다면, 그의 후계자는 협의회(슈라)에 의해 임명되고, 백성들은 안전을 유지하며, 하산의 지지자들은 사면을 받을 것이라는 조건 하에 무아위야에게 이슬람 통치를 넘길 것이라고 적었다. 따라서 하산은 7개월간의 통치 후 661년 8월에 칼리파직을 포기했다. 이 해는 초기 이슬람 자료들에서 '통일의 해'로 여겨지며, 일반적으로 무아위야 칼리파 시대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항복식에서 무아위야는 하산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하산은 일어서서 자신과 후세인 이븐 알리가 무함마드의 유일한 손자들이며 칼리파의 권리는 자신에게 있지 무아위야에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항복했다고 백성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러자 무아위야는 하산과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이전의 약속들을 번복하며, 그 약속들은 전쟁을 단축하기 위해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산은 쿠파를 떠나 메디나로 갔지만, 곧 무아위야로부터 쿠파 근처의 하리지파 반란을 진압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무아위야에게 평화와 타협을 위해 칼리파의 지위를 포기했지, 그의 편에서 싸우기 위해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회신했다.
5. 은퇴 이후의 삶과 죽음
661년 하산은 칼리파 자리에서 물러난 뒤 메디나에서 조용히 지내며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아파들은 무아위야에 맞서 싸울 것을 요청했지만, 하산은 평화 조약을 지키며 이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하산은 바누 하심과 알리 지지자들에게 무함마드 가문의 수장으로 존경받았으며, 그들은 무아위야의 후계자로 하산을 원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산은 670년 4월 2일(AH 50년 5라비 알 아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AH 49, 50, 48, 58, 59년이라고도 한다.[14] 베치아 바글리에리는 하산이 병으로 또는 독살로 사망했다고 보았지만,[15] 초기 자료들은 대부분 하산이 독살되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14]
일반적으로 무아위야가 하산을 살해한 배후로 여겨진다.[16][17][14][18] 시아파 자료 외에도, 알와키디(823년 사망), 알마다이니, 우마르 이븐 샤바(877년경 사망), 알발라두리, 알하이탐 이븐 아디(822년 사망), 아부 바크르 이븐 하프스 등 일부 저명한 수니파 역사가들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19]
하산은 퇴위 당시 약 38세였고, 무아위야는 58세였다. 자프리는 이러한 나이 차이가 무아위야에게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17] 무아위야는 하산과의 평화 조약을 어기고 자신의 아들 야지드 1세(재위 680~683년)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26][17] 따라서 자프리는 무아위야가 하산의 죽음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는 아들의 계승에 대한 걸림돌을 없앴기 때문이다.[17] 모멘과 메들룽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16][14]
하산은 누가 자신을 독살했는지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잘못된 사람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5] 시아파 학자 알-무피드는 하산의 아내 자아다 빈트 알-아슈아스가 무아위야로부터 100000KRW과 그의 아들 야지드와의 결혼을 약속받고 그를 독살했다고 전한다.[26]
하산은 죽기 전 가족들에게 무함마드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델룽에 따르면, 만약 그들이 "악을 두려워한다면" 하산은 알바키 묘지에 있는 어머니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요청했다. 메디나의 우마이야 총독인 사이드 이븐 알아스는 무함마드 옆에 하산을 묻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마르완 이븐 알하캄은 우스만이 알바키에 묻혔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 마르완의 반대에는 무함마드의 미망인인 아이샤도 동참했는데, 그녀는 종종 알리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함마드 이븐 알하나피야가 하산의 매장 요청을 상기시키며 중재했고, 결국 하산은 알바키에 묻혔다. 하산의 묘는 이후 돔이 있는 사당이 되었으나, 와하비에 의해 1806년과 1927년 두 차례 파괴되었다.[14]
