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치아 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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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리치아 백국은 1107년경 마인하르트 가문이 건국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영방 국가이다. 백작령은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포크트였던 마인하르트 1세가 고리치아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지를 봉토로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백국의 경계는 주변 국가와의 전쟁으로 인해 자주 변동되었으며, 리엔츠를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영지와 고리치아를 중심으로 한 프리울리 영지로 구분되었다. 1335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카르니올라와 케른텐을, 1363년 티롤을 획득하면서 고리치아 백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압박을 받았다. 1500년 마지막 백작 레온하르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고리치아 백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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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치아 백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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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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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이탈리아어) | Contea di Gorizia |
공식 명칭 (독일어) | Grafschaft Görz |
공식 명칭 (슬로베니아어) | Goriška grofija |
공식 명칭 (프리울리어) | Contee di Gurize |
일반 명칭 | 고리치아 백국 |
국가 | 신성 로마 제국 |
수도 | 고리치아 리엔츠 |
공용어 |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리울리어 슬로베니아어 |
공식 언어 | 라틴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정치 | |
정치 체제 | 백국 |
작위 | 백작 |
통치 가문 | 고리치아 가문 |
초대 백작 | 마이nhar르트 1세 |
마지막 백작 | 레온하르트 폰 고리치아 |
역사 | |
성립 | 약 1117년 |
주요 사건 | 마이nhar르트 3세, 티롤 상속 (1253년) |
주요 사건 | 후백국으로 승격 (1365년) |
주요 사건 | 합스부르크 가문에 양도 (1500년) |
주요 사건 | 오스트리아 관구 가입 (1512년) |
해체 | 그라디스카와 재통합 |
경제 | |
통화 | 고리치아 디나르 |
이전 국가 | |
이전 국가 | 프리울리 공국 |
계승 국가 |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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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바이에른 공국의 리엔츠 지역 소유권을 가졌던 마인하르트 가문 출신 마인하르트 1세가 1107년 처음 등장한다.[1] 그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국의 관리 폭트였고, 고리치아가 포함된 옛 프리울리 변경백국의 넓은 영지를 받아 1127년부터 스스로 ''그라프 폰 괴르츠''(Graf von Görz, 괴르츠 백작)라고 칭했다.
백국의 국경은 아퀼레이아 등과의 잦은 전쟁으로 4세기 동안 자주 바뀌었으며, 영토는 리엔츠가 있는 상 드라바강 위쪽에서 푸스터 계곡의 이니헨까지 이르는 지역과 프리울리가 있는 고리치아 지역을 중심으로 두 주요 중심지를 축으로 구분되었다.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신하였던 마인하르트 3세는 1248년에 슈타이어마르크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케른텐 공국에 전쟁을 벌였으나, 1252년 그라이펜부르크에서 베른하르트 폰 슈판하임 공작과 그의 아들 잘츠부르크 대주교 필리프에게 패했다. 그럼에도 마인하르트 3세는 장인 알베르트 4세가 사망하면서 티롤 백국을 계승하여 나라의 힘은 정점에 달했다.
1258년 마인하르트 3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1271년까지 공동 통치를 하였다. 장남 마인하르트 4세는 푸스터 계곡 서쪽 티롤 영지를, 동생 알베르트 1세는 리엔츠와 고리치아 주변의 마인하르트 선조들의 영지를 차지했다. 알베르트 1세 사후, 고리치아 백국은 다시 분할되어 고리치아 중심지인 "인너 지역"은 하인리히 3세가, 리엔츠를 중심으로 "아우터 지역"은 알베르트 2세가 가져갔다. 1323년 하인리히 3세가 암살되자, 고리치아 영지는 4개로 분할되었다. 알베르트 3세는 파진 주변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잔류 영지를 1365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유언으로 물려준다.
