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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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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신환국은 1680년, 남인 세력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남인 영의정 허적이 숙종의 허락 없이 왕실의 천막을 사용한 유악 사건을 계기로 숙종이 남인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면서 시작되었다. 숙종은 군권을 서인에게 넘기고 남인계 인사를 대거 파면했으며, 허적의 서자 허견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삼복의 변을 통해 남인 세력을 몰락시켰다. 이로 인해 서인이 집권하고 숙종의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이후 정국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배경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 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 수어사에는 김익훈 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보직을 그대로 고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을 멀리하는 숙종의 태도가 확실하게 드러난 뒤, 정원로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있게 되었다. 즉,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근자에는 그들에 의하여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의 피해가 남인계 여러 인사에게 미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

2. 1. 남인 정권의 문제점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를 받는 잔칫날, 이른바 유악사건이 발생하면서 경신환국이 시작되었다.[1] 이날 비가 내리자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려 했으나, 이미 허적이 유악을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분노하였다. 숙종은 패초(牌招, 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를 이용하여 군권(軍權) 책임자들을 소집,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인사조처를 단행했다.[1]

이에 따라 훈련대장직은 남인계 유혁연에서 서인계 김만기로 교체되었고, 총융사에는 신여철, 수어사에는 김익훈 등 서인이 임명되었다. 다만,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보직이 유지되었다.[1]

이처럼 숙종이 남인을 멀리하는 태도를 보이자, 정원로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발생하였다. 허적의 서자 허견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1]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노렸으며, 최근에는 이들에 의해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것이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으로 남인계 여러 인사가 피해를 입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

2. 2. 서인과 숙종의 관계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를 받는 잔칫날에 유악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날 비가 내리자 숙종은 허적의 집에 유악을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군권(軍權) 책임자들을 불러들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1]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교체하고, 총융사에는 신여철, 수어사에는 김익훈 등 서인을 임명하였다. 다만,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에 보직을 유지하였다.[1]

이후 숙종이 남인을 멀리하는 태도를 보이자, 정원로의 고변으로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일어났다. 허적의 서자 허견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역모를 도모했다는 것이다.[1]

이들은 숙종이 병약함을 틈타 왕위를 노렸고, 최근에는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보고가 이 사건으로 남인계 여러 인사들이 피해를 입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

3. 경신환국의 전개

1674년(현종 15년)의 복상 문제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전횡이 심하였고, 숙종으로부터도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영의정 허적의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 사건은 왕으로 하여금 더욱 남인을 꺼리게 하였다. 유악 사건이란, 허적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연 날에 숙종의 허락도 없이 왕실의 천막인 유악을 빌려가자, 숙종이 분노하여 군권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대거 교체한 것이다.(허견의 옥사)

허적의 천막 유용과 허견의 옥사로 분노한 숙종은 정권을 교체해버린다. 영의정이던 허적, 좌의정이던 민희, 우의정이던 오시수가 모두 파직되었고 이조판서이던 이원정, 호조판서이던 목내선, 예조판서이던 오정창도 모두 파직되었고 병조판서 김석주는 경신환국을 기획한 서인이라 유임되었으며 형조판서이던 김덕원, 공조판서이던 유혁연도 모두 파직되었다.

이때 서인김석주 등은 허적의 서자인 허견 등이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나는데, 이를 '삼복의 변'이라 한다. 이리하여 종실인 복창군 3형제와 허견은 물론, 허적과 윤휴도 살해되었고, 허목은 파직되어 문외출송되었으며 나머지 일파는 옥사·사사·유배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하였다. 영의정에는 김수항이, 좌의정에는 정지화가, 우의정에는 민정중이 각각 임명되었고 이조판서에는 정재숭이, 호조판서에는 민유중이, 예조판서에는 홍처량이 임명되었고 병조판서에는 김석주가 계속 유임되었으며 형조판서에는 박신규가, 공조판서에는 이정영이 임명되면서 서인 내각이 완성되었다.

1680년 3월, 남인의 중신 허적(許積)이 허락 없이 함부로 궁궐의 천막을 사용한 ‘유악(油幄)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숙종은 남인 정권에 대한 강한 불신과 의혹을 품게 되었고, 환국(換局)이라 불리는 정권 교체를 준비했다. 환국은 남인파 훈련대장이었던 유혁연(柳赫然)의 해임과 그 대신 서인 김만기(金萬基)의 보임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남인 중앙군영의 장교들까지 모두 파면되고 그 후임에 서인이 임명되면서 남인은 점차 정치적 입지가 약해졌다.

