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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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레고리오 15세는 1554년 볼로냐에서 태어나 1621년부터 1623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그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교회법과 로마법을 공부하고 교황청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교황으로 선출된 후 조카 루도비코 루도비시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등 족벌주의를 보였다. 재위 기간 동안 콘클라베 선거 방식을 개정하고 포교성성을 설치하는 등 교황청 개혁을 추진했으며, 반종교개혁을 지원하고, 여러 성인을 시성했다. 또한 예술을 후원하여 바로크 양식 발전에 기여했으며, 1623년 7월 8일 사망하여 산티냐시오 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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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15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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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정보 | |
존칭 | 교황 |
이름 | 그레고리오 15세 |
직함 | 로마 주교 |
로마자 표기 | Gregorius XV |
이탈리아어 표기 | Gregorio XV |
출생 이름 | 알레산드로 루도비시오 |
교회 | 가톨릭교회 |
재임 시작 | 1621년 2월 9일 |
재임 종료 | 1623년 7월 8일 |
선임자 | 바오로 5세 |
후임자 | 우르바노 8세 |
주교 서임 | 1612년 5월 1일 |
주교 서임자 | 시피오네 추기경 카페렐리-보르게세 |
추기경 서임 | 1616년 9월 19일 |
추기경 서임자 | 바오로 5세 |
출생일 | 1554년 1월 9일 |
출생지 | 교황령 볼로냐 |
사망일 | 1623년 7월 8일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
문장 | C o a Gregorius XV.svg |
서명 | Signature of Pope Gregory XV.svg |
이전 직책 | 사도 참사회 참조인 (1593–1596) 로마 부교구장 (1597–1598) 로마 교황청 법원 감사관 (1599–1612) 볼로냐 대교구 대주교 (1612–1621) 산타마리아인 트라스폰티나 성당 사제 추기경 (1616–1621) |
기타 | 그레고리오 |
모교 | 볼로냐 대학교 |
기타 정보 | |
일본어 이름 | グレゴリウス15世 |
한국어 이름 | 그레고리오 15세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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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알레산드로 루도비시는 1554년 볼로냐에서 사모지아(오늘날의 사비뇨) 백작 폼페오 루도비시와 카밀라 비안키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일곱 형제자매 중 셋째였다.
예수회가 세운 로마 기숙학교와 로마의 게르만 대학에서 공부한 후 볼로냐 대학교에서 1575년 6월 4일 교회법과 로마법 학위를 받았다. 교황청 법률가로 경력을 시작했으나, 사제 서품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1575년 로마로 돌아와 1593년부터 1596년까지 교황청 대심원 참사, 1597년 로마 부총독(1598년까지 재직), 1599년부터 1612년까지 교황청 공소원 감사로 일했다.
1612년 3월 12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볼로냐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짐작컨대 이 때 사제품을 받고, 같은 해 5월 1일 산 안드레아 알 퀴리날레 성당에서 주교품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616년 8월, 사보이아 공국에 교황 대사로 파견되어 몬페라트 변경백국의 곤자가 가문을 둘러싼 분쟁 중이던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를 중재했다. 1616년 9월 19일,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폰티나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1]
교황 바오로 5세 선종 후, 콘클라베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그레고리오 15세로 명명되었다. 1621년 2월 14일 즉위식, 5월 14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로마 주교좌 착좌 미사를 봉헌했다.
즉위 당시 67세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못했던 그는 조카 루도비코 루도비시를 추기경에 서임하고, 동생 오라치오 루도비시를 교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도움을 받았다.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루도비코는 가문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교황에게 충심으로 헌신했다고 한다. 그레고리오 15세는 1621년 동생 오라치오를 로마 귀족 및 피아노로마노 공작, 1622년 조카 루도비코가 구입한 차가롤로 공작에 또 다른 동생을 임명했다. 다른 조카 니콜로 루도비시는 1632년 피옴비노 공작 및 이솔라델바 영주 상속녀와 혼인하여 지위를 물려받았다.