1365년 마인하르트 6세 폰 괴르츠는 룩셈부르크 가문 카를 4세에게 대공 작위를 약속받아 고리치아 대공국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마인하르트 가문은 오스트리아 영지의 합스부르크와 베네치아 공화국 같은 강력한 이웃 국가들로 인해 하향세를 보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335년에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변경백국을, 1363년에 티롤 백국을 차지하였으며, 리엔츠의 고리치아 잔여 영지도 합스부르크의 "세습 영토"로 분리되었다. 베네치아는 프리울리에 있는 옛 총대주교국의 영토를 정복하여 1434년에 도미니 디 테라페르마에 합병시켰다. 베네치아의 10인 위원회는 인접했던 고리치아를 중심으로 한 "인너 지역"을 이스트리아에 있는 베네치아의 스타토 다 마르에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압박으로 고리치아 백작은 리엔츠에 있는 뷔르크 성에 거점을 두었다.
1429년 백국은 하인리히 6세 폰 괴르츠 아래 재통합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최후의 백작인 레온하르트 폰 괴르츠가 1500년에 사망하였고 베네치아의 권리 주장이 일어났지만, 상속 계약에 따라 백국은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다.[2]
리엔츠 지역은 티롤의 왕실 소유지와 같이 관리되었지만, 고리치아의 "인너 지역"은 오스트리아 관구의 일부분으로 인너오스트리아 대공이 다스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영방 국가로 남았다. 오스트리아 관구는 소차강 남쪽 아퀼레이아, 코르몬스, 두이노와 1511년 제국군에 의해 정복된 베네치아의 옛 요새 그라디스카디손초가 포함된다. 몬팔코네는 1420년에서 1797년까지 베네치아의 고립 영토였다. 1647년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고리치아에서 "그라디스카 백국"을 그의 조신 요한 안톤 폰 에겐베르크를 위해 분리시켜냈다가 1747년에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왕실 소유지 중 하나인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으로 재통합되었다.
2. 1. 고리치아 가문 (마인하르트 가문)
바이에른 공국 리엔츠 일대의 영지를 소유했던 마인하르트 귀족 가문의 후손 마인하르트 1세는 1107년 초에 처음 등장한다.[1] 그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국의 관리 폭트였으며, 고리치아가 포함된 옛 프리울리 변경백국의 넓은 영지를 받았다. 1127년부터 스스로 ''그라프 폰 괴르츠''(Graf von Görz, 괴르츠 백작)라고 칭했다.마인하르트 1세는 1117년에 이미 백작으로 언급되었다.[1]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포크트 관료였던 그는 고리치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지를 봉토로 받았다.
마인하르트의 후손 고리치아의 마인하르트 3세 백작은 호엔슈타우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추종자였다. 1248년 슈티리아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인접한 케른텐 공국에서 원정을 벌였지만 1252년 그라이펜부르크에서 베른하르트 폰 슈판하임 공작과 그의 아들 잘츠부르크의 필리프 대주교의 군대에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인하르트 3세가 1년 후 장인 알베르트 4세 백작으로부터 티롤을 (마인하르트 1세로서) 상속받으면서 백국은 권력의 절정에 달했다.
1258년 마인하르트 3세 백작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1271년에 유산을 분할했다. 마인하르트 4세는 푸스터 계곡 서쪽의 티롤 영토를 차지했고, 그의 형제 알베르트는 리엔츠와 고리치아 주변의 마인하르트 가문의 영토를 유지했다. 알베르트 사후 고리치아 백국은 다시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고리치아의 "내부 백국" (하인리히 3세가 통치)과 리엔츠와 알베르트 2세 주변의 "외부 백국"으로 분할되었다. 1323년 하인리히 3세 백작이 암살되자 고리치아 영토는 네 개의 국가로 쪼개졌다. 고리치아 백작들은 잠시 이탈리아의 트레비소 변경백령 (Marca Trevigiana)과 파진 (Mitterburg) 주변의 이스트리아 변경백령 잔해를 통제했는데, 이는 알베르트 3세 백작이 1365년 합스부르크 가문에 유증했다.
1365년 마인하르트 6세 백작은 룩셈부르크 황제 카를 4세로부터 제후 칭호를 부여받았고, 그 후 백국은 "Gefürstete Grafschaft Görz"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인하르트 가문은 강력한 이웃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영토와 베네치아 공화국 아래에서 급격한 쇠퇴를 겪었다.
