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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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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40년경 로마에서 태어나 604년에 사망한 인물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자 성인이다. 그는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로마 시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수도 생활을 거쳐 590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 재임하며 그는 교회 개혁, 교황권 강화, 선교 활동, 전례 개혁, 자선 사업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잉글랜드 선교를 통해 앵글로색슨족의 기독교화를 이끌었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정립하는 등 서방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저술은 중세 교황 제도를 확립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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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령과 함께 있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
12세기 필사본 대화록에 있는 그레고리오 1세의 삽화, 영국 도서관, 런던.
직함로마 주교
출생 이름그레고리우스 아니키우스 (Gregorius Anicius)
출생540년경
출생지동로마 제국, 로마
사망604년 3월 12일
사망지동로마 제국, 로마
매장지성 베드로 대성당 (1606년)
종교칼케돈 기독교
거주지로마
부모고르디아누스 (Gordianus)와 실비아
재임 정보
재임 시작590년 9월 3일
재임 종료604년 3월 12일
선임자펠라지오 2세
후임자사비니아노
서임590년 9월 3일
성인 정보
축일9월 3일 (로마 가톨릭교회)
3월 12일 (동방 정교회, 1969년 이전의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교회, 성공회, 루터교)
숭배 대상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상징교황관
교황 예복
교황 십자가

깃펜
수호 성인음악가, 가수, 학생, 교사

2. 생애 초기

그레고리오는 이탈리아가 대변동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542년부터 동로마 제국에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바다 건너 이탈리아에까지 번졌다. 역병은 이탈리아 전체를 휩쓸면서 사회에 기근과 공포를 만연시켰고, 이따금씩 폭동도 일어났다. 몇몇 지역에서는 3분의 1이 넘는 인구가 쓰러지거나 사망했으며, 이는 이탈리아인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72]

540년대 이탈리아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고트족 왕들이 통치하고 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점차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다시 되돌려지고 있었다. 당시 전투는 주로 이탈리아 북부 쪽에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그레고리오는 전쟁을 체험하지 못했다. 부친이 정계에서 은퇴하자 그의 가족은 고르디아누스 황제의 시칠리아 사유지로 이사를 갔다가 549년에 로마로 돌아왔다. 547년 토틸라가 로마를 약탈하고 시민들을 내쫓으면서 로마는 거의 파멸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549년 쫓겨나간 시민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다.[73] 고트족과의 전쟁은 552년에 종식되었으며, 이어진 프랑크족의 침입도 554년에 격퇴하였다. 554년 이후 이탈리아는 평화를 되찾았으며, 제국 정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과거 로마 제국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오늘날 그레고리오는 종종 로마와 게르만계, 동방과 서방,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대와 중세의 경계선에 위치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75]

2. 1. 가문과 출생

그레고리오는 540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이름을 그레고리오라고 지었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파수하다’ 또는 ‘지키다’라는 뜻이다.[65] 이 이름에 대한 어원을 연구했던 중세 작가들은 이름이 내포한 뜻을 교황 본인의 삶에 그대로 투영하였다. 가령 애빙던의 앨프릭은 “그(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매우 부지런했다.”라고 논평하였다.