2. 1. 초기 생애
알레산드로 루도비시는 1554년 볼로냐에서 사모지아(오늘날의 사비뇨) 백작 폼페오 루도비시와 카밀라 비안키니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일곱 명의 형제자매 중 셋째였다.그는 예수회가 세운 로마 기숙학교와 로마의 게르만 대학에서 공부한 후 볼로냐 대학교에 가서 1575년 6월 4일 교회법과 로마법 학위를 받았다. 그는 로마에서 교황청 법률가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 때 그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1575년 로마로 돌아와 1593년부터 1596년까지 교황청 대심원에서 참사로 일했으며, 1597년 로마 부총독으로 임명되어 1598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또한 1599년부터 1612년까지 교황청 공소원의 감사로도 일했다.
1612년 3월 12일, 교황 바오로 5세는 그를 볼로냐 대주교로 임명했다. 짐작컨대 알레산드로 루도비시는 이 때 사제품을 받은 데 이어 같은 해 5월 1일 산 안드레아 알 퀴리날레 성당에서 주교품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616년 8월, 교황은 그를 사보이아 공국에 교황 대사로 파견해 몬페라트 변경백국의 곤자가 가문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진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를 중재하도록 했다.
1616년 9월 19일, 교황 바오로 5세는 그를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폰티나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했다.
2. 2. 교황청 경력
알레산드로 루도비시는 1554년 볼로냐에서 사모지아(오늘날의 사비뇨) 백작 폼페오 루도비시와 카밀라 비안키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총 일곱 명의 형제 중에서 셋째였다.[1]그는 예수회가 세운 로마 기숙학교에서 공부한 후 볼로냐 대학교에 가서 1575년 6월 4일 교회법과 로마법 학위를 받았다.[1] 이후 로마에서 교황의 법률가로 경력을 시작했으나, 사제 서품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1]
1575년 로마에 돌아온 그는 1593년부터 1596년까지 교황청 대심원에서 중재인으로, 1597년에는 로마 시 대리로 임명되어 1598년까지 재직했다.[1] 1599년부터 1612년까지는 교황청 공소원의 감사관으로 일했다.[1]
1612년 3월 12일 교황 바오로 5세는 그를 볼로냐 대주교에 임명했다.[1] 짐작컨대 알레산드로 루도비시는 이때 사제품을 받은 후, 같은 해 5월 1일 산 안드레아 알 퀴리날레 성당에서 주교품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
1616년 8월, 교황은 그를 사보이아 공국에 교황 대사로 파견하여 몬페라트 변경백국의 곤자가 가문을 둘러싼 분쟁 중이던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를 중재하도록 했다.[1]
1616년 9월 19일, 교황 바오로 5세는 그를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폰티나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했다.[1]
2. 3. 교황 선출
교황 바오로 5세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주교좌가 있던 볼로냐에서 로마로 갔다. 그리고 콘클라베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자신의 이름을 그레고리오 15세라고 명명했다. 그의 즉위식은 1621년 2월 14일 수석 부제급 추기경 안드레아 바로니 페레티 몬탈토 추기경의 집전 아래 거행되었으며, 이어서 같은 해 5월 14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로마 주교좌 착좌 미사를 봉헌했다.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그는 이미 67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따라서 교황청에서 그를 돕기 위해 그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힘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레고리오 15세는 자신의 조카인 25세의 청년 루도비코 루도비시가 그에 걸맞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족벌주의의 위험을 감수하고 교황으로 즉위한지 사흗날에 그를 추기경에 서임했다. 같은 날, 교황의 어린 동생 오라치오 루도비시는 교황군을 이끄는 교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루도비코는 자신을 등용해 준 교황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가톨릭 백과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루도비코는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교회의 복지 문제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과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교황을 위해 충심으로 헌신했다고 한다. 그레고리오 15세는 공작령 두 곳을 확보한 다음 1621년 자신의 동생 오라치오를 로마 귀족 및 피아노로마노 공작에 임명했으며, 1622년에는 조카 루도비코 루도비시가 콜론나 가문으로부터 구입한 차가롤로 공작에 또 다른 동생을 임명했다. 또 다른 조카인 니콜로 루도비시는 1632년 3월 30일 피옴비노 공작 및 이솔라델바 영주의 상속녀와 혼인해 그 지위를 물려받았다.
3. 교황 재위 기간
그레고리오 15세는 교황 재임 기간 동안 콘클라베 선거 방식 개선, 선교 활동 체계화, 악마 관련 범죄 처벌 명확화 등 가톨릭 교회 발전에 기여했다.
