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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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란사는 백마강 왼쪽 암벽 위에 위치한 사찰로, 사찰 후면 암벽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 여러 번 중수되었으며, 대웅전 좌측에는 요사채, 우측에는 범종각이 있다. 고란사 대웅전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건축되었으며, 갓난아이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과 백제 왕들이 고란정의 샘물을 즐겨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재 사적 제428호인 부여 고란사지 및 부여 고란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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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란사 | |
|---|---|
| 위치 정보 | |
| 소재지 |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번지 |
| 일반 정보 | |
| 명칭 | 皐蘭寺 (고란사) |
| 한자 표기 | 皐蘭寺 |
| 로마자 표기 | Goran-sa |
| 문화재 지정 |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98호 |
| 종교 정보 | |
| 역사 | |
| 기타 정보 | |
![]() | |
2. 역사
고란사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백제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는 설, 궁중 내불전이었다는 설, 무령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어졌다는 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란사는 성벽 안에 위치하지 않으므로, 고려 시대 창건설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1]
현재의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왔으며, 같은 해에 중건되었다는 상량문 기록이 있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 올렸다. 초석에 새긴 연화문양은 고려 시대 기법으로 추정된다.[1]
1959년 건물을 고쳐 지을 때 대들보 밑에서 발견된 고란사 상량문에 따르면, 정조 21년(1797년)에도 중건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전 시대의 상량문도 있었으나 종이가 삭아 판독할 수 없었다. 현재 대웅전 좌측에는 요사채, 우측에는 범종각이 있다.
절 주변 경관은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 험준하고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2. 1. 백제 시대
낙화암 바로 위에 고란사가 있다. 절 뒤의 바위틈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1]절의 창건 시기는 백제 말기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백제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 내불전이었다는 설이 있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은 사찰이라는 설도 있다.[1] 무령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고려 초기 창건설도 유력하다. 고란사는 성벽 안에 위치하지 않으므로, 고려 시대 창건설이 더욱 그럴듯하다.[1]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같은 해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 올렸다. 초석에 새긴 연화문양은 고려시대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 주변 경관은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 험준하고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2. 2. 고려 시대
고란사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백제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는 설, 궁중 내불전이었다는 설, 백제 제17대 무령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설 등이 있다. 고란사는 성벽 안에 위치하지 않으므로, 고려 시대 창건설이 더욱 그럴듯하다.[1]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초석에 새긴 연화문양은 고려 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2. 3. 조선 시대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1]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했다고 한다.[1]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1] 초석에 새긴 연화문양은 고려 시대 기법으로 추정된다.[1]1959년 고쳐 지을 때 대들보 밑에서 고란사 상량문이 나왔는데, 정조 21년 정사(1797)에도 고쳐지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상 올라가는 연대의 상량문도 있었으나 종이가 삭아서 판독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재 대웅전 좌측에는 요사채가 있고 우측에는 범종각이 있다.
3. 건축
고란사는 부소산성 북서쪽, 낙화암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1] 절 뒤편 암벽 사이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암벽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1][2]
이 절은 백마강변 낙화암 절벽에 둘러싸여 있어, 큰 당우 한 채와 수행승을 위한 숙소, 종루만 있을 뿐이다.[2]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 은산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같은 해에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화문이 새겨진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 올렸다. 초석의 연화문양은 고려 시대 기법으로 추정된다.
3. 1. 대웅전
현재의 사원은 은산 숭각사(崇角寺)에서 옮겨 온 것으로 여러 번 중수하였으며, 1959년 고쳐 지을 때 대들보 밑에서 고란사 상량문이 나왔는데, 이에 의하면 정조 21년 정사(1797)에도 고쳐 지은 적이 한 번 있었던 건물이다.[1] 또한 그 이상 올라가는 연대의 상량문도 있었다 하나 종이가 삭아서 판독할 수 없었다고 한다.현재 대웅전 좌측에는 요사채가 있고 우측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높은 암벽 앞에 있는 이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불전 건물인데, 좌측 2칸을 요사로 사용하고 나머지 우측 5칸 모두에 우물마루를 깔고 후면 중앙부분에 긴 불단을 조성하였다.