그레고리오는 부유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부친의 이름은 고르디아누스, 모친의 이름은 실비아이다. 그레고리오의 가문은 교회와 가까운 관계였으며, 그의 고조부는 교황 펠릭스 3세이다.[66] 다만 펠릭스 3세는 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의 추대로 교황이 된 것이었던 반면에,[67] 그레고리오는 교황 선거에서 당당히 선출되어 베드로좌를 계승한 것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레고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된 덕분에 그의 가문은 당대 가장 막강한 성직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그레고리오의 가문은 대대로 첼리오 언덕에 있는 대저택(villa suburbana)에 거주하였다. 반대편 팔라티노 언덕에는 옛 로마 황제들이 거주하던 궁전들이 있다. 그리고 두 언덕 사이에 거리가 있는데, 오늘날에는 산 그레고리오 거리(Via di San Gregorio)라고 불리고 있다. 그 거리에서 북쪽으로 가면 콜로세움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 가면 원형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맞닿아 있다. 그레고리오가 살았던 시절에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이미 황폐화된 지 오래되었으며, 개인 소유 건물로 전락하였다.[68] 이 지역에는 수많은 빌라로 뒤덮였으며, 그레고리오의 가문 또한 로마 인근[69]은 물론 시칠리아에도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다.[70] 그레고리오는 나중에 챌리오 언덕에 있는 자기 가문의 저택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했는데, 300년이 지난 후 요한네스 히모니데스는 프레스코화를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고르디아누스는 키가 크고 긴 얼굴형에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실비아 역시 키가 컸으며, 둥근 얼굴형에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그녀는 명랑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레고리오 말고도 아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의 이름과 생애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71]

2. 2. 유년기와 교육

그레고리오는 부유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고조부는 교황 펠릭스 3세였다.[66] 그레고리오 가문은 첼리오 언덕에 있는 대저택에 거주하였으며, 로마 인근[69]시칠리아에도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70]

그레고리오는 540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65] 그의 부친은 고르디아누스, 모친은 실비아이다.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파수하다' 또는 '지키다'라는 뜻이다.[65] 애빙던의 앨프릭은 "그(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매우 부지런했다."라고 평했다.

그는 투르의 그레고리오가 문법, 변증법, 수사학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라고 칭할 정도로 고등 교육을 받았다.[74] 그는 라틴어는 능숙했지만 그리스어는 읽거나 쓰지 못했다. 그는 자연과학, 역사, 수학,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법률에도 능통했다.[74]

그레고리오는 부모의 권유로 570년 공직에 진출하여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한때 로마 시장(Praefectus urbi)의 지위에까지 올랐다.[74]

2. 3. 공직 진출

그레고리우스는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한때 로마 시의 총독을 지낸 귀족 고르디아누스의 아들로,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유한 로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4] 그는 문법, 수사학, 과학, 문학, 법률 등 좋은 교육을 받았고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4]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문법, 변증법, 수사학에서 ...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 관리가 되었고, 빠르게 승진하여 아버지처럼 불과 33세에 로마의 최고 민정직인 로마 총독이 되었다.[4]

3. 수도 생활

어릴 때부터 그레고리오는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열성적이었다. 부친이 사망한 후 그는 수사가 되어 키르쿠스 막시무스 맞은편 첼리오 언덕에 위치한 자신의 대저택(villa suburbana)을 수도원으로 개축하였다. 성 안드레아 사도를 수호성인으로 모신 이 수도원은 그레고리오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산 그레고리오 마노 알 첼리오 성당으로 개축되어 시성된 그레고리오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레고리오는 자신이 이해한 관상 기도를 “하느님 안에 쉼”이라고 표현하면서, 관상 생활은 “관상하는 동안에는 마치 모두 잠들어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이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침묵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76]

수도 생활 시절의 그레고리오는 항상 너그럽거나 상냥하지만은 않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한 예로, 낡은 침실에 누워 임종을 기다리던 한 수사는 죽기 전에 자신이 금화 세 닢을 훔쳤다고 고백하였다. 실제로 그의 침실을 살펴보니 금화 세 닢이 숨겨져 있었다. 청빈 허원을 한 이 수사의 죄를 보고 그레고리오는 다른 이에게 교훈이 되도록 그 옆에 아무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여 홀로 고독하게 죽게 했다. 그리고 수사가 사망한 후에는 외딴 곳에 무덤을 파고 시체를 묻을 때 금화 세 닢을 그 위에 던지며 수사 일동과 함께 “이 금화와 함께 너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저주하였다. 그레고리오는 설사 임종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77] 물론 그가 이렇게 엄격하게 행동한 것은 그 수사가 자신이 지은 죄를 진정으로 참회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한 것이었을 뿐, 죄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레고리오가 내린 처벌은 수사의 회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그레고리오는 연옥에 있을 수사의 영혼을 위로하고 하루속히 그가 보속을 모두 기워갚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지향으로 서른 대의 미사를 봉헌하도록 했다. 수사가 죽은 지 30일 후, 사망한 수사의 영혼은 다른 수사에게 나타나 이때까지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었으나 오늘 해방되어 이제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78]