5. 1. 무아위야와의 관계
661년 하산은 퇴위 후 670년 사망할 때까지 메디나에서 조용히 지내며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평화 조약을 준수하여 시아파 집단들이 무아위야에 맞서 싸울 것을 요청했지만, 하산은 이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하산은 바누 하심과 알리의 지지자들에게 무함마드 가문의 수장으로 여겨졌으며, 그들은 무아위야의 후계자로 하산을 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니파 역사학자 알발라두리는 저서 『귀족들의 계보(Ansab)』에서 하산이 조약에 따라 이란의 파사와 다라브지르드에 세금 징수관을 파견했으나, 무아위야의 지시를 받은 바스라 총독이 백성을 선동하여 쫓아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마들룽은 하산이 카리지파와의 싸움에서 무아위야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 기록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또한, 하산은 평화 제안에서 재정적 조항을 제시하지 않았고, 무아위야도 그에게 어떤 지불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마들룽은 무아위야가 하산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을 깨닫고 둘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본다.알리가 이라크 남부 쿠파에서 사망하자, 그곳의 알리 지지자들은 하산을 칼리파로 추대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이는 알리와 칼리파 자리를 다투던 무아위야에게 위협이 되었다. 무아위야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요르단의 지휘관들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하고, 하산에게는 칼리파 계승 포기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무아위야는 하산이 칼리파 계승을 포기하면 내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투를 통해 하산을 굴복시킬 수도 있었지만, 이는 정당성 문제를 야기하고 장기적인 분쟁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고, 무아위야는 6만 명의 군대를 하산에게 보냈으며,[4] 하산 또한 이에 맞서 군대를 파견했다. 양군은 사바트 근교에서 대치했다.
이 긴장된 시기에 하산은 공동체의 분열을 우려하여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따를 것을 호소했다. 이를 항복의 준비로 오해한 일부는 하산에게 반항하며 칼을 겨누기도 했다. 하산은 부상을 입었지만 충성스러운 병사들의 보호를 받았다. 우바이두알라처럼 무아위야에게 투항한 지휘관도 있었지만, 하산은 반역자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5. 2. 죽음과 독살설
하산은 아마도 670년 4월 2일(AH 50년 5라비 알 아왈)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AH 49, 50, 48, 58, 59년이라고도 한다.[14] 베치아 바글리에리는 하산이 병으로 또는 독살로 사망했다고 추정하지만,[15] 초기 자료들은 하산이 독살되었다는 데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14]무아위야는 일반적으로 하산의 살해 배후로 여겨진다.[16][17][14][18] 시아파 자료 외에도,[19][20][21] 알와키디(823년 사망), 알마다이니, 우마르 이븐 샤바(877년경 사망), 알발라두리, 알하이탐 이븐 아디(822년 사망), 아부 바크르 이븐 하프스 등 일부 저명한 수니파 역사가들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19] 그러나 알타바리는 이러한 기록들을 묵살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기록들을 사소하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메들룽과 도널드슨(1976년 사망)이 시사했듯이 일반 대중(awamm)의 신앙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22][20] 일부 다른 초기 수니파 자료들은 하산이 독살당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그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24]
하산이 퇴위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8세였고, 무아위야는 58세였다. 자프리는 이러한 나이 차이가 무아위야에게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17] 무아위야는 하산과의 평화 조약을 위반하여 자신의 아들 야지드 1세(재위 680~683년)를 후계자로 지명할 계획이었다.[26][17] 따라서 자프리는 무아위야가 하산의 살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는 그의 아들의 계승에 대한 장애물을 제거했기 때문이다.[17] 이러한 견해는 모멘과 메들룽도 지지한다.[16][14]
