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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저 (헝가리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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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저(Géza)는 972년경 헝가리 대공이 된 인물이다. 그는 헝가리 대공 타소니의 장남으로, 중앙 집권 정책을 펼치며 무자비한 통치자로 알려졌다. 신성 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하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헝가리 최초의 로마 가톨릭 교구를 설립하는 등 종교 정책을 펼쳤다. 게저는 이슈트반 1세를 포함한 세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아들 이슈트반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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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저 (헝가리 대공)
기본 정보
"일루미네이티드 크로니클에 묘사됨"
칭호헝가리 대공
통치 기간970년대 초 – 997년
즉위식알려지지 않음
선임자탁쇼니
후임자이슈트반 1세
배우자샤롤트
아델라이데 (아들레타) 폴란드 공주 (?)
자녀유디트
마르가레트
이슈트반 1세
그리멜다, 베네치아 도제 부인
왕가아르파드 왕조
왕가 유형왕조
부친탁쇼니
모친알려지지 않음
출생 추정 시기약 940년
출생 장소알려지지 않음
사망 년도997년
사망 장소알려지지 않음
매장 장소알려지지 않음

2. 초기 생애

게저는 타소니와 헝가리 대공의 장남이었다.[1] 그의 어머니는 타소니의 아내였으며, 익명의 벨러 3세의 비서관은 《게스타 헝가로룸》에서 "쿠만족의 땅에서 온" 여성이었다고 밝혔다.[2] 이는 시대착오적인 쿠만족에 대한 언급으로, 그녀가 하자르, 페체네그 또는 볼가 불가리아 출신임을 시사한다.[3] 950년경 대공 아르파드의 후손들을 열거한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는 게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4] 줄러 크리스토는 게저가 940년경에 태어났으며, 황제가 그의 젊은 나이 때문에 그를 무시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의 이름은 "Gyeücsa" 또는 "Gyeusa"였으며, 튀르크어 칭호인 ''야브구''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저의 아버지는 그를 사롤트와 결혼시켰는데, 사롤트는 트란실바니아를 대공과 별개로 통치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헝가리 추장 줄러의 딸이었다. 사롤트는 헝가리의 동방 정교회를 따랐던 것으로 보이며, 브루노 폰 퀘르푸르트는 그녀의 "나태하고 혼란스러운 기독교"에 대해 언급했다.

3. 통치

게저 대공은 972년경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헝가리 대공이 되었다.[2] 그는 중앙집권 정책을 펼치며 왕권 강화를 추구했는데, 이로 인해 무자비한 통치자라는 평판을 얻었다.[3] 팔 엥겔은 게저가 친척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숙청"을 실시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972년경부터 아르파드 왕조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언급이 부족한 이유를 설명한다. 코파니는 트란스다누비아 남부 지역을 계속 통치했는데, 이는 이러한 언급 부족에 대한 유일한 예외였다.

972년, 오토 왕조와 마케도니아 왕조 사이의 결혼 동맹은 헝가리와 인접한 두 강대국 간의 화해를 가져왔다. 게저는 신성 로마 제국과 평화를 이루기로 결정했다. 972년경, 오토 1세가 보낸 브루노라는 수도사가 헝가리에 도착했다. 973년에는 헝가리의 사절단이 퀘들린부르크에서 황제가 주최한 회의에 참석했다.[2]

장크트 갈렌 수도원의 푸룬바르트 주교는 그의 "왕"을 포함한 많은 헝가리인들을 세례시킨 그의 성공에 대해 언급했다.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는 이교도 헝가리인들의 기독교 개종이 게저 치하에서 시작되었음을 확인하며, 그는 헝가리의 최초 기독교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세례명은 이슈트반이었다. 그러나 게저는 이교도의 의식을 계속 지켰는데, 이는 그의 기독교 개종이 결코 완전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4] 크리스토와 다른 역사가들은 헝가리의 최초의 로마 가톨릭 교구인 베스프렘 대교구가 게저의 통치기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게저의 아들 통치 기간에 발행된 헌장에는 게저가 베네딕토회의 판논할마 대수도원의 설립자라고 명시되어 있다.

983년, 게저는 오토 2세 황제의 죽음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발생한 내부 갈등을 이용하여 바이에른을 침략하여 멜크 요새를 점령했다. 991년, 바이에른인들은 반격을 시작하여 게저가 비엔나 숲 동쪽 지역에서 헝가리 군대를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996년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4세와의 평화 조약에서 라이타 강 동쪽의 영토를 포기했다. 게저는 또한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이슈트반과 하인리히 4세의 누이 기젤라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 결혼 동맹 이전에도 게저는 헝가리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그의 아들이 그를 계승할 권리를 확인하는 맹세를 하도록 강요했다.

4. 가족

사롤트는 게저에게서 적어도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슈트반 1세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딸이 있었다. 사롤트는 게저보다 오래 살았는데, 이는 그녀가 게저의 딸들의 어머니였음을 보여준다.[1] 폴란드-헝가리 연대기에서는 딸들의 어머니가 게저의 두 번째 아내로 추정되는 폴란드의 아델라이드라고 기록했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아델라이드는 폴란드-헝가리 연대기에만 언급되어 있으며, 미에슈코 1세의 여동생으로 묘사되지만, 전문가들은 종종 그녀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1]

다음 가계도는 게자의 조상과 그의 자손을 나타낸다.

아르파드
졸탄
터크쇼니
게저
사롤트미하일딸 (주디트?)
이슈트반 1세기젤라볼레스와프 1세가브릴 라도미르
성 에머리크아달베르트오토르세올로사무엘*헝가리 왕가
(1046년 이후)
프로차페테르 (헝가리)자손**


  • 머누머로트가 실제 인물인지 아니면 지어낸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1]
  • * 하자르 또는 페체네그 귀부인.[1]
  • ** 사무엘 아바는 게자의 사위가 아니라 손자였을 수도 있다.[1]

그들로부터 내려온 아바 가문은 14세기에 여전히 번성했다.[1]

5. 평가

게저는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헝가리 왕국 성립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서유럽과의 관계 개선 노력은 헝가리가 유럽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특히 신성 로마 제국과의 평화는 헝가리의 안정에 기여했다.[2]

헝가리의 게저 대공 (1664년)


하르트비히는 게저가 이교도 의식에 얽매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했으며, 영토 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환대와 안전을 베풀었다고 기록했다.[3] 장크트 갈렌 수도원의 기록에는 게저를 포함한 많은 헝가리인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2]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는 게저가 이교도 헝가리인들의 기독교 개종을 시작한 최초의 기독교 통치자라고 언급하며, 그의 세례명이 이슈트반이었다고 기록했다.[4]

하지만 게저는 이교도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이중적인 종교 행태를 보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는 게저가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전능하신 하나님과 다양한 거짓 신들에게 모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했다.[4]

또한 게저는 강압적인 통치 방식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친척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여 무자비한 통치자라는 평판을 얻었다.[2] 그의 아들의 생애에는 게저의 손이 "피로 더럽혀졌다"고 묘사되기도 했다.[2]

참조

[1] 서적 Anonymus, Notary of King Béla: The Deeds of the Hungarians
[2] 서적 The Chronicon of Thietmar of Merseburg
[3] 서적 Hartvic, Life of King Stephen of Hungary
[4] 서적 The Chronicon of Thietmar of Merse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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