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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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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궁예는 신라 왕족의 서자로 추정되며, 후삼국시대의 인물이다. 출생 당시 불길한 징조로 인해 버려졌으나 유모에 의해 길러졌고, 승려가 되었다. 이후 군벌 세력에 의탁하며 세력을 키워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미륵을 자처하며 종교적 권위를 내세웠으나, 말년에 폭정을 일삼아 신하들에게 축출되어 사망했다. 궁예는 왕건에 의해 폐위되었고, 고려 건국 이후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에는 그의 실제 성격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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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궁예의 초상화
궁예 초상화
이름궁예
한자弓裔
로마자 표기Gung Ye
출생
사망918년 7월 24일
종교불교
즉위 정보
왕국태봉
즉위901년 7월
재위 시작901년 7월
재위 종료918년 7월 24일
이전 왕왕조 성립
다음 왕왕조 폐지
(고려 태조로서의 고려의 첫 번째 왕)
섭정구진 (905년–906년)
왕건 (912년–913년)
가족 관계
배우자강왕후
자녀총광
신광
순백
아버지헌안왕
왕호 및 연호
시호선종
연호무태 (武泰; 904년)
성책 (聖冊; 905년–910년)
수덕만세 (水德萬歲; 911년–914년)
정개 (政開; 914년–918년)
기타 정보
다른 이름미륵 (彌勒)

2. 생애

궁예의 생애는 불분명한 점이 많으나,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신라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로, 음력 5월 5일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 특이한 징조가 있었고, 단오에 태어난 아이는 불길하다는 믿음 때문에 왕명으로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유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었고, 유모와 함께 도망가 자랐다.[27]

10여 세 무렵, 유모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듣고 세달사(世達寺)[28]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스스로를 선종(善宗)이라 칭했다. 훗날 궁예의 측근이 된 종간도 세달사에서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29]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 까마귀가 '왕(王)' 자가 새겨진 물건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을 예감했다고 한다.

진성여왕 때 신라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 징수로 인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891년, 궁예는 죽주(현재의 경기도 안성시)의 기훤(箕萱)에게 갔으나, 무례한 대우에 892년 북원경(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의 양길(梁吉)에게 투항했다.

894년 명주(溟州)를 무혈 점령하고 3,500명의 병력을 얻었다.[24]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고 전리품을 공평하게 분배하여 인망을 얻었다.[24] 895년 동해를 따라 북상하여 영서 지방을 점령하고, 철원 등 10여 군현을 장악하여 지금의 강원도 전 지역을 차지했다. 896년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王隆)이 항복하자, 그의 아들 왕건을 등용했다.[33] 898년 7월,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건을 시켜 양주청주 등 30여 성을 정벌하게 했다.

899년, 소백산맥 이북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공략하게 했지만,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궁예는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을 격파했다.[34] 900년,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 국원경(충주), 청주, 당성(唐城), 괴양(槐壤) 일대를 정벌하게 하여[34] 광주를 평정하고, 국원경과 청주, 괴양의 적수 청길(淸吉), 신훤(莘萱) 등의 항복을 받았다. 901년 7월, 스스로 고려왕(후고구려왕)을 칭하고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904년 국호를 마진[35]으로 고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905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청주 지역 백성을 이주시켰다.[36] 911년 국호를 태봉[3][4]으로 변경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며 종교적으로 신격화하려 했다.[35] 그러나 석총(釋總)과 같은 승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석총을 철퇴로 쳐 죽였다.[35]

말년에 궁예는 폭정을 일삼고 관심법(觀心法)을 주장하며 많은 사람을 숙청했다.[12] 부인 강(康)씨와 두 아들마저 잔혹하게 살해했다.[14][3]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을묘일), 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정변을 일으켰다.[40]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도망쳤으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1] 궁예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하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궁예의 출생은 불분명하나,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신라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로, 음력 5월 5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태어날 때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이빨이 나 있는 등 특이한 점이 있었다. 당시 단오에 태어난 아이는 불길하다 여겼고, 일관 역시 궁예를 불길하게 여겨 왕에게 아뢰어 죽이려 하였다. 왕명으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으나, 유모가 밑에서 받아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이 궁예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을 잃게 되었고,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그를 길렀다.[27]

궁예가 10여 세가 되었을 무렵, 유모는 말썽만 일으키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렸다. 궁예는 슬퍼하며 집을 나와 세달사(世達寺)[28]에 의탁하여 승려가 되었고, 스스로를 선종(善宗)이라 칭하였다.