하산은 누가 자신을 독살했다고 의심하는지 밝히지 않았는데, 잘못된 사람이 처벌받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5] 시아파 학자 알-무피드는 하산의 아내 자아다 빈트 알-아슈아스가 무아위야로부터 100000KRW과 그의 아들 야지드와의 결혼을 약속받고 그를 독살했다고 전한다.[26] 자프리는 수니파와 시아파 보고서 대부분이 이와 유사하다고 적고 있는데,[17] 아부 알-파라즈 알-이스파하니, 알-마수디, 그리고 알-야쿠비의 보고서도 포함된다.[27][26] 반면 아흐메드는 이러한 보고서들을 알-아슈아스에 대한 "알리드" 선전이라고 본다. 알-아슈아스는 자아다의 아버지이자 쿠파의 저명한 부족장으로, 마델룽에 따르면 시핀 전투(657)에서 중재를 지지함으로써 알리를 약화시켰고, 무아위야에게 뇌물을 받고 알리의 군사 작전을 방해했다. 자프리와 마찬가지로 베치아 바글리에리도 많은 초기 자료들이 무아위야의 사주를 받아 자아다 빈트 알-아슈아스가 하산을 독살했다고 주장하지만, 알-아슈아스가 시아파에게 배신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의 딸에게 책임을 전가했을 가능성도 지적한다.[15]
다른 설로는 수니파 학자 알-하이탐 이븐 아디가 수하일 이븐 암르의 딸을 범인으로 지목한다.[19] 또 다른 수니파 학자 알-와키디의 기록은 무아위야의 사주를 받은 하산의 하인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19] 또 다른 설은 야지드가 자파르 이븐 아비 탈리브의 딸 자이나브와 결혼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고 하산과 결혼하자, 분노한 야지드가 하산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Burke 등의 최근 논문은 하산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을 조사했다. 광물학적, 의학적, 화학적 증거를 사용하여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온 칼로멜(염화제일수은, Hg2Cl2)이 하산의 죽음에 주된 책임이 있는 물질이라고 제안했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하산의 가족 구성원 중 다른 한 명도 비슷한 증상을 겪었기 때문에, 이 논문은 하산의 아내를 주요 용의자로 간주한다. 이 논문은 역사적 문서를 인용하는데, 그 문서에 따르면 비잔티움 황제(아마도 콘스탄티누스 4세)가 무아위야의 요청으로 독이 든 음료를 보냈다고 한다. 따라서 저자들은 그들의 법의학적 가설이 무아위야의 사주와 비잔티움 황제의 개입으로 하산의 아내 자아다가 하산을 독살했다는 역사적 서술과 일치한다고 결론짓는다.[25]
하산은 죽기 전에 가족들에게 무함마드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지시했다. 마델룽에 따르면, 만약 그들이 "악을 두려워한다면" 하산은 알바키 묘지에 있는 어머니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요청했다. 메디나의 우마이야 총독인 사이드 이븐 알아스는 무함마드 옆에 하산을 묻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마르완 이븐 알하캄은 우스만이 알바키에 묻혔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했다. 마르완의 반대에는 무함마드의 미망인인 아이샤도 동참했는데, 그녀는 종종 알리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무함마드의 동료 아부 후라이라는 무함마드가 하산과 후세인을 얼마나 존중했는지를 상기시키며 마르완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각각 바누 하심과 바누 우마이야 출신인 후세인의 지지자들과 마르완의 지지자들이 무기를 들고 모였다. 무함마드 이븐 알하나피야는 하산의 매장 요청을 상기시키며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그는 알바키에 묻혔다. 디나와리는 대치 중 우마이야인들이 시신에 화살을 쏘았다고 기록했고, 이것은 시아파의 견해이기도 하다.[15] 마델룽은 무아위야가 나중에 메디나 총독직을 복직시켜 마르완에게 보상을 했다고 제안한다.[14] 그러나 하산의 시신이 알바키로 운반되는 동안 마르완은 행렬에 합류하여 "관용(hilm)이 산을 능가하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관례에 따라, 하산의 장례기도는 메디나 총독인 사이드 이븐 알아스가 인도했다. 하산의 묘는 나중에 돔이 있는 사당이 되었는데, 이것은 와하비에 의해 1806년과 1927년 두 번 파괴되었다.[14]
6. 평가와 유산
하산 이븐 알리는 시아파와 수니파 양쪽에서 모두 존경받는 인물이다. 시아파에서는 그를 제2대 이맘으로, 수니파에서는 아흘 알 바이트의 일원이자 사하바 중 한 명으로 존경한다.