그레고리오는 수도 생활을 매우 깊이 사랑하였다. 그는 수도자로 사는 것은 “우리 창조주만을 바라보며 열렬히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80] 수사가 된 그는 수도원에서 묵상과 공부에 몰두하였다. 특히 성경과 라틴 교부들의 문헌을 공부하고 고행에 힘썼다. 그의 세 고모는 모두 수녀가 되어 거룩한 생활로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첫째 고모와 둘째 고모가 조상인 펠릭스 3세 교황의 환시를 체험한 후에 갑작스럽게 선종하자, 막내 고모는 곧 수도 생활을 그만두고 자기 사유지의 집사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가문의 스캔들에 대해 그레고리오는 초대받은 이는 많으나 선택받는 이는 거의 없다고 평가하였다.[81] 한편 그레고리오의 모친 실비아는 성녀로 시성되었다.

4. 교황 사절 (579년 ~ 585년)

579년 교황 펠라지오 2세는 그레고리오를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재하는 자신의 교황 사절로 임명했고, 그레고리오는 586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82] 롬바르드족의 침입에 맞서기 위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578년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되었는데, 그레고리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83]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군사력이 동방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84년 펠라지오 2세는 그레고리오에게 롬바르드족 치하에서 로마가 겪는 고난을 설명하고,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구원군을 보내도록 힘써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83] 하지만 마우리키우스는 군사력 대신 모략과 외교를 통해 롬바르드족의 위협에 대처하기로 결정했고, 프랑크족과 롬바르드족을 이간질했다. 그레고리오는 동로마 제국이 동쪽의 페르시아, 북쪽의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더 큰 위협으로 여기기 때문에 로마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84]

그레고리오의 주요 임무는 동로마 황제에게 로마에 대한 군사 원조를 약속받는 것이었지만, 이미 동로마 황제의 대(對)이탈리아 정책이 명확해진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로마에 대한 군사 원조를 계속 요구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에서 귀찮은 존재로 여겨져 황제를 만나기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84] 게다가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직에 복직된 에우티키우스에 반대하며, 이전 12년간 총대주교였던 요한 스콜라스티쿠스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황제의 눈 밖에 나 있었다.[84]

이러한 상황에서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의 상류층과 인맥을 쌓는 데 주력했고, 특히 귀족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며 영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했다.[84] 그러나 이러한 인맥이 로마에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84] 요한네스 히모니데스에 따르면, 그레고리오는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펠라지오 2세가 지시한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85]

에우티키우스 총대주교와의 신학 논쟁은 그레고리오에게 동방 신학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겼고, 이는 그가 교황이 된 후에도 영향을 미쳤다. 585년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로마의 카엘리우스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돌아갔다.[88]

4. 1. 에우티키우스와의 신학 논쟁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황 사절로 있던 시절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티키우스와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당시 에우티키우스는 죽은 이의 부활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오늘날 이 논문은 남아 있지 않다. 에우티키우스는 죽었다가 부활한 육신은 공기보다 느끼기 힘들며, 물질적으로 만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그레고리오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육신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루카 복음서 24장 39절[105][20]을 근거로 해서 부활한 육신 역시 분명히 물질적인 형태라고 반박하였다.

두 사람 간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동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2세가 중재에 나섰다. 황제는 부활한 후의 사람의 육신도 물질적인 형태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 에우티키우스의 책들을 모조리 소각하라고 지시하였다. 바로 그 직후에 그레고리오와 에우티키우스 모두 병이 났다. 그레고리오는 회복되었지만, 에우티키우스는 582년 4월 5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에우티키우스는 임종 직전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면서 그레고리오는 논쟁을 그만두었다. 에우티키우스가 사망한 지 몇 주 후에는 티베리우스 2세 황제가 뒤따라 사망하였다.

