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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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는 루마니아의 군인으로, 1884년 보토샤니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여러 차례 진급하여 소장까지 올랐으며, 제4군 사령관을 역임하며 투르다 전투와 데브레첸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1945년 소련군에 소환된 후 사망했는데, 사망 경위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사후에는 클루지나포카에 유해가 안장되고 그의 이름을 딴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다.
아브라메스쿠는 1898년부터 1906년까지 A. T. 라우리안 고등학교에 다녔다.[2] 그 후 부쿠레슈티의 보병 및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에 소위로 졸업했으며, 1911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에 참전한 후, 고등 전쟁 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대위로 진급했다.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한 루마니아의 군인이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2. 1. 출생 및 가족
아브라메스쿠는 1884년 1월 26일 보토샤니에서 바실레 아브라메스쿠와 아글라리아 아브라메스쿠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2]
2. 2. 학창 시절
아브라메스쿠는 1884년 1월 26일 보토샤니에서 농부 바실레 아브라메스쿠와 아글라리아 아브라메스쿠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8년부터 1906년까지 A. T. 라우리안 고등학교에 다녔다.[2] 이후 부쿠레슈티의 보병 및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에 소위로 졸업했으며, 1911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에 참전한 후, 고등 전쟁 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대위로 진급했다.
3. 군 경력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여 도브루자군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웠고, 아르제슈 전투와 머러셰슈티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쳐 루마니아의 별 훈장과 왕관 훈장을 수여받았다.[1]
전간기에는 중령, 대령, 준장, 소장으로 꾸준히 진급하며 제1산악 보병 사단, 제10 보병 사단, 제3 군단 등을 지휘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추축국 측에서 뮌헨 작전, 아조프해 전투, 크림 반도 작전, 세바스토폴 포위전 등에 참전하여 중장으로 진급하고, 루마니아 왕관 훈장 대십자 훈장, 용감한 미하일 훈장 2등급, 독일 십자 훈장 금장 등을 받았다.[2][3]
1944년 루마니아 쿠데타 이후에는 연합국 측으로 돌아서 제4군을 이끌고 투르다 전투, 데브레첸 전투, 카레이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4][5] 소련 측에 보급 부족과 과도한 임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다 지휘권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곧 복귀하여 슬로바키아에서 즈볼렌-반스카비스트리차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3. 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루마니아는 1916년 8월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했다. 아브라메스쿠는 도브루자군에서 안드레이 자욘치코프스키 러시아 장군의 지휘 아래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11월에는 제38연대 제2대대 지휘관이 되었고, 12월 아르제슈 전투에서 싸웠으며, 몰다비아로 후퇴하는 일련의 방어 작전에 참여했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용맹으로 1917년 루마니아의 별 훈장 기사 등급을 받았다. 1917년 여름 머러셰슈티 전투에서 공을 세워 왕관 훈장 사령관 등급을 수여받고, 1917년 9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1]
3. 1. 1. 도브루자 전투
아브라메스쿠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916년 8월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참전했으며, 안드레이 자욘치코프스키 러시아 장군의 지휘 하에 도브루자군에서 복무하며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1]
3. 1. 2. 아르제슈 전투 및 몰다비아 방어전
1916년 8월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편으로 참전했고, 아브라메스쿠는 러시아 장군 안드레이 자욘치코프스키의 지휘 아래 도브루자군에서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1] 11월 제38연대 제2대대 지휘관이 되었고, 12월 아르제슈 전투에서 싸웠으며, 일련의 방어 작전에서 몰다비아로 후퇴했다.[1] 이러한 전투에서의 용맹으로 1917년 루마니아의 별 훈장 기사 등급을 받았다.[1]
3. 1. 3. 머러셰슈티 전투
1917년 여름, 머러셰슈티 전투에서 공을 세워 왕관 훈장 사령관 등급을 수여받고, 1917년 9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1]
3. 2. 전간기
전간기 동안 그는 1917년 9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고,[1] 1923년 중령, 1929년 대령, 1935년 준장, 1940년 소장으로 진급했다.[1] 그는 제1산악 보병 사단, 제10 보병 사단, 제3 군단을 여러 차례 지휘했다.[1]
3. 2. 1. 진급 과정
아브라메스쿠는 전간기에 1923년 중령, 1929년 대령, 1935년 준장, 1940년 소장으로 진급했다.[1] 그는 제1산악 보병 사단, 제10 보병 사단, 제3 군단을 여러 차례 지휘했다.[1]
3. 2. 2. 주요 지휘 보직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아브라메스쿠는 1923년에 중령, 1929년에 대령, 1935년에 준장, 1940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제1산악 보병 사단, 제10 보병 사단, 제3 군단 등을 지휘했다.[1]
3.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브라메스쿠는 추축국과 연합국 양 진영에서 모두 참전했다.