하산은 무함마드의 외모와 성품을 닮았으며, 평화를 사랑하고 관대한 인물로 묘사된다.[15][16][19] 그의 관용은 마르완과 같은 바누 하심의 적들에게도 잘 드러났다.[18]
무아위야와의 평화 조약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이를 약점으로 보기도 하지만, 다른 자료들은 쿠파 주민들의 반란 이후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이슬람 공동체의 통합과 평화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주장한다.[21] 시아파 역사가들은 쿠파 주민들의 약한 지지와 무아위야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고려할 때 하산의 퇴위가 유일한 현실적인 행동 방침이었다고 본다.
시아파에서는 하산을 무바할라 구절, 타흐지르 구절, 마와다 구절 등 꾸란 구절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로 여긴다. 특히 타흐지르 구절은 아흘 알-바이트의 무오류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현대에 이르러 하산의 삶은 문학과 드라마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1996년 메흐디 파킴자데 감독의 드라마 ''홀로 남겨진 지도자(Loneliest Leader)''는 하산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다우드 미르바게리의 드라마 ''목타르나메(Mokhtarnameh)''에서도 하산과 관련된 사건이 언급된다.[1]
6. 1. 인격과 성품
하산은 외모가 무함마드와 매우 흡사했다고 묘사된다.[15][16] 마들룽은 하산이 무함마드의 기질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를 평화주의자로 묘사한다.[19] 베치아 바글리에리는 그가 온화한 성품(ḥalīm)을 지녔고, 관대하며, 경건했으며, 여러 차례 도보 순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고 기술한다. 하산은 훌륭한 연설가로 묘사되지만, 아부 알-파라지 알-이스파하니에 따르면 언어 장애를 겪었을 가능성도 있다. 마들룽은 하산과는 대조적으로, 후세인이 아버지의 "투쟁심"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19]하산 이븐 알리에게 적대적인 자료들은 그가 무아위야와 맺은 평화 조약을 그의 약점의 징후로 해석하며, 하산이 처음부터 항복할 의도였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부 저술가들은 하산의 퇴위 결정이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삶에 대한 유혹 때문이었다고 제안하며, 서구 역사가들은 칼리파 자리를 양보한 것에 대해 하산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자료들은 이러한 비판을 거부하며, 쿠파 주민들의 반란 이후 하산의 퇴위는 불가피했고, 이는 시핀 전투(657년)에서 알리가 중재 제안을 받아들인 것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료들은 하산이 무함마드 사후 알리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공동체의 통합과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퇴위했다고 주장한다. 시아파 역사가들은 쿠파 주민들의 약한 지지와 무아위야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고려할 때 하산의 퇴위가 유일한 현실적인 행동 방침이었다고 본다. 그들의 견해는 베치아 바글리에리의 견해와 일치한다. 수니파 자료들은 하산이 평화를 선호하고 유혈 사태와 호전적인 정치를 혐오했기 때문에 퇴위했다고 주장한다. 이 세 가지 이유 중 처음 두 가지는 시아파 학자 타바타바이(1981년 사망)도 언급하고 있다.[21]
역사적 서술에 따르면, 하산 이븐 알리는 외모와 덕행에서 예언자와 매우 닮았기에, 무함마드는 그를 가리켜 "너는 성격과 기질에서 나를 닮았다"라고 말했다. 하산이 달성한 명예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관용은 바누 하심의 적들 앞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마르완의 모욕에 대한 그의 행동 등이 그 예이다. 하지 마누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하산의 관용은 지성과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용기를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아들로 여겼고, 그의 아버지는 하산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의 금욕주의와 신심은 그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여러 차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죽음, 부활, 그리고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변화했다. [18]
이란 백과사전에서 윌프리드 마들룽은 하산이 무함마드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 알리의 정책을 비판했다고 믿고 있다.