5. 교황 (590년 ~ 604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레고리오 선교앵글로색슨 잉글랜드로 향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0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604년 선종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정치 경력을 쌓다가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59]

그는 공식 문서에서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자신을 '세계 총대주교'라고 칭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인시키고자 했다.[91] 그는 베드로좌가 모든 교회의 우두머리이며, 전체 교회의 관심과 수위권이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위임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모든 주교는 교황에게 예속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도 예외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레고리오 1세는 "제국과 교회를 동일한 실체로 해석한 후,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상호 보완적인 임무를 띠고 있는 교황과 황제 중, 교황이 보다 중요한 영적인 문제를 관장하기 때문에 황제도 궁극적으로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2]

그는 명상적인 수도원 생활을 그리워했지만,[21] 교황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했다. 특히 북유럽의 비(非)기독교인들에 대한 선교에 힘썼으며,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 파견하여 그레고리오 선교를 추진했다.[23][24]

그레고리오 1세는 서방뿐 아니라 동방에서도 저명한 인물이었으며, 로마 주교(司教)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했던 교황직의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는 부족 국가의 정착으로 서유럽에 생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교회의 통합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5. 1. 교황 즉위 초기의 어려움

그레고리오 1세는 본래 수도원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89] 교황으로서 첫 해 동안 쓴 글을 보면, 교황직의 부담감에 탄식하며 수도자로서의 평온한 기도 생활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다.[90] 590년 교황이 되자마자, 그는 베드로좌에 대한 욕심이 없음을 고백하고 수도자들의 명상적인 삶을 칭송하는 편지를 썼다.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로마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사흘간 참회 기도를 했다. 그는 기도 행렬을 이끌고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산탄젤로 성까지 행진했다. 행렬이 돌아가던 중, 대천사 미카엘이 칼을 든 채 산탄젤로 성 위를 맴도는 환시를 보았다. 그는 이 환시를 기도의 응답으로 믿고 전염병이 끝날 것이라 선포했고, 실제로 더 이상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를 기념하여 산탄젤로 성 위에 칼을 든 청동 천사상을 세우도록 했다.

당시 교황청교황 젤라시오 1세 이후 서방에서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갈리아 주교들은 대지주 가문 출신으로 가문과 동일시되었고, 히스파니아 주교들은 서고트족 통치하에 로마와 교류가 어려웠다. 이탈리아는 북쪽의 랑고바르드족과 남쪽의 라벤나 총독부의 위협을 받았다.

5. 2. 교회 개혁과 교황권 강화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 교회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삼장 논쟁 해결을 시도하고,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잉글랜드에 파견하여 선교 활동을 펼쳤다.[59] 그레고리오 선교를 통해 앵글로색슨족을 복음화하고, 이후 선교사들을 네덜란드와 독일로 파견하여 북유럽 선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23][24]

당시 교황청교황 젤라시오 1세 이후 서방에서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갈리아 주교들은 대지주 가문 출신으로 가문과 동일시되었고, 히스파니아 주교들은 서고트족 통치하에 로마와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랑고바르드족동로마 제국의 위협에 시달렸다.[89]

이러한 상황에서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세계 총대주교'라 칭한 것에 반발하여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인했다.[91] 그는 베드로좌가 모든 교회의 우두머리이며, 교황은 신앙의 머리로서 모든 주교는 교황좌에 예속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제국과 교회를 동일한 실체로 해석하고, 교황이 영적인 문제를 관장하므로 황제도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2] 겔라시우스 1세의 두 칼의 이론을 근거로 종교적 재판의 관할권이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제 권력이 신에게서 유래함을 인정하고 존중했으며, 양권의 협력을 주창했다.