《삼국사기》는 궁예가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고 전한다. 훗날 궁예의 측근이 된 종간 역시 승려 출신으로, 세달사 시절 궁예와 알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9] 세달사에서 승려로 지내던 궁예는 어느 날 까마귀가 '왕(王)' 자가 새겨진 상아 조각을 자신의 바리때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장차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

진성여왕 때부터 신라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 징수로 인해 각지에서 도적들의 봉기가 잇따랐다. 891년, 궁예는 절을 떠나 죽주(竹州,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의 군벌 기훤(箕萱)을 찾아갔으나, 기훤이 오만하고 무례하게 대하자 이듬해인 892년 기훤의 휘하에 있던 원회(元會), 신훤(申煊)과 함께 기훤 세력을 떠나 북원경(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의 군벌 양길(梁吉)의 휘하에 들어갔다.

2. 1. 1. 출생 관련 이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신라 헌안왕 혹은 경문왕과 그의 빈어(嬪御) 사이에서 태어난 왕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27] 그러나, '태봉의 궁예정권'을 쓴 조인성을 비롯한 소장 학자들은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궁예를 신라 왕의 아들로 조작했다는 설을 주장한다. 즉, 신라 왕자이면서도 조국인 신라를 철저히 적대시하는 패륜아로 묘사하여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궁예를 고구려 유민 출신의 평범한 승려로 보았고, 조인성 등 현대 학자들은 몰락한 신라 진골 귀족 출신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궁예가 고구려 부흥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한 고구려국의 지배자 안승의 직계 후손이라는 설을 제기한다. 신라 기록에 따르면 고안승은 신라 왕실의 성씨인 "김"씨를 하사받았다. 따라서 궁예가 신라 왕족 출신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지만, 신라 왕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17]

학계 일각에서는 궁예를 헌안왕의 서자로 보기도 하지만, 헌안왕에게는 두 딸만 있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왕자를 죽일 이유가 없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2. 2. 세력 형성 및 후고구려 건국

891년, 궁예는 죽주(현재의 안성)의 도적 두목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으나, 기훤이 무례하게 대하자 892년 북원의 양길(梁吉)에게 투항했다.[24]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894년에는 명주(溟州)를 무혈 점령하고 3,500명의 병력을 얻어 14개의 부대를 편성했다.[24] 궁예는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고 전리품을 공평하게 분배하여 인망을 얻었다.[24]

895년, 동해를 따라 북상하여 영서 지방으로 이동, 저족, 성주(화천), 부약(금화), 금성(금화군), 철원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여 지금의 강원도 전 지역을 장악하고 이듬해 철원을 도읍으로 삼았다. 궁예의 세력이 커지자 예성강 이북 지역 호족들이 투항했다.

896년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王隆)이 항복하자,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에 임명하고, 왕륭의 아들 왕건을 등용하여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고 성주로 임명했다.[33] 혹은 왕건을 철원군태수에 임명했다는 기록도 있다.[26] 898년 7월, 궁예는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건을 시켜 양주청주 등 30여 성을 정벌하게 했다.

899년,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공략하게 했지만, 전투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궁예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북원의 양길은 한산주 지역 호족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공격했지만, 궁예는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을 격파했다.[34]

900년,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 · 국원경(충주) · 청주 · 당성(唐城) · 괴양(槐壤) 일대를 정벌하게 하여[34] 광주를 평정하고, 국원경과 청주 · 괴양의 적수 청길(淸吉) · 신훤(莘萱) 등의 항복을 받았다. 901년 7월, 스스로 고려왕(후고구려왕)을 칭했다. 궁예는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켜 평양의 옛 도읍에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그 원수를 내가 갚겠다"고 선언하며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2. 3. 태봉(泰封)으로 국호 변경 및 통치

904년 궁예는 국호를 마진[35]으로 고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905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청주 지역 백성을 이주시켰다.[36]

왕건은 906년 상주에서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910년에는 나주 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했다. 912년 궁예는 왕건과 함께 덕진포로 진출해 견훤을 패배시키고 나주를 다시 되찾았다.[37] 이러한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궁예의 판도는 크게 확장되었다.

