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4세
1. 개요
교황 요한 4세는 640년 12월 24일에 선출되어 642년 10월 12일에 사망한 교황이다. 달마티아 출신으로, 교황 재위 기간 동안 단의론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교회와의 관계를 맺었으며, 슬라브족 선교와 고향 지역 구호 활동에 힘썼다. 특히 단의론 논쟁에서 동로마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등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 이름 | 요한 4세 |
|---|---|
| 직함 | 로마 주교 |
| 교회 | 가톨릭 교회 |
| 재임 시작 | 640년 12월 24일 |
| 재임 종료 | 642년 10월 12일 |
| 선임자 | 세베리노 |
| 후임자 | 테오도로 1세 |
| 출생 이름 | 요한 |
| 출생일 | 미상 |
| 출생지 | 이아데라, 달마티아 |
| 사망일 | 642년 10월 12일 |
| 사망 장소 | 바티칸 |
| 기타 | 요한 |
| 라틴어 이름 | Ioannes IV |
|---|---|
| 이탈리아어 이름 | Papa Giovanni IV |
| 일본어 이름 | ヨハネス4世 |
| 로마자 표기 | Yohanesu 4-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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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년 사망 -
영류왕
영류왕은 고구려의 27대 왕으로 당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왕이다. -
642년 사망 -
사택왕후
사택왕후는 백제 무왕의 왕비로, 미륵사지 석탑 금제사리봉안기에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되어 있으며 미륵사 창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녀의 이름과 선화공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7세기 동로마인 -
교황 호노리오 1세
교황 호노리오 1세는 앵글로색슨 선교 지원과 기독교 건축물 재건에 힘썼으나, 단의론 논쟁에 휘말려 사후 파문되었고, 이슬람의 부상을 인지했다. -
7세기 동로마인 -
교황 에우제니오 1세
에우제니오 1세는 온화한 성품으로 동로마 황제의 지지하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단성론 반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불인정으로 황제와 갈등을 겪었으며, 이후 성인으로 시성되어 기념되고 있다. -
7세기 이탈리아 사람 -
교황 호노리오 1세
교황 호노리오 1세는 앵글로색슨 선교 지원과 기독교 건축물 재건에 힘썼으나, 단의론 논쟁에 휘말려 사후 파문되었고, 이슬람의 부상을 인지했다. -
7세기 이탈리아 사람 -
교황 에우제니오 1세
에우제니오 1세는 온화한 성품으로 동로마 황제의 지지하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단성론 반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불인정으로 황제와 갈등을 겪었으며, 이후 성인으로 시성되어 기념되고 있다.
2. 생애 초기와 교황 선출
요한 4세는 달마티아의 야드라(현 자다르) 출신이었다. 그는 법률가(학자)였던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의 아들이었다. 선출 당시 그는 로마 교회의 대사제였는데, 이는 교황청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역할이었다. 요한은 "매우 교양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요한의 서임이 640년 12월 24일에 선출 직후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선거는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아니라 라벤나 총독에 의해 승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교황 재위 기간의 주요 활동
요한 4세는 교황 재위 기간 동안 단의론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슬라브족의 침입으로 고통받는 고향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 지역을 돕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요한 4세는 호노리우스 1세가 단의론을 옹호했다는 비판에 대해, 호노리우스 1세가 예수가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의지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 했을 뿐이라고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또한 슬라브족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마르티누스 수도원장을 파견하여 재정 지원을 하였다.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할 수 없었기에, 달마티아 성인들의 유해를 로마로 옮겨와 그들을 기리는 예배당을 세우고, 예배당 모형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모자이크로 장식하기도 했다.
3.1.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교회와의 관계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요한 4세는 다른 가톨릭교회 주교들과 함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요한 4세는 부활절 시기 계산의 오류를 지적하고, 펠라기우스파 이단에 대해 경계할 것을 촉구했다.
3.2. 단의론 논쟁
요한 4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다른 가톨릭 교회 주교들과 함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부활절 시기에 관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펠라기우스파 이단에 대해 경계할 것을 촉구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그는 단의론을 이단으로 단죄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즉시 "에크테시스"로 알려진 단의론 문서를 부인했다. 요한 4세는 헤라클리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3세에게 호노리우스 1세 교황에게 보낸 사과문을 전달했는데, 그 안에서 그는 호노리우스의 이름을 단의론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비난했다. 그는 호노리우스가 예수 안에 하나의 의지만 있다고 말한 것은 예수 안에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의도였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641년, 로마에서 최초로 종교회의(로마 공의회)를 열어 단의론을 강력히 비난하고, 헤라클리우스 황제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3.3.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 구호 활동
슬라브족의 발칸반도 침입으로 고향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자, 교황 요한 4세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요한 4세는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르티누스 수도원장을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로 보내 포로들을 구출하고 재정 지원을 하도록 했다.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할 수는 없었기에, 몇몇 중요한 달마티아 성인들의 유해를 로마로 옮겼다. 이후 요한 4세는 이들을 기리는 예배당을 세웠다. 교황은 예배당에 자신이 예배당 모형을 들고 있는 모자이크 그림을 장식했다. 요한 4세는 이를 통해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의 슬라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다.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는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달마티아로 초청한 백색 크로아티아인들의 영주인 포르가 공작이 헤라클리우스 황제에게 기독교 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이 메시지가 보내진 황제는 헤라클리우스 황제 자신이었고, 그가 요한 4세 교황에게 보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3.4. 슬라브족 선교
슬라브족의 발칸 반도 침입으로 인한 고향의 어려움은 요한 4세의 관심을 그곳으로 돌리게 했다.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요한 4세는 마르티누스 수도원장을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로 보내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한 많은 돈을 전달하게 했다.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할 수 없었기에 몇몇 중요한 달마티아 성인들의 유물이 로마로 옮겨졌다. 그 후 요한 4세는 그들을 기리는 예배당을 세웠다. 교황은 그 예배당에 자신이 예배당 모형을 들고 있는 모자이크 그림으로 장식했다. 요한 4세는 이를 통해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의 슬라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에 의해 달마티아로 초청받은 백색 크로아티아인들의 영주인 포르가 공작이 기독교 교사를 보내달라고 헤라클리우스 황제에게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이 메시지가 보내진 황제는 헤라클리우스 황제 자신이었고, 그가 요한 4세 교황에게 보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