그레고리오 1세는 부족 국가의 권력을 인정하는 대신 기독교 질서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부족 군주들에게 조언과 지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도덕적 권위를 행사했고, 교회는 국가에 활력을 주는 존재가 되어 교황청의 영적 권능을 높였다.

5. 3. 선교 활동

그레고리오 1세는 북유럽의 비(非)기독교 백성들에 대한 교회의 선교 활동을 조직화하고 독려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레고리오 선교라고 불리는 잉글랜드 앵글로색슨족 이교도들에 대한 복음화였다. 그레고리오는 수도원장 시절 로마 시내 광장을 거닐던 중 우연히 잉글랜드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 시장에서 매매되는 것을 목격했는데, 이후 그 장면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베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영국 런던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있는 19세기 모자이크.


:그레고리오는 그들의 하얀 피부와 반듯한 용모, 뛰어나게 아름다운 머리카락 등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잠깐 그들을 바라보다 그들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물었다. 그들은 브리타니아에서 왔고, 그곳 주민들은 모두 그렇게 생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레고리오는 다시 그 섬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도들인지 물었고, 그들은 이슬람교도라고 말했다. 그는 말하였다. “아, 가련하게도 어둠을 만든 자가 이토록 환하고 아름다운 이들을 가졌구나. 그리고 이들은 겉으로는 우아하게 빛나지만, 내면의 우아함은 공허하구나.” 그리고는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들은 ‘천사들’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이에 그레고리오가 말했다. “그렇게 불릴 만도 하군. 얼굴은 천사와 같고, 그런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사는 천사들의 후계자들이었을 테니.”[93]

베다에 따르면, 이 일로 잉글랜드를 위한 선교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하게 확신한 그레고리오는 교황 펠라지오 2세에게 청하여 일단의 선교사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간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잉글랜드로 떠나던 중 읽고 있던 성경 위로 메뚜기 한 마리가 앉자 길을 멈추었다. “메뚜기(locusta)라니! 이는 머물러 있으라(loco sta)는 뜻이다!”라고 그는 외쳤다. 교황이 된 후에도 그레고리오는 잉글랜드를 잊지 않았다. 597년, 그는 자기 수도원의 수사들을 선교사로 임명하여 잉글랜드에 파견하였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들에게 권위를 주시어 그들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여러분의 사목지로 맡겨진 잉글랜드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여러분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강복은 또한 여러분의 손을 통해 여러분이 사목할 백성들에게도 내려질 것입니다.”[94] 그리하여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동료 수사 40명은 잉글랜드 교회의 창시자들이 되었다. 잉글랜드 교회에는 대교구 두 곳과 교구 열두 곳이 설치되었으며, 캔터베리 교구가 수좌 교구로 결정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잉글랜드에서의 선교 활동이 성공을 거두자, 네덜란드와 독일에도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이에 위배되는 모든 이교 및 미신을 제거하는 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더불어 이는 그가 교황으로 재임하는 기간 내내 유지한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95]

5. 4. 전례 개혁과 그레고리오 성가

그레고리오 1세는 전례를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많은 요소를 없애거나 수정하고 추가했다. 이 미사는 트리덴티노 미사가 나오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 미사 전문이 끝난 후 빵 나눔 예식을 하기 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도록 하였는데, 이 순서는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또한 로마 미사 전문에 “주님, 저희 봉사자들과”(Hanc igitur)라는 구절을 추가하고, 미사 시작 시 자비송을 집전 사제와 회중이 번갈아 가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를 세 번,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Christe, eleison)를 세 번, 마지막으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다시 세 번, 총 아홉 번 바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로마 전례에서 부제들의 역할을 최소화했다.[95]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개혁된 성사 예식들은 ‘그레고리오 성사’(Sacrementaria Gregoriana)라고도 불리며, 이를 집대성한 《그레고리오 성사 예식서》(Sacramentarium Gregorianum)가 전해진다. 이 예식서는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집필이 시작되어 11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레고리오 1세의 성사 예식 개혁으로 서방 교회의 전례는 동방 교회의 전례와 뚜렷하게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변화가 거의 없는 동방 교회의 전례 양식과는 달리, 로마를 비롯한 서방 교회의 전례 양식은 축일이나 전례력의 변경이 반영되어 수많은 기도문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로마 미사 전문뿐만 아니라 본기도와 감사송도 여러 종류가 나오게 되었다.[27]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레고리오 1세가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를 제정했다고 보고 있다.