911년 국호를 태봉[3][4]으로 변경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2. 3. 1. 종교적, 개인적 신격화 시도

궁예는 911년 스스로를 현세의 미륵이라 칭하며, 금관을 쓰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을 타고 행차했다. 행차 앞뒤로는 향로를 든 남녀 어린아이들을 세웠고, 자신의 두 아들을 각각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 불렀다. 또한 불교 경전 20권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35]

하지만 당시 승려 석총(釋總)은 궁예가 지은 불경을 "요사스러운 말"이라며 혹평했고, 분노한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쳐 죽였다.[35]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진 형미나, 궁예의 최측근이었다가 등을 돌린 최응, 왕유(박유) 등의 예를 보아도, 궁예의 신격화에 대한 불교계와 유학자들의 반발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4. 몰락과 최후

궁예는 말년에 폭정을 일삼았으며,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고 관심법(觀心法)을 주장하며 많은 신하와 백성을 숙청했다.[12] 특히 자신의 부인 강(康)씨를 간통죄로 몰아 붉게 달군 쇠막대기로 잔혹하게 살해하고, 두 아들마저 처형하는 등 패륜적인 행위를 저질렀다.[14][3]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을묘일), 궁예의 숙청에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 4명의 장수와 일부 청주 세력, 패서 지역 호족, 유학자 관료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정변을 일으켰다.[40] 이들은 궁예의 지나친 폭정과 민심 이반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정변 당시 중앙 군사력이 약화된 틈을 타 거사를 성공시켰다.[40]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도망쳤으나, 객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1] 《삼국사기》에는 화전민에게, 《고려사》에는 굶주림에 지쳐 보리 이삭을 먹다가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자결했다고 전해진다.[41]

궁예의 죽음에 대한 민간 전승은 다양하다. 포천 산정호수철원군 갈말읍 인근의 명성산 전설은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한 산새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명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42] 철원의 보개산성, 운악산성, 명성산성 등에는 궁예가 왕건에게 맞서 항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42] 반면, 궁예의 정치적 고향인 철원 지역에는 죄 없는 사람을 무수히 죽이고, 18세 여자의 유방을 먹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는 부정적인 전승도 존재한다.[43]

궁예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하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했다. 그러나 한동안 왕건에 반대하는 친궁예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에 귀부하기도 했다.

3. 평가와 영향

궁예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나뉘며, 역사적 의의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궁예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895년 동해를 끼고 북상해 여러 군현을 점령하여 세력 기반을 다졌고, 896년에는 왕건을 발어참성 성주로 임명하였다.[33] 899년에는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을 수중에 넣었고, 901년에는 스스로 고려(후고구려)왕을 칭했다.[18] 903년에는 금성(나주)을 점령하여 영토를 넓혔다. 또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며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려 했다.[3]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궁예는 말년에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고, 결국 부하들에게 축출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40] 관심법을 주장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숙청하고, 신라 출신 귀순자들을 학살하는 등 독재적이고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13][3]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궁예를 축출한 왕건 세력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왕건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궁예의 폭정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고려사》 홍유 열전과 《고려사》 세가 934년 왕건의 조서 기록들에는 궁예가 재위 말년에 가서야 폭군이 되었다는 힌트를 주는 내용도 있다.[40]

궁예가 폭군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왕조 측의 조작이 있었을 수 있지만, 전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에서 지나치게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궁예의 초기 지지기반은 신라 말의 초적으로, 신라 조정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조인성(2008)은 궁예의 신라 귀순자 대량 학살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신라 지배층에 한정된 학살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등 왕건의 역성혁명 1등 공신들 중 일부가 신라 출신이라는 점은 궁예가 신라 출신 귀순자들을 모두 학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40]