1429년 백국은 백작 하인리히 6세의 단독 통치하에 재통일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마지막 백작인 레온하르트는 1500년에 사망했으며, 상속 계약과 고리치아 총독 비르길 폰 그라벤[2]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가 제기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백국은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다.
2. 2. 고리치아-티롤 가문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신하였던 마인하르트 3세는 바벤부르크 가문이 단절되자, 1248년에 슈타이어마르크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케른텐 공국에 전쟁을 벌였으나, 1252년 그라이펜부르크에서 베른하르트 폰 슈판하임 공작과 그의 아들 잘츠부르크 대주교 필리프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했다. 그럼에도 마인하르트 3세의 장인인 알베르트 4세가 전투가 벌어진 지 1년 만에 사망하면서, 티롤 백국을 계승하여 나라의 힘은 정점에 다다른다.1258년 마인하르트 3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물려받은 나라를 1271년까지 공동 통치하였다. 장남인 마인하르트 4세는 푸스터 계곡의 서쪽 티롤 영지를 가져갔고, 그의 동생인 알베르트 1세는 리엔츠와 고리치아 주변의 마인하르트 선조들의 영지를 차지했다. 알베르트 1세 사후, 고리치아 백국은 다시 분할되어 고리치아 중심지인 "인너 지역"은 하인리히 3세가, 리엔츠를 중심으로 "아우터 지역"은 알베르트 2세가 가져갔다. 1323년에 하인리히 3세 백작이 암살되자, 고리치아 영지는 4개의 국가에 분할되었다. 고리치아 백작은 임시로 트레비소 변경백국의 이탈리아인이 통제했고 파진을 주변으로 한 이스트리아 변경백국의 잔류 영지는 알베르트 3세가 1365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유언을 통해 물려준다.
1365년에 마인하르트 6세 폰 괴르츠가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에게 대공 작위를 약속받았으며, 그때부터 고리치아 대공국으로 불렸다. 마인하르트 가문은 그럼에도 오스트리아 영지의 합스부르크와 베네치아 공화국 같은 강력한 이웃 국가들로 인해 하향세를 띄고 있었다.
2. 3. 합스부르크 가문
레온하르트 폰 괴르츠가 1500년에 사망하였고 베네치아의 권리 주장이 일어났지만, 상속 계약에 따라 백국은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다.[2]리엔츠 지역은 티롤의 왕실 소유지와 같이 관리되었지만, 고리치아의 "인너 지역"은 오스트리아 관구의 일부분으로 인너오스트리아 대공이 다스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영방 국가로 남았다. 오스트리아 관구는 소차강 남쪽으로 아퀼레이아, 코르몬스, 두이노와 1511년 제국군에 의해 정복된 베네치아의 옛 요새인 그라디스카디손초를 포함한다. 몬팔코네는 1420년에서 1797년까지 베네치아의 고립 영토였다. 1647년에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고리치아에서 "그라디스카 백국"을 그의 조신인 요한 안톤 폰 에겐베르크를 위해 분리시켜냈다가 1747년에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왕실 소유지 중 하나인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으로 재통합되었다.
3. 백작 목록
고리치아 백작 가문은 11세기 초 바이에른 공국의 리엔츠 주변 영지를 소유했던 마인하르디너 귀족 가문에서 시작되었다. 메인하르트 1세는 1117년에 이미 백작으로 언급되며,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포크트 관료로서 옛 프리울리 변경백국에 속한 고리치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지를 봉토로 받았다.[1]
이후 4세기 동안 백국의 경계는 잦은 전쟁으로 빈번하게 변경되었으며, 드라바 강 상류의 리엔츠를 중심으로 푸스터 계곡의 이닉헨까지 이어지는 바이에른 조상 영지와 프리울리의 고리치아를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주요 구역으로 분할되었다.
