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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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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스티누스 2세는 565년부터 578년까지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조카이자 쿠로팔라테스였던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후 황위에 올랐다. 통치 초기에는 삼촌의 빚을 갚고 원로원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으나, 이후 아바르족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시작하는 등 외교 정책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572년 이후 정신 질환을 앓았으며, 결국 티베리우스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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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누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유스티누스 2세의 솔리두스 앞면
유스티누스 2세의 솔리두스
로마자 표기Iustinus
그리스어Ἰουστῖνος (Ioustînos)
칭호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 아우구스투스
재위 기간565년 11월 14일 – 578년 10월 5일
출생지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사망일578년 10월 5일
사망지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칼케돈 기독교
정치
직위동로마 황제
즉위565년
퇴위574년
이전 통치자유스티니아누스 1세
후임 통치자티베리우스 2세
가족
배우자소피아
자녀유스투스
아라비아
티베리우스 2세 (양자)
아버지둘키디오 (또는 둘키시무스)
어머니비길란티아
왕조
왕조유스티니아누스

2. 가족

그는 비길란티아와 둘키치오(때로는 둘키시무스라고도 함)[1]의 아들이었는데, 비길란티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누이였고 둘키치오는 그의 매형이었다. 그의 형제자매로는 마르켈루스와 프라에젝타가 있었다. 소피아와 결혼하여 딸 아라비아를 두었고,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 유스투스를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헬레나라는 조카도 있었다.[2]

3. 초기 생애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치세 동안 유스티누스 2세는 궁정에서 쿠로팔라테스 직을 역임했다. 552년과 553년에 세 장 논쟁 당시 교황 비질리오에게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 처음 기록에 등장한다.[2]

559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쿠트리구르 침략자들이 다뉴브강을 건너 후퇴하는 것을 호위하기 위해 유스티누스 2세를 파견했다. 562년과 563년에는 서커스 파벌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발생한 도시 폭동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3]

시간이 흐르면서 유스티누스 2세는 궁정에서 지지 세력을 구축했다. 560년대 초, 그의 아내 소피아와 지지자들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그를 카이사르로 임명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실패했다고 전해진다.[4]

4. 치세

유스티누스 2세는 즉위 초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빚을 갚고 원로원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566년에는 집정관 직책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권력 강화를 위해 왕위 경쟁자였던 유스티누스를 암살했다.[8]

외교적으로는 페르시아와 아바르족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강경책을 펼쳤다.[11] 이로 인해 572년 사산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했고, 다라 점령 이후 유스티누스는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다.[11]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포 계곡을 상실하기도 했다.[11]

투르크족과의 동맹을 통해 중국 비단 직접 교역을 추진했다. 568년 소그디아나 외교관 마니아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단이 파견되어 동맹이 체결되었다.[12][13]

572년 이후 정신병이 악화된 유스티누스는 574년 황후 소피아의 권유로 장군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고 은퇴했다.[16] 578년 티베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하고 9일 뒤 사망했다.[19]

4. 1. 즉위 과정

유스티누스 1세는 565년 11월 14일에 자식 없이 사망했다.[5] 그의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자 내시였던 칼리니쿠스(Callinicus, Kallinik (eunuch)|칼리니크pl)는[5] 나중에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기 직전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들 유스티누스"를 자신의 상속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사촌인 유스티누스(게르마누스의 아들)가 왕위 계승 후보로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이 필요했다.[5] 현대 역사가들은 칼리니쿠스가 자신의 정치적 동맹을 위해 유스티니아누스의 마지막 말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한다.[5] 역사가 로버트 브라우닝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실제로 마지막 순간에 선택을 한 것인가, 아니면 칼리니쿠스가 그를 대신해 선택을 한 것인가? 칼리니쿠스만이 알고 있었다."라고 언급했다.[6]

칼리니쿠스는 왕위 계승에 가장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여러 비잔틴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유스티누스와 소피아에게 공동으로 왕위를 제안했고, 유스티누스는 이를 받아들여 아내 소피아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으로 호송되었다. 엑스큐비토르는 밤 동안 궁전 입구를 막았고, 이른 아침 요한네스 스콜라스티쿠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새로운 ''아우구스투스''에게 왕관을 씌웠다. 그제야 유스티니아누스의 죽음과 유스티누스의 계승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7]

총대주교와 티베리우스(엑스큐비토룸 사령관)는 최근에 임명되었으며, 유스티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쿠로팔라테스''로서 그들의 임명에 관여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후원자이자 동맹을 왕위에 올리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7]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주조된 솔리두스


통치 초기에 유스티누스는 삼촌의 빚을 갚았고 원로원 계급에 대해 더 화해적인 태도를 취했다. 566년 1월 1일에 그는 집정관이 되었고, 이는 유스티니아누스가 541년부터 중단했던 직책을 부활시킨 것이다. 유스티누스와 소피아는 처음에는 유스티누스의 사촌이자 왕위 경쟁자인 유스티누스(게르마누스의 아들)와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를 암살했다. 적대적인 자료에 따르면, 황실 부부는 그의 잘린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고 한다.[8]

유스티누스 2세가 집정관 유스티누스의 체포를 명령하는 모습. 12세기 마나세스 연대기의 한 장면.