궁예는 석총을 비롯한 불교계 인사들과 최응을 비롯한 유학자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석총은 궁예가 지은 경전을 혹평하다 죽임을 당했고, 형미 역시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 유학자 최응은 왕건을 살려준 후 궁예를 등졌고, 왕유(본명 박유)와 송함홍, 백탁, 허원 등도 궁예의 행동에 반감을 가졌다.[40]

궁예는 말년에 편집증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초능력으로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많은 신하들을 반역죄로 몰아 죽였다.[13] 자신의 부인 강씨를 간통죄로 몰아 붉게 달군 쇠막대기를 자궁에 찔러 죽였고, 두 아들도 함께 처형하였다.[14][3] 그 결과,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최측근 장군 네 명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 태조로 즉위시켰다.[2][12]

비록 궁예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궁예의 실제 성격을 재평가하려 하고 있다.

3. 1. 긍정적 평가

궁예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895년 궁예는 동해를 끼고 북상해 저족, 성주(화천), 부약(금화), 금성(금화군), 철원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여 세력 기반을 다졌고, 이듬해 철원을 자신의 도읍으로 삼았다.[34] 896년에는 송악의 왕륭이 항복하자, 그의 아들 왕건을 발어참성 성주로 임명하였다.[33] 899년에는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을 수중에 넣었다.[34] 901년에는 스스로 고려왕(후고구려왕)을 칭했다.[18] 903년 3월, 수군으로 후백제의 주요 해상 거점이었던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을 점령하여 영토를 넓혔다.

궁예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며,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려 노력했다. 그는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청해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평양의 옛 도읍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그 원수를 내가 갚겠다"고 선언했다.[3]

초기에 궁예는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민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고려 건국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왕건의 통치를 거부하고 새로 건립된 왕조에 반기를 들었으며, 심지어 견훤의 후백제로 자발적으로 귀순한 사람들도 있었다.

3. 2. 부정적 평가

궁예는 말년에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고, 결국 부하들에게 축출되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40] 관심법을 주장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숙청한 것은 독재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평가된다.[13] 신라 출신 귀순자들을 학살하는 등 편협하고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3]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대부분 궁예를 축출한 왕건 세력에 의해 편찬되었고, 왕조 시대의 흥망사관에 입각해 왕건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궁예의 잔인함, 난폭함, 폭정을 강조하는 면이 크다. 그러나 《고려사》 홍유 열전과 《고려사》 세가 934년 왕건의 조서 기록들에는 말년에 가서야 폭군이 되었다고 말해주는 기록들도 있어, 실제로는 재위 말년에 가서야 궁예가 비로소 폭군이 되었다는 것에 힌트를 주는 면도 있다.[40]

궁예가 폭군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왕조 측의 조작이 있었겠지만, 그가 전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에서 너무나 무리하고 과격한 수들을 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하는 기록은, 신라 왕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원한을 품고 행한 감정적인 행동으로만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처음 일어날 당시의 지지 기반과 왕건과의 차이점, 신라로부터의 귀순자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궁예의 행동에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부여되고 있다.[3]

궁예의 초기 지지기반은 신라 말의 초적으로, 이들은 신라 왕실과 진골 귀족들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다 못해 무장화하여 도적으로까지 불리게 된 이들로서 신라 조정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정통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이 신라 귀순자들을 너그럽게 다 받아주었던 것과는 달리, 초적을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룬 궁예로서는 신라 조정이나 그로부터 귀순해온 세력들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일 수만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2008년 조인성의 저서 (태봉의 궁예정권) 195P를 보면 궁예의 신라 귀순자 대량 학살은 과장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궁예의 신라 출신 귀순자 학살은 당시 신라의 지배층들에 한정된다고 나온다. 더 나아가서 궁예는 신라에서 넘어온 귀족 모두를 학살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918년 왕건의 역성혁명 때 왕건을 황제로 만드는데 1등 공신들이였던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을 보면 이중에 홍유는 신라 지역인 경북 의성 출신이고, 배현경은 본관이 경주 배씨인 것을 감안하면 잘 알 수 있다. 궁예가 신라 출신 귀순자들을 모조리 학살했다면 이들이 궁예가 다스리던 나라의 고위급 장군이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40]

