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펠라지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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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펠라지오 2세는 579년부터 590년까지 재위한 로마 출신의 교황이다. 롬바르드족의 침입에 맞서 동로마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프랑크족에 의지했으며, 성직자 독신주의를 장려했다. 그는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건설을 명령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와 갈등을 겪었다. 펠라지오 2세는 590년 로마를 휩쓴 역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그의 성직자 독신주의 규정을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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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펠라지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펠라지오 2세 |
직함 | 로마 주교 |
교회 | 칼케돈 기독교 |
재임 기간 | |
시작 | 579년 11월 26일 |
종료 | 590년 2월 7일 |
이전 교황 | 베네딕토 1세 |
다음 교황 | 그레고리오 1세 |
개인 정보 | |
출생명 | 펠라지오 |
출생 | 520년? |
출생지 | 동고트 왕국 로마 |
사망 | 590년 2월 7일 |
사망지 | 동로마 제국 로마 |
추가 정보 | |
참고 | 펠라지오 |
2. 생애
펠라지오 2세는 로마 출신으로 동고트족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579년 11월 26일 황제의 승인 없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2] 그는 롬바르드족의 침입에 맞서 황제 마우리키우스와 프랑크족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휴전을 맺어야 했다.[1]
펠라지오 2세는 성직자 독신주의를 장려하고 관련 규정을 발표했다.[1]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밀라노 주교는 삼장 분열에서 로마와 다시 교류를 회복했지만, 다른 북부 이탈리아 주교들은 분열 상태를 유지했다.[1] 또한 성 라우렌시오가 순교한 장소에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건설을 명했다.[1]
스페인의 서고트족이 개종하였으나,[1]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와 "전 세계의 총대주교" 칭호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1][3][4] 펠라지오 2세는 590년 로마를 휩쓴 역병으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펠라지오 2세는 로마 출신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위니길드인 것으로 보아 동고트족의 후손으로 추정된다.[2]2. 2. 교황 선출
교황 펠라지오 2세는 로마 출신이었지만, 아버지의 이름이 위니길드인 것으로 보아 동고트족의 후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펠라지오 2세는 579년 11월 26일, 황제의 승인 없이 교황 베네딕토 1세의 후임 교황이 되었다.[2]2. 3. 롬바르드족과의 갈등
교황 펠라지오 2세는 롬바르드족에 맞서 황제 마우리키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펠라지오 2세는 휴전을 "매수"해야 했으며, 프랑크족에게 의지했다. 프랑크족은 이탈리아를 침공했지만 롬바르드족의 뇌물을 받고 떠났다.[1]2. 4. 성직자 독신주의 강화
펠라지오 2세는 성직자 독신주의를 장려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발표했다.[1] 그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오 1세는 펠라지오 2세의 성직자 독신주의 규정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여 어느 정도 수정했다.[1]2. 5. 삼장 분열과 밀라노
펠라지오 2세 재위 기간 동안, 밀라노의 주교는 삼장 분열로 인해 로마와의 교류가 끊어졌지만, 581년경에 다시 교류를 회복했다.[1] 그러나 북부 이탈리아의 다른 주교들은 분열 상태를 유지했다.[1]2. 6.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갈등
펠라지오 2세는 교황의 권위가 훼손된다고 여겨 "전 세계의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채택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와 갈등을 빚었다.[1][3][4]2. 7. 서고트족의 개종
펠라지오 2세 재위 기간에 스페인의 서고트족이 개종하였다.[1] 그러나 펠라지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가 "전 세계의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채택한 것에 대해 교황의 권위가 훼손된다고 믿어 갈등을 겪었다.[1][3][4]2. 8. 죽음
펠라지오는 590년 말 로마를 황폐화시킨 역병의 희생자가 되었다.[1] 그의 후임자 그레고리오 1세는 펠라지오가 제정한 성직자 독신주의 규정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여 어느 정도 수정했다.[1]3. 업적
교황 펠라지오 2세는 롬바르드족의 침입에 맞서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결국 펠라지오 2세는 롬바르드족과 휴전을 맺어야 했고, 프랑크족에게 의지했으나 이들 역시 롬바르드족에게 매수되어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1]
펠라지오 2세는 성직자 독신주의를 장려하고 관련 규정을 발표했다.[1]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밀라노 주교는 삼장 분열로 인해 로마와의 교류를 단절했다가 581년경 복귀했으나, 북부 이탈리아의 다른 주교들은 분열 상태를 유지했다.[1]
또한 스페인의 서고트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교황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갈등을 빚었다.[1]
펠라지오 2세는 590년 말 로마에 퍼진 역병으로 사망했다.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펠라지오 2세의 성직자 독신주의 규정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판단하여 일부 수정했다.[1]
3. 1.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건설
펠라지오는 성 라우렌시오가 순교한 장소에 교회 성지인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건설을 명했다.[1][3][4]참조
[1]
백과사전
[2]
웹사이트
Pelagius II
https://www.britanni[...]
[3]
서적
Saints and Sinners: A History of the Popes
Yale University Press
[4]
서적
Chronicle of the Popes: The Reign-by-Reign Record of the Papacy from St. Peter to the Present
Thames & Hudson
[5]
웹사이트
Pope Pelagius II
https://en.wikisourc[...]
[6]
서적
Saints and Sinners: A History of the Popes
Yale University Press
[7]
서적
Chronicle of the Popes: The Reign-by-Reign Record of the Papacy from St. Peter to the Present
Thames & Hu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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