그 사이, 서인의 중신이자 왕족과 외척 관계였던 김석주(金錫冑)가 남인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은밀히 조사하여 남인들의 반역 음모 사건을 폭로하며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김석주에 따르면,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이 병력을 배경으로 삼복(三福)이라 불리는 왕족과 결탁하여 숙종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려는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경신환국(庚申換局)은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배경으로 진행되어, 갑인예송(甲寅禮訟)에 이어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김석주는 경신환국 이후에도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3. 1. 유악 사건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諡號)를 받는 잔칫날에 유악 사건이 벌어졌다.[1] 마침 이날 비가 내리자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려 했으나, 허적이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군권(軍權) 책임자들을 서인으로 교체하는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1]

훈련대장직은 남인 유혁연에서 서인 김만기로 바뀌었고, 총융사에는 신여철, 수어사에는 김익훈 등 서인이 임명되었다. 다만,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어 보직이 유지되었다.[1]

이러한 숙종의 태도 변화 이후, 정원로의 고변으로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발생하였다. 허적의 서자 허견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역모를 도모했다는 것이다.[1] 이들은 숙종의 건강이 좋지 않은 틈을 타 왕위를 노렸고,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있었다는 보고가 남인에게 피해를 주는 근거가 되었다.[1]

허적은 자신의 조부가 시호를 받는 것을 축하하기위해 연시연(延諡宴)을 열었는데, 각 사(司)와 전국 팔도 및 문무백관이 모였다.[1] 그러나 “제사에 오는 자 중 김석주와 김만기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았고, 김석주는 불참, 김만기는 늦게 참석하여 독살을 피해 다른 사람의 술잔을 빼앗아 마시고 자신에게 오는 술잔은 받지 않았다.[1] 이러한 상황에서 허적이 궁중의 천막을 무단으로 사용한 사실이 알려지자, 숙종은 서인을 등용하고 남인을 축출하였다. 이 사건은 “차일(遮日) 사건”이라고도 불린다.[1]

3. 2. 삼복의 변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를 받는 잔칫날, 이른바 유악사건이 발생하면서 경신환국이 시작되었다.[1] 이날 비가 내리자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려 했으나, 이미 허적이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군권을 서인에게 넘기는 인사를 단행했다.[1] 훈련대장직을 남인유혁연에서 서인계 김만기로, 총융사에는 신여철, 수어사에는 김익훈 등 서인을 임명하였다.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어 보직이 유지되었다.

이후 정원로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일어났다.[1] 허적의 서자 허견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것이다.[1]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노렸으며, 최근에는 그들에 의해 도체찰사부 소속 이천 둔군의 특례적인 조련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한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의 피해가 남인계 여러 인사에게 미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

3. 3. 정권 교체

4. 경신환국의 결과

4. 1. 남인의 몰락

4. 2. 서인의 집권과 분열

4. 3. 숙종의 왕권 강화

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5. 1.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6.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 1995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요부 장희빈에서 경신환국을 다루었다.
  • 2002년부터 2003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장희빈에서 경신환국을 다루었다.
  • 2013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경신환국을 다루었다.

6. 1. 드라마


  • 1995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요부 장희빈에서 경신환국을 다루었다.
  • 2002년부터 2003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장희빈에서 경신환국을 다루었다.
  • 2013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경신환국을 다루었다.

참조

[1] 서적 경신환국(庚申換局)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인물 심의겸
[3] 인물 김효원
[4] 그룹 서인에 대한 보복 반대
[5] 그룹 서인에 대한 강경 보복 주장
[6] 그룹 광해군 폐위 반대
[7] 그룹 광해군 폐위와 영창대군 세자옹립 주장
[8] 그룹 광해군의 폐모살제 찬성
[9] 그룹 광해군의 폐모 반대, 살제는 찬성
[10] 그룹 광해군의 폐모살제 반대
[11] 그룹 인조반정 주도세력
[12] 그룹 반정에 참여치 않은 재야세력
[13] 인물 원두표
[14] 인물 김자점
[15] 인물 김집
[16] 인물 김육
[17] 그룹 예송 이전에 서인과 대충 잘 지낸 세력
[18] 그룹 서인과 싸운 예송 주도자들
[19] 인물 송시열
[20] 인물 윤증
[21] 그룹 영조에게 영합하여 생존함
[22] 그룹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
[23] 그룹 척신정치 반대
[24] 그룹 영조의 탕평책과 척신정치에 영합
[25] 그룹 천주교 박해 주장
[26] 그룹 천주교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27] 그룹 천주교 박해 반대
[28] 그룹 사도세자 추숭 반대파
[29] 그룹 사도세자 추숭 찬성파
[30] 그룹 정순왕후 사망 이후 벽파 세력을 전멸시키고 정권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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