궁예가 지은 경전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 교훈거리가 될 수 없다."고 혹평하여 궁예에게 살해된 석총과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해, "진표의 제자인 석충(釋忠)이 간자 108개를 태조에게 바쳤다."고 적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석총과 《왕대종족기》의 석충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궁예가 지향했던 불교와 석총의 불교가 같은 법상종 계열이면서도 궁예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중심이었던 데 반해서 석총은 미륵보살, 지장보살 중심이었던 차이점이 지적되어, 양자간에 알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며 적어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감정적으로 울컥해서 죽이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되었듯이 근본적으로 석총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종파를 떠나서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정통 불교의 승려로서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917년에 선종 계열의 승려로, 후백제 지역에서 건너와 활동했던 형미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져,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불교계가 거센 반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자들의 경우도 본래 궁예의 최측근이였다가 궁예에게 죽을뻔한 왕건을 살려준후, 궁예를 등지고 왕건의 최측근이 된 유학자 최응과 태봉 시절 궁예의 태자인 청광보살의 사부였던 동궁기실로 있다가 궁예의 왕비 강씨와 강씨의 두 아들이 처형된 전후에 궁을 탈출해 승려가 되었다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집권한 후 돌아와 왕건의 신료가 되어 왕건에게 최초로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유(본명 박유)의 경우와 궁예가 몰락한 해인 918년 3월, 왕창근이 한 기이한 노인에게서 얻은 거울에 적힌 왕건이 궁예를 멸망시킨 후 삼한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내용의 은어로 된 글들을 해석한 후, 왕건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서 왕건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궁예의 문인들인 송함홍, 백탁, 허원 등의 경우들을 봐도, 대개의 유학자들과 유학 계열의 문인들 역시,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신으로서의 숭배를 강요하는 궁예의 행동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40]

궁예는 말년에 편집증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초능력으로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많은 신하들을 마음대로 반역죄로 몰아 죽였다.[13] 자신의 부인 강씨를 간통죄로 몰아 붉게 달군 쇠막대기를 자궁에 찔러 죽였고, 두 아들도 함께 처형하였다.[14][3] 그 결과,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최측근 장군 네 명이 궁예를 몰아내고, 당시 재상이었던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 태조로 즉위시켰다.[2][12] 궁예는 궁궐에서 도망쳤다고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나 도둑으로 오인한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15]

궁예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통치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궁예의 실제 성격을 재평가하려 하고 있다. 고려 시대 많은 역사가들이 왕건이 궁예를 폐위시킨 쿠데타를 정당화하여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하려 했기 때문에 궁예에 대한 역사 기록은 부정적이다.[18] 그러나 고려 건국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왕건의 통치를 거부하고 새로 건립된 왕조에 반기를 들었고, 심지어 견훤의 후백제로 자발적으로 귀순한 사람들도 있었다. 왕건이 왕위에 오른 쿠데타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궁예의 통치를 지지했고,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그가 완전한 폭군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궁예의 불교적 자칭을 그의 권력 강화 시도로 설명한다. 그는 신라 왕족이었지만, 강력한 지방 토호와 상인들에게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에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의 힘을 이용하려 했지만 효과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해석한다.[3]

3. 3. 역사적 의의

궁예는 비록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궁예의 실제 성격을 재평가하려 하고 있다. 고려 시대 많은 역사가들이 왕건이 궁예를 폐위시킨 쿠데타를 정당화하여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하려 했기 때문에 궁예에 대한 역사 기록은 부정적이다.[18] 그러나 고려 건국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왕건의 통치를 거부하고 새로 건립된 왕조에 반기를 들었고, 심지어 견훤후백제로 자발적으로 귀순한 사람들도 있었다. 왕건이 왕위에 오른 쿠데타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궁예의 통치를 지지했고,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그가 완전한 폭군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궁예의 불교적 자칭을 그의 권력 강화 시도로 설명한다. 그는 신라 왕족이었지만, 강력한 지방 토호와 상인들에게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에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의 힘을 이용하려 했지만 효과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해석한다.[3]

4. 대중문화 속 궁예

21세기에 이르러 애꾸눈에 승려라는 외모가 묘하게 재미있어서 인터넷 밈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인기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보스급 캐릭터 사가트도 궁예와 똑같이 애꾸눈에 대머리인지라 같이 엮여서 인터넷 밈이 되는 경우도 많다.