4. 2. 외교 정책

유스티누스 2세는 재정 고갈로 인해 잠재적 적들에게 뇌물을 주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관행을 중단했다. 즉위 직후, 558년부터 지속된 휴전을 깨고 아바르족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11] 이로 인해 판노니아 분지의 세력 균형이 깨졌고, 아바르족은 새로운 부를 찾아 프랑크족을 습격하기도 했다.[11] 롬바르드족이 게피드족을 멸망시킨 후 아바르족의 압력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568년 알보인 왕의 지휘 아래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포 계곡을 빠르게 점령했다.[11] 아바르족은 573년 또는 574년에 다뉴브 강을 건넜으나, 유스티누스의 후계자인 티베리우스가 6만 조각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진정시켰다.[11]

북쪽과 동쪽 국경은 유스티누스의 주요 관심사였다. 유스티누스는 아바르족과 페르시아 모두에게 위협적인 중앙 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인 투르크족과의 동맹을 강화하려 했다. 572년, 그는 페르시아인에게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고 투르크족에게 접근하여 사산 제국과의 전쟁을 일으켰다.[11] 호스로 1세 치하의 페르시아 군대가 시리아를 유린하고 다라를 점령한 후, 유스티누스는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다.

카르타고에서 주조된 유스티누스 2세의 100 누미 동전. 헬멧을 쓰고 갑옷을 입은 정면 흉상, 방패를 들고 있음. 위에 십자가, 아래에 100이 새겨져 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메난드로스 프로텍토르는 중국에서 누에 알의 밀수 이후 소그디아나인들이 중국 비단의 직접 교역을 시도했다고 기록했다. 서투르크 카간국의 군주 이스테미는 소그디아나 상인들의 요청을 처음에 거절했지만, 두 번째 요청을 승인하고 사절단을 보냈으나 사산 왕이 독살했다.[12] 568년, 소그디아나 외교관 마니아는 이스테미를 설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직접 사절단을 파견했고, 유스티누스 2세는 비단과 함께 사산 페르시아에 대한 동맹을 제안받았다. 유스티누스는 동맹에 동의하고 투르크 카간국에 사절단을 보내 소그디아나인들이 원하던 직접적인 비단 교역을 보장했다.[12][13]

역사가 프리비테-오턴은 유스티누스 2세를 "전임자의 영광에 눈이 멀어 피폐하고 방어력이 약한 제국을 위기와 새로운 민족 이동에 대처해야 하는 완고한 남자"라고 묘사했다. 그는 외교 문제에서 굽히지 않는 태도를 취했으며, 현실 감각 부족으로 인해 재앙을 초래했고 결국 정신이 무너졌다고 평가했다.[14]

4. 3. 정신 질환과 퇴위

572년 이후, 유스티누스는 정신병 발작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유스티누스 치하에서 탄압을 받은 에페소스의 요한은 유스티누스의 광기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그는 마치 야생 동물처럼 행동하고, 이동식 옥좌에 앉아 이동했으며, 밤낮으로 오르간 음악을 연주해야 했다.[15] 574년, 소피아의 제안에 따라 그는 장군 티베리우스를 아들이자 상속자로 입양하고 은퇴했다.[16] 테오필라크트 시모카타에 따르면, 12월 7일, 유스티누스는 왕관을 넘겨주면서 훌륭한 연설을 할 정도로 정신이 맑았다.[17][18]

너는 최고의 권력의 상징을 보고 있다. 너는 그것을 내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받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존경하라, 그러면 너는 그것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다. 황후인 너의 어머니를 존경하라: 너는 이제 그녀의 아들이고, 전에는 그녀의 하인이었다. 피를 즐기지 말고, 복수를 삼가고, 내가 대중의 미움을 산 행동을 피하라. 그리고 네 전임자의 모범보다는 경험에 따라 결정하라. 한 인간으로서, 나는 죄를 지었다. 죄인으로서, 심지어 이 삶에서도 나는 심하게 벌을 받았다: 그러나 내 신뢰를 남용하고 내 열정을 불태운 이 하인들(그리고 그는 그의 신하들을 가리켰다)은 나와 함께 그리스도의 법정에 나타날 것이다. 나는 왕관의 화려함에 눈이 멀었다: 너는 현명하고 겸손하라. 네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네가 무엇인지 기억하라. 우리 주변에는 너의 노예와 자녀들이 있다: 권위와 함께 부모의 다정함을 가져라. 너 자신처럼 네 백성을 사랑하고, 군대의 애정을 기르고, 규율을 유지하며, 부유한 자의 재산을 보호하고, 가난한 자의 궁핍을 덜어주어라.|최고 권력의 상징영어

4년 후, 578년 9월 26일, 그는 티베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로 높였다. 유스티누스는 9일 후인 578년 10월 5일에 사망했다.[19]

누미 주화에 새겨진 유스티누스 2세와 소피아

참조

[1] 논문 Justin under Justinian: The Rise of Emperor Justin II Revisited 2021
[2] 논문 Justin under Justinian: The Rise of Emperor Justin II Revisited 2021
[3] 논문 Justin under Justinian: The Rise of Emperor Justin II Revisited 2021
[4] 논문 Justin under Justinian: The Rise of Emperor Justin II Revisited 2021
[5] 서적 1999
[6] 서적 2003
[7] 서적 1999
[8] 문서 Evagrius Scholasticus, Ecclesiastical History, 5.2
[9] 논문 Emperor Justinian 2017
[10] 문서 Novellae Constitutiones 140
[11] 서적 Byzanptium: the Early Centuries London:Penguin 1988
[12] 서적 Transnationalism in Ancient and Medieval Societies McFarland & Company 2012
[13] 간행물 The Silk Road: Overland Trade and Cultural Interactions in Eurasia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2001
[14] 서적 The shorter Cambridge medieval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15] 웹사이트 Ecclesiastical History, Part 3, Book 3 http://www.tertullia[...]
[16] 문서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Chapter XLV, Part II
[17] 문서 Theophylact Simocatta III.11: "This was spoken on the seventh of December, on the sixth day, in the ninth indiction."
[18] 웹사이트 3.5 https://www.ccel.org[...]
[19] 웹사이트 Chronicon Paschale 578 https://www.cce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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