고리치아의 마인하르트 3세 백작은 호엔슈타우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추종자였으며, 1248년 슈티리아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1253년 장인인 알베르트 4세 백작으로부터 티롤을 상속받으면서 백국은 권력의 절정에 달했다.
마인하르트 3세가 1258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1271년에 유산을 분할했다. 마인하르트 4세는 푸스터 계곡 서쪽의 티롤 영토를, 그의 형제인 알베르트 1세는 리엔츠와 고리치아 주변의 마인하르트 가문의 영토를 유지했다. 알베르트 1세 사후 고리치아 백국은 다시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고리치아의 "내부 백국" (하인리히 3세 통치)과 리엔츠와 알베르트 2세 주변의 "외부 백국"으로 분할되었다.
1365년 마인하르트 6세 백작은 룩셈부르크 황제 카를 4세로부터 제후 칭호를 부여받았고, 이후 백국은 "Gefürstete Grafschaft Görz"로 불렸다.
1429년, 백국은 백작 하인리히 6세의 단독 통치하에 재통일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마지막 백작인 레온하르트는 1500년에 사망했으며, 상속 계약에도 불구하고 백국은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다.
통치자 | 출생 | 재위 기간 | 통치 지역 | 배우자 | 사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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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스터 계곡 백작 마인하르트 | 1090년경 | |||||
엥겔베르트 1세 | 1050년경 | 1090년 – 1122년 12월 14일 | 고리치아 백국 | 불명 | 1122년 12월 14일 | |
마인하르트 1세 | 1070년경 | 1122년 12월 14일 – 1142년 | 고리치아 백국 | 힐데가르트 자녀 없음 슈바르첸베르크의 엘리자베스 자녀 4명 | 1142년 | |
하인리히 2세 | 1120년경 | 1142년 – 1149년 10월 11일 | 고리치아 백국 | 불명 | 1149년 10월 11일 | |
엥겔베르트 2세 | 1120년경 | 1142년 – 1191년 4월 1일 | 셰이언-다하우-발리의 아델라이드 자녀 3명 | 1191년 4월 1일 | ||
마인하르트 2세 장로 | 1163년 | 1191년 4월 1일 – 1231년 | 고리치아 백국 | 파일슈타인의 쿤이군데 자녀 없음 아델라이드 자녀 없음 티롤 백작 하인리히 1세의 딸 자녀 없음 | 1231년 | |
엥겔베르트 3세 | 1164년 | 1191년 4월 1일 – 1220년 | 피시노의 마틸다 1183년 자녀 없음 안데크스의 마틸다 1190년 자녀 1명 | 1220년 | ||
마인하르트 3세 | ![]() | 1200년경 | 1231년 – 1258년 7월 22일 | 고리치아 백국 (1253년부터 티롤 백국과 함께) | 티롤의 아델라이드 1237년경 자녀 4명 | 1258년 7월 22일 |
알베르트 1세 | ![]() | 1240년경 | 1258년 7월 22일 – 1304년 4월 1일 | 고리치아 백국 | 글로고프의 에우페미아 자녀 3명 오르텐부르크의 에우페미아 자녀 없음 | 1304년 4월 1일 |
하인리히 3세 | 1263년 | 1304년 4월 1일 – 1323년 4월 24일 | 고리치아 백국 | 카미노의 베아트리체 1297년 자녀 1명 바이에른의 베아트리체 1322년 자녀 1명 | 1323년 4월 24일 | |
알베르트 2세 | 1265년경 | 1304년 4월 1일 – 1327년 | 헤세의 엘리자베스 1299년 자녀 5명 매치의 에우페미아 1321년 자녀 3명 | 1327년[4] | ||
마인하르트 5세 | 1300년경 | 1314년경 – 1320년경 | 미혼 | 1320년경 | ||
(요한) 하인리히 4세 | ![]() | 1322년 | 1327년 – 1338년 3월 17일 | 고리치아 백국 | 오스트리아의 안나 1335년경 자녀 없음 | 1338년 3월 17일 |