1941년 제10사단장을 시작으로, 1941년 6월에는 산악군 지휘를 맡았다. 1943년 10월에는 제3군단장, 1944년 2월에는 제6군단장을 역임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는 제4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루마니아군이 패배한 후, 1944년 8월 소련의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직전 이온 미하일 라코비처 장군이 쿠데타 준비를 위해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아브라메스쿠가 제4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용한 장갑 및 기계화 부대가 부족하여 패배를 막지 못하고 8월 23일에 해임되었다.
3. 3. 1. 추축국 시기 (1941-1944)
아브라메스쿠는 1941년 6월부터 산악군 지휘를 맡아 뮌헨 작전, 아조프해 전투, 크림 반도 작전,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참전했다. 세바스토폴 함락 후 그의 군단은 크림 반도를 점령했다.[2]
크림 반도 작전에서 세운 공로로 1942년 7월 18일 중장(군단장)으로 진급했으며, 루마니아 왕관 훈장 대십자 훈장(1942년 7월 29일), 용감한 미하일 훈장 2등급(1942년 9월 1일), 독일 십자 훈장 금장(1942년 10월 25일)을 수여받았다.[3]
3. 3. 2. 연합국 시기 (1944-1945)
국왕 쿠데타 이후, 아브라메스쿠는 나치 독일과 헝가리 국민통일 정부에 맞서 소련 편에서 제4군을 지휘하도록 소환되었다.[4] 그는 투르다 전투, 데브레첸 전투, 카레이 전투 등 제4군과 함께 많은 전투를 벌였다.[4][5]
아브라메스쿠는 소련에게 보급품 부족과 그의 군대에 주어진 불가능한 임무에 대해 반복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이로 인해 1945년 1월 11일에 지휘권이 박탈되고 예비군으로 배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 9일에 대장으로 진급하여 임무에 복귀했다. 전선으로 돌아온 그는 슬로바키아에서 브라티슬라바-브르노 공세의 전주곡이었던 즈볼렌–반스카비스트리차 선에 대한 공격에서 제4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4. 체포 및 사망
아브라메스쿠의 체포 및 사망과 관련하여, 그의 가족에게도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45년 3월 3일, 아브라메스쿠의 아내 아델라와 딸 펠리시아 아브라메스쿠-스터르자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강제 이송되었다.[6] 딸 펠리시아는 시베리아에서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으며, 소련 측 자료에는 1945년 3월 6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6] 아델라는 1956년에 루마니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00년 10월 23일, 아브라메스쿠의 유해는 루마니아로 송환되어 클루지나포카의 하종가르드 묘지에 군사적 예우를 갖추어 안장되었다. 클루지나포카의 슈테판 첼 마레 광장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졌으며, 보토샤니, 브러일라, 터르구 무레슈의 거리와 프라제슈티의 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또한, 제24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 반토리 데 문테 대대는 미에르쿠레아 추크에 본부를 두고 있다.[8]
4. 1. 소련군 소환 및 실종
1945년 3월 2일, 슬로바키아 전선에서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 장군은 소련 제40군 사령관에게 소환되었다.[6] 한 시간 후, 루마니아 대표단은 아브라메스쿠와 제40군 사령관 필리프 즈마첸코 장군이 2차 우크라이나 전선의 지휘소로 출발했으며, 그곳에서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원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때문에 후대의 논평가들은 아브라메스쿠 장군이 체포되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루마니아 제4군은 니콜라에 더스칼레스쿠 장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그는 아브라메스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즈마첸코는 그에게 루마니아 국방부 또는 루마니아 참모총장에서 아브라메스쿠에 대한 정보를 찾으라고 조언했다. 소련 측에 따르면 아브라메스쿠는 1945년 3월 3일 그를 태운 차량에 대한 공습으로 사망했다. 그는 차량에 탑승한 유일한 사망자였다.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가 1945년 3월 23일에 발표한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아브라메스쿠는 차량의 앞 유리를 통해 날아온 총알에 맞았다.[2] 그는 부다페스트의 사살롬 지역 묘지에 묻혔다.[7]
4. 2. 사망 경위 논란