제목방영 연도방송사배우
왕자 미륵1959년방수일
태조 왕건1970년박암
태조 왕건2000년~2002년KBS김영철, 맹세창
제국의 아침2002년~2003년KBS김영철
《SNL 코리아》2014년 ~ 2016년김민교, 마리오
나 혼자 산다2016년기안84
코미디빅리그 2018 궁예》, 《코미디빅리그 2018 장희빈》2018년이진호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2018년고세원(다 꿰뚫어보고 있느니라 궁예)
코미디빅리그 2018 궁예》, 《아는 형님 175회》2019년김희철
《스튜디오 룰루랄라》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KQLF4sAvwmmC5HEezSFXtQ5mjaGOfzdz 관종투어]2019년장성규
천일야사 비사 73화2018년[19]
독자를 위한 작가2018년외눈박이 미륵 또는 미륵왕[20]


5. 가계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가족에 대해 왕비 강씨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신광청광이라 불린 아들은 강씨 소생인 것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46] 조정이 편찬한 기록 외에 후대의 광산 이씨가 궁예의 첫째 아들 신광의 후손을 자처했으며 순천 김씨 또한 둘째 청광의 후손을 자처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두 가문 모두 인정하지 않고 있다.

관계이름
아버지헌안왕
어머니미상
왕후강비
장남신광(神光)
차남청광(淸光)


참조

[1] 서적 Korea through the Ages
[2] 웹사이트 Gung Ye http://people.aks.ac[...] 2012-02-27
[3] 웹사이트 Gung Ye http://100.nate.com/[...] 2011-06-10
[4] 웹사이트 Gung Ye http://100.naver.com[...]
[5] 웹사이트 Queen Jinseong http://100.naver.com[...]
[6] 서적 Korea through the Ages
[7] 서적 Korea through the Ages
[8] 웹사이트 Gi Hwon http://people.aks.ac[...] 2011-07-22
[9] 웹사이트 Yang Gil http://100.naver.com[...]
[10]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11]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12] 서적 Korea through the Ages Vol. 1
[13] 서적 A Concise History of Korea: From the Neolithic Period through the Nineteenth Century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6-00-00
[14] 논문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Personalities in the Founding of the Koryo Dynasty. https://china.usc.ed[...] 2023-11-08
[15] 서적 Historia Korei Dialog
[16] 웹사이트 Taejo http://100.naver.com[...]
[17] 서적 The History of Balhae Empire Seohaemunjib
[18] 뉴스 궁예 https://terms.naver.[...] 2018-05-26
[19] 영상매체 왕건 대신 왕의 옷을 입고 죽은 신숭겸의 정체는?!|천일야사 73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 KBS Drama Classic 2023-06-02
[20] 웹사이트 웹툰캐릭터디비센터 https://www.chuing.n[...] 2023-06-03
[21] 서적 삼국사기 平凡社
[22] 서적
[23] 뉴스 궁예가 출가한 절 세달사는 어디일까? 흥교라는 명문기와를 통해 남한강변 영월의 흥교사임을 확인 http://www.ohmynews.[...] 2018-09-23
[24] 서적
[25] 서적 삼국사기
[26] 서적 삼국사기
[27] 서적 동사강목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고려사 태조세가
[34] 웹사이트 http://newsplus.chos[...] 2013-10-23
[35] 웹사이트 http://newsplus.chos[...] 2014-12-17
[36] 논문 나말여초의 지방학교 문제
[36] 논문 고려 건국기의 청주 세력과 왕건
[36] 논문 (제목 없음)
[37] 기타
[38]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39] 서적 궁예의 나라 태봉 그 역사와 문화 일조각
[40] 서적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사
[41] 서적 (제목 없음)
[42] 서적 (제목 없음)
[43] 기타
[44] 서적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사
[45] 서적 궁예왕 전설과 역사소설
[4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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