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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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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파드는 마자르족 연합체의 첫 수장으로, 헝가리 건국 신화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9세기경에 태어났으며, 헝가리어로 보리를 뜻하는 '아르파'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하자르 카간국으로부터 헝가리 부족을 이끌도록 임명받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아르파드는 마자르인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불가리아를 공격했지만 패배 후 헝가리 평원으로 이주했다. 그는 904년 쿠르산이 사망한 후 마자르인의 최고 수장이 되었으며, 907년 사망했다. 아르파드는 헝가리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가계는 1301년까지 헝가리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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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파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러츠케베에 있는 아르파드의 동상
러츠케베에 있는 아르파드의 동상
이름아르파드
작위헝가리인의 대공
통치 기간895년경 – 907년경
대관식알려진 바 없음
전임자알모시
후임자졸탄 (불확실)
배우자알려진 바 없음
자녀리운티카
타르카추스
옐렉
유토차스
졸탄
왕조아르파드 왕조
아버지알모시
어머니알려진 바 없음
출생일845년경
출생지알려진 바 없음
사망일907년경 (62세 사망)
사망지알려진 바 없음
종교헝가리 이교
매장지페헤레지하저 (헝가리) (불확실)

2. 생애

아르파드는 마자르족 연합체의 첫 수장 알모시의 아들로, 9세기 후반 마자르족을 이끈 주요 지도자였다. 그는 부족 연합의 지도자로 선출된 후,[1] 페체네그족의 압박 등 외부 요인으로 인해 부족민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파티아 분지에 정착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쿠르산과 같은 다른 지도자들과 협력하거나 때로는 경쟁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904년경 쿠르산이 바이에른 귀족들에게 살해된 후, 아르파드는 마자르 부족 연합의 유일한 최고 통치자가 되어[8] 헝가리 대공국의 초기 기반을 다졌다. 그는 새로운 터전인 헝가리 평원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대한 군사 원정을 이끌었으며, 907년 오스트마르크 동방 변경백령을 침입하여 격파하는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나[11]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아르파드는 오늘날 헝가리 건국의 아버지이자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이야기는 여러 연대기와 전설의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헝가리 건국 신화에는 아르파드의 지팡이 끝에 빛나는 새가 앉아 길을 인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일본 신화의 금까마귀 설화와의 유사성으로 주목받기도 한다.

2. 1. 초기 생애

아르파드는 모든 헝가리 연대기에서 헝가리 부족 연합의 첫 번째 지도자로 언급된 알모시의 아들이었다.[1] 그의 어머니의 이름과 가문은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가 귤러 크리스토에 따르면, 아르파드는 845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헝가리어로 보리를 뜻하는 단어인 '아르파'(árpa)에서 유래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7세 (재위: 913–959)는 헝가리인들이 아르파드 이전에는 "어떤 시대에도 다른 군주를 가진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헝가리 연대기에서 아르파드의 아버지 알모시의 지위에 대한 기록과는 상반된다.[1] 콘스탄티노스 7세의 설명에 따르면, 하자르의 카간은 헝가리 부족에 대한 자신의 종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휘 체계를 중앙 집권화하려 했다. 카간은 처음에 레베디라는 추장을 헝가리인들의 지도자로 임명하려 했으나, 레베디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알모시나 아르파드를 추천했다. 카간이 이 제안을 헝가리인들에게 전달하자, 그들은 아르파드가 "지혜와 조언, 용맹으로 널리 존경받았고 이 통치를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보다 아르파드를 선호했다.[1] 이후 아르파드는 "하자르의 관습에 따라 방패 위에 올려져" 군주(ἄρχων|아르콘el)로 추대되었다.[1] 콘스탄티노스 7세는 아르파드를 "튀르크의 대군주"( ὁ μέγας Τουρκίας ἄρχωνel )라고 칭했는데,[1] 이는 당시 헝가리인들이 튀르크족의 유전적, 문화적 영향을 일부 받았고 사회 구조가 튀르크 기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으로는 튀르크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잘못된 명칭이었다.[2][3][4]

