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케른텐 공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케른텐 공국은 7세기 슬라브족의 카란타니아 공국에서 시작되어, 동프랑크 왕국, 바이에른 공국을 거쳐 97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에 의해 독립 공국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여러 가문의 통치를 받으며 영토가 변동되었고, 1335년 합스부르크 가문에 귀속되어 1918년까지 지배를 받았다. 1910년 조사에서 독일어가 다수를 차지했으며, 슬로베니아어도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로 분할되었다.

2. 역사

7세기경 케른텐 지역은 슬라브족의 카란타니아 공국에 속해 있었으며, 743년경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의 종주권 아래 놓였다. 788년 샤를마뉴가 바이에른을 카롤링거 제국에 편입시켰고,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케른텐은 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 2세의 영토가 되었다.

97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는 바이에른에서 케른텐 공국을 분리하여 독립시켰다. 이후 에펜슈타인 가문, 스폰하임 가문 등 여러 가문이 케른텐을 통치했다. 1122년 에펜슈타인 가문이 단절되자 스폰하임 가문이 공국을 상속받았고, 스폰하임 가문의 마지막 공작 울리히 3세는 오타카르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를 격퇴하고 케른텐을 마인하르트 2세에게 주었다. 1335년 하인리히 6세 사후, 루트비히 4세는 케른텐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겼고, 이후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케른텐을 지배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요제프 2세는 합스부르크 국가를 중앙집권화하려 했고, 1804년 케른텐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통합되었다.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치슬라이타니아 황제 직할령이 되었다.

수 세기 동안 케른텐 남부에서는 슬로베니아어 대신 독일어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케른텐 제후들이 케른텐을 빈트 대공국, 즉 슬로베니아인의 대공국이라 칭한 것은 케른텐인이 게르만족 이전의 뿌리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1. 카란타니아와 중세 왕조

7세기경 슬라브족이 세운 카란타니아 공국은 케른텐 공국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카란타니아는 743년경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의 종주권 아래 놓였고, 788년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제국에 편입되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 2세의 영토가 되었다. 97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는 바이에른 공국에서 케른텐 공국을 분리하여 독립적인 공국으로 만들었다.[1]

초기에는 루이트폴딩 가문, 잘리어 가문 등 다양한 가문이 케른텐 공작을 역임했다.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에펜슈타인 가문이, 12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는 스폰하임 가문이 케른텐 공국을 통치했다. 스폰하임 가문의 베른하르트는 케른텐 공국에서 '영토의 군주'로 존경받는 뛰어난 공작이었다.[2] 1269년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가 케른텐 공작을 겸임하면서 프르제미슬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2. 2. 합스부르크 가문

로마왕으로 선출되어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를 물리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는 처음에는 케른텐을 고리치아-티롤 백작 메인하르트 2세에게 주었다. 1335년, 이 가문의 마지막 남자였던 케른텐의 하인리히가 사망한 후, 황제 루트비히 4세는 5월 2일 린츠에서 케른텐과 티롤 백국 남부를 제국 봉토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겼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918년까지 케른텐을 계속 통치했다.[4]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다른 구성 부분과 마찬가지로 케른텐은 오랫동안 자체적인 헌법 구조를 가진 반자치 국가로 남아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379년 노이베르크 조약에 따라 두 번, 그리고 1564년에 다시 가족 내에서 영토를 분할했다. 매번 케른텐 공국은 내오스트리아의 일부가 되었고, 인접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카르니올라 공국과 공동으로 통치되었다.

18세기 초 케른텐 지도, 잘츠부르크(분홍색)와 밤베르크(노란색)가 소유한 봉토 표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는 보다 단일화된 합스부르크 국가를 만들려고 시도했으며, 1804년 케른텐은 프란츠 2세/1세 치하에서 새로 설립된 오스트리아 제국에 통합되었다. 1867년, 공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서부인 치슬라이타니아의 황제 직할령이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치슬라이타니아 왕령 케른텐


수세기 동안 더 권위있는 독일어슬로베니아어를 희생하면서 확장되었지만, 16세기에 케른텐의 신분 계층은 케른텐이 "빈디크 대공국", 즉 주권적인 슬로베니아 공국이라고 지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케른텐 사람들이 고대와 게르만 이전의 뿌리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5]

