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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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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평대군은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로, 1622년에 태어나 1658년에 사망했다. 인조반정 이후 왕자로서 입궁했으며, 일찍 죽은 삼촌 능창군의 양자가 되어 인평대군에 책봉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형인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고, 이후 사은사로 여러 차례 청나라를 방문하면서 스트레스와 질병에 시달렸다. 효종의 유일한 동복 아우로서 효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효종 사후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는 시, 서예, 그림에 능했으며, 여러 저서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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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요 (李㴭)
작위조선 능양군의 아들
생애
출생1622년 12월 10일 (음력)
사망1658년 5월 13일 (음력)
가족
아버지 (생부)능양군
어머니인열왕후 한씨
배우자복천부부인 동복 오씨
자녀4남 2녀 (6남 4녀)
아들복녕군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
이금온
정중만의 처 이씨
시호
시호충경(忠敬)
기타 정보 (Infobox royalty)
직함대군
왕조이씨
아버지 (양부)능창대군

2. 생애

인조와 인열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623년 아버지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왕자가 되었고, 1629년 '''인평대군'''(麟坪大君)으로 봉해졌다.[1] 1634년 오단의 딸 복천부부인 오씨와 혼인하였다.[2]

병자호란 이후에는 형인 소현세자,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함께 청나라볼모로 끌려갔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은사(謝恩使) 등으로 청나라를 방문하였다. 잦은 청나라 방문은 그에게 큰 정신적 고통과 병을 안겨주었다.[3]

형인 효종과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효종 즉위 후에도 깊은 우애를 나누었다. 이러한 관계로 인평대군의 아들들 또한 효종과 그의 아들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8]

그러나 숙종 대에 이르러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정치적 갈등 속에서 경신환국 당시 삼복의 옥에 연루되어 사사되는 비극을 겪었다.[12]

인평대군은 청나라를 오가며 얻은 병으로 1658년 음력 5월 13일,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효종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애도했다.[5]

인평대군 사후, 그의 후손들은 왕실 방계로 이어졌으나, 장남 복녕군의 7대손인 익성군이 익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622년(광해군 14년) 음력 12월 10일, 선조의 손자이자 능양군(훗날 인조)과 인열왕후 한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듬해인 1623년, 아버지 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궁궐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아버지 인조의 명으로, 아들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난 삼촌 능창군 전의 사후 양자가 되었다. 1629년(인조 7년)에 '''인평대군'''(麟坪大君)으로 봉해졌다.[1]

1634년(인조 12년), 12세의 나이로 오단의 딸인 복천부부인 오씨와 혼인하였다.[2]

2. 2. 왕자 시절

1622년 음력 12월 10일, 능양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1623년 아버지 인조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궁궐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1629년(인조 7년) 12월, 인평대군(麟坪大君)에 책봉되었다.[6] 1634년(인조 12년) 11월 27일, 12세의 나이로 복천부원군 오단의 딸인 동복부부인 오씨와 혼인하였다.[6][2] 인평대군과 오씨 부인은 슬하에 6남 4녀를 두었으나, 이 중 4남(복녕군,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2녀만이 성장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이후, 두 형인 소현세자,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볼모로 끌려갔다.[7]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와 조선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아 심각한 병을 얻기도 했다.[3]

인조 사후에도 청나라 방문은 계속되었다. 1650년부터 효종 재위 기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청나라를 방문했다.[7] 하지만 잦은 청나라 방문은 일부 신료들 사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인평대군이 청나라의 환심을 사려 한다고 주장했다.[3] 특히 송시열은 효종이 아버지 인조의 유지를 어기고 동생인 인평대군을 위험한 청나라(호랑이 굴)에 사신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3]

인평대군은 효종 즉위 후까지 생존한 유일한 동복 동생이었기에, 효종은 그와 매우 우애가 깊었으며 그의 아들들(복녕군,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또한 총애했다.[8] 인평대군이 서인 세력으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의 비호 아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9] 효종은 인평대군이 궁궐에 출입할 때 마치 집안 사람처럼 후하게 대접했으며, 희귀한 물건을 두고 내기를 하는 등 격의 없이 지냈다.[10]