구조는 6벌대로 쌓은 높은 화강석 기단 위에 방형과 원형, 그리고 복련판이 조각되어 있는 부재들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이 부재들의 일부는 백제시대의 초석을 전용(轉用)한 것들로 보인다.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계통이나 앙설형(仰舌形)으로 뻗은 초익공의 상단에는 연꽃이, 수설형(垂舌形)으로 뻗은 이익공 아래에는 연봉우리 등의 조각이 있어 장식적 경향이 매우 심하다.
지붕틀 가구는 대들보 아래에 걸쳐서 우물천정이 가설되어 있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3. 2. 기타
낙화암이 고란사 바로 위에 있다. 절 뒤편의 바위틈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1][2] 고란초는 양치류에 속하는 은화식물로서 포자로 번식되는 이끼 종류의 일종이며, 제주도에서는 불로초라고도 한다.절의 연혁은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설에 따르면, 이 절은 원래 백제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궁중 내불전이었다고도 한다. 백제 멸망 당시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고란사는 성벽 안에 위치하지 않으므로, 고려 시대 창건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1]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왔다.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했다고 한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긴 연화문양은 고려시대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 주변 경관은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험준하며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현재 사원은 은산 숭각사에서 옮겨 온 것으로 여러 번 중수하였으며, 1959년 고쳐 지을 때 대들보 밑에서 고란사 상량문이 나왔는데, 정조 21년(1797년)에도 고쳐 지은 적이 한 번 있었던 건물이라 한다. 또한 그 이상 올라가는 연대의 상량문도 있었다고 하나 종이가 삭아서 판독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웅전 좌측에는 요사채가 있고 우측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4. 전설
고란사는 백제의 마지막 왕성이었던 부소산성 북서쪽, 낙화암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절 뒤편 암벽 사이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암벽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1][2]
백제 왕들은 고란정의 샘물을 즐겨 마셨으며, 궁녀들은 그 물을 떠오면서 고란정에서 물을 길어왔다는 증거로 고란초 잎 두세 장을 함께 바쳤다고 전해진다.[1][2]
4. 1. 고란약수와 젊음
부여 부소산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약수에는 갓난아기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4] 고란약수는 한 잔만 마셔도 3년이 젊어진다고 한다.[3][1]아득한 옛적 소부리 마을에 금슬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늘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다시 젊어져 자식 갖기를 소원했다.[4][3]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일산(일산; 이르산, 금성산한국어)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 날 새벽 남편을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다음 날 일찍 약수터로 찾아가 보니 할아버지는 없고 웬 갓난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 있어 깜짝 놀랐다.[4][3]
할머니는 "아차!" 했다. 도사가 한 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 시대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4][3]
5. 문화재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운 곳에,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교포를 짜 올렸다. 초석에 새겨진 연화문양은 고려 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1]
6. 기타
고란사는 백마강변 낙화암 절벽에 둘러싸여 있으며, 큰 당우 한 채와 수행승을 위한 숙소, 종루만이 있다.[2]
절의 연혁은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은 없다.[2] 백제 왕들의 휴식을 위한 정자였다는 설과[2] 궁궐 안의 내불전이었다는 설이 있다.[1] 무령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고려 초기 창건설도 있다.[1]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 현종 19년 (1028년)에 세웠다는 설도 있다.[1] 고란사는 성벽 안에 위치하지 않으므로, 고려 시대 창건설이 더 그럴듯하다.[1]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운 곳에,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교포를 짜 올렸다. 초석에 새겨진 연화문양은 고려 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절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함께 험준하고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참조
[1]
웹사이트
goransa temple
http://www.invil.org[...]
2019-05-07
[2]
웹사이트
goransa temple
http://www.visitkore[...]
2019-05-07
[3]
문서
현지 안내문
[4]
문서
현지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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