1621년 교황 칙서 《영원하신 성부의 성자》(Aeterni Patris Filius)를 발표하여 콘클라베 선거 방식을 개선했고,[1] 1622년 포교성성을 설치하여 선교 활동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다.[2] 1623년에는 요술 행위에 대한 교황의 마지막 법령인 《전능하신 하느님》(Omnipotentis Dei)을 반포하여 악마와 관련된 범죄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규정했다.[2]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 지그문트 3세 바사를 지원하여 개신교와 오스만 제국에 맞서 가톨릭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다.[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냐시오 데 로욜라 등 주요 성인들을 시성하고, 암브로지오 산세도니 등을 시복하여 가톨릭 교회의 영성을 풍요롭게 했다. 구에르치노, 잔 로렌초 베르니니, 알레산드로 알가르디와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바로크 예술의 발전에도 기여했다.[1]
3. 1. 교황청 개혁
그레고리오 15세는 박식한 신학자로 개혁 정신을 천명했다.[1] 1621년 11월 15일 교황 칙서 《영원하신 성부의 성자》(Aeterni Patris Filius)를 발표하여 비밀 투표로 결정되는 콘클라베에서 철저한 검토와 타협, 환호 등 세 가지 선거 방식만을 허용했다. 1622년 1월 6일에는 선교 정책을 담당하는 포교성성을 설치했다.[2] 포교성성은 한 달에 두 차례, 교황과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열었고 각 선교 지역의 정보와 파견지, 파견할 인물이나 수도회 등을 결정하고 선교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였다.1623년 3월 20일에는 요술 행위에 반대한 교황의 마지막 법령인 《전능하신 하느님》(Omnipotentis Dei)을 반포했다. 이 법령으로 요술 행위에 대한 형벌은 과거보다 줄었으며, 처벌 대상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이나 악마의 도움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로 국한되었다.[2]
3. 2. 반종교개혁 지원
그레고리오 15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가톨릭 제후연맹이 개신교에 맞서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 금화 백만 두카토를 보냈고,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 지그문트 3세 바사를 원조하였다.[1] 1623년 3월 20일에는 요술 행위에 반대한 교황의 마지막 법령인 《전능하신 하느님》(Omnipotentis Dei)을 반포했다. 요술 행위에 대한 형벌은 과거보다 줄었으며, 처벌 대상을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이나 악마의 도움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로 국한했다.[2]그레고리오 15세는 박식한 신학자였으며 개혁적인 정신을 보였다.[1] 1621년 11월 15일 교황 칙서 《영원하신 성부의 성자》(Aeterni Patris Filius)를 발표하여 비밀 투표로 결정되는 콘클라베에서 철저한 검토와 타협, 준 영감의 세 가지 선거 방식만을 허용했다. 1622년 1월 6일에는 교황청의 선교 부서로서 기능하는 상설 기구인 선교성을 설립했다.[2]
3. 3. 시성 및 시복
1622년 3월 12일, 그레고리오 15세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냐시오 데 로욜라, 이시도로 농부, 필리포 네리, 테레사 아빌라를 시성했다.또한 암브로지오 산세도니,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페드로 데 알칸타라를 시복했다.
3. 4. 예술 후원
그레고리오 15세는 볼로냐 출신 화가 구에르치노를 로마로 초빙했는데, 이는 고전주의 바로크 양식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1] 그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 알레산드로 알가르디에게 자신의 흉상 제작을 의뢰했고, 알가르디가 만든 절제된 흉상은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1]4. 죽음과 유산
그레고리오 15세는 신결석증을 앓고 있었으며, 1623년 6월 16일부터 7월 1일까지는 설사와 위장 질환으로 큰 고통을 겪으며 침대에 누워 지냈다. 7월 4일에는 고열로 매우 쇠약해져 상태가 악화되었다. 7월 5일 병자성체를, 7월 6일에는 종부성사를 받았고, 이틀 후인 7월 8일 퀴리날레 궁전에서 사망했다.[2]
그는 산티냐시오 성당에 매장되었으며, 80년 이상 지난 후 예수회는 루도비코 루도비시 추기경의 뜻에 따라 그의 모습을 새긴 웅장한 기념비를 이 묘비에 세웠다.
그의 뒤를 이어 교황 우르바노 8세가 교황이 되었다.
참조
[1]
뉴스
UPI Almanac for Thursday, Jan. 9, 2020
https://www.upi.com/[...]
2020-01-09
[2]
웹사이트
Sede Vacante 1623
http://www.csun.edu/[...]
201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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