자파리안은 그러한 서술들을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서술에서 제시된 이미지는 알리와 아슈라의 얼굴을 훼손하고, 오스만 제국의 경향에 찬성했던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타바타바이는 하산과 후세인의 행동 비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이맘 후세인이 야지드와 화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동생 이맘 하산(무아위야와 10년을 보냈다)처럼 무아위야의 지배하에 10년을 보내고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부 서술자들이 두 사람(이맘 하산과 이맘 후세인)이 서로 대립했고, 이맘 후세인과는 달리 이맘 하산이 평화를 선호했다고 말한 것은 잘못되었다.
6. 2. 수니파의 평가
하산 이븐 알리에 대한 초기 자료들은 그가 무아위야와 맺은 평화 조약을 약점으로 해석하며, 처음부터 항복할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저술가들은 하산의 퇴위 결정이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삶에 대한 유혹 때문이었다고 제안하며, 서구 역사가들은 칼리파 자리를 양보한 것에 대해 하산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다른 자료들은 이러한 비판을 거부하며, 쿠파 주민들의 반란 이후 하산의 퇴위는 불가피했고, 이는 시핀 전투(657년)에서 알리가 중재 제안을 받아들인 것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료들은 하산이 무함마드 사후 알리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공동체의 통합과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퇴위했다고 주장한다. 시아파 역사가들은 쿠파 주민들의 약한 지지와 무아위야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고려할 때 하산의 퇴위가 유일한 현실적인 행동 방침이었다고 본다. 그들의 견해는 베치아 바글리에리(Veccia Vaglieri)의 견해와 일치한다. 수니파 자료들은 하산이 평화를 선호하고 유혈 사태와 호전적인 정치를 혐오했기 때문에 퇴위했다고 주장한다. 이 세 가지 이유 중 처음 두 가지는 시아파 학자 타바타바이도 언급하고 있다.
무타질라 이슬람에서, 회개하지 않은 이맘의 잘못된 행위만이 충성 서약을 받은 후 이맘직에서 그를 실격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맘은 사임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할 수 없었다. 무타질라 학자 알-카디 압드 알-자바르(1025년 사망)는 하산이 쿠파 사람들의 전쟁에 대한 약한 지지를 깨달은 후 마지못해 평화를 맺고 무아위야에게 마지못해 충성을 맹세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지못한 충성 맹세는 그를 이맘직에서 실격시키거나 무아위야의 칼리파 지위를 정당화하지 않았다. 무타질라 학자 이븐 알-말라히미(1141년 사망)는 덧붙여 "충성 서약을 확보하기 위해 무아위야와 싸울 계획을 세웠던 하산이 마지못해 칼리파직을 포기할 것이라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8세기와 9세기 동안에는 어떤 칼리프가 정통 칼리프인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다. 이는 그들의 행동과 의견이 종교적 관점에서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9세기 이후, 수니파 이슬람에서 최초의 네 명의 칼리프, 아부 바크르(재위 632-634년), 우마르(재위 634-644년), 우스만(재위 644-656년), 알리(재위 656-661년)가 정통 칼리프로서 정설이 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프인 우마르 이븐 압드 알-아지즈(재위 717-720년)는 수니파 하디스 수집가인 아부 다우드 알-시지스타니(사망 889년)에 의해 다섯 번째 정통 칼리프로 언급되었다. 또 다른 가설은 하산이 다섯 번째 정통 칼리프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6개월간의 통치는 아부 바크르의 즉위 후 30년이라는 기간을 완성하는 데 필요했는데, 이 기간은 무함마드가 예언적 계승의 길이로 예언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아부 다우드 알-타얄리시의 이 하디스 버전에서도 암시되는데, 이 버전에서는 우마르의 칼리프 기간에 6개월을 더하여 하산을 다섯 번째 정통 칼리프로 계산하지 않았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무아위야와의 하산의 평화 조약을 무함마드에게 귀속되는 하디스로 정당화하는데, 이 하디스는 하산이 두 개의 전쟁 중인 무슬림 세력을 통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들은 무아위야의 칼리프직을 합법화함으로써 평화 조약을 칼리프직에서의 자발적 사퇴로 본다. 더 일반적으로, 수니파 이슬람에서 이맘은 자신의 결정의 분열을 알고 있더라도 축출되거나 사퇴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사퇴가 무슬림의 최상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면 퇴위할 수 있다. 하산의 퇴위는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한 자발적인 결정이었다.