아르파드의 선출에 대한 비잔틴 황제의 기록의 신뢰성은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빅토르 스피네이는 이 기록이 "다소 모호하고 거의 믿을 수 없다"고 평가하는 반면, 안드라스 로나-타스는 그 핵심 내용이 신뢰할 만하다고 보았다. 로나-타스는 아르파드의 선출이 아버지 알모시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알모시가 레베디에게 신성한 통치자(''켄데'', kende) 지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고 덧붙인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아르파드는 레베디의 뒤를 이어 ''켄데''가 되었고, 이를 통해 그의 아버지 알모시는 헝가리인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군사 통치자(''귤라'', gyula)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2. 2. 헝가리 정복을 향해

아르파드의 생애에 대한 가장 오래된 신뢰할 만한 자료는 10세기 초 기록인 수도사 죄르지의 연대기 속편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 6세 현제(재위 886–912)는 894년 또는 895년에 니케타스 스클레루스를 마자르족에게 사절로 보내 "선물을 주고" 그들을 불가리아 제국에 맞서 싸우도록 부추겼다. 스클레루스는 도나우강 하류에서 마자르족의 두 지도자, 아르파드와 쿠르산을 만났다. 스클레루스의 임무는 성공하여, 마자르 군대는 비잔티움 선박을 타고 도나우강을 건너 불가리아를 공격했다. 포르피로옌니토스의 기록에 삽입된 부분에 따르면, 이 침공군은 아르파드의 아들인 리운티카가 지휘했다.

스클레루스와의 협상 당시 아르파드와 쿠르산의 위계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스피네이는 아르파드가 군사 지도자인 ''귤라''였고 쿠르산이 종교 지도자인 ''켄데''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크리스토는 쿠르산이 ''귤라''였고 아르파드는 당시 ''켄데''였던 아버지 알모시를 대표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베레니 (세켈리베레, 루마니아)의 아르파드 흉상
세켈리베레 (베레니, 루마니아)의 아르파드 동상


마자르 군대는 불가리아 군대를 격파했지만, 불가리아는 이에 맞서 페체네그족을 끌어들였다. 불가리아와 페체네그족은 895년 또는 896년에 폰토스 스텝 서부 지역에 있던 마자르족의 영토를 동시에 침공했다. 페체네그족이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하자, 마자르족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판노니아 평원으로 새로운 고향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는 헝가리인의 카르파티아 분지 정복의 시작이었다.

''삽화 연대기''는 아르파드의 아버지 알모스가 "판노니아에 들어갈 수 없었고, 에르델" 즉 트란실바니아에서 살해되었다고 기록한다.[6] 이 기록의 신뢰성을 인정하는 엥겔, 크리스토, 몰나르 등은 알모스의 죽음이 백성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행해진 하자르의 카간 희생 의식과 유사한 의례적 살해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반면, 로나-타스는 알모스의 살해 기록이 사실이라면 "아르파드나 그의 측근 중 누군가가" 나이 든 군주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유일한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스피네이는 ''삽화 연대기''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데, 이는 ''헝가리인의 업적''(Gesta Hungarorum)에서 알모스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 웅바르(우크라이나 우주호로드) 포위 공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연대기에서는 알모스가 이 시기에 아르파드를 마자르족의 "지도자이자 주군"으로 임명했다고 전한다.[7]

2. 3.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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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파드의 이름은 9세기 말과 10세기 초 카르파티아 분지의 주요 세력이었던 동프랑크 왕국에서 작성된 동시대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시기 동프랑크의 기록인 ''알레마니 연대기''나 ''아이신들렌세 연대기'' 등에서는 다른 헝가리 지도자인 쿠르산만이 언급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쿠르산이 군사적 실권을 쥔 지휘관(''귈러'')이었고, 아르파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신성한 지도자(''켄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쿠르산이 ''켄데''였고 아르파드는 그가 904년 바이에른인들에게 살해된 후에야 군사 지휘관인 ''귈러''가 되었다는 상반된 견해도 존재한다.[8]

이러한 동시대 기록의 부족함과 대조적으로, 사건 발생 수 세기 후에 쓰인 헝가리 연대기들, 예를 들어 ''헝가리인의 사적''이나 ''삽화 연대기'' 등은 카르파티아 분지 정복 과정에서 아르파드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특히 ''헝가리인의 사적''은 아르파드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관대함을 강조하며, 일곱 헝가리 부족 지도자 중 한 명인 테테니조차 아르파드의 승인을 받은 후에야 트란실바니아 지역을 확보했다고 기록하여 아르파드의 주도적인 위치를 부각시킨다.[9]