2. 3.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 중 케른텐은 인구 1,000명당 37명의 전쟁 사망자를 겪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다른 대부분의 독일어 사용 지역보다 높은 수치였다.(독일령 남부 모라비아 제외)[2]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 1919년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타르비시오에서 폰테바까지 뻗어 있는 케른텐 운하 계곡(187제곱마일)이 이탈리아로 넘어갔다. 또한, 슬로베니아어 사용 지역인 메자 계곡, 운터드라부르크(이후 드라보그라드로 개명됨) 주변의 드라바 계곡 지역, 그리고 예제르스코 지역(128제곱마일)이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후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할양되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은 이전 공국의 이 지역에 만족하지 못하고, 카라반케 산맥 북쪽의 클라겐푸르트를 포함한 지역까지 점령했다. 연합국은 케른텐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1920년 10월 10일에 케른텐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는 오스트리아에 유리하게 나왔고, 생제르맹 조약에서 결정된 국경은 바뀌지 않았다.

클라겐푸르트 ''란트하우스''


이전 공국의 오스트리아 부분은 오늘날 연방주인 케른텐주(Land Kärntende)가 되었다. 이탈리아에 할양된 지역은 "줄리안 변경주"의 일부로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의 자치 지역에 속한다. 유고슬라비아에 할당된 지역의 대부분(참고 슬로베니아령 케른텐)은 현재 슬로베니아의 더 큰 케른텐 통계 지역의 일부를 형성한다.

3. 케른텐 공작 목록

1276년 루돌프 1세가 로마 왕으로 선출되어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를 물리친 후, 케른텐을 고리치아-티롤 백작 마인하르트 2세에게 주었다.[1] 1335년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자, 루트비히 4세린츠에서 케른텐 공국과 티롤 백국 남부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제국 봉토로 넘겼다.[1] 1619년,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된 후, 케른텐 공국은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와 통합되었고, 이후 신성 로마 황제가 케른텐 공작을 겸임했다.

3. 1. 여러 가문의 교차 통치 시대

976년, 황제 오토 2세는 기존의 간선 공국 외에 여섯 번째 공국인 카린티아 공국을 새로 만들었다. 그는 바이에른 영토에서 카린티아를 분리하고, 전 공작 베르톨트의 아들인 젊은 하인리히를 공작으로 임명하여 루이트폴딩 왕조에게 영토 소유권을 돌려주었다.[1]

최대 확장 시 신성 로마 제국 내 케른텐 공국


젊은 하인리히는 세 명의 하인리히 전쟁에서 황제 오토 2세에 대항했으나 실패했고, 2년 후 카린티아를 잃었다. 황제의 조카인 오토 1세(잘리어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985년 하인리히가 다시 공작 칭호를 되찾았지만, 989년 사망 후 카린티아는 바이에른의 오토 왕조로 되돌아갔다.[1]

1012년경, 에펜슈타인의 아달베로 1세 백작은 마지막 오토 황제 하인리히 2세로부터 공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아달베로는 1035년 잘리어 황제 콘라트 2세의 호의를 잃은 후 해임되었다.[1] 1039년 케른텐은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상속되었고, 1077년 공작위는 다시 에펜슈타인 가문의 일원인 루이트폴트에게 주어졌지만, 루이트폴트의 동생 하인리히 3세가 1122년 사망하면서 가문이 단절되었다.[1]

가문이름재위 기간
루이트폴딩 왕조하인리히 1세976년–978년
잘리어 왕조오토 1세978년–985년
루이트폴딩 왕조하인리히 1세985년–989년
오토 왕조하인리히 2세989년–995년
오토 왕조하인리히 3세995년–1002년
잘리어 왕조오토 1세1002년–1004년
잘리어 왕조콘라트 1세1004년–1011년
에펜슈타인 가문아달베로1011년–1035년
잘리어 왕조콘라트 2세1036년–1039년
잘리어 왕조하인리히 4세1039년–1047년
구 웰프 가문벨프1047년–1055년
에초 가문콘라트 3세1056년–1061년
체링겐 가문베르톨트 2세1061년–1077년
에펜슈타인 가문루이톨트1077년–1090년
에펜슈타인 가문하인리히 3세1090년–1122년