대부분의 칼리파 연대기는 하산 이븐 알리를 칼리파로 포함하지 않는다. 하산이 칼리파 직위를 자칭한 기간은 매우 짧았으며, 또한 이슬람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만 인정받았을 뿐, 결국 무아위야의 칼리파 직위를 승인했다. 그러나 수유티, 이븐 아라비, 이븐 카시르 등 일부 수니파 역사가들은 하산을 무아위야 이전의 칼리파로 인정한다.[9] 12이맘 시아파 무슬림들은 하산을 무오한 12이맘 중 한 명으로 여긴다.
수니파에서는 하산 이븐 알리를 아흘 알 바이트의 일원이자 사하바 중 한 명으로 존경한다. 또한 일부 수니파 학자들은 앞서 언급한 알리의 지명을 근거로 그를 제5대 칼리파로 추대하기도 한다.[9]
6. 3. 시아파의 평가
하산 이븐 알리는 아흘 알-바이트(Ahl al-bayt, 무함마드의 가족)의 일원이자 아흘 알-키사(Ahl al-kisa, 무함마드, 알리, 파티마, 하산, 후세인) 중 한 명으로, 모든 무슬림에게 존경받지만 특히 시아파에게 가장 존경받으며 무슬림 공동체의 정당한 지도자로 여겨진다.[27]- 무바할라 구절: 631-2년 나즈란의 기독교 공동체와의 논쟁에서 무함마드는 쿠란 3:61절을 받았는데, 이 구절에서 '우리의 아들들'은 무함마드의 손자인 하산과 후세인을 가리킨다. 무바할라에서 무함마드는 알리, 파티마, 하산, 후세인을 자신의 망토 아래 모아 아흘 알-바이트(Ahl al-bayt)라 불렀으며, 이들은 아흘 알-키사(Ahl al-kisa)로도 알려져 있다.
- 타흐지르 구절: 쿠란 33:33절의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은 오직 너희, 아흘 알-바이트로부터 더러움을 제거하고 너희를 완전히 정결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하며, 시아 이슬람은 아흘 알-바이트를 무함마드, 알리, 파티마, 하산, 후세인으로 한정하고, 이 구절을 아흘 알-바이트의 무오류성의 증거로 여긴다.
- 마와다 구절: 쿠란 42:23절은 "나는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친족들 사이의 애정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시아파는 이 구절의 친족(al-qurba)을 알리, 파티마, 하산, 후세인, 즉 아흘 알-바이트로 해석한다. 하산은 661년 칼리프 취임 연설에서 이 구절을 언급하며 자신이 아흘 알-바이트에 속한다고 말했다.
- 쿠란 76:5-22절: 이 구절들은 알리, 파티마, 하산, 후세인이 3일 연속으로 거지들에게 유일한 식사를 내어준 후 계시되었다고 전해지며, 아흘 알-키사와 관련되어 있다.
하산의 퇴위에 대한 여러 관점이 존재한다.
- 하산에게 적대적인 자료들은 그가 무아위야와 맺은 평화 조약을 약점으로 해석하고, 처음부터 항복할 의도였다고 주장한다.
- 일부 저술가들은 하산의 퇴위 결정이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삶에 대한 유혹 때문이었다고 제안하며, 서구 역사가들은 칼리파 자리를 양보한 것에 대해 하산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 다른 자료들은 쿠파 주민들의 반란 이후 하산의 퇴위가 불가피했고, 시핀 전투(657년)에서 알리가 중재 제안을 받아들인 것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하산이 무함마드 사후 알리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공동체의 통합과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퇴위했다고 주장한다.