''헝가리인의 사적''은 아르파드가 다뉴브강을 건너 부다펠헤비즈에 도착했을 때, 판노니아에 살던 로마인들이 모두 도망쳤다고 묘사한다. 다음 날 아르파드와 그의 군대가 아퀴쿰에 입성하여 옛 훈족 아틸라 왕의 도시와 궁전을 보고 감탄하며 기뻐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아르파드가 아틸라의 후예임을 강조하며, 그가 싸우지 않고 도시를 차지한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또한 아르파드가 아틸라의 궁전에서 잔치를 베풀고,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토지와 재산을 나누어주는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고 묘사한다.

: 다뉴브 강을 건너, 그들은 부다펠헤비즈까지 다뉴브 강 옆에 진을 쳤다. 이것을 듣고, 판노니아 땅에 살던 모든 로마인들은 도망쳐서 목숨을 구했다. 다음 날, 아르파드 공작과 그의 모든 주요 인물들은 헝가리의 모든 전사들과 함께 아퀴쿰에 들어갔고, 그들은 모든 왕궁을 보았는데, 어떤 것들은 기초까지 파괴되었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았으며, 그들은 석조 건물에 대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감탄했고, 훈족아틸라 왕의 도시를 싸우지 않고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으며, 그의 혈통에서 아르파드 공작이 나왔다. 그들은 아틸라 왕의 궁전에서 매일 큰 기쁨으로 잔치를 벌였고, 서로 나란히 앉아 있었으며, 모든 시타와 피리의 멜로디와 달콤한 소리, 그리고 모든 음유시인의 노래가 그들에게 선사되었다... 아르파드 공작은 그들과 함께 머무르는 손님들에게 큰 토지와 재산을 주었고, 그들이 이것을 듣자 많은 손님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기꺼이 그와 함께 머물렀다.[10]

아르파드는 원래 러시아 남부 볼가강 유역에 있던 마자르인의 대수장으로, 주로 군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적대적인 튀르크계 페체네그족의 압박을 받아, 공동 통치자이자 종교적 최고 지도자(''켄데'')였던 쿠르산과 함께 마자르 부족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였고, 결국 도나우강 중류의 헝가리 평원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곳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독일 남동부의 바이에른, 이탈리아 등 주변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이어나갔다.

904년, 공동 통치자였던 쿠르산이 바이에른 귀족들이 꾸민 거짓 연회에 초대받아 갔다가 수행원들과 함께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아르파드는 마자르인의 유일한 최고 지도자로서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단독 통치자가 된 아르파드는 907년 오스트리아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트마르크 동방 변경백령을 침공하여 격파하는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같은 해 스위스 지역에서는 프랑크 왕국 군대에게 큰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 아르파드는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헝가리인의 사적''은 아르파드가 "헝가리의 주요 인물들과 전사들의 맹세"를 받고, 살아있을 때 아들인 졸탄 공작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1] 그러나 이 기록의 정확성이나 ''헝가리인의 사적''에 나오는 대공들의 계승 순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950년경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가 ''제국 통치론''을 저술할 당시 헝가리를 통치했던 파이시가 이 연대기의 대공 목록에서는 누락되어 있다.

사망 이후 아르파드는 오늘날까지 헝가리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여러 연대기와 노래의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헝가리 건국 신화에서는 아르파드의 지팡이 끝에 빛나는 새가 앉아 길을 인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일본 신화의 금까마귀 설화와의 유사성으로 주목받기도 한다.