서양의 단선율 성가의 주요 양식은 9세기 말엽에 표준화되었는데,[98] 이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주도적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레고리오 1세 사후 300년이 지난 후 요한네스 히모니데스가 쓴 그레고리오 1세의 전기에서는 이를 그레고리오 1세의 업적으로 평가하며, 그레고리오 성가가 로마 성가와 피핀과 샤를마뉴 등이 다스렸던 프랑스-독일 제국 치하에 있던 프랑크족 성가가 융합되어 탄생한 결과물이라고 적고 있다.[99]

5. 5. 자선 활동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에서 가난한 사람들, 특히 롬바르드족의 침략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자선사업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모든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며, 교회는 단지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그레고리오 1세에게 기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하였는데, 그럼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구호품을 개개인은 물론 집단에게도 넉넉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는 작성한 서신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25]

:“주님께서는 나를 대리자로 삼으시어 힘겨워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보살피는 관리인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1세와 그의 가문은 빈민 구제를 위해 음식과 옷 등의 소모품을 포함하여 부동산과 예술품, 투자자산, 농토 등 다양한 종류의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였다. 교회는 각 교구마다 부제들을 배치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호품을 배분하는 정책을 이미 실행하고 있었는데, 그레고리오 1세는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라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무소를 설치할 것을 지시하였다.[117]

그레고리오 1세가 교황이 된 590년 당시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 중에서 비옥한 영토를 많이 점령하였고, 롬바르드족의 약탈 때문에 이탈리아의 경제는 거의 마비되었다. 그들은 로마 성문 바로 앞에 진지를 지었고, 로마 시내는 각양각색의 피난민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집도 없이 길거리에 나와 살았으며, 생필품도 거의 없었다. 제국 정부의 소재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사실상 요원해 보였다. 그레고리오 1세를 포함한 교황들은 로마를 지켜달라고 수차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의 지원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던 그레고리오 1세는 교회 자원들을 빈민 구제를 위한 용도로 전환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레고리오 1세는 자신이 높은 회계 능력을 지녔음을 증명해 보였는데, 사실 그가 확립한 회계원칙은 세속에서는 수세기 후에 생성되어 발전된 것들이었다. 그레고리오 1세 덕분에 교회는 이미 세속 정부에 앞서 기본적인 회계 장부들을 갖게 되었다. 모든 비용은 ‘레제스타’(regesta)라고 불리는 장부에 기록되었는데, 이 장부는 금액과 수령자, 그리고 돈이 오고 간 상황들을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수입은 ‘폴리피치’(polyptici)라는 책에 기록되었다. 이 폴리피치의 상당수는 성당의 운영비와 교회 부동산 재산 등이 기록되었다. 교황청은 원로 사제의 감독하에 이러한 장부들을 보관하면서, 각 본당 사제의 재산 목록을 발간하였다.[118]

그레고리오 1세는 성직자 및 수도자들에게 빈민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구제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으며, 그러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책망하였다. 그는 시칠리아의 한 성직자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써서 보냈다. “나는 그대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는 누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 나는 그대가 파텔리아라는 이름의 그 부인에게 40솔리두스를 주어 자녀들에게 신발을 사주게 하고, 추가로 40부셸의 식량을 주기를 바라랍니다.”[119] 그레고리오 1세는 빈민구휼에 비협조적이거나 무능력한 성직자들은 과감하게 해임하였으며, 동시에 자신이 품은 원대한 계획을 실현에 옮기려고 하였다. 그는 지출을 늘리려면 그만큼 소득도 늘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인상되는 지출을 채우기 위해 투자자산을 자금화하였으며, 장부에 기록된 예산안에 따라 현금으로 그 비용을 충당하였다. 성직자들은 1년에 4차례 사례금을 받았는데, 개인적으로 빈민 구제를 위해 힘쓴 노고에 대한 대가로 금화를 지급받기도 하였다.[26]

