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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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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감은사지는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 문무왕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왕의 유언에 따라 건립이 시작된 사찰이다. 신문왕 대에 완공되어 감은사라 명명되었으며, 동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바닥을 특수하게 설계했다는 특징이 있다. 쌍탑식 가람 배치와 사천왕사 배치에 영향을 준 건축 양식을 가지며, 호국사찰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1959년 발굴 조사를 통해 건물터와 유물이 확인되었고, 동·서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신라 금속 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현재는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국보로, 동·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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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은사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경주 감은사지
경주 감은사지
경주 감은사지
일반 정보
유형사적
이름경주 감은사지
영문 이름Gameunsa Temple Site, Gyeongju
번호31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소유자국유
면적26,807m2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 55-1
시대통일신라
문화재청 ID13,00310000,37

2. 역사

신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국방 강화를 위해 이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신문왕 때인 682년에 완공되었다.[1][2][3] 문무왕은 죽은 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대왕암에 안장되었으며,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 이름 지었다.[1][2][3] 고려 시대 이숭인은 '초옥자전'(草屋子傳)에서 감은사를 언급하였는데, 이는 고려 말기에도 감은사가 실존했으며 유명했음을 보여준다.[5] 전문가들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소실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6][7]

2. 1. 건립 배경

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 이 절을 짓기 시작했다.[1][2][3] 문무왕은 죽은 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1][2][3]

2. 2. 완공 및 명칭

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이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였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巖)에 안장하였다.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1][2][3]

2. 3. 고려 시대

고려 시대 이숭인은 '초옥자전'(草屋子傳)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感應寺에서 놀며 용혈을 들여다보았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감은사와 용혈이 반경 1.3km 이내에 있는 이견대 및 대왕암과 함께 동해의 명소로서 고려 말기에도 사찰로 실존했으며 유명했었음을 보여준다.[5] 전문가들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소실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6][7]

3. 발굴

1959년1997년 두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감은사의 구조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특히, 동·서탑 해체 수리 때 삼층탑신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신라의 금속 조각 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3. 1. 발굴 내용

1959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로 기단석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었다.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중 기단 구조이며,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고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으며,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루처럼 깔고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있는 특수한 구조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강당지(講堂址)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일부만 발굴되었는데, 기단석과 초석들이 거의 완전하게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회랑(回廊)은 강당 정면 중앙 칸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절터는 쌍탑식 가람으로 창건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탑 역시 한국 석탑의 주류를 이루는 신라 양식 석탑 중 양식적으로 완성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59년1997년 동·서탑 해체 수리 때 삼층탑신 사리공(舍利孔)에서 당대 대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라 금속 조각이 성당(盛唐)을 능가함을 보여준다.

과거 중문지(中門址), 회랑지(回廊址), 남반(南半) 및 금당지(金堂址) 대부분이 밭이나 수풀이었고, 회랑지 북반과 강당지(講堂址)는 민가에 있었으나 현재는 복원 및 정비되어 관리되고 있다.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 남북선상에 중문, 금당, 강당을 세웠다. 중문은 석탑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 북쪽에 위치한다. 남·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중문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석축 바깥에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고 금당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금당터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는데, 금당터 앞 석재 중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있어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로 추측된다.

감은사 초석의 기하학적 태극문양 원(圓) 및 삼각형 방(方)

3. 2. 건축 구조



1959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감은사지는 쌍탑식 가람 배치로, 동서로 두 개의 탑을 세우고 남북선상에 중문, 금당, 강당을 배치했다.[1] 회랑은 남·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는데,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1]

  • 중문(中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된다.[1]
  • 금당(金堂):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중기단 구조이다.[1]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1] 금당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은 후 다시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깔아 초석을 놓았다.[1]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있는 특수한 구조인데, 이는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구조로 추정된다.[1]
  • 강당(講堂):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일부만 발굴되었으나, 기단석과 초석들이 거의 완전하게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1] 회랑은 강당의 정면어간(正面御間)에 연결되어 있었다.[1]


중문 남쪽에 정교하게 쌓은 석축과 연못(용담)이 남아 있는데,[1] 이는 대종천 및 금당과의 연결 가능성을 시사한다.[1] 금당터 주변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석재들이 흩어져 있는데,[1] 이는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로 추정된다.[1]

3. 3. 태극장대석



금당터 동편과 서편의 태극장대석은 음각 및 양각으로 처리된 이등변삼각형과 태극 문양을 통해 해와 달의 운행, 계절 변화를 보여주는 기하학적 천문관측기구이다. 1959년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이 장대석들은 첨성대 축조 46년 후 설계되었으며, 첨성대와 더불어 신라의 천문학 기술을 보여준다.[8] 음력과 양력을 측정하는 이 기구는 물때에 따른 해수면의 높낮이와 조석 간만(干滿)을 예측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2개의 태극 장대석 - 해(31일)와 달(30일)의 공전 주기를 설명하는 이등변삼각형과 4태극 도형의 기하학


4. 사리장엄구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신라 금속공예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보물 제13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관련 이미지는 하위 섹션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생략함)

4. 1.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곽(외함)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내함)


경주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보물 제1359호로 지정되어 있다.

4. 2.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5. 의의 및 영향

감은사는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를 사용했으며, 금당과 동서 회랑 사이에 익랑을 둬 이후 건립된 사천왕사 배치에 영향을 주었다.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호국사찰로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4] 롯데월드 민속박물관에 감은사 복원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감은사 터 개략도

6. 관련 문화재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국보 제112호이다.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보물 제1359호[1],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보물 제366호[2]이다.

6. 1. 국보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대한민국의 국보 제112호이다.

6. 2. 보물


  •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대한민국 보물 제1359호[1]
  •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대한민국 보물 제366호[2]
  • *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 사리기 - 대한민국 보물 제366-1호[3]
  • *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 사리외함 - 대한민국 보물 제366-2호[4]

참조

[1] 문헌 萬波息笛
[2] 문헌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4] 웹인용 경주감은사지(慶州感恩寺址) http://encykorea.aks[...] 2018-06-17
[5] 간행물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 2015 上 http://116.67.40.25/[...] 문화재청, 재단법인불교문화재연구소
[6] 한국고전종합DB 초옥자전 http://db.itkc.or.kr[...]
[7] 한국고전종합DB 초옥자전 http://db.itkc.or.kr[...]
[8] 논문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의 수리천문학적 의미 https://www.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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