2. 4. 죽음

나지메게르 (슬로바키아 Vel'ký Meder)의 아르파드 동상


아르파드의 사망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 논쟁의 대상이다. 《헝가리인의 사적》은 그가 907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 크리스토는 《헝가리인의 사적》이 헝가리의 "영토 점령" 시작 연도를 실제 연도인 895년경이 아닌 90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르파드가 실제로는 900년 또는 그 이후에 사망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907년 아르파드는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던 오스트마르크 동방 변경백령을 침입하여 격파했으나, 이후 스위스에서 프랑크 왕국 군대에게 크게 패배하여 철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헝가리인의 사적》에 기록된 그의 장례식에 대한 내용이 신뢰할 만하다면, 아르파드는 "아틸라 왕의 도시로 돌 관을 통해 흐르는 작은 강 상류"에 묻혔으며, 약 한 세기 후에 그 장소 근처에 부다 인근의 페헤레지하저라는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11]

3. 가족

아르파드는 마자르 연대기에서 마자르족 연합체의 첫 수장으로 언급되는 알모시의 아들이다.[12] 그의 어머니의 이름과 가문은 알려져 있지 않다.[13] 아르파드의 아내 역시 이름과 가문이 전해지지 않는다.

헝가리인의 도착 (사이클로라마)의 세부 사항
아르파드 페스티의 그림 ''헝가리인의 도착''에 묘사된 아르파드의 아내(추정).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옌니토스(913년~959년 재위)의 기록에 따르면 아르파드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타르카초우스(Tarkatzous), 둘째는 이에렉(Ielek), 셋째는 이우토트자스(Ioutotzas), 넷째는 잘타스(Zaltas)이다.[12]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7세는 다른 기록에서 아르파드의 아들로 리운티카스(Liountikas)를 언급하기도 했다. 사학자 쥴러 크리스토는 리운티카스(리윈티카)가 타르카초우스(타르호스)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13]

아르파드의 후손들은 아르파드 왕조를 이루어 1301년까지 헝가리를 통치했다. 그의 아들 졸탄을 거쳐 손자인 탁소니의 후손들이 이후 모든 마자르 대공과 헝가리 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다른 아들들의 후손으로는 타르카초우스의 아들 테벨리(Tebeli)와 제린드, 이우토트자스의 아들 팔리치 등이 있다. 또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르파드의 아들을 통해 손자 타스(Tas)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 유산

헝가리인들은 아르파드의 지휘 아래 카르파티아 산맥 안쪽에 새로운 고향을 마련했다. 아르파드는 ''헝가리인의 사적''에서 "헝가리 정복"과 관련된 거의 모든 중요한 사건의 중심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1301년 그의 직계 남성 후손이 끊어질 때까지 헝가리는 아르파드로부터 내려온 "단일 왕자 가문"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아르파드는 헝가리인들 사이에서 '우리 고향의 창시자'라는 의미의 ''honalapító''로 불리며 존경받는다.

오늘날까지 아르파드는 헝가리의 민족적 영웅으로 여겨지며, 오래된 연대기나 많은 가요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특히, 헝가리 건국 신화에는 아르파드 왕이 가진 지팡이 끝에 빛나는 새가 앉아 길을 밝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금까마귀와의 관련성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참조

[1] 문서 Constantine Porphyrogenitus: De Administrando Imperio
[2] 서적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to the 19th Century: The So-called Tartars of Russia and Central Asia https://books.google[...] Cosimo, Inc. 2008
[3] 서적 Transylvania in the medieval Hungarian kingdom (896-1526) Social Science Monographs, University of Michigan, Columbia University Press, East European Monographs 2001
[4] 간행물 A MAGYAROK TÜRK MEGNEVEZÉSE BÍBORBANSZÜLETETT KONSTANTINOS DE ADMINISTRANDOIMPERIO CÍMÛ MUNKÁJÁBAN http://nadasdymuzeum[...] SAVARIAA VAS MEGYEI MÚZEUMOK ÉRTESÍTÕJE28 SZOMBATHELY 2004
[5] 문서 The Taktika of Leo VI
[6] 문서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7] 문서 Anonymus, Notary of King Béla: The Deeds of the Hungarians
[8] 문서 Anonymus, Notary of King Béla: The Deeds of the Hungarians
[9] 문서 Anonymus, Notary of King Béla: The Deeds of the Hungarians
[10] 문서 Anonymus, Notary of King Béla: The Deeds of the Hungarians
[11] 문서 Anonymus, Notary of King Béla: The Deeds of the Hungarians
[12] 문서 Constantine Porphyrogenitus: De Administrando Imperio
[13] 문서 Constantine Porphyrogenitus: De Administrando Impe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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