하지만 돈은 기아 직전 상태인 도시에서 식량을 대신할 수 없었다. 심지어 부유층도 함께 굶주리는 상황이 되었다. 교회는 3400km2에서 4700km2 정도의 넓은 면적을 지닌 수익형 농지를 여러 개 갖고 있었다. 이를 ‘파트리모니아’(patrimonia)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농작물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물품이 생산되어 매매되었는데, 그레고리오 1세가 개입하여 이 물품들을 로마로 배송하도록 하였다. 그는 생산 속도를 늘릴 것을 지시하였고 할당량을 주었으며, 이를 이행하기 위한 행정조직을 만들었다. 물품을 생산하는 하위 계층은 ‘루스티쿠스’(rusticus)라고 불렸다. 루스티쿠스에 속한 이들 중 일부는 노예이거나 노예를 소유한 이들이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자신이 지주로 있는 토지의 소작농들에게 생산 곡물 중 일부를 넘겨주었다. 곡물, 와인, 치즈, 고기, 생선과 기름 등이 대량으로 로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구호품으로 빈민들에게 무료로 배분되었다.[121]

빈민들에게의 구호품 배부는 매월 이루어졌다. 하지만 빈민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길거리에 살거나 매월마다 배당식량을 수령하러 가기에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1세는 수사들을 동원하여 매일 아침마다 식량을 지참하고 그들에게 보내 구휼하도록 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빈민들이 먼저 식량을 공급받기 전까지는 절대로 먼저 식사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부유층에 속하지만 궁핍한 이들이 구호품을 받는 것에 수치심을 느낄 것을 염려한 그레고리오 1세는 손수 그들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는 식사할 때, 12명의 빈민들을 손님으로 초대해 같이 식사하였다. 그때 사용한 대형 식탁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어느 뒷방에서 한 가난한 사람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레고리오 1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살인자라고 자책하며 수일 동안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였다.[26]

이러한 그레고리오 1세의 여러 가지 업적 및 선행과 그의 고결한 인품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로마 시민들은 동로마 제국 대신에 교황의 통치를 받기를 원하게 되었으며, 로마 시장에 한 사람도 입후보하지 않았다.

6. 저술

그레고리오 1세는 중세 교황 제도를 확립하고 중세 영성의 시작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100]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재위한 교황들 가운데 서신과 저술이 많이 보존된 유일한 교황이다. 그의 주요 저술은 다음과 같다.


  • 《욥기 주해(Magna Moralia)》: 591년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교부 문헌 가운데 하나이다. 그레고리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인 신자들에게 욥기의 내용을 설명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교황이 된 후 개정 작업을 거쳐 완성되었다.[101]
  • 《사목 규범(Liber regulae pastoralis)》: 591년에 완료된 이 책은 주교직의 특성에 대해 설명한다. 사목직에 적합한 인물, 올바른 동기, 사목자의 덕성, 다양한 사람들에게 하는 강론, 양심 성찰 등을 규정하고 있다.
  • 《대화록》: 6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성인들(대부분 수사)의 행적과 기적 등을 담은 4권의 책이다. 제2권은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의 생애를 다룬다.[102]
  • 《강론집》:
  • 《에제키엘서 강론집》(Homilae in Hiezechielem)》: 에제키엘서 1장 1~4절과 3절, 40장을 다룬다. 592년에서 593년 사이 롬바르드족의 로마 포위 공격 당시 미사 중 강론들을 담고 있으며,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8년 후 개정되었다.
  • 《4대 복음서 강론집》(Homilae xl in Evangelia)》: 591년에서 592년까지 미사 중 강론들을 모은 것으로, 593년에 완료되었다.
  • 《아가 강론》(Expositio in Canticis Canticorum)》: 아가 1장 9절에 대한 강론이 들어 있으며, 그레고리오 1세가 아가를 주제로 강론한 것 가운데 유일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 《열왕기 상권 주해》(In Librum primum regum expositio)
  • 854편의 서한: 일부 사본이 남아 있으며, 9세기 요한네스 히모니데스에 따르면 14장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원본은 분실되었지만, 사본 854편은 보존되어 있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지시로 작성된 편지 사본 686편이 가장 많다.[101] 사본 대부분은 10세기에서 15세기에 바티칸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103]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창문,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로즈먼트의 착한 목자 교회(Church of the Good Shepherd (Rosemont, Pennsylvania))