3. 2. 슈폰하임 가문


  • 하인리히 4세 (1122년–1123년)
  • 엥겔베르트 (1123년–1134년)
  • 울리히 1세 (1134년–1144년)
  • 하인리히 5세 (1144년–1161년)
  • 헤르만 (1161년–1181년)
  • 울리히 2세 (1181년–1201년)
  • 베른하르트 (1199년부터 섭정, 1202년–1256년 공작)
  • 울리히 3세 (1256년–1269년)

3. 3. 여러 가문의 교차 통치 시대


  • 오타카르 2세 (1269년-1276년), 보헤미아의 왕 (1253년-1278년)
  • 루돌프 1세 (1276년-1286년), 독일의 왕 (1273년-1291년)

3. 4. 겔츠 백작 가문 (고리치아-티롤)


  • 마인하르트 (1286년–1295년)
  • 헨리 6세 (1295년–1335년), 1306년/1307년–1310년 보헤미아 왕 역임, 형제들과 공동 통치
  • * 고리치아-티롤의 루이 (1295년–1305년)
  • * 오토 3세 (1295년–1310년)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를 격퇴하고 로마 왕으로 즉위한 후, 케른텐을 마인하르트에게 주었다. 1335년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자, 루트비히 4세는 1335년 5월 2일 린츠에서 케른텐 공국과 티롤 남부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제국의 봉토로 주었다.

3. 5. 합스부르크 가문

1276년 루돌프 1세가 로마 왕으로 선출되어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를 물리친 후, 처음에는 케른텐을 고리치아-티롤 백작 메인하르트 2세에게 주었다.[1] 1335년, 이 가문의 마지막 남자였던 케른텐의 하인리히가 사망한 후, 황제 루트비히 4세는 5월 2일 린츠에서 케른텐과 티롤 백국 남부를 제국 봉토로 합스부르크가에 넘겼다.[1] 합스부르크가는 1918년까지 케른텐을 계속 통치했다.[1]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다른 구성 부분과 마찬가지로 케른텐은 오랫동안 자체적인 헌법 구조를 가진 반자치 국가로 남아 있었다.[1] 합스부르크가는 1379년 노이베르크 조약에 따라 두 번, 그리고 1564년에 다시 가족 내에서 영토를 분할했다.[1] 매번 케른텐 공국은 내오스트리아의 일부가 되었고, 인접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카르니올라 공국과 공동으로 통치되었다.[1]

1335년부터 1637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과 내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케른텐 공국을 통치하였다.

통치 기간이름비고
1335년–1339년오토 4세알브레히트 2세와 공동 통치
1335년–1358년알브레히트 2세
1358년–1362년프리드리히 3세루돌프 2세와 공동 통치
1358년–1365년루돌프 2세
1365년–1395년알베르트 3세
레오폴트 계열
1379년–1386년레오폴트 3세
1386년–1406년빌헬름
1406년–1424년에른스트
1424년–1493년프리드리히 3세
1458년 합스부르크 영토 통합 이후
1493년–1519년막시밀리안 1세1508년–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519년–1521년카를 5세1519년–155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521년–1564년페르디난트 1세1558년–156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내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1564년–1590년카를 2세
1590년–1637년페르디난트 2세1619년–1637년 신성 로마 황제



케른텐은 1619년에 합스부르크 영토와 다시 통합되었다.[4]

4. 인구 통계

1910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인구 조사에 따르면 케른텐 공국의 총 인구는 396,228명이었다.

4. 1. 언어 구성

언어인구비율
독일어304,315명76.80%
슬로베니아어82,212명20.75%
이탈리아어82명0.02%
기타 언어 또는 외국어9,619명2.43%
총합396,228명100.00%



1910년 마지막 오스트리아 제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케른텐 공국은 위와 같은 언어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인구 조사는 민족 집단이나 모국어를 집계하지 않고, "일상적인 의사 소통 언어"(Umgangssprachede)를 집계했다.

4. 2. 종교 구성

종교인구비율
로마 가톨릭교371,361명93.72%
개신교24,299명6.13%
유대교341명0.09%
기타 종교 또는 불명227명0.06%
총계396,228명100%


참조

[1] 웹사이트 Mediaeval Genealogy http://www.genealogi[...] 2007-12-14
[2] 서적 The Army of Francis Joseph Purdue University Press
[3] 백과사전 Kärnten
[4] 웹사이트 Mediaeval Genealogy http://www.genealogi[...]
[5] 웹사이트 ibid http://www.genealogi[...]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