알베르트 3세 | 1305년경 | 1338년 3월 17일 – 1374년 | 고리치아 백국 (1365년까지) 고리치아의 제후 백국 (1365년부터) | 헬렌 자녀 없음 첼레의 캐서린 1353년 자녀 없음 | 1374년 | |
마인하르트 6세 | 1325년경 | 1338년 3월 17일 – 1385년 5월 | 판베르크의 캐서린 자녀 3명 매치의 에우페미아-우테힐트[5] 자녀 3명 | 1385년 5월 | ||
하인리히 5세 | 1325년경 | 1338년 3월 17일 – 1362년 | 카라라의 지글리올라 자녀 없음 | 1362년 | ||
하인리히 6세 | ![]() | 1376년 6월 22일 | 1385년 5월 – 1454년 3월 18일 | 고리치아 제후 백국 (고리치아 자체, 1430년부터 키르히베르크 백국과 함께) | 첼레의 엘리자베스 1400년 1월 31일 자녀 2명 가라이의 카탈린 자녀 3명 | 1454년 3월 18일 |
(요한) 마인하르트 7세 | 1378년 | 1385년 5월 – 1430년 5월 22일 | 고리치아 제후 백국 (키르히베르크 백국) | 바이에른-란츠후트의 막달레나 1404년 자녀 없음 페타우-부름베르크의 아그네스 1422년 자녀 없음 | 1430년 5월 22일 | |
요한 2세 | 1438년 | 1454년 3월 18일 – 1462년 5월 22일 | 고리치아 제후 백국 (키르히베르크 백국과 함께) | 미혼 | 1462년 5월 22일 | |
레오나르트 | ![]() | 1440년 | 1454년 3월 18일 – 1500년 4월 12일 | 일로크의 히에로니마 자녀 없음 파올라 곤자가 1478년 자녀 없음 | 1500년 4월 12일 |
3. 1. 에펜슈타인 가문과 지그하르딩 가문
- 마르콰르트 (E) (1060년/1074년경 활동), 아퀼레이아 포크트
- 메긴하르트 (S) (1090년경 사망), 지그하르딩 가문 출신, 푸스터 계곡의 백작
- 하인리히 1세 (E) (1102년 이후 사망), 1082년부터 아퀼레이아의 포크트
- 울리히 (E) (1122년 사망), 하인리히 1세의 형제
3. 2. 마인하르트 가문
바이에른 공국의 리엔츠 주변에 영지를 소유한 마인하르디너 귀족 가문의 후손인 메인하르트 1세는 1117년에 이미 백작으로 언급되었다.[1] 그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포크트 관료로서 옛 프리울리 변경백국에 속한 고리치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지를 봉토로 받았다.
이후 4세기 동안 백국의 경계는 잦은 전쟁으로 빈번하게 변경되었으며, 영토는 드라바 강 상류의 리엔츠를 중심으로 푸스터 계곡의 이닉헨까지 이어지는 바이에른 조상 영지와 프리울리의 고리치아를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주요 구역으로 분할되었다.
고리치아의 마인하르트 3세 백작은 호엔슈타우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추종자였으며, 1248년 슈티리아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케른텐 공국에서 원정을 벌였지만, 1252년 그라이펜부르크에서 베른하르트 폰 슈판하임 공작과 그의 아들인 잘츠부르크의 필리프 대주교의 군대에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인하르트 3세가 1년 후 장인인 알베르트 4세 백작으로부터 티롤을 상속받으면서 백국은 권력의 절정에 달했다.
마인하르트 3세 백작이 1258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1271년에 유산을 분할했다. 마인하르트 4세는 푸스터 계곡 서쪽의 티롤 영토를 차지했고, 그의 형제인 알베르트 1세는 리엔츠와 고리치아 주변의 마인하르트 가문의 영토를 유지했다. 알베르트 1세가 죽은 후 고리치아 백국은 다시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고리치아의 "내부 백국" (하인리히 3세가 통치)과 리엔츠와 알베르트 2세 주변의 "외부 백국"으로 분할되었다. 하인리히 3세 백작이 1323년에 암살되자 고리치아 영토는 네 개의 국가로 쪼개졌다. 고리치아 백작들은 잠시 이탈리아의 트레비소 변경백령 (Marca Trevigiana)과 파진 (Mitterburg) 주변의 이스트리아 변경백령의 잔해를 통제했는데, 이는 알베르트 3세 백작이 1365년 합스부르크 가문에 유증했다.