효종의 아들 현종 역시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들과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며 조정의 일에 참여시켰다. 외아들이었던 숙종 또한 가까운 종친이 없었기에 오촌 당숙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형제(삼복)를 가까이 두고 대우했다.[8][9] 그러나 숙종의 외척인 김우명김석주서인 세력은 삼복 형제의 외숙부인 오정위, 오정일 등이 당시 남인 정권의 실세라는 점을 경계했다.[11] 또한, 아직 어리고 후사가 없던 숙종에게 만약 변고가 생긴다면 왕위 계승 문제로 인평대군의 아들들이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들 형제를 정치적으로 위협으로 여겨 제거하려 하였다.[8]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일찍 사망한 복녕군을 제외한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훗날 삼복의 옥에 연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12]

인평대군은 청나라를 여러 차례 오가며 얻은 병으로 인해 1658년(효종 9년) 음력 5월 13일에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효종은 동생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인평대군의 집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신하들이 여러 차례 궁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기도 했다.[5]

2. 3. 사망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사신으로 자주 오가면서 얻은 스트레스와 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3][4] 일부 신료들은 인평대군이 청나라를 자주 방문하여 환심을 사려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송시열은 효종이 부왕 인조의 유지를 어기고 인평대군을 위험한 청나라로 보낸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3]

1658년(효종 9년) 인평대군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효종이 직접 그의 집을 찾아 문병했다. 《인평대군 묘지명(麟坪大君墓誌銘)》에는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술년(1658) 1월에 공이 감기에 걸려서 질질 끌어 여름이 되도록 낫지 않으니, 상(효종)이 공의 집에 친림하였다. 그러자 공이 병든 몸을 이끌고 억지로 일어나서 옷을 바르게 여미고 뜰 아래로 내려왔다. 상이 손을 잡고서 올라가서는 공의 얼굴빛이 초췌한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세자(현종)와 여러 공주들도 모두 와서 서로 위로하였는데, 마치 한집안 사람을 대하는 듯한 예로 대하여 해가 저문 뒤에야 돌아갔다. (《인평대군 묘지명(麟坪大君墓誌銘)》)[13]

같은 해 음력 5월 13일, 인평대군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4] 효종은 급히 견여(肩輿)를 타고 달려왔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인평대군 묘지명》은 효종의 슬픔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상이 공의 집 문 앞에 이르러서는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 두세 차례 길게 공을 불렀으나, 공은 이미 응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상이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고, 몸소 염습을 하였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세자(현종) 역시 공의 여러 자식들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비통하여 쳐다보지 못하였다. (《인평대군 묘지명(麟坪大君墓誌銘)》)[13]

효종은 인평대군의 장례 절차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하며, "대군이 평소에 매번 비용을 줄여서 폐단을 없애라고 말하였다. 그러니 모든 일을 되도록 간략하게 하여 그의 마음에 부응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장례에 필요한 물품은 대궐에서 마련하도록 했다. 장례일에는 직접 제사를 지내려 했으나 건강 문제로 중사를 보내 친히 지은 제문으로 제사를 대신하게 했다. 제문에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추억과 중년에 헤어지고 만난 정을 애틋하게 담아 듣는 이들을 감격시켰다고 전해진다.[13][5]

인평대군의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있다.[13]

3.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고읍(현재의 하남시)에 있는 양아버지 능창군의 묘 근처에 묻혔다. 1658년 7월 26일, 효종의 특별 지시로 시호를 정하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충민(忠敏)으로 정해졌으나, 이름자인 휘를 피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 결국 같은 해 9월 17일에 충경(忠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효종의 묘를 모신 사당인 묘정(廟庭)에 함께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다.