그레고리오 1세의 저술에 대해 노먼 캔터는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행정가이자 능숙하고 지혜로운 외교관, 놀라운 세련됨과 꿈을 지닌 지도자"였지만, "사적 신심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무엇이든 쉽사리 잘 믿는 수사"이자 "배움에 적대적"이고 "신학자치고는 견해가 매우 한정적"이며 "성인들과 기적, 성유물 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104]

7. 복음서에 나오는 여인들

그레고리오 1세는 요한 복음서 12장 1절~8절에 나오는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하였다. 일부에서는 이 일을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죄인인 여자가 자신의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은 다음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른 일[106]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추정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강론 시간에 루카 복음서의 해당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루카는 죄인이라고 부르고,[107] 요한은 마리아라고 부른[108] 이 여자는 바로 마르코가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라고 말한 마리아 막달레나[109]로 여겨진다.”[110]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죄인인 여자는 서로 다른 인물로 보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아직도 세 인물을 같은 인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111]

8. 평가 및 영향

그레고리오 1세는 선종한 이후에도 큰 영향력을 남겼다. 잉글랜드에서는 그를 '우리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oster)라고 불렀으며,[122] 713년 휘트비의 수도원에서 그의 생애에 대한 전기가 쓰여졌다. 이는 로마나 이탈리아보다 앞선 것이었다.[123] 잉글랜드에서 그레고리오 1세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잉글랜드 복음화와 변혁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24] 이탈리아에서는 9세기 요한네스 히모니데스가 최초로 그의 전기를 집필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 개정된 로마 가톨릭교회 전례력에서는 성 대 그레고리오 축일을 9월 3일로 지정했다.[125] 이전에는 그의 선종일인 3월 12일이었으나, 사순 시기와 겹쳐 그가 주교로 서품된 9월 3일로 변경되었다.[126]

호세 데 리베라(José de Ribera)의 ''성 그레고리오 대왕''


미술 작품에서 그레고리오는 보통 교황관과 이중 십자가를 착용한 교황 예복을 입고 묘사되지만, 초기에는 수도승의 단발과 단순한 복장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정교회 이콘에서는 주교 복장을 하고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으로 축복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상징은 비둘기인데, 이는 그의 친구 피터 집사가 전하는 이야기에 기인한다. 피터 집사에 따르면, 그레고리오 1세가 에제키엘서에 대한 설교를 받아쓸 때 비둘기가 그의 머리 위에 앉아 부리로 그의 입술 사이에 머물렀다고 한다.

리베라의 성 그레고리오 대왕 유화(1614년)는 국립 고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레고리오의 얼굴을 요한 집사의 묘사와는 다르게 캐리커처처럼 묘사했다.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의 ''성 그레고리오 미사(Mass of St. Gregory)'', 15세기


후기 중세 시대의 주제인 ''성 그레고리오 미사''는 그레고리오 1세가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슬픔에 잠긴 예수가 제단에 나타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실체 현존을 강조하고, 종교 개혁 이후에는 개신교 신학에 맞서는 교리 주장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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