1365년 마인하르트 6세 백작은 룩셈부르크 황제 카를 4세로부터 제후 칭호를 부여받았고, 그 후 백국은 "Gefürstete Grafschaft Görz"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인하르트 가문은 강력한 이웃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영토와 베네치아 공화국 아래에서 급격한 쇠퇴를 겪었다.
합스부르크가가 1335년 카르니올라 변경백국과 1363년 티롤 백국을 획득한 후, 리엔츠의 남은 고리치아 영토는 왕조의 "세습 영지"를 분리시키는 가시였다. 베네치아는 1434년까지 프리울리의 이전 총대주교령을 정복하여 ''도미니 디 테라페르마''에 편입했다. 열인 위원회는 이스트리아의 베네치아 ''스타토 다 마르'' 영토까지 고리치아 주변의 "내부 백국" 영토를 위해 노력했다. 압력으로 인해 고리치아 백작들은 리엔츠의 브루크 성에 거주지를 두었다.
1429년, 백국은 백작 하인리히 6세의 단독 통치하에 재통일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마지막 백작인 레온하르트는 1500년에 사망했으며, 상속 계약과 고리치아 총독 비르길 폰 그라벤[2]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가 제기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백국은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다.
통치자 | 출생 | 재위 기간 | 통치 지역 | 배우자 | 사망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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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스터 계곡 백작 마인하르트 | 1090년경 사망 | ||||||
엥겔베르트 1세 | c.1050 | 1090년 – 1122년 12월 14일 | 고리치아 백국 | 불명 | 1122년 12월 14일 | 바이에른 궁정 백작이기도 했다. | |
마인하르트 1세 | c.1070 | 1122년 12월 14일 – 1142년 | 고리치아 백국 | 힐데가르트 자녀 없음 슈바르첸베르크의 엘리자베스 자녀 4명 | 1142년 | 선임자의 형제.[3] | |
하인리히 2세 | c.1120 | 1142년 – 1149년 10월 11일 | 고리치아 백국 | 불명 | 1149년 10월 11일 | 마인하르트의 자녀들이 공동으로 통치했다. 엥겔베르트는 1188년부터 명목상의 이스트리아 변경백이기도 했다. | |
엥겔베르트 2세 | c.1120 | 1142년 – 1191년 4월 1일 | 셰이언-다하우-발리의 아델라이드 자녀 3명 | 1191년 4월 1일 | |||
마인하르트 2세 장로 | 1163 | 1191년 4월 1일 – 1231년 | 고리치아 백국 | 파일슈타인의 쿤이군데 자녀 없음 아델라이드 자녀 없음 티롤 백작 하인리히 1세의 딸 자녀 없음 | 1231년 | 엥겔베르트 2세의 자녀들이 공동으로 통치했다. 마인하르트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포크트이기도 했다. | |
엥겔베르트 3세 | 1164 | 1191년 4월 1일 – 1220년 | 피시노의 마틸다 1183년 자녀 없음 안데크스의 마틸다 1190년 자녀 1명 | 1220년 | |||
마인하르트 3세 | 1200년 | 1231년 – 1258년 7월 22일 | 고리치아 백국 (1253년부터 티롤 백국과 함께) | 티롤의 아델라이드 c.1237년 자녀 4명 | 1258년 7월 22일 | 결혼을 통해 티롤 백국을 상속받았다. | |
알베르트 1세 | 1240년 | 1258년 7월 22일 – 1304년 4월 1일 | 고리치아 백국 | 글로고프의 에우페미아 자녀 3명 오르텐부르크의 에우페미아 자녀 없음 | 1304년 4월 1일 | ||
하인리히 3세 | 1263년 | 1304년 4월 1일 – 1323년 4월 24일 | 고리치아 백국 | 카미노의 베아트리체 1297년 자녀 1명 바이에른의 베아트리체 1322년 자녀 1명 | 1323년 4월 24일 | 알베르트 1세의 자녀들은 공동으로 통치했다. 하인리히 3세는 그의 맏아들 마인하르트를 공동 통치자로 지정했다. | |