1945년 3월 2일, 슬로바키아 전선에서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 장군은 소련 제40군 사령관에게 소환되었다.[6] 한 시간 후, 루마니아 대표단은 아브라메스쿠와 제40군 사령관 필리프 즈마첸코 장군이 2차 우크라이나 전선의 지휘소로 출발했으며, 그곳에서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원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때문에 후대의 논평가들은 아브라메스쿠 장군이 체포되었다고 주장했다.루마니아 제4군은 니콜라에 더스칼레스쿠 장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그는 아브라메스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즈마첸코는 그에게 루마니아 국방부 또는 루마니아 참모총장에서 아브라메스쿠에 대한 정보를 찾으라고 조언했다. 소련 측에 따르면 아브라메스쿠는 1945년 3월 3일 그를 태운 차량에 대한 공습으로 사망했다. 그는 차량에 탑승한 유일한 사망자였다.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가 1945년 3월 23일에 발표한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아브라메스쿠는 차량의 앞 유리를 통해 날아온 총알에 맞았다.[2] 그는 부다페스트의 사살롬 지역 묘지에 묻혔다.[7]
또한 1945년 3월 3일, 아브라메스쿠의 아내 아델라와 그의 딸 펠리시아 아브라메스쿠-스터르자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그의 딸은 자살했다. 소련 자료에 따르면 이 일은 1945년 3월 6일에 일어났다.[6] 아델라는 1956년에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4. 3. 가족의 체포 및 수용소 생활
1945년 3월 3일, 아브라메스쿠의 아내 아델라와 그의 딸 펠리시아 아브라메스쿠-스터르자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6] 그의 딸은 시베리아에서 자살했다. 소련 자료에 따르면 이 일은 1945년 3월 6일에 일어났다.[6] 아델라는 1956년에 루마니아로 돌아왔다.4. 4. 유해 송환 및 추모 사업
2000년 10월 23일, 아브라메스쿠 장군의 유해는 루마니아로 돌아와 클루지나포카의 하종가르드 묘지에 군사적 예우를 갖춰 안장되었다.[8] 클루지나포카의 슈테판 첼 마레 광장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보토샤니, 브러일라, 터르구 무레슈의 거리와 프라제슈티의 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제24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 반토리 데 문테 대대는 미에르쿠레아 추크에 본부를 두고 있다.[8]5. 유산 및 평가
1945년 3월 2일, 슬로바키아 전선에서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 장군은 소련 제40군 사령관에게 소환되었다.[6] 이후의 정황으로 인해 후대 역사가들은 아브라메스쿠 장군이 체포되었다고 추정한다.
소련 측 주장에 따르면, 아브라메스쿠는 1945년 3월 3일 공습으로 사망했다. 그는 차량에 탑승한 유일한 사망자였다.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는 1945년 3월 23일 공식 보고서에서 아브라메스쿠가 차량 앞 유리를 통해 날아온 총알에 맞았다고 밝혔다.[2] 그는 부다페스트 사살롬 지역 묘지에 안장되었다.[7]
1945년 3월 3일, 아브라메스쿠의 아내 아델라와 딸 펠리시아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그의 딸은 그곳에서 자살했다.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이 사건은 1945년 3월 6일에 발생했다.[6] 아델라는 1956년에 루마니아로 귀환했다.
2000년 10월 23일, 아브라메스쿠의 유해는 루마니아로 돌아와 클루지나포카 하종가르드 묘지에 군사적 예우를 갖춰 다시 안장되었다. 클루지나포카 슈테판 첼 마레 광장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보토샤니, 브러일라, 터르구 무레슈의 거리와 프라제슈티의 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제24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 반토리 데 문테 대대는 미에르쿠레아 추크에 본부를 두고 있다.[8]
참조
[1]
웹사이트
6 martie 1945: Guvern general Avramescu sau dr. Petru Groza?
https://www.historia[...]
2021-03-06
[2]
웹사이트
Generalul Avramescu, "tătuca" soldaților români în al Doilea Război Mondial. A dispărut într-o operațiune NKVD
https://adevarul.ro/[...]
2017-05-13
[3]
서적
Das Deutsche Kreuz 1941 – 1945 Geschichte und Inhaber Band II
Verlag Klaus D. Patzwall
[4]
웹사이트
Ziua Armatei – Bătălia de la Carei – Ultima palmă de pământ românesc eliberată în Ardeal
https://www.defenser[...]
2021-03-06
[5]
웹사이트
Ședința Camerei Deputaților din 26 octombrie 2010: Ziua Armatei României
http://www.cdep.ro/p[...]
2021-03-06
[6]
웹사이트
Generalul Avramescu, trădător sau victimă a NKVD?
https://www.historia[...]
2020-02-23
[7]
웹사이트
2 martie 1945. Drama generalului Gheorghe Avramescu
https://www.art-emis[...]
Revista Art-Emis
2024-04-27
[8]
웹사이트
Batalionul 24 Vânători de Munte "General Gheorghe Avramescu", tabără de instrucție la munte
https://monitorulapa[...]
202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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