- 시아파 역사가들은 쿠파 주민들의 약한 지지와 무아위야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고려할 때 하산의 퇴위가 유일한 현실적인 행동 방침이었다고 본다.
- 수니파 자료들은 하산이 평화를 선호하고 유혈 사태와 호전적인 정치를 혐오했기 때문에 퇴위했다고 주장한다.
무타질라 이슬람에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맘의 잘못만이 이맘직에서 실격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이맘은 사임할 수 없었다. 무타질라 학자 알-카디 압드 알-자바르(1025년 사망)는 하산이 마지못해 평화를 맺고 무아위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그를 이맘직에서 실격시키지 않았다고 본다.
시아파는 하산을 두 번째 이맘으로 여기며, 그의 퇴위를 비판하는 일부 추종자들도 있었지만, 670년 사망할 때까지 알리의 지지자들의 지도자(이맘)로 여겨졌다. 시아파의 이맘 교리는 무함마드가 알리에게, 그리고 신의 칙령에 따라 하산에게 계승되었다고 설명한다. 시아파 이슬람에서 하산의 포괄적인 세속적 및 종교적 권위는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지명(nassar)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아위야에게 퇴위함으로써 무효화될 수 없었다.
시아파 신학자들은 하산의 군대 붕괴, 동맹국의 배신, 군사 캠프 약탈, 암살 시도 등을 들어 무아위야와의 평화를 정당화한다. 시아파 이슬람에서 하산의 무오류성(ismaar)은 그의 행동을 더욱 정당화하며, 시아파의 샤리프 알-무르타자는 하산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마지못해 평화를 맺었고, 그 후 무아위야에게 맹세한 것은 타키야ar의 행위로 본다고 기록한다. 시아파 신학자들은 이 조약을 무아위야와의 동맹이 아닌 휴전(muh'adanaar) 또는 합의(mu'ahadaar)로 본다.
하산의 생애를 다룬 텔레비전 시리즈 "탄하 타린 살다르"는 페르시아어, 아랍어, 터키어 등으로 제작되었다.[27]
결론적으로, 시아파에서는 하산 이븐 알리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제2대 이맘이자 순교자로 여긴다.
6. 4. 현대적 의의
하산 이븐 알리에 대한 페르시아 문학은 역사적 문학과 신비적 문학,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역사적 문학은 하산의 삶, 이맘직, 무아위야와의 화해, 그리고 그의 죽음을 다룬다. 신비적 문학은 그의 미덕과 시아파 영성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보여준다.하산의 삶은 사나이(1141년 사망)로부터 현재까지 시의 주제였다. 시의 주제는 그의 미덕, 무함마드의 그에 대한 찬사, 그의 고난과 죽음이다. 하산을 주제로 시를 쓴 시인으로는 하디카트 알 하키카를 쓴 사나이, 니샤푸르의 아타르, 가바미 라지, 루미, 알라 알 다울라 심나니, 이븐 야민, 크와주 케르마니, 살만 사보지, 하지 랄리지, 나지리 네이샤부리, 베살 시라지, 아디브 알 말락 파라하니가 있다.
1996년 메흐디 파킴자데(Mehdi Fakhimzadeh) 감독의 드라마 ''홀로 남겨진 지도자(Loneliest Leader)''는 하산 이븐 알리의 삶, 무아위야와의 화해, 하산 암살 이후 이슬람 공동체의 상황을 그린다. 하산의 화해로 이어지는 사건들과 알마다인(al-Mada'in)에서의 암살 시도는 다우드 미르바게리(Davood Mirbagheri)의 드라마 ''목타르나메(Mokhtarnameh)''에서도 언급된다.[1] 아랍 드라마 ''무아위야, 하산 그리고 후세인(Muawiya, Hassan and Husayn)''은 하산과 후세인에 관한 작품이지만, 반시아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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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al-k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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