알베르트 2세 | c.1265년 | 1304년 4월 1일 – 1327년 | 헤세의 엘리자베스 1299년 자녀 5명 매치의 에우페미아 1321년 자녀 3명 | 1327년[4] | |||
마인하르트 5세 | c.1300년 | c.1314년 – 1320년? | 미혼 | c.1320년 | |||
(요한) 하인리히 4세 | 1322년 | 1327년 – 1338년 3월 17일 | 고리치아 백국 | 오스트리아의 안나 c.1335년 자녀 없음 | 1338년 3월 17일 | 하인리히 3세의 아들. 자녀 없이 사망했고, 그의 사촌이자 숙부 알베르트 2세의 아들이 계승했다. | |
알베르트 3세 | c.1305년 | 1338년 3월 17일 – 1374년 | 고리치아 백국 (1365년까지) 고리치아의 제후 백국 (1365년부터) | 헬렌 자녀 없음 첼레의 캐서린 1353년 자녀 없음 | 1374년 | 알베르트 2세의 아들들은 공동으로 통치했다. 사망 시 알베르트는 광대한 이스트리아와 카르니올라 소유권을 합스부르크 공작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4세에게 유증했다. 나머지 영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에 의해 제후로 승격된 마인하르트 6세가 유지했다. | |
마인하르트 6세 | c.1325년 | 1338년 3월 17일 – 1385년 5월 | 판베르크의 캐서린 자녀 3명 매치의 에우페미아-우테힐트[5] 자녀 3명 | 1385년 5월 | |||
하인리히 5세 | c.1325년 | 1338년 3월 17일 – 1362년 | 카라라의 지글리올라 자녀 없음 | 1362년 | |||
하인리히 6세 | 1376년 6월 22일 | 1385년 5월 – 1454년 3월 18일 | 고리치아 제후 백국 (고리치아 자체, 1430년부터 키르히베르크 백국과 함께) | 첼레의 엘리자베스 1400년 1월 31일 자녀 2명 가라이의 카탈린 자녀 3명 | 1454년 3월 18일 | 마인하르트 6세의 아들들은 공동으로 통치했다. | |
(요한) 마인하르트 7세 | 1378년 | 1385년 5월 – 1430년 5월 22일 | 고리치아 제후 백국 (키르히베르크 백국) | 바이에른-란츠후트의 막달레나 1404년 자녀 없음 페타우-부름베르크의 아그네스 1422년 자녀 없음 | 1430년 5월 22일 | ||
요한 2세 | 1438년 | 1454년 3월 18일 – 1462년 5월 22일 | 고리치아 제후 백국 (키르히베르크 백국과 함께) | 미혼 | 1462년 5월 22일 | 하인리히 6세의 아들들은 공동으로 통치했다. | |
레오나르트 | 1440년 | 1454년 3월 18일 – 1500년 4월 12일 | 일로크의 히에로니마 자녀 없음 파올라 곤자가 1478년 자녀 없음 | 1500년 4월 12일 |
참조
[1]
서적
Goriški grofje ter njihovi ministeriali in militi v Istri in na Kranjskem
https://www.academia[...]
Znanstveni inštitut Filozofske fakultete Ljubljana [Institute of Science, Faculty of Arts, Ljubljana]
[2]
서적
Geschichte Österreichs: von den Anfängen bis zur Gegenwart
https://books.google[...]
[3]
간행물
Diplomi patriarcali. I documenti dei patrarchi aquileiesi anteriori alla meta del XIII secuio nell`Archivio capitolare di Udine,Quaterni e dispense dell` Istituto di storia dell` Universita degli Studi di Udine 8
Udine
[4]
서적
I conti di Gorizia
LEG
[5]
문서
Tirol Neusti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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