1698년(숙종 24년)에는 묘를 경기도 광주군 고읍에서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로 옮겼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인평대군 후손들의 묘소도 그의 묘 주변으로 옮겨와 함께 조성되었으며, 양아버지 능창군의 묘소 역시 인평대군 묘 근처로 이장되었다.

인평대군의 초상화는 20세기 초반까지 전해져 내려왔으나, 후손인 이재극이 1923년에 잃어버려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4. 평가

제자백가에 정통하였고 시서화에도 능하여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을 방문한 의 화가 맹영광과 교류하기도 하였다.[7] 그림으로는 〈고백도〉, 〈노승하관도〉, 〈산수도〉, 〈일편어주도〉와 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이 있다.

그 밖에 그가 지은 시조 3수인 '봉화낙선재구호', '소원 백화총에', '바람에 휘었노라' 등은 《청구영언(靑丘永言)》과 《해동가요(海東歌謠)》에도 수록되어 전해진다.

5. 작품

인평대군은 제자백가에 정통하였고 시, 서예, 그림 등 여러 예술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는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을 방문한 의 화가 맹영광과 교류하며 예술적 식견을 넓혔다.[7] 그의 예술적 성과는 그림, 저술, 시조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전해진다.

5. 1. 저서


  • 《연행록 (燕行錄)》
  • 《송계집》
  • 《산행록 (山行錄)》

5. 2. 작품

인평대군은 제자백가에 정통하였고 시, 서예, 그림에 모두 능하여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에 비견되기도 했다.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을 방문한 의 화가 맹영광과 교류하기도 했다.[7]

그림으로는 〈고백도〉, 〈노승하관도〉, 〈산수도〉, 〈일편어주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을 남겼다.

또한, 그가 지은 시조 세 수인 '봉화낙선재구호', '소원 백화총에', '바람에 휘었노라' 등은 《청구영언(靑丘永言)》과 《해동가요(海東歌謠)》에도 실려 전해진다.

6. 가족 관계

'''인평대군의 가족 관계'''
구분이름생몰년비고
조부모조부정원군1580년 ~ 1619년선조의 아들, 인조의 아버지
조모연주군부인 구씨1578년 ~ 1626년구사맹의 딸
외조부모외조부한준겸1557년 ~ 1627년서평부원군
외조모회산부부인 창원 황씨1561년 ~ 1594년
부모아버지인조1595년 ~ 1649년조선 제16대 국왕 (즉위 전 능양군)
어머니인열왕후 한씨1594년 ~ 1635년
형제소현세자1612년 ~ 1645년
효종1619년 ~ 1659년조선 제17대 국왕
동생용성대군1624년 ~ 1629년
부인복천부부인 동복 오씨1622년 ~ 1658년오단의 딸
자녀장남복녕군[14]1639년 ~ 1670년부인: 양천 허씨, 흥선대원군의 6대 조부
차남이름 미상1640년요절
3남복창군1641년 ~ 1680년삼복의 옥에 연루되어 사사됨
4남이름 미상? ~ ?요절
5남복선군1647년 ~ 1680년삼복의 옥에 연루되어 사사됨
6남복평군1648년 ~ 1700년숙부 용성대군에게 입적됨
장녀이금온1654년 ~ ?풍양 조씨 조기수(趙祺壽)의 처
차녀이름 미상? ~ ?해주 정씨 정중만(鄭重萬, 1658 ~ 1732)의 처


7. 대중 매체


  • 최우성이 TV 드라마 대명에서 연기했다.
  • 지은성이 TV 드라마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 연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12-31
[2]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12-31
[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12-31
[4]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12-31
[5]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12-31
[6] 실록 상이 셋째 아들 이요를 인평대군으로 삼을 것을 하교하다 1629-12-26
[7]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8] 서적 윤휴와 침묵의 제국 다산초당 2011
[9] 서적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10] 실록 1657-02-14
[11] 서적 화경 숙빈 최씨 케이엔제이 2010
[12] 문서
[13